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k Korea'라는 자조의 역설
“대한민국은 끝났다.”
어떤 선언은 너무나 강렬하여 듣는 순간 모든 다른 목소리를 삼켜버린다. 요즘 우리가 마주하는 ‘끝났다’는 말들, ‘Peak Korea’라는 다소 냉소적인 진단은 그러한 압도적인 힘을 지닌다. 이 종말의 선언 앞에 붙은 논거의 중심에는 '저출생'이라는 단어 속에 숨은 '저성장'의 두려움이다. 합계출산율 0.72명이라는 숫자가 찍힌 그래프 앞에서, 숨 막히는 경쟁과 불안정한 미래 앞에서, 이 종말의 선언은 차라리 시원한 해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성장이 끝났다는 절망 속에서도, 어쩌면 우리는 성장이 가려온 가장 소중한 알맹이를 이제야 발견할 기회를 얻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성장’이라는 하나의 신화에 매몰되어 있었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 이 주문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자 개인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자연히 인구 증가는 그 신화의 강력한 동력이었고, 인구 감소는 신화의 파산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가 <탈성장>에서 예언했듯, 무한한 자원을 전제로 하는 무한 성장은 지구라는 유한한 행성에서 불가능한 꿈이었다. 라투슈는 단언한다. “지속 가능한 사회란 인구 증가와 성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성장의 속도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 즉 자연의 피로와 자원의 고갈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한다. 성장이 멈춘 자리에 비로소 지속 가능성이라는 알맹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통찰은 성장이 가려온 또 다른 알맹이에 눈뜨게 한다. 그는 현대 문명이 ‘생산의 재생산’에만 몰두하며 인간 소외를 심화시킨다고 보았다. 학교는 학생을, 병원은 환자를, 자동차는 운전자를 ‘생산’하는 기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인구 감소는 어쩌면 이 생산 기계의 속도를 늦추고, 인간 본연의 ‘삶의 재생산’이라는 느리고 부드러운 리듬을 되찾을 기회일 수 있다. 기술과 제도의 확장 뒤편에 숨겨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돌봄, 공동체의 연대, 비물질적 가치의 중요성이라는 알맹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출산'이 우리의 미래 자산인가?
에이미 블랙스톤(Amy Blackstone)이 <Childfree by Choice>에서 주장하는 ‘아이를 갖지 않을 자유’는 국가의 인구 증대 목표가 개인의 가장 깊은 선택과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의무처럼 강요될 때, 출산율이라는 숫자에 가려지는 것은 개개인의 삶의 서사,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형태, 비출산을 선택한 이들의 존엄성이라는 소중한 알맹이다. 데이비드 애튼버러(David Attenborough)가 지구 환경 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인구 과잉을 지목할 때, 그는 인구 수치에 대한 집착이 생태계의 건강성이라는 더 크고 중요한 알맹이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인구 감소는 지구 생태계가 숨을 고르고, 파괴된 생물 다양성이 회복될 아주 작은 여백, 그 초록빛 알맹이를 우리에게 돌려줄지도 모른다.
이제 시선을 해외로 돌려보자. ‘끝났다’는 선언 대신 ‘전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들의 풍경 속에서 성장이 가려왔던 알맹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일본 홋카이도의 유바리시는 재정 파탄과 인구 유출이라는 극심한 위기 속에서 ‘작은 도시, 큰 행복’을 모토로 내걸었다. 폐광의 역사를 문화로 엮고, 지역 농산물과 예술을 결합하며, 인구는 줄었지만 공동체의 유대감은 단단해졌다. 성장의 동력이 사라진 자리에 지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람 사이의 연결이라는 알맹이가 피어난 것이다.
독일 동부의 슈트랄준트는 인구 감소를 ‘도시 축소(Smart Shrinking)’라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였다. 비어 가는 건물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고, 낡은 공간은 공동체 센터로 탈바꿈시켰다. 도시의 물리적 크기는 줄었지만, 녹지 공간은 늘고 주민들은 더 가까워졌다. 양적 성장이 멈춘 자리에 도시의 쾌적함과 시민들의 삶의 질이라는 알맹이가 채워지고 있다.
이탈리아 남부의 시골 마을에서 시작된 ‘1유로 주택’ 운동 역시 인구 감소의 틈새를 비집고 나온 알맹이다. 방치된 빈집들을 1유로에 내놓아 새로운 이주민을 유치함으로써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돈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 정책은, 낡은 공간의 가치를 복원하고, 외부 문화를 수용하며, 공동체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방식이다. 부동산 가치 상승이라는 성장에 가려졌던, 공간과 사람, 그리고 역사가 엮어내는 관계의 알맹이가 되살아난 것이다.
핀란드는 인구 감소 추세 속에서도 끊임없이 ‘삶의 질’을 묻는다. 노동 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실험은 사람들이 돈벌이 기계가 아닌, 성찰하고 창작하며 서로를 돌보는 존재로 살아갈 시간을 마련해 준다. GDP 수치와 효율성이라는 성장의 틀에 가려져 있던, 시간의 풍요로움, 여가와 돌봄의 가치라는 알맹이를 사회 시스템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성장은 지속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는 시간을 마주하고 있다. 리더십의 과제 중 하나가 '성장'에 고정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출생과 인구소멸, 지방소멸 같이 자극적인 지표가 모두의 마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저출생이 반드시 비극일까?' 하는 질문조차 주저하게 만드는 사회의 공기가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
직장인 시절, 그 사회가 전부라 생각하던 시절, 모든 관심사는 연봉이라는 성과에 맞추어져 있었다. 개인 구성원의 성과는 곧 회사 조직의 성장에 기대기 마련이다. 성장의 고전적 기본 지표는 '매출'이었다. 그러나 미국부터 시작한 성장 임계의 환경에서 선도 기업들은 성장대신 '지속 가능'을 목표로 다시 삼기 시작했다. 고전적 지표는 부수적 참고사항이 되고, '이익'이나 '장기계약', 그리고 '고정적 수익모델'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롱텀의 장기 서비스 계약은 매출 반영이 당장 되는 것은 아니나 미래 가치를 담보하고, 유지보수, 멤버십, 라이선스피 등의 반자동 지불요 과금은 기업의 주요 사업이 되었다. 구독경제니 공유경제니 하는 말장난의 시작이었다. 직장인들의 생각도 변화해 한 번의 높은 성취보다는 복무 기한이 보장되는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성장의 욕망'이 드세게 작동해 양질의 지속 가능한 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한탕'의 틈새만 바라보는 세대가 주류가 되었다.
한국 사회의 ‘끝났다’는 선언은 어쩌면 너무도 익숙한 성장 담론의 언어로 현재의 변화를 해석하려는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익숙한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라투슈와 일리치, 블랙스톤과 애튼버러가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으로 인구 감소를 바라본다면, 숨겨진 알맹이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양적인 팽창이 아닌 질적인 충만함, 생산의 논리가 아닌 삶의 논리,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그리고 지구와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알맹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성장’이라는 신화의 정상만을 바라볼 필요가 없다. 정상에 이르는 길이 끝났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다. 이제 우리는 정상에서 내려와, 성장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산비탈과 골짜기, 들판과 강변에 숨겨진 알맹이들을 찾아 나설 시간이다.
인구 감소는 그 탐험을 시작하라는 부름일 수 있다. GDP 대신 행복지수를,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 대신 다양한 공동체 거점을, 경쟁적인 성공 대신 느슨하지만 단단한 관계를, 자원 고갈 대신 생태적 순환을 추구하며, ‘끝났다’는 말 대신 ‘이제 시작한다’는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갈 때, 성장에 가려졌던 진정한 삶의 알맹이가 찬란하게 빛을 발할 것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성장의 압박에서 벗어난 곳에서, 가려졌던 알맹이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함께 찾아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