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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을 수 없는 것을 끊는 마음에 대하여

쿠팡에 대한 복잡한 마음에 대하여

by 박 스테파노

오래된 노트북에 파워 케이블이 없는 것을 인지한 건 밤 열한 시 무렵이었다. 책상에 엎드려 서류 정리를 서두르던 나는, 오래된 핸드폰이 마감 알림을 띄우는 것을 보고서야 며칠째 잊고 있던 현실을 자각했다.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까지 정리해 제출해야 할 의료 기록과 전원 신청을 준비할 수 없다. 몸살기는 채 낫지 않았고, 편의점도 단축 영업하는 동네였다. 순간 주저 없이 앱을 열었다. 쿠팡. 검색창에 '케이블'을 치고, 접속 타입과 낮은 가격순을 검색 설정하고, 로켓배송 표시가 있는 제품을 골라 결제했다. 창을 닫고 나서야 잠깐 숨이 막혔다. 익숙한 편리함 속에 어김없이 느껴지는 어두운 불편함.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나는 나를 설득하고 잠을 청했다. 이튿날 아침 현관 앞엔 바삐 던져 놓은 상자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낭패의 마지막 손 끝에는 늘 그 공룡이 있었다. Sora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쿠팡을 이용했을지 가늠도 어렵다. 대부분 급할 때 보다 가격 차이가 너무 클 때였다. 한 달 생활비를 쪼개 써야 하는 입장에서, 몇 백 원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쿠팡은 우리 같은 이들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그리고 그 약점을 틀어쥐고, 정교하게 반복 소비의 루틴을 설계해왔다. 버튼은 커졌고, 추천은 정밀해졌으며, 다음 날 도착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쿠팡은 나의 몸속으로, 나의 시간과 습관과 윤리에까지 침투했다. 처음엔 나도 알고 있었다. 쿠팡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 쿠팡의 로켓배송이 누군가의 야간노동과 과로 위에 세워졌다는 것. 하지만 나의 인식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불편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고, 대안도 뚜렷하지 않았다.


나는 윤리적으로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그 윤리는, 선택지가 없는 사람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것일까?


SNS에서는 #쿠팡불매 태그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노동자 과로사, 배송 기사 사망, 중소상공인 생태계 파괴. 하나하나가 분노할 만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쿠팡을 끊지 못한다. 생필품을 언제 어디서든 싸게, 빠르게 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불매'는 윤리의 실천처럼 들리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결국 자원과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불매는 일종의 계급적 실천이다. 여유 있는 자만이 불편을 견딜 수 있고, 대체재를 선택할 수 있다. 프레카리아트—가이 스탠딩이 말한 그 불안정한 계층에겐 그런 실천이 고통을 동반한 모험이 된다.


지젝이 말한 현대인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나는 알고 있다. 젝은 알면서도 따른다는 냉소적 이성으로 설명했다. 쿠팡을 알고도 끊지 못하는 우리의 행위는 이 구조에 정확히 부합한다. 우리는 쿠팡이 무엇을 착취하는지 알고 있다. 노동자의 밤, 자영업자의 숨, 지방 소매망의 붕괴, 그 모든 것을 안다. 그럼에도 앱을 연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구조는 쿠팡뿐이기 때문이다. 이 냉소적 이성은 죄책감과 정당화를 번갈아 호출하며, 나를 시스템의 일원으로 유지시킨다.


행동 이전에 생존이 문제인 이들이 있다. Sora


그렇다면 불매는 해답인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곧 회의가 들었다. 그것은 해답이 아니라 출구일 수 있다. 다만 그 출구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렌트는 '행동'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실천이라 보았다. 쿠팡 불매는 분명 행동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노동과 생존의 강박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그 조건에 겨우 걸쳐 있고, 많은 이들은 그조차 없다. 행동은 멀고 노동은 현실이며 생존은 턱까지 차오른다.


불매하지 못한 당신, 쿠팡을 여전히 쓰는 나, 그것이 부끄러운 건 윤리가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증거다. 우리는 시스템에 순응한 것이 아니라, 아직 빠져나올 출구를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이, 이 글이, 하나의 숨구멍이 되기를 바란다. 완전한 불매는 아직 어렵지만, 이 구조가 부당하다는 감각은 놓치지 않겠다. 그리고 언젠가, 이 감각이 다른 길을 열 수 있기를.


그러나 쿠팡을 끊는다는 일은 단지 소비를 중단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시간 구조를 바꾸는 일이자, 대체할 수단들을 새로 학습하고 적응하는 노동을 뜻한다. 예를 들어 동네 마트를 다시 찾기 위해선 영업 시간을 알아보고 긴 거리를 오갈 결심이 서야한다. 원하는 제품의 재고 유무를 확인해야 하고 대안도 마련해야 한다. 배송을 하지 못하면 직접 무게를 감당해야 하고, 문제가 생겼을 때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시간의 여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현대 소비 시스템이 어떤 방향으로 우리를 구조화해왔는지를 직감하게 된다. 시간 자본을 가진 자만이 윤리적 소비자가 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다수는, 윤리보다는 생존과 즉시성에 더 가깝게 밀려난다.


자영업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쿠팡은 소비자의 영역만이 아니라 공급자의 생태계마저 포섭한다. 소형 판매자들은 입점 구조 속에서 쿠팡에 종속되며, 판매량을 유지하기 위해 수수료 구조를 감내한다. 배송을 쿠팡에 위임한 순간, 상품의 품질이나 고객 응대에서조차 주도권을 잃는다. 쿠팡은 결국, '유통'이라는 기능을 매개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모두 자신에게 의존시키는 자본의 플랫폼이자, 디지털 봉건제의 새로운 영지다. 이 시스템을 떠나는 일이 단순한 탈퇴가 아닌 이유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이 시스템에 걸고 있기 때문이다.


공룡이 되기까지 견제와 경고는 어디에 있었을까? Sora


이럴 때 필요한 건 단순한 죄책감도 아니고, 선언적 윤리도 아니다. 대신 우리는 새로운 소비의 감각, 관계의 회복을 향한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협동조합 기반의 지역 유통망, 노동 중심의 플랫폼 전환 실험, 구매자와 생산자가 직접 연결되는 느린 경로들. 그것은 결코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덜 착취적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그런 작은 시도들이 생존 가능한 삶의 또 다른 문법으로 자리 잡도록 사회 전체가 재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이 보장될 때만 가능하다.


쿠팡, 또는 SPC, 일본 전범 기업 등 불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저항이지만, 동시에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쉽게 휘두르며, 무엇이 윤리적 선택을 이토록 어렵게 만드는가?


그 질문에 머무는 일, 그 질문을 말로 내뱉는 일, 그 안에서 동료를 찾는 일이 지금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작고 내밀한 실천일지 모른다. 세상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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