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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암시민 살아져, 그 큰 바당도 파도를 쏟아내듯

[리뷰]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

by 박 스테파노

제주의 사계절은 육지의 여느 날과 달리 펼치고


제주의 행정 공식 명칭은 제주특별자치도(濟州特別自治道)로 줄여서 제주도(濟州道)로 부른다. 그런데 또 다른 '제주도(島)'는 말 그대로 '섬'이다. 섬은 모름지기 교통수단과 교역이 발달하지 않는 한 고립된 곳이다. 그 고립의 흔적은 언뜻 알아듣지 못하는 그들의 방언에 담겨 있다. 제주는 예전부터 항상 부족함으로 힘들어하는 섬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배가 고팠고, 부지런히 절약하며 살아도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예전부터 섬을 떠나고 싶어 했고, 기회가 된다면 육지로 육지로 향하였다.


제주의 봄은 성급하게 이르고 빠르다. 그 봄에 제주는 4.3이라는 큰 아픔을 삼켜 버렸다. 아직도 이리저리 할퀴는 말들에, 속셈에 제주의 유채는 빨리 피고 저문다. 제주의 여름은 길고도 뜨겁다. 제주 공항에 내리면 맞아 주는 여름 선물은 뜨겁고 습습한 태양 아니면, 우산 쓰기 힘들 정도로 횡으로 몰아치는 비바람이다. 그 여름의 바다는 생각보다 깊고 사납다. 속 깊은 바다의 파도처럼 드세고 사납다.


제주의 가을은 여름 내내 외지인들이 헤집어 놓은 몸과 마음을 다잡는 날들이다. 긴 여름 덕에 급한 마음에 와락와락 가을을 걷기 바쁘다. 누구나 꿀 수 있지만 가질 수 없는 게 꿈이라면, 제주에서의 꿈은 더 꿈같기만 하다. 그리곤 제주의 겨울. 그리 드센 추위나 눈보라가 없어서일까, 겨울에 춘풍을 꿈꾸다 얼어 죽기 십상이다. 육지보다 춥지 않아도 겨울이라면 겨울인데 말이다. 겨울은 아래로 아래로 흐르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 파고드는 법이니까.


폭싹 속았수다.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는 모두가 가난하고 고달팠던 시절, 그 시절 더 가난하고 더 고달픈 섬 제주를 떠나고 싶어도 결국 떠나지 못한 어느 인생의 쉽지 않은 뒤돌아보기다. 드라마에 가득 찬 제주 방언이 주는 이질감은 보는 모두에게 안전장치가 된다. 저 시절을 살지 않아 다행이고, 저 시절에 살았어도 육지에 살아 다행이라는 안도감.


그러나 금방 익숙해진 방언에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이 각자의 고달픔으로 젖어든다. 섬에 머문 적도 없고, 저 시절을 살아낸 시간도 만무하지만 어느새 안도감이란 안전장치는 풀려 버리고 동화되어 훌쩍이고 만다. 드라마란 본디 문학의 한 줄기이고, 문학이란 이처럼 낯선 듯 익숙한 부침을 지켜보는 일이 아니던가. 그 부침 속 복잡하고 깊은 속 살을 어루만지며 살펴보는 일이 이야기의 힘이다.



호로록 봄ㅣ


제주말로 "맨도롱 또똣할 때 호로록 잡솨"라는 말은 '먹기 좋게 따뜻할 때 어서 드쇼'라는 말이. 여기서 호로록은 후루룩의 방언으로 빠르게 들이마시듯 삼키는 모양새를 말하는데, 호로록 봄은 봄이 그처럼 후루룩 지나간다는 얘기.


봄이 제일 먼저 와닿을 것만 같은 남단의 제주의 봄은 생각보다 짧. 꽃이라고는 핀 채로 자신의 목을 꺾어지는 동백이 겨울에 피고, 육지의 겨울이 깊은 정월에 노란 유채꽃이 올라 성산 일출봉 앞에 노란 바당을 만든다. 노란 바당. 바당. 그 지겨운 바당. 그 노란 바당이 푸르게 물들면 제주의 짧은 봄은 호로록 가버린다.


검푸른 바당을 건너 육지 사람과 사는 꿈을 날마다 꾸지만, 기댈 곳 없는 애순이는 결국 무쇠 소 같은 관식이 섬 놈이랑 바당을 은 건너 육지에 . 검은 바당이 없어 이제 다시는 누구도 삼킬 수 없는 육지에 올랐지만, 그 육지엔 바당보다 깊은 사람들의 아귀가 있었다. 스물도 안 된 섬 녀석들에게는 바당보다 깊은 아귀의 깊은 수렁. 그 수렁에서 건져낸 것도 섬에 남은 사람들의 아우성.


봄을 겨우 버티어 내어도 또 봄을 그린다. 사진=넷플릭스


유채꽃이 한 때로 꽃을 피우듯 모두가 함께 지슬 하나로 그 봄을 버티어 낸다. 홀로 피는 꽃은 꺾이기 쉬운 법이다. 결국 한꺼번에 호로록 꽃을 피우고 지는 섬으로 다시 돌아와 살기로 한다. 제주의 봄은 그렇게 요망한 첫사랑의 도망질처럼 빠르게 피고 저다. 그 저문 꽃바다를 밀어내고 그 무서운 여름이 온다. 꽈랑꽈랑 옴팡지게 뜨거운 여름. 모든 것을 자라게 하고 삼키기도 하는 그런 여름.



ㅣ꽈랑꽈랑 여름


제주의 여름은 깊고 길다. 무척이나 뜨겁고 습하다. 뜨거운데 습하기까지 한 제주의 여름 바당은 변덕 천지다. 어떤 날은 만선의 기쁨을 주었다가 어느 날은 모진 태풍과 풍랑으로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뱃놈들과 잠녀들은 공치기 일쑤다. 육지는 점점 살만해 이 뜯어먹을 것 한참 모자란 섬 바당에 신행이니 바캉스니 놀러 온다는데, 아직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실망과 기대의 시소를 멀미 나게 타고만 있다.


되는 일이 하나 없는 것이 인생의 맨얼굴이라 해도, 진짜 되는 일 하나 없는 애순과 그 애순만 바라보는 관식은 어설프고 이른 살림을 차린다. 웬일인지 애순을 받아들이는 관식의 무녀 할망과 어망의 속셈은 손주 딸내미 금명을 잠녀로 만들어 살림 보태는 일이었다. 얼마가지 않을 속셈은 탄로가 나고 애순과 관식은 집을 떠나 궁한 하루살이를 시작한다.


날마다 몸과 맘이 지쳐 떨어지는 관식을 보다 못해 애순은 친정 아닌 친정 같은 할망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결같이 매정했던 그 할망, 그래도 속정은 가득하다. 제주란 곳이 그렇다. 죽느니 사느니 해도 말뿐이고, 옆집 앞뒷집, 온 동네 사정 뻔하니 도둑 욕심하나 둘 곳도 없다.


하나만 이루게 해 줄께. 사진=넷플릭스


배를 사서 선장 네가 되고, 금은동 세 아이를 메달 삼아 사는 지금이 인생의 전성기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모든 걸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여름은 한 편으로 모든 걸 한 순간에 빼앗어 간다. 바당은 결국 아방도 어망도 막내 자식도 다 삼켰다. 먹먹하고 아련함에 모두가 죄인이 되어 서로를 눈치 보게 만든다.


가난이라는 것이 곤란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법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모두 빼앗겨도 결국 가진 것 없는 이들끼리 등 기대고 사는 것이 이 바람 모진 세상이. 속이 큰 바당도 억겁으로 파도를 쏟아내며 살듯이, 살민 살아진다. 살암시민 살아져. 그렇게 살다 보면 무거운 여름 공기가 저물고 자락자락 가을이 그림자처럼 스며든다.



자락자락 가을


개천에서 용 나면 누가 좋은 걸까? 용 한 마리 품었던 개천은 그 용의 꿈바라지 하다 마르고 닳기 마련이다. 그럼 용은 행복할까? 용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세등등하여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자신은 그저 그런 수많은 이무기들 중 한 마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날 때의 기쁨은 한순간이지만 그 순간 뒤엔 언제나 밀린 빚잔치가 현실이 된다. 한 번에 뛰어넘을 사다리라는 것은 이미 저 위의 사람들이 다 걷어차 버렸다는 것을 너무나도 뒤늦게 알게 될 뿐. 반전은 없다.


개천의 용은 큰 바다를 만나 허우적 대기 일쑤고, 용을 뒷바라지하던 개천의 살림들은 쪼그라들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극한 조바심이었고, 그 지극한 조바심은 우연도 막아 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았던 모든 것이 허탈로 수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지극한 조바심이 마음에 사무쳤다.


조바심으로 목숨을 건진 일도 예삿일처럼 느껴질 때 품 안의 자식은 자신의 사랑을 찾아들지만, 세상이 모두 품어주던 부모 마음 같지 않은 법.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저마다이듯 각자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제각기다. 내 품 안의 바람이 내 품 안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뉘우침만 뒤늦게 찾아든다.


혼자 살 수 없는 것이 인생. 사진=넷플릭스


햇볕과 비와 정성이 깃든 가을에는 수확만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더라. 봄이 생명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저무는 날들이 와락와락 찾아드는 시간이다. 누구나 두 번째 이가 빠지는 시간이 찾아들고 생각보다 가을바람은 서럽게 시리다. 하지만 추풍은 또다시 춘풍을 부르는 법. 살아 낸 자에게는 또다시 살아지는 것이 인생이다.



펠롱 펠롱 겨울ㅣ


겨울바다의 새벽 고깃배는 외롭고 두렵다. 차가운 바다를 건너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길을 떠나는 고기잡이들은 언제나 그랬다. 그들은 바다 위에 뜬 작은 점처럼, 어딘가에 닿을 듯하지만, 결국 다시 떠도는 존재들. 그 바다의 깊이는 그들만큼이나 알 수 없고, 그 깊이는 그들의 삶처럼 어두운 빛을 내고 있다.


겨울, 제주는 여전히 그렇게 고요하게 깊어간다. 가끔씩 내리는 눈은 찬 기운을 더하고,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 속에서 먼바다의 물결은 어딘가 애처롭게 출렁인다. 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겠지만, 그 봄을 기다리며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제주의 겨울은 춥고도 깊고, 그 깊이가 끝없이 사람을 밀어 넣는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처럼, 아무리 간절히 기다려도 빨리 오지 않는 것처럼, 겨울은 우리에게 존재감을 더 크게 남긴다.


어떤 이들은 이 겨울을 따뜻한 이불속에서 지나가겠지만, 또 다른 이들은 바람에 몸을 내어 던져야 한다. 그들은 겨울이 지나가기를,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다. 제주의 겨울은 그렇게 묵묵히 사람들을 품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추위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는 기회를 품고 있는 제주, 그곳에서 겨울은 하나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의 준비가 된다. 아이가 자라서 엄마가 되고 내 커다란 우주를 또 다른 우주에게 내어 주는 일이 산다는 것.


겨울을 버티고 봄을 만난다. 사진=넷플릭스


겨울은 제주의 사계절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바다의 깊이, 바람의 차가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겨울이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 시절은 여지없이 우리를 문 밖으로 밀어내듯 제주의 겨울은 그저 지나가는 계절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고통과 희망, 외로움과 기다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를 끝내면 우리는 다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기어이 춘풍은 겨울을 밀어낸다. 어린 가지가 또 다른 가지를 품어 낼 때 나무는 얼마나 떨었는지 그때는 모른다.



ㅣ만날, 봄ㅣ


계절을 한 바퀴 돌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래도 봄은 설렘이 찾아온다는 것. 인생은 한가할 틈을 주지 않고 늘 우리를 문 밖으로 내몰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마침이 마침내가 되어 다시 봄시 되면 겨울을 밀어내며 춘풍이 불어 오는 것이 순리고 이치다. 인생에 한 번 울릴까 말까 하는 종소리도 연신 울리고 세상 어른 없이 사는 아이만 같던 이들도 엄마가 되고 할망이 된다.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문에서 소리를 내는 법이라 했다. 행운도 불행도 마찬가지 행보로 찾아올 뿐이었다. 단 한 가지 성실이라는 내력이 유산이 되어 각자가 살아낼 요령을 마련하는 것을 축복이라 불러도 어긋나지 않을 법이다. 제비가 물어 오는 박씨는 행운이 아니라 흥부의 성실에 대한 포상이 아니었던가.


이제 다시 봄이구나 싶을 때,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떨구는 산다는 것의 이치가 야속하기만 하다. 악당 같은 절대 악인은 없지만 세상이 계절이 고달프게 만들었던 그 시절을 지금 세대는 알 수 있을까. 고달픔을 기꺼이 감당해 받아들인다는 말이 수고라는 것을 알기는 할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이 이토록 애달픈 것임을 깨닫기는 할까.


고달퍼도 살민 살아져.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제주라는 섬에서 일어난 특이한 삶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다. 살만해지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마음에 섬을 만든다. 어울리기보다 격리하고 고립하는 편이 속 편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저마다가 섬 위에 담을 쌓으며 건너 편의 무엇을 갈망할 뿐이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걸친 애순과 관식의 삶을 그저 그런 옛날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모두는 섬 속에 갇힌 외로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섬 바당에 꽃이 피겠지


제주의 사계절은 육지의 여느 날과 달리 펼쳐진다. 여느 일상에서 시간은 무뎌지고, 계절의 흐름도 잦아들기 마련인데, 제주에서는 시간이 나지막한 속도로 흐른다. 제주의 사계절은 그 자체로 깊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대화처럼 느껴진다. 제주, 그 자체가 마치 ‘섬’이라는 독립된 세계와도 같다. 육지와 고립된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그 고립의 흔적처럼, 여전히 깊고도 낯선 숨결을 지닌다. 그 고립이야말로 이 섬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끊임없는 꿈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환상의 섬 이어도처럼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인생 첫 비행기를 타고 간 여행길이었다. 아홉 살로 기억되는 여행은 일 년 만에 귀국 휴가에 오른 중동파견노동자 부친 덕이었다. 사십 년이 훌쩍 넘은 그 옛날을 지나 어른의 길목에서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부러질 때마다 제주를 떠 올렸다. 실제 제주에서의 삶을 생각하는 '제주 플랜'을 세우기도 하였다.


폭싹 속았수다. 모두들. 사진=넷플릭스


이제 나는 제주에 대해, 이 작은 섬에서 흐르는 사계절을 떠올린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꿈을 따르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삶의 목적을 하나씩 정리하며, 그들의 바다는 언제나 여전히 바다로 이어지지 않는 땅끝에서 저물어 가듯, 그들의 길도 나아가고 있다. 나 역시, 이 거대한 도시에서 끝없이 흐르는 시간이 짓누를 때마다 제주를 생각했다. 그 섬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곳에서 내가 꿈꾸던 평화로운 삶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언제나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제주에 살고자 하는 이들의 꿈은 점차 '제주도'의 그 신비로운 면모와 현실 사이에서 상충하게 된다. 중산간을 넘고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환상 속의 제주도가 아닌, 점점 더 상업화되어 가는 제주를 보게 된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로 인해 땅값이 오르고, 개발이 진행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주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 꿈이 희미해지지 않는다. 바로 그 제주, 그 섬은 여전히 '이어도'처럼 살아 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바다를 건너고, 새로운 삶을 꿈꾸며 제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제주에서의 삶을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단순하다. 그것은 마음속 깊이 자리한 평화에 대한 갈망이다. 제주가 주는 그 풍경, 그 고요한 바람과 물결, 그리고 섬에 흩어져 있는 작은 마을의 따스함은 결국 내 마음을 붙잡는다. 제주에 대한 꿈은 단지 물리적인 곳을 향한 갈망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잃어버린 여유와 평화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었음을 깨닫는다.


‘제주플랜’을 꺼내 들고, 다시 한번 그곳을 돌아보며, 나의 제주도를 꿈꾼다. 제주가 주는 그 '이상향'의 꿈을 좇고, 여유를 찾으며, 나는 이제 그 꿈을 향해 한 발 더 내디뎌야 한다. 그곳에서 내가 품고 있던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조금씩 실현해 가며, 결국 '늘 사랑하면서 살기'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내 꿈속에서 제주도는 그저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내 삶의 이정표이자, 진정한 삶의 의미가 있을 곳이다.


언젠가, 내가 그곳에 서서 그 모든 바람과 바다를 느끼며 살아가리라. 그곳에서, 언제까지 살아 낼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서 있는 우리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내가 꿈꾸었던 '늘 사랑하면서 살기'라는 목표가 있을 것이다.


살아 내는 모든 이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담아 보낸다.


폭싹 속았수다.

모두를 위한 찬사.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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