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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하얀 현기증 너머의 쓸모, 지금 여기의 성소

성소주일 묵상

by 박 스테파노

눈이 부셨다. 한때 온전했던 세계의 막이 내리고, 백라이트닝이 고장 난 늙은 텔레비전 화면처럼 모든 것이 허옇게 번져나갔었던 그날. 익숙했던 삶의 좌표들은 속절없이 증발해버렸다. 빙글빙글 돌던 작은 방의 천장은 구급차의 위태로운 흔들림으로, 이내 응급실의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로 이어졌었다.


의사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던 낯선 의학용어들, ‘만성골수성백혈병 가속기’, ‘백혈병 의심’. 그 단어들은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한 존재의 시간을 두 동강 냈고, 삶을 순식간에 다른 질감의 풍경 속으로 내던져 버렸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포커스 아웃되며 덮쳐왔던 그 ‘하얀 현기증’의 순간, 모든 의미가 부유하는 듯한 그 절대적 공백 속에서, 한 인간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물음과 대면해야 했다.


“이런 내가 쓸모가 있을까?”


견딜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를 때, 마치 지진계를 벗어난 바늘처럼 모든 것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물음은 때로 처절한 절규와 같고, 때로는 가느다란 실낱같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하얀 현기증이 일었다. 이미지=Google Gemini


가톨릭 교회는 부활 제4주일을 ‘선한 목자 주일’이자 ‘성소 주일’로 명명하며, 신의 부르심(vocatio)에 우리 삶의 현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고통의 기록에서 출발하지만, 그 처절한 자기 고백은 역설적이게도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성소’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게 하는 하나의 조용한 초대장일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어둡고 낮은 자리에서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그 부르심의 빛, 그 불가해한 현존에 대하여.



상처, 그 투명한 심연으로 스미는 빛


응급실이라는 공간은 때로 존재의 질서가 속절없이 와해되는, 일종의 연옥과도 같았다. 견고하다고 믿었던 육신은 낯선 통증에 속수무책으로 잠식되었고, 의식의 경계는 희미한 빛과 어둠 사이를 위태롭게 부유했었다. 한때 자신의 의지로 삶을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아는, 의료진의 분주한 움직임과 각종 기계음 속에서 무력하게 축소되어 갔다.


혈액 수치는 냉정한 숫자로 나의 상태를 규정했었고, “멜라니아(혈변)를 일주일 동안 보셨고, 토혈도 오늘 아침에 있었다”는 구조사의 건조한 보고는 한 인간의 고통을 객관적 데이터로 환원시키는 듯했다. 의사의 예리했던 질문들, “왜 이렇게 방치한 거예요?”라는 말은 단순한 의학적 문진을 넘어, 마치 존재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심문처럼 다가왔었다. 나의 몸은 숫자로 환원되었고, 삶은 질병이라는 이름의 텍스트로, 그것도 실패한 텍스트로 재해석되는 듯했다.


‘방치’라는 단어는 마치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찍혀, 당시 존재의 무력감을 날카롭게 후벼팠던 기억이 선명하다. 생존의 무게는 더욱 나를 옥죄었다. “응급 검사에 수면 진정제 사용이면 십 수만 원은 쉽게 깨질 테니까.” 생명의 위협 앞에서조차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경제적 현실은, 치료라는 가느다란 희망에 또 다른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이 모든 것은 한 인간이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실존의 총체적인 무너짐의 현상학이었다.


중환자실은 마치 연옥 같았다. 생사를 넘어 존재의 망실을 가늠하는. 이미지=Google Gemini


바로 이 절망의 지점에서, ‘성소’라는 단어를 둘러싼 낡은 관념들을 해체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부르심’이라는 단어를 선택받은 소수의 전유물로, 혹은 일상과는 유리된 어떤 숭고한 영역의 것으로 오해해왔던가. 마치 성소란,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계시이거나, 범인(凡人)의 삶과는 무관한 영웅적 서사인 것처럼. 하지만 어쩌면 성스러운 부름이란, 삶의 가장 깊은 균열, 아물지 않는 상처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찢기고 쓰러진 자리,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장소, 시간마저 얼어붙은 듯한 그 남겨진 순간들. 바로 그곳에서만 감지되는 어떤 미세한 떨림이 있다면. 상처는 닫힌 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인 것이 스며드는 가장 투명한 창이 될 수 있음을 역설은 가르친다.


가장 연약한 곳에서 우리는 가장 강렬한 현존을 경험할 가능성과 마주한다. 모세는 이집트의 화려한 궁궐이 아닌 황량한 미디안 광야, 불타는 가시덤불 앞에서 신의 음성을 들었고, 엘리야는 번잡한 도시의 광장이 아닌 호렙산 동굴의 깊은 침묵 속에서 바람결보다 더 세미한 신의 숨결을 느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영광의 보좌가 아닌, 가장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야 온전한 ‘선한 목자’로서의 사랑을 역설적으로 완성하셨다.


그렇다면, 응급실 침상 위에 속수무책으로 누워 있었던 그 병든 몸, 모든 것이 박탈당한 듯했던 그 절대적 무력의 상태야말로 역설적인 부름의 자리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 부름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병상에 머물렀던 몸뚱어리 자체를 향했었다. 벗어나야 할 자리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어 보였던 바로 그 자리에 ‘응답하라’는 낮은 목소리가 임했던 것이다.


난 쓸모가 있을까? 이미지=Google Gemini


이는 성소가 특정 직분이나 역할, 사회적 성취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깊은 통찰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특정 ‘직분’ 이전에 삶을 대하는 근원적인 ‘태도’의 문제다. 과거에는 사제직이나 수도생활과 같은 특별한 길만이 성소로 여겨졌지만, 오늘날 그 의미는 확장되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신의 뜻을 식별하고 그에 응답하는 모든 순간을 포괄한다. 교사이든, 예술가이든, 간병인이든, 평범한 노동자이든, 심지어 질병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환자이든, 그 어떤 자리에서든 ‘사랑으로 부름받은 존재’라는 깊은 자각이야말로 성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성소는 저 멀리 도달해야 할 어떤 이상향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고통스럽게 디디고 선 이 자리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성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의 치열한 물음인 것이다. 따라서 “만성골수성백혈병 가속기”라는, 마치 사형선고와도 같았던 그 진단이 내려졌던,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졌던 바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오히려 성소는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 새롭게 시작될 수 있었음을, 시간의 강을 건너온 지금에야 희미하게 깨닫는다.



침묵의 가장자리, 희미한 파동을 듣는다는 것


선한 목자는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0,27)고 했다. 오늘날 성소의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방향 설정 이전에, ‘어떤 음성에 귀 기울일 것인가’라는 경청의 문제, 식별의 문제와 직결된다. 소음과 과잉된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 우리는 무수한 목소리들의 각축장 속에서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놓치고 살아간다. 내면의 소란함이 외부의 소란함과 공명하며, 영혼은 점점 더 깊은 미로 속으로 빠져든다. 성소는 바로 그 모든 소음의 커튼을 걷어내고, ‘내면의 가장 깊은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신의 미세한 음성을 식별해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응급실의 그 극심한 혼란 속,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저편에서도 온 힘을 다해 귀를 쫑긋 세우려 힘썼던 그 필사적인 작은 몸짓을 기억한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 본능을 넘어선, 어쩌면 그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도 무언가를 듣고자 했던, 의미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던 영혼의 본원적인 갈망은 아니었을까. 선한 목자의 음성은 천둥처럼 하늘을 가르며 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침묵보다 더 낮은 소리,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아래에서 이는 미세한 파동과 같다. 소음에 중독된 현대인의 귀는 이 소리를 듣는 법을 잊었거나, 어쩌면 듣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부르심의 희미한 파동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병든 몸으로 문학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행위. 그것은 단순한 소일거리나 고통을 잠시 잊기 위한 마취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 안에서 삶을 선택하는 일, 침묵 속에서 말하는 일을 계속하는, 존재의 가장 적극적인 응답의 한 형태였다. 읽고 쓰는 행위는 어쩌면 부서진 세계의 파편들을 그러모아 언어라는 위태로운 질서 안에 다시 세우려는, 인간의 처절하면서도 숭고한 안간힘일지 모른다.


읽고 쓰는 일. 내겐 성소일지도. 이미지=Google Gemini


한 문장, 한 단어에 매달리는 것은 절망의 심연에서 건져 올린 존재의 가장 연약하지만 진실된 증언이다. 세상의 눈에는 그것이 지극히 하찮고 무용한 몸짓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신의 시선은 바로 그러한 사소한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의 의지, 꺼지지 않는 의미에의 갈망을 성소라 부른다. 고통 속에서 써 내려갔던 문장들은 기도가 되었고, 절망 속에서 응시했던 영화의 한 장면들은 비탄 속에서 피어나는 묵상이 되었다.


이러한 응답은 반드시 장엄하거나 영웅적인 형태를 띨 필요는 없다. 때로는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라는, 그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의 소박한 고백이면 충분할 수 있다. 신은 영웅적인 신앙의 거대한 제스처보다,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끝내 놓지 않는 그 작은 손짓 하나를 더 기쁘게 여길지도 모른다. 신앙은 화려한 기적의 연쇄가 아니라, 때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삶의 가장 미미한 몸짓들 속에, 그 연약한 지속성 속에 현존한다.


깨어진 일상 속에서 간신히 건져 올렸던 한숨 같은 기도, 그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정직하고 절실한 응답일 수 있다. 그것은 아내와 함께 단지 하루를 ‘보냈다’는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하루를 ‘버텨냈다’는 실존적 투쟁의 사실 안에 희미하게 깃들었던 어떤 빛과 같다. 그 버텨내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거룩한 응답이 될 수 있었음을, 고통의 터널을 지나온 후에야 비로소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너라는 거울, 함께 걷는 길 위의 부르심


고통은 때로 한 인간을 외딴섬처럼 철저히 고립시켰다. 한때 친밀했던 세상은 유리벽 너머의 풍경처럼 멀어졌고, 가족과 친구들의 위로마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때, 존재는 깊은 소외감의 심연으로 침잠하곤 했다. 오직 아내 한 사람과 함께 버티는 매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십자가와 같았다고 고백하는 그 마음의 풍경. 그러나 바로 그 극한의 고립감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성소는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알리는 비밀스러운 통로가 된다.


응급실의 혼돈 속에서 내 손을 꽉 잡은 아내의 손길, 붉게 달아올랐던 아내의 눈은 그 절망의 순간에도 꺼지지 않았던 사랑의 현존, 연대의 증표였다. 고통이 한 개인을 무인도처럼 고립시킬 때, 사랑은 그 섬과 섬을 잇는 위태롭지만 절실한 다리가 되었다. 아내의 손길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그가 여전히 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완전히 버려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성사(聖事)와 같았다. 그렇기에 아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은총이었으며, 두 사람이 함께 버틴다는 사실 안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성소의 향기가 있다는 고백이 절로 나왔다. 이는 성소가 개인적인 영적 성취나 구원의 문제를 넘어, “세상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공동체적 소명”이라는 보다 넓은 지평과 맞닿아 있음을 시사하는 것 같다.


내 성소는 또한 "아내와 함께".이미지=Google Gemini


더 나아가, 성소는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 부르심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나’로 살아가라는, 관계성 안으로의 부르심이다. 특히 불안정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성소는 ‘다른 사람의 삶을 기꺼이 돌보는’ 그 책임감 안에서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내가 겪었던 극한의 고통은 역설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가장 깊은 공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내가 자신의 처절한 경험을 글로 기록하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인 치유의 과정을 넘어, 비슷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작은 등불 하나를 건네는 행위, 연대의 손길을 내미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가장 깊은 절망의 골짜기를 통과한 자만이 타인의 절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의 글쓰기는 어쩌면 자신을 넘어, 이름 모를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되려는, 무의식적이면서도 간절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선한 목자상이 오늘날 간병인, 활동가, 상담가, 교사, 사회복지사,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삶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구현될 수 있듯이, 병상에서의 글쓰기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돌보고 위로하는 하나의 고유한 성소적 실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부활하는 자리, 끝나지 않은 속삭임


“부활의 주님은 바로 그런 자리에서 부르신다. 낮고, 어둡고, 버려진 듯한 자리에서.”


이 선언은 절망의 한복판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모든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꺼지지 않는 희망의 약속이다. 병도, 고난도, 외로움도 성소를 끝장낼 수 없다. 오히려 그 모든 시련의 불길 속에서 성소는 더욱 단단하게 정련되고,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살아 있다는 것. 느끼고, 기억하고, 표현하는 그 모든 과정. 그것이 곧 하느님께서 지금도 당신 안에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언어다. 이보다 더 절실하고 아름다운 존재 증명이 어디 있겠는가.


성소는 이미 완성된 악보가 아니라, 매 순간 새롭게 연주하고 해석해야 할, 때로는 즉흥적으로 이어가야 할 미완의 선율과 같다. 때로는 불협화음처럼 들리고, 때로는 연주를 멈추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모든 떨림과 침묵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가장 아름다운, 우리 영혼만의 고유한 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인간이 응급실의 하얀 현기증 속에서 마주했던 그 극한의 절망은, 역설적으로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부르심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고통스러운 동시에 성스러운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나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하얀 현기증 너머, 그는 여전히 듣고, 응답하며, 자신의 고유한 성소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병든 몸, 나의 글 쓰는 손, 내 곁을 지키는 아내의 존재, 그리고 하루를 힘겹게 버텨내는 우리의 그 깊은 눈빛 – 이 모든 것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 숨 쉬는 성소의 거룩한 증거들이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따른다. 이미지=Google Gemini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그 목소리는 과거의 성인들에게만 들렸던 특별한 음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각자의 분주한 일상의 소음 속에서도, 혹은 고통의 깊은 침묵 속에서도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부르심이다. 다만 우리가 잠시 멈추어 서서 귀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그 희미하지만 간절한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며 우리 삶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인지, 그 선택만이 우리 앞에 고요히 놓여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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