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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삶은 당신이 잠들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2016, Be with You)

by 박 스테파노

소아외과 전문의 수현(김윤석)은 캄보디아 의료봉사 도중 우연히 눈먼 노인에게서 검은 알약 하나를 받는다. 노인은 “이걸 먹으면 과거로 간다”고만 남긴 채 사라지고, 수현은 곧 두 가지 질문에 사로잡힌다. 한편으로는 “정말 가능한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나만 이 말을 듣게 되었을까?” 알약을 입에 넣은 순간, 화면은 바깥 풍경을 지우고 기차 철로 위로 절묘하게 전환된다. 순간, 카메라는 볕 아래 번들거리는 선로를 따라 롱테이크로 뒤로 물러나며, 시간이 아날로그 ‘면’ 위에서 디지털 ‘점’ 하나로 압축되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포착한다.


수현은 곧 과거의 자신(변요한)을 만나고, 연인 연아(최서진·김성령)의 미소를 처음 보았던 순간으로 돌아간다. 기억은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데, 이 점프는 곧 “한 순간”을 떼어내어 면 전체를 뒤튼 셈이다. 알약 열 개는 그 반복의 기회를 상징하지만, 반복을 거듭할수록 점마다 새겨진 수많은 면이 떨려 일어난다. 예컨대, 알약 둘째를 삼킨 뒤 연아와 부부의 미래를 꿈꿀 때, 우리는 딸 수아(박혜수)가 이미 다른 시간 속에서 태어나 마음속 울림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수아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선’이자 ‘면’이다. 점 하나만 바꾸면 선과 면 전체가 공명하며 무너진다.


의료 봉사 도중 노인은 '잠들지 못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말한다. AI Sora



점, 선, 면, 그리고 시간


“만약에…”라는 상상의 문이 열릴 때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흐름의 견고한 벽에 균열을 낸다. 상당수의 가상 창작 이야기들은 바로 이 ‘만약에’라는 가정 속에서 숨을 쉬며, 극작 평론가 스타니슬라브 스랍스키가 명명한 ‘Magic If’— 즉, ‘마법 같은 가정’을 발판 삼아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이끈다. 이 ‘마법적 가정’은 문학과 영화가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품게 하는 원천이 된다. 시간여행은 단순한 플롯 장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인간 존재가 부딪치는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무언의 반항이며,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 사이에서 허우적대는 욕망의 은유다.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미래와 과거를 넘나드는 여정은 단순한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아이러니, 곧 나와 내가 아닐 수도 있는 ‘나’ 사이의 간극을 짚는다.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사랑과 시간의 비대칭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파편적 연대를 그리며, <나비효과>는 작은 변화가 거대한 결과를 낳는 카오스의 세계를 펼쳐낸다. 이처럼 시간여행은 ‘무엇이었을까’ 혹은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라는 인간 근원적 질문들을 시각화하는 신화적 장치다. 또한, <어바웃 타임>, <이프 온리>, <사랑의 블랙홀>과 같은 영화들은 시간여행이라는 직접적 도구 대신,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라는 내밀한 정념을 마법의 향수로 치환한다. 시간은 마치 사랑의 무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악기처럼, 그 음조가 변형될 때마다 현실도 함께 뒤틀린다. <이터널 선샤인>이나 <첫 키스만 50번째>처럼, 직접적인 시간여행 없이도 기억과 상실, 반복과 재생이라는 내러티브는 시간의 틈새를 여행하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다시 돌아가 나를 증명하면... AI Sora


시간을 되돌리고, 잃어버린 순간을 다시 붙잡고 싶어 하는 이 욕망은 문학적·영화적 서사의 영역을 넘어 일상 속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내면 풍경이다. 마치 무심코 멍하니 있을 때 떠오르는,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는 작은 저항. 이는 시간의 불가역성, 즉 돌이킬 수 없는 흐름 앞에서 인간이 감히 내미는 작고도 거대한 손짓이다. 시간은 우리를 억압하지만, 그 억압 속에 자라나는 저항의 가능성—그 ‘마법 같은 가정’—이야말로 창작의 불꽃이며 존재의 신비가 아닐까.


이렇듯 시간여행을 둘러싼 이야기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에 관한 미학적 질문이다. 시간의 흐름과 인간의 욕망이 만나는 그 자리에서, 문학과 영화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며, ‘만약에’라는 마법적 문장을 열고 우리를 초대한다. 시간의 거대한 권능과 무서움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묻는다. “만약에…”라는 질문 속에 감추어진 진짜 마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마법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다시 보고, 듣고, 느끼게 하는가?


시간을 되돌리고, 지나간 순간을 다시 붙잡고자 하는 상상은 결코 문학이나 영화의 한 장르적 장치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멍하니 앉아 무의식의 구석에서 불쑥 떠오르는, 우리네 일상의 가장 고요하고 은밀한 커리큘럼에 이미 고정된 메뉴다. 우리 모두가 잠시 멈춰 선 그 순간, ‘만약에’라는 숨죽인 물음표를 내뱉으며,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맞서는 작고도 꿋꿋한 저항의 형상이다. 시간은 그만큼 거대하고 무자비하다. 우리를 가로막는 벽이며, 누군가에게는 압도적인 권력이다. 그렇기에 시간은 거역할 수 없고, 때로는 그 무서움 앞에서 숨이 막히는 존재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절박한 감각은, 24시간을 86,400초로 쪼개어 분할하는 오늘날 현대인의 삶 속에서 더욱 예리해진다. 과거의 사람들이 시간이라는 연속성을 아날로그적 감각으로 받아들였다면, 현대인은 디지털이라는 분절된 단위 속에서 시간을 인식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를 경험하는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말한다. 아날로그 시계는 시침, 분침, 초침이 끊임없이 원을 돌며 시간을 연속적인 ‘면’으로 펼친다. 시간은 매끄러운 흐름이며, 그 흐름 안에서 우리의 존재도 물결처럼 퍼져간다. 반면 디지털 시계는 일정한 점들의 배열, ‘끊어진 순간’들의 집합이다. 시간은 점과 점 사이의 거리로, 분리된 단위로 인식된다. 이로써 시간은 ‘흐름’이 아닌 ‘측정’이 되고, 그 측정은 다시 삶을 세분화하고 단절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시계의 바늘이 움직이는 방식 이상의 의미를 품는다. 그것은 시간의 ‘감각’이 어떻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세계 인식에 영향을 끼치는지에 관한 미학적·철학적 문제다. 시간의 흐름을 ‘면’으로 감각하는 아날로그적 세계는, 마치 한 편의 시(詩)처럼 연속성과 조화를 내포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깊이를 경험한다. 반면 디지털적 시간 인식은 세계를 ‘조각난 퍼즐’처럼 경험하게 만들고, 그 퍼즐 조각마다 우리는 다시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시간 앞에서 인간은 늘 작아진다. AI Sora


결국, 시간의 불가역성에 맞서는 ‘만약에’의 상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선 위에서 울리는 인간 존재의 내밀한 노래인 것이다. 시간은 무섭고 막강하지만, 그 거대한 힘 앞에서 우리는 ‘마법 같은 가정’을 펼치고, 시간의 틈새를 헤집으며 존재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시간의 주인이 되지 못한 채, 시간을 품에 안고 서성이는 여행자가 된다. 그 여행 속에서 비로소, ‘되돌림’과 ‘다시 고침’의 욕망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시적 저항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디지털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면’이 아니라, 오직 ‘점’으로서의 순간이다. 0과 1의 이분법적 컴퓨팅 시퀀스가 그 대표적 형상인데, 멀리서 보면 하나의 선이나 점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모든 시간은 그저 독립된 점들의 집합일 뿐이다. 이처럼 시간의 본질을 ‘점’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과학과 컴퓨팅 공학의 근본 개념에서 비롯된다. ‘시간여행’이라는 상상 역시 바로 이 시간에 대한 인식 방식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대면하는 '나'에 대하여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기록하고 전달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중대한 섭리를 최대한 보완하고자 탄생한 기술적 사유의 산물이다. 디지털은 ‘점’, ‘선’, 그리고 어쩌면 ‘면의 일부분’으로 아날로그를 재현하려 한다면, 아날로그는 ‘면’, ‘부피’,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온몸으로 품고 있다. 다시 말해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읽고, 기록하고, 해석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이며, 그것 없이는 아날로그의 풍부한 시간성을 포착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흔히 오해하는 ‘디지털 대 아날로그’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적이 아니라, 가장 밀접한 ‘연관어’이며, 그 서로의 존재 조건을 이루는 쌍둥이처럼 이해되어야 한다. 강조하여 반복해 말하듯, 이 두 시간 인식의 방식은 서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서로를 통해 존재의 깊이와 시간을 재해석하는 미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


시간여행의 상상도 이 ‘점’과 ‘면’의 시간 개념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싹튼다. 한 점의 시간으로 환원된 디지털 세계 속에서 과거를 건드리는 순간, 그 점과 점 사이를 이어주는 아날로그적 시간의 흐름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래서 시간여행은 곧 ‘점’과 ‘면’의 대화, 불가능한 두 시간의 접속을 상상하는 미학적 실천인 셈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무수한 점들로 해체되면서도, 다시 면으로 이어져 삶의 무늬를 짓는, 끝없이 유동하는 시적 구조로 우리 앞에 펼쳐진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시간의 이중 구조를 영화미학적으로도 정교하게 드러낸다. 캄보디아의 정오 햇살은 묽은 노을처럼 수현의 얼굴을 스치고, 다음 장면에서 서울의 밤은 냉정한 네온사인처럼 치환된다. 이 대조는 아날로그 시간(시침·분침의 흐름)이 가진 ‘면적’을, 디지털 시간(순간의 촬영 컷과 편집 컷 사이사이)을 찰나의 ‘점’으로 뒤집는다. 이때 카메라는 두께감 있는 색조를 사용해 과거의 따스함과 현재의 금속성을 대비시키며, 화면 전체를 하나의 서정적 캔버스로 확장한다.


어제의 나를 오늘의 내가 설득할 수 있을까? AI Sora


철학자 니체가 “영원회귀”라 부른 것처럼, 수현은 반복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내가 이 점, 이 순간을 반복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곧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누구일까?”라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이때 그의 얼굴에 비치는 미세한 떨림은, 마치 프루스트의 ‘무의식적 회상’처럼 무심코 터져 나온 기억의 파편이다. 한 순간의 점프가 수많은 면을 뒤흔들고, 그 뒤흔듦은 다시 점 하나를 강조하며 우리를 한없이 흔든다.


수현은 처음 네 알약을 삼키고 연아의 비극을 막으려 하지만, 딸 수아와의 인연이 사라질수록 고통이 짙어진다. 결국 그는 점 하나를 위해 면 전체를 버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우리는 “지울 수 없는 것”이란 오히려 더 오래 기억 속에 머문다는 역설을 본다. 절대적인 망각이란 없으며, 지워진다고 믿은 기억은 더욱 깊은 추억의 층위를 드러낸다.



‘딱 한 번만’이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


한 알 또는 열 알의 기회가 주어져도, 수현은 매번 고개를 젓는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사랑을 다 회복할 수는 없다. 그는 연아와의 재회를 갈망하면서도 “딱 한 번만”이라는 주문이 가져올 불안과 모순을 동시에 안고 있다. 빛바랜 영화 속 스틸컷처럼, 추억은 선명했다가도 이내 필름이 끊긴 듯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난다. 이 과정을 통해 수현은 자신이 원한 것은 과거의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낼 ‘의지’였음을 알게 된다.


지나온 시간들이 채우고 있는 ‘면’의 풍경을 무시한 채, 단지 ‘점’ 하나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은 깊은 오역이다. 시간을 ‘점’으로 환원하는 순간, 과거의 그 한 점이 변형되는 것만으로도 이후에 시침이 유영하는 모든 면들이 뒤흔들리고 만다. 그렇게 지나온 30년은 한순간에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풀리고, 다시는 원래대로 묶이지 않을 위험에 처한다. 30년 전의 연아를 찾아 나서면, 지난 20년 동안 삶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딸 수아(박혜수)의 존재가 마치 바람처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아를 지키고자 애쓰는 순간, 연아와의 인연은 그 어떤 이유로도 단절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삶은, 캄보디아의 한 묘한 노인이 말했듯, 사람이 잠들지 못하는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선명한 결정을 요구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 마음이 흔들리며, 그 무엇도 쉽게 ‘결정’되지 않는 아득한 밤들이다. 그렇게 시간은 ‘점’과 ‘면’의 대립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시험한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쪽이 사라지고, 우리는 그 끝없는 떨림 속에서 잠 못 이루는 존재로 남는다. 시간의 미학은 바로 이 ‘결정 불가능성’과 ‘불가역성’의 지점에서 태어난다.


산다는 것은 친구와 나누는 기억 한조각의 여운. AI Sora


이 시간의 부서진 면들과 반짝이는 점들은 한 편의 산문시처럼, 우리 내면 깊숙이 흐르는 존재의 진동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재구성되고, 때로는 무너지는 존재의 시간을 체험한다. 그 체험이 바로 인간 존재의 시적 깊이이자, 시간여행이라는 허구적 상상이 현실과 만나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다.


예술비평가들이 종종 말하듯, 사랑의 진정한 미학은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남겨진 여운”에 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마지막 음조에서 여전히 진동을 잃지 않듯, 수현이 남긴 후회와 다짐은 그가 알약을 내려놓는 순간에도 화면 너머로 떨어지지 않는다. 알약 마지막 개를 두고 망설이는 그의 얼굴을 롱테이크로 잡는 편집은, 관객에게 여운을 오래도록 남긴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행복했을 때만 생각해.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져”


영화의 엔딩은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묘한 ‘불완전함’을 남긴다. 수현이 딸 수아의 손을 꼭 잡고 숲길을 내려오는 장면은 로망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를 견디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연아의 존재는 여전히 기억 속에 먼 그림자처럼 살아 있지만, 그는 “그 그림자가 남긴 빛에 의지해” 새로운 인생을 스스로 쓰기로 다짐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의 각성을 닮았다.


살아온 시간만큼 살아낸 자가 백 살에 이르러도, 가끔은 시간을 되돌리는 허망한 공상에 빠진다. 그 공상의 무대는 대개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운 순간, 혹은 가슴 한켠에 아쉬움을 품은 만남과 이별의 자리다. 몇 달 전, 몇 해 전, 그리고 어느덧 30대의 시절, 20대 청춘의 어두운 골목을 지나 입시와 입사의 뜨거운 문턱까지, 시간은 점점 더 뒤로 달려간다. 그렇게 되돌아가는 마음의 역진은 마침내 자신의 탄생조차도 의심하는 끝에 이르러, 이내 무거운 회의와 불안을 남긴다. 그리하여 이 모든 시간여행의 공상은 결코 유쾌하지 않은 고독한 결론으로 귀결된다.


이 회귀의 여정은 시간의 무한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자아의 고독한 방황이다. 부끄러움과 후회가 낱낱이 흩어진 시간의 파편들 사이로 무심히 미끄러지는 기억의 강물, 그 끝에 도달한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는, 마치 오래된 시계의 태엽이 느슨해져 멈추려는 듯한 순간이다. 이 불가항력적인 역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를 묻고, 다가올 시간의 무게를 새삼 가늠한다. 결국, 시간은 우리에게 꿈틀대는 생의 고통이자, 잊을 수 없는 시적 화두로 남는다.


“지금-여기, 내가 서 있는 이 순간”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지만, 곧 새로운 점프가 될 수 있다. 알약 없이도 우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새로운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점을 찍는다. 그 점이 만들어내는 선과 면 위에서, 사랑은 여전히 다시 쓰여질 수 있는 미학이자 실존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묻는다. “지금-여기에 머물러도, 나는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질문은, 잠들지 못할 때 비로소 벌어지는 우리 삶의 비밀스러운 서곡이 된다.


고백은 시간의 무게와 상처를 고요히 품은 시(詩)다. 그 무거운 무게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의지, 흔들리는 마음의 끝에서 발견하는 사랑의 가능성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내면의 울림처럼 우리를 감싼다. 삶의 어느 순간에도 ‘사랑’은 우리를 붙드는 마지막 끈이자, 시간의 흐름을 아름답게 새기는 서정적 기호로 남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조용히 속삭인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AI Sora


타고난 사랑꾼이라 믿었건만, 몇 번 되지 않은 사랑의 결말을 마주할 때마다 무겁고 짙은 그림자가 마음 깊숙이 내려앉는다. 지나온 시간들은 가끔 머리를 쥐어짜듯 아프고, 가슴 한켠을 무겁게 누르는 무게로 다가온다. 그 무거움에 시간은 어느새 가속을 붙이고, 주름 자글한 중년의 문턱을 넘어, 어느덧 그 한가운데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해가 바뀌고 나이가 늘어날수록 두려움은 점점 커진다.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며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 이유를 ‘사랑함’이라는 단어로 온전히 붙들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거울 속 자신에게 던져본다. 시간이 흘러도 그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 이 영화가 무언의 동조를 건네온다. 어쩌면 그 영화는,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인지도 모른다. 먼 훗날, 오늘 이 순간이라는 ‘점’에 돌아오고 싶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는 조용히 답한다.


지금, 여기, 바로 그대—사랑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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