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터널 선샤인> (2004, Eternal Sunshine of...)
아침 햇살이 살짝 내려앉은 기차 객차 안, 조엘(짐 캐리)은 차갑게 등을 돌린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즐릿)을 마주한다. 사랑의 기록이 삭제되는 순간, 그는 낯선 이가 되어버린 옛 연인을 다 알아본 듯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클레멘타인은 이미 ‘라쿠나’라는 기억 삭제 회사의 절차를 거쳐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웠다. 하지만 기묘하게, 조엘은 자신의 고통까지 반으로 접어 지워버리고자 같은 절차를 밟으려 한다. 영화가 열어 보이는 것은 기억을 지운다는 것이 단순한 치유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 속에 감추어진 미련과 사랑을 끌어안는 의식이라는 역설이다.
영화 속에서 기억을 지우는 과정은 마치 은밀한 의식처럼 진행된다. 일기와 삽화, 기차역의 노랫소리 같은 파편들이 화면 위로 하나씩 꺼내어지고, 그 파편들은 곧 지워져야 할 대상이지만, 이상하게도 삭제될수록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라쿠나사 수장인 하워드 박사조차 고개를 떨군 채 그 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은, 과학의 감각이 아닌 인간의 고뇌를 불러온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와 화해하려는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Eloisa to Abelard》와 ‘영원한 햇빛’
영화의 원제 는 알렉산더 포프의 1717년 시 《Eloisa to Abelard》에서 비롯되었다. 시의 209행 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How happy is the blameless vestal’s lot!
The world forgetting, by the world forgot.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Each pray’r accepted, and each wish resign’d;
티 없이 맑은 베스타의 축복받은 삶이여!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세상마저 그녀를 잊었네.
번뇌 없는 영혼에 깃든 영원한 햇살!
간절한 기도는 응답받고, 모든 바람은 잠잠히 내려놓았으니.;
벽에 새겨진 듯한 이 네 줄은, 기억을 지웠을 때 가능해질 것이라 믿었던 무구한 행복을 은유한다. 영화가 펼쳐 보이는 것은, 신녀가 세상의 번뇌를 모두 내려놓고 하얀 햇빛 속에 머무르듯, 기억마저 지워진 존재가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포프의 시에서 신녀는 세상을 잊고 세상도 그녀를 잊은 채 빛 속에 머물지만, 결국 그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은 행복인지 망각인지 끝끝내 분간하기 어려운 지점으로 인도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무구함’이란 단어 뒤에 숨겨진 결핍을 느끼고, 크레멘타인과 조엘의 관계가 단순한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기억을 지우려 드는 도피’였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항상 함께 있으면 세상이 조금은 덜 무거워지고, 사소한 일상조차 기쁨이 되었던 사이였다. 늘 곁에 있고 싶었고, 모든 것을 나누던 날들은, 마치 영원이라는 말이 실체를 가진 듯 여겨지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사랑은, 때로 가장 가까웠던 이를 타인보다 먼 자리로 밀어낸다. 끝내 ‘잘 지내’라는 인사를 끝으로, 서로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다. 처음에는, 보지 않으면 잊히고, 시간이 지나면 새로이 일상이 자리 잡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감정보다 한 발 앞서 잔인하다.
하루를 숨 쉬는 일조차 기억을 견디는 일로 바뀌고, 무심코 걷는 거리마다, 들리는 음악마다, 입에 담은 말끝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 손끝이 닿던 순간, 스쳐 웃던 표정, 심지어 싸움 끝에 내뱉던 말투까지—그 모든 것이 기억의 창고에서 뛰쳐나와 지금 이곳을 휘젓는다. 사랑이란 그립고 소중한 장면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시점이다. 좋았던 순간은 아프고, 싫었던 장면은 더욱 아프다. 기억은 선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그 모든 것들을 지워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충동이 온몸을 휘감는다.
"망각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 마저 잊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이터널 선샤인>에서처럼. “망각은 삶의 위로”라 속삭이던 니체의 문장을 떠올리며, 우리는 지우고 싶다고, 잊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그러나 잊음은 선택이 아니며, 고통조차 사랑의 증거가 된다는 사실은 문득 문득 다시 떠오른다.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은 마음과, 그럼에도 잊히지않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사랑을 통해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풍경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 이 기억의 습격은, 단순히 아픔이 아니라, 한때 사랑이 존재했다는 가장 정직한 증거다.
기억이란 생각나는 것, 잊혀진 것은 기억도 추억도 아닌 것
영화의 처음과 끝은 마치 하나의 숨결처럼 연결된다. 기억을 지워버린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를 모르는 채 다시금 묘한 끌림에 이끌려 썸을 타듯 가까워진다. 마치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의 반복. 그러나 막 피어오르려는 새로운 설렘의 순간에, 마치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빗줄기처럼 그들 앞에 던져진 것은 라쿠나사의 내부고발, 그리고 각자의 기억이 담긴 낡은 테이프였다. 은밀하고 치욕적인 속내가 고스란히 담긴 그 음성의 파편들 속에 사랑의 찬란함은 없다. 오직 이별의 당위와 필연을 입증하는 조각들만 흘러나온다.
조엘의 테이프에서 클레멘타인은 제멋대로고 이기적이며, 육체만으로 남자와의 관계를 시작하는 싸늘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는 그녀가 어휘력도 모자라 늘 창피를 당하게 한다고 말한다. 반면 클레멘타인의 입에서는 조엘이 늘 의욕이 없고 진부하며, 무기력하고 밤에도 무덤덤한 남자라는 평가가 쏟아진다. 소심하고 비겁하며 자신에게 어떤 활력도 주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그녀에게 조엘이었다.
이들이 이토록 잔혹한 묘사를 남기고도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려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정말 그들은 서로의 못난 모습이 너무 싫어서였을까. 그들의 이별이 증언대로 '필연'이었기 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진짜 그들을 괴롭힌 것은, 상대방의 나쁜 모습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워지지 않는 끌림, 사랑이라는 감정이 끝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못난 점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그 누구보다 그를 깊이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별의 고통은 그 결점을 탓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여전히 사랑해버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 아니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기억을 지운다는 것은 사랑을 잊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지만, 그 사랑의 궤적이 마음의 어딘가에 흔적처럼 남아있다면, 되짚어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은 어쩌면, 새로이 시작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깊은 슬픔을 안은 사랑의 귀환일지도 모른다.
이별 직후, 사람은 으레 그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는다. '그 사람이 변했기 때문', '그 사람이 모질었기 때문', '그 사람이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며 애써 분리하고 추방하려 든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렇게 단순히 나쁜 사람일 리 없다는 생각이 스며든다. 한때는 내가 전부였던 사람 아닌가. 그렇게까지 못된 이였더라면,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비루해 보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신의 사랑이 실패가 아니라 운명이었다고, 떠남이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고 자위하며 그 관계를 조용히 접으려 한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마무리보다 여백이 더 크다. 완결이란 없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기억은 사전 경고도 없이 우리의 일상을 급습한다. 냉장고를 열어 혼자 먹을 저녁을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손은 두 사람 분량의 재료를 꺼내 놓는다. 독신 남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앉아서 볼일을 본다. 자극적인 음식에 유난스레 민감하던 그 사람의 잔소리는 사라졌지만, 습관처럼 마트에서는 카레를 들었다가 놓는다. 익숙한 동네, 낯익은 골목길에서 누군가를 바래다주던 발길의 기억이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 길을 걷게 만든다. TV에서 흘러나온 노래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우연히 마주친 여행지 소개에 채널을 바꾸지 못하고 오래 머문다. 혼자 극장에 가는 일이 어색해지고, 백화점에서 혼자 슈트를 고르는 일에도 망설임이 묻어난다.
이별은 단절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점과 선 위에 들러붙은 잔향이다. 아주 수치스러운 순간이든, 누구보다 빛났던 영광의 순간이든, 그 사람의 흔적은 삶의 표면마다 잔상처럼 맺힌다. 숨을 쉬는 매 순간이, 존재의 결마다 침투한 기억의 습격이다. 애써 잊으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손끝에서 기억은 빠져나가지 않고, 고개를 저어도 마음 깊은 곳의 습도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실현 불가능한 바람을 품게 된다. 시간을 되돌리거나, 아니면 그 시간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바람. 차라리, 그날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 계절이 통째로 지워진다면, 그렇게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안다. 깊이 사랑한 만큼, 이별의 기억은 더욱 아프고, 더욱 오래 남는다는 것을.‘기억나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잊음'이라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애써 밀어내는 이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다시 불러오고 싶어도 불러낼 수 없는희미한 안개처럼 흩어질지도 모른다.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는 것. 그것은 곧 누군가를 정말로, 뼛속 깊이 사랑했다는 가장 조용한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억과 망각의 메커니즘
인간은 ‘기억’을 흉내 내려 컴퓨팅에 ‘메모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자주 불러내야 하는 정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핵심 데이터를 먼 저장소 깊은 어둠 속에 방치하지 않고, 입출력에 가까운 어디쯤—보다 빠르고 민첩하게 닿을 수 있는 자리, ‘메모리’라 불리는 공간에 따로 안치하는 것이다. 그곳에 보관된 정보는 주저 없이, 망설임 없이 호출된다. 다만 문제는, 그 메모리라는 것이 생각보다 협소하고, 또한 망실되기 쉬운 존재라는 데 있다. 연약하고 한시적인 기억의 포대. 그러고 보니, 인간의 기억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택한 기억 삭제는 마치 컴퓨터 메모리에서 데이터를 지우는 과정과 유사하다. IT 용어로 말하자면, 사람의 뇌에 저장된 기억이라는 데이터는 하드드라이브(깊숙한 저장소)에 담겨 있지만, 때로는 ‘메모리’(RAM)처럼 자주 호출해야 할 정보가 가까운 표면에 남는다. 문제는 깊이 숨겨진 기억을 호출할 때 시간이 지연되거나, 어디에 보관했는지 잊어버리면 존재 자체가 흔들린다는 사실이다. 라쿠나사는 이 모든 파편을 한 올 한 올 꺼내 삭제함으로써 ‘깊은 저장소’가 아닌 표층 기억까지도 영구 제거하려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아픈 기억이 삭제되어도 그 자리에 빈틈이 남아 더 깊은 그리움이 스며든다는 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되뇌는 생각, 반복되는 습관의 결 속에 스며든 기억들은 굳이 애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재생된다. 마치 오래된 책갈피처럼 어떤 사건의 문장을 열면, 그 순간의 감정과 풍경이 따라 올라온다. 하지만 애써 밀어냈던 것들, 꺼내기 싫어 고의로 묻어 둔 기억들은 점점 그 윤곽을 흐려간다. 오늘을 아프게 만드는 그 기억들, 가슴을 쑤시는 회상들—지워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쉽게 삭제해도 되는 걸까?
지금은 견디기 어려운 기억일지라도, 언젠가 다시 그것을 붙잡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면? 다시는 불러올 수 없게 된다면? 지워진 기억의 자리를 허공처럼 더듬으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사라진 이의 음성을 되감고 싶은 밤에 녹음 파일조차 남아 있지 않은 절망과 닮았다.
기억은 늘 선택의 경계에 놓인다. 가까운 메모리에 올려 두고 자주 떠올릴지, 아니면 깊은 무채색 저장소에 감춰둘지, 혹은 차라리 영구 삭제해 버릴지. 선택은, 언제나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기억이라는 이름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늘 우리 존재의 어디쯤에서, 마치 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감정처럼, 가장 불현듯한 순간에 돌아온다.
영화 속에서 기억을 지우는 방식은 단순한 데이터 삭제가 아니다. 지워야 할 대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것들—편지, 일기, 스케치, 선물, 함께 나눈 사소한 물건들까지—모두 수집하여 기억을 추적하고, 감정을 연상하게 만든다. 기억을 직접 제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의 윤곽을 따라가기 위해서다. 결국 지우려면 먼저 정확히 기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의 사랑, 이제는 곁에 없지만 여전히 자기 내부 어딘가에서 살아 있는 그 사람을 환기시키는, 감정의 단초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예감.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마음의 본질은,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이별이 굳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그것이 아프다고 해서 무작정 밀어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별 후에 밀려드는 추억들, 생활의 구석구석을 침투하는 기억의 자취들—그것들은 분명 힘겹고 번거로운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애써 지우지 않기로 한다. 기억이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생각이 날카로워지면 그대로 감내하기로 한다. 언젠가는 이 감정조차 희미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 그 희미해짐을 슬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 고통도 결국은 사랑이었다는 흔적일 테니까.
망각과 잊히지 않는 사랑, 새로운 사랑의 직조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편집과 색채, 음향의 재배치로 기억 삭제의 의식을 시각화한다. 꿈처럼 번지는 몽타주, 얼어붙은 색감으로 표현된 조엘의 고통, 그리고 클레멘타인의 붉은 머리칼이 화면 안에서 잠깐씩 다시 살아나는 순간은, 서사가 아닌 시간의 파편을 반복하며 관객에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시각적 재료들은 마치 프루스트가 말한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작은 자극에 의해 살아난다”는 기억의 ‘무의지적 회상’을 영화로 재현한 듯하다.
또한 이 작품은 사랑과 이별의 서사를 탈구조화한다. 통상적 플롯에서는 ‘만남—갈등—화해’의 기승전결을 기대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삭제—기억—재발견’의 순환이 반복된다. 조엘이 기억을 지워가는 과정은 일종의 역순 서사(backward narrative)처럼 기능하며, 관객은 삭제된 과거를 잊은 채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조우한다. 이는 타인의 기억이 아닌, 스스로가 붙잡은 연대와 애정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든다.
철학의 눈으로 볼 때, 영화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한 ‘이데아의 세계’와도 상응한다. 클레멘타인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니라 이상적인 ‘형상’이 된다. 그녀를 기억할 때마다 조엘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이미 실존을 넘어선, 불완전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사랑의 조각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거의 비어버린 클레멘타인의 방 안에서 둘은 서로의 이름을 추억처럼 읊조린다. 모든 기억이 삭제된 듯 보이지만, 그 대사는 “진짜로 지워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언의 선언이다. 한 줌의 애틋함은 메아리처럼 남아 있어, 관객은 화면 너머로 스며든 여운을 느끼게 된다. 이 여운은 단순한 이야기의 종결이 아니라, ‘기억이 품은 서정성’에 대한 문학적 계시다.
포프의 시가 묘사한 ‘영원한 햇빛’은, 결국 망각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 후에도 남은 사랑의 잔영을 말한다. 삶은 결코 깨끗한 창백함 속에 머물 수 없으며, 티끌 없는 햇빛마저도 그림자를 남긴다. 우리는 잊혀진 순간을 다시 떠올리며 “아픔을 품은 희망”을 간직한다. 이것은 니체가 말한 실존적 회귀에도 닿는다. 반복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자신과 마주하고,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껴안는 과정은 곧 ‘존재의 실천’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단순히 기억 삭제 기술을 다루는 SF 작품이 아니라, ‘기억의 문법’을 재구성하는 서사다. 영화는 기억의 파편들을 해체하고 재배치하면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기억을 지운 뒤에도, 당신이 사랑했던 것은 사라지지 않을까?” 이 질문은 마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서가처럼, 기억이라는 무한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결국, 사랑의 아픔을 지우고 싶은 욕망은 ‘온전한 존재’를 향한 갈망이자, 현재의 자아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은 갈망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한다.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사랑의 결을 찾아 새롭게 짜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불러와, 그 불완전함 속에서 비로소 자신과 화해하고, 타인과의 연대를 완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이야말로 <이터널 선샤인>이 제시하는 궁극적 서사—‘기억이 빚어낸 삶의 시학’—이다.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가, 정말 바라고 바라던 대로 누구더라도 한 번만 다시 만나게 되면 너무 늦지 않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 선한 밤에 보기 좋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