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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K컬처를 말하는가-<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뒷면

이미지와 주체, 고유성과 디아스포라의 경계에서

by 박 스테파노

최근 넷플릭스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글로벌 팬덤을 형성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미국 자본과 제작진이 한국 케이팝 아이돌 문화를 소재로 삼은 이 작품은, 언뜻 보면 K컬처의 또 다른 성공 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작품이 한국 고유의 문화 콘텐츠로서 온전히 자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한국 문화의 진정한 ‘주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과연 K컬처는 ‘팔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말하는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문화 비평의 고전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서구가 상상하고 재현하는 방식, 즉 타자의 공간으로 고정하는 지식과 권력의 작동방식을 설명한다. 21세기 글로벌 문화시장에서도 ‘동양’은 여전히 그저 팔리는 이미지에 불과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겉으로는 한국을 배경으로 삼지만, 한국인의 삶이나 역사, 문화적 맥락보다는 미국식 히어로 서사의 틀에 가깝다. 한국은 단지 신비하고 이국적인 배경으로 소비된다. 이는 곧 문화의 주체성을 소거한 채, 문화 상품으로서의 K컬처만 남기는 일이다.


더 나아가, 할리우드 영화들이 재현하는 한국 이미지도 여전히 20세기 후진국 도시의 낡고 어둡고 혼란스러운 골목으로 고정되어 있다. 예컨대 이번 주 스트리밍 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올드 가드2> 같은 작품은 서울을 낡고 지저분한 공간으로 묘사함으로써 오늘날의 경제·문화적 위상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는 일종의 현대판 오리엔탈리즘으로, 한국 문화를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머무른다. 이런 시각은 한국 문화가 세계 시장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화가 ‘말하는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제작사는 소니픽쳐스. 넷플릭스


또한, <미나리>, <파친코>, <성난 사람들> 같은 작품은 전통적 ‘고유 정체성’이 아닌,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시선에서 한국 문화를 재구성한다. 이들 작품은 한국인 이민자의 언어, 문화, 그리고 경계인의 정체성을 통해 새로운 ‘한국’을 만들어낸다. 단일 민족 정체성이 아닌, 혼종성과 경계성, 그리고 이동과 정체의 긴장 속에서 ‘한국’은 다층적으로 확장된다. 디아스포라는 ‘떠남’과 ‘재구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문화다. 그들은 고유 정체성의 보존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타문화와의 충돌과 융합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주체성을 창조한다. 이를 애써 'K컬쳐'로 끌어 안아 고무하는 포용은 이해가지만, 이를 정체성의 문화라 고양하는 것은 해석의 과잉이라 생각한다.


고유 정체성의 문화는 한 사회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전통과 역사에 기반한 단일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문화는 경계인의 삶을 반영하며, 고정된 문화 정체성보다는 끊임없는 이동과 변형, 그리고 혼종적 특성을 담아낸다. 이는 문화가 본질적으로 고정불변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동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유성’과 ‘디아스포라성’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긴장 관계에 놓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흑인들 영가에 뿌리를 둔 블루스는 미국의 음악인가, 아니면 아프리카 대륙의 정체성일까. 영화 <씨너스>에 대한 비판 지점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영화 이야기는 나중에.


오늘날 K컬처는 산업적 성공과 세계적 소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즉, 자본의 힘으로 ‘팔리는 이미지’가 아닌, 문화의 ‘말하는 주체’로서 자기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 문화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주체적 표현이어야만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가 가능하다. 또한 글로벌 시장에서의 문화적 주체성은 단지 정체성의 고수에 그치지 않고, 그 정체성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한국 문화가 세계화 과정에서 겪는 이중적 현실은 오늘날 다문화 사회와 디아스포라 시대에 더욱 두드러진다. K컬처는 ‘누가, 어떤 언어로, 어떤 맥락에서’ 문화를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늘 답해야 한다. 한국 사회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 그리고 해외 한인 사회와 그 후손들의 경험을 포용할 때만이 K컬처의 미래는 건강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당신은 누구의 언어로, 누구를 대신해 말하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이는 문화의 정체성과 존립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물음이며, 지금 이 시대 K컬처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긴급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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