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웨이브 드라마 <로커비>
한국에서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영국에서는 최다 희생자가 발생한 사상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로커비 참사', 혹은 '팬암 103 폭발'로 기억되는 항공 테러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크리스마스 나흘 전 런던 히드로를 떠나 뉴욕 JFK로 향하던 민간 항공기 팬암 103편이 공중 폭발로 스코틀랜드의 작은 마을 로커비를 덮치며 270명의 희생자를 만든 사건이었다. 이는 이후 테러로 인한 폭발 사고로 밝혀지며 이란, 시리아, 리비아 등과 미국, 영국의 첨예한 외교 분쟁으로 거듭되었다.
영국 드라마 <로커비: 진실을 찾아서>는 이 참사의 사후를 다룬다. 팬암103에 탑승한 소중한 딸을 잃은 의사 짐 스와일리(콜린 파웰)의 회고록 'Lockerbie Bombing: A Father's Serch for Justice'에 기반하여 이야기를 구성했다. 원작과 드라마의 이야기는 현재 정설로 전해지는 사건의 결론에 물음표를 던진다. 누군가는 이를 음모론이라 말할 수도 어떤 이는 망상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극 중 제시되는 여러 사료를 추론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혹시'라는 물음이 일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폭탄 테러의 배후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과 기정 결론이 정의롭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당시 '중동의 미친개' 리비아의 카다피 일당이 일으켰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사건 결론이지만, 짐 스와일리는 37년 가까이 그것이 영국과 미국 정부 당국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국제 정황상, 오히려 이란과 시리아의 보복성 테러라는 추정이 마뜩한 상황이지만, 당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견제하고 압박하기에 몰두한 미영 양국의 이해관계가 이란과 시리아를 테러 용의국에서 고의 배제하였다는 주장이다.
한 발 더 들어가는 질문은 참사와 재난이 닥쳤을 때 국가와 사회의 방향 목적은 무엇이 맞는가에 대한 것이다. 보통 사고를 넘어 선 사고, 그것도 재난에 가까운 참사 뒤에 공권력은 흔히 '범인색출'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이 폭발을 일으켰으며 누가 테러를 자행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러나 정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으며 왜 방지하지 못했는가의 답변이다. 미국정보기관의 사전 경고,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게 전파된 테러 위협, 그리고 참사 후에나 전달된 테러 예상 지침 공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저 '기밀'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막아설 뿐이다.
재난의 시간, 시간의 비현실성
드라마는 역사의 기정 결론을 뒤집지 못한 채 끝맺음을 한다. 짐 스와일리의 주장은 여러 증거들과 논리들로 보면 새로운 진상 조사가 마땅해 보이지만 영국이나 미국정부는 아직까지도 진상 조사를 특별히 실시하고 있지 않다. 이는 20세기말부터 복잡해지는 국제 정세와 각 정치세력의 국내 집권 의도에 의해 철저히 배격당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란과 시리아와 적대를 보이다가 사담 후세인이 튀어나오자 걸프전이 발생하는 등 이란과 시리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정치적 당위가 대두 된다. 이런 이유로 독재자 카다피가 있는 리비아에게 독박을 씌우고자 재판까지 동원해 리비아를 범죄의 배후로 결론낸다.하지만 뜻밖의 산유국이 된 리비아의 비유를 맞출 필요에 의해 진실 규명보다 물밑 거래가 우선 된다. 결국 카다피가 아랍의 봄으로 개죽음을 당하자 미국, 영국은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정보를 기밀로 묻어 버린다.
무엇이 진실인지, 권력과 국가는 무엇을 은폐하고 있는지를 규명하는 일은 사후라도 분명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제삼자는 물론 당사자 주변인들도 피로와 현실을 이유로 '이제 그만 잊고 묻자'라고 이야기들 한다. 그 심리와 심정이 이해불가한 것은 아니다. 그만 잊자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보통 뉴스 소비자인 대중들일 경우가 많다. 새롭게 쏟아지는 매일 뉴스의 압력에 더 이상 과거지사를 붙들고 있을 수 없다는 한탄에서 그러하다. 수긍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해 볼 수 있는 것을 해 보지 못한 채 그 사건이 된 사고를 잊고 묻기란 누군가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재난을 마주한 당사자들의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소멸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정보라의 단편 <지향>을 보면 시간에 대해서 두 가지 학설을 이야기한다. 존 맥태거트 엘리스 맥태거트라는 철학자가 '시간의 비현실성'이라는 개념을 에세이에 쓴 내용이라며 설명한다. 하나는 일반적인 통념으로 시간은 과거에서 와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사건의 이전과 이후로 양분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학설은 서로 상충하기에 사실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석의 개념이다. 재난과 같은 사건, 사고를 마주한 당사자들의 시간은 이와 같이 모순적으로 존재하거나 소멸해 버린다. 불멸의 슬픔은 이 시간의 비현실성을 체감할 때 비로소 다가온다.
로커비 폭발 사건의 배후가 지금의 정설처럼 카다피의 리비아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세력일 수도 있다. 의문 가득하지만 심도 있는 조사 없이 그저 패권 국가들이 내세운 '공익'에 진실은 아직 기밀로 남았다. 이 사건을 마주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시간은 사건 당시에 머물며 사건 이후의 시간을 가늠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시간의 무중력감에 어질대는 긴 시간을 못 이겨 공권력이 내미는 결론을 억지 수긍하는지도 모른다. 사건 이전의 시간을 묶어 두고 사건 이후의 시간이라도 되찾으려는 궁여지책처럼 보인다.
확신은 죄가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원작의 집필자 짐 스와일리 박사의 시간은 여전히 1988년 12월 21일에 정지되어 있다. 그런 그의 투쟁을 처음에는 격려하고 위로하며 응원하던 모든 이들도 그의 고집스런 물음표에 등을 돌렸다. 가족들도 예외 없이 말이다. 뉴스 소비자인 대중들은 그를 음모론에 사로잡힌 확신범으로 몰아가기 일쑤였다. 카다피와 면담을 하고 중립국 재판정에서 스코틀랜드 검사와 미국 법무부에 반기를 들고, 주범으로 몰린 테러범 용의자의 친구가 되어 그의 무죄를 구명하기까지 이르렀다.
그의 죄명은 '확신'이었다. 그의 주장이 확신에 오염된 진실의 왜곡이라는 것이다. 성실한 조사와 추론이 다수의 의견과 상충한다는 것만으로 편향된 음모론이라고 몰아붙이는 요즘이다. 이 지점에서 속이 시끄러워진다.
계엄 내란에 동조하고 그 세력을 지지하는 무리들의 너무나도 단단한 결속은 어떤 확신에 의한 것들이다. 부정선거가 있고, 종북 국가 전복 세력이 국회를 차지했다는 근거 없는 신념의 확신. 반대로 로커비 폭발과 같이 사회적 참사에 대하여 공권력이 감추는 것이 있으며 그들의 부조리와 사리사욕이 원인이 되었다는 강한 의문이 앞선 확신. 세월호, 이태원 참사, 그리고 채상병 죽음까지 이어진 의혹들에 대한 확신적 비판은 모두 반사회적 사고일까.
최근 영화 <콘클라베>에 나온 대사를 인용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자는 '확신'에 사로 잡힌 사람이라는 말이 넓게 퍼졌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극단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자칫 전체주의로 전도될 수 있는 무비판적인 편향적 신념에 대한 경고가 투영된 말이다. 여기에서 담아둘 말은 무비판과 편향에 있다. 확고한 신념이라는 확신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저 확신을 가진 의문을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의 이익'이라는 핑계로 배척하는 일은 진실 해석에 부합할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확고한 신념의 바닥에는 튼튼한 논리와 깊은 사유의 반석이 자리 잡고 있어야 진실 추구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의적 비판자가 되는 진실 탐구자들의 의혹과 검증에 대한 주장은 귀 기울일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정의된 일들에 대한 진실 추구는 진실 규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이유는 사건은 더 이상 사고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은 '왜?'라는 질문을 추출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가야 비로소 맺음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규정하는 사고와 사건의 종국적인 차이는 '시간의 복구'에 있다. 그 일이 있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사고는 사건화 된다. 사고는 원인을 규명하고 누구의 탓인가를 찾아 처벌함으로써 처리하는 것이지만, 사건은 복구 불가능한 이전의 시간을 되돌리기보다는 더 이상의 퇴행을 막기 위해 물음을 던지며 해석하는 일이라 말한다. 재난은 과거와 미래가 모두 잘려나가고 순수한 현재라는 시간성만 자신 앞에 존재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재난은 통념적 시간의 존재를 무너뜨려 비현실로 휘집어 놓는 일이다.
짐 스와일리의 주장이 옳은지 대중의 결론이 맞는지 아직 어는 편의 손도 들 수 없다. 여전히 로커비, 팬암 103 테러는 해석 중이다. 이 해석이 시도조차 없었다는 지점이 드라마와 원작이 환기하고 싶은 지점이 아니었을까. 논리와 증명으로 구성한 가설은 확신의 작용으로 참과 거짓의 분별대에 겨우 오르게 되는 오늘날이다. 그저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죄악시되는 일반화도 또 하나의 편향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상실된 시간을 복구하려는 노력과 적어도 퇴행을 막아설 진실에 대한 해석과 질문은 늘 유효하다. 아직 우리에겐 사건에 멈춘 시간들이 가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