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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기도의 흰 틈

늦은 아침 생각의 시창작 06

by 박 스테파노

병든 몸은 세상에 화낼 힘조차 잃었다


남은 것은 피곤이라는 이름의 바람, 나는

그 바람 속에 기도를 놓는다


누구도 듣지 못할 가난한 기도

풀잎이 스치듯 흔적도 없이 스며들기를

여름이 끝나

계절의 죽음이 가까이 앉아, 그래서인지

기도는 더 또렷하다


이 계절에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나는

가난하게 기도한다


사랑 하나로 가난을 견디며

무게를 비워낸 흰 구름처럼

햇빛에 스러지는 잎맥처럼, 내 기도는

잡히지 않을만큼 희미하다


희미하기에 더 오래 머

뿌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식물은 자라듯

숨은 기도는 아무도 모르게 스며들어

누군가의 지친 어깨 위에 앉는다


여름 끝

죽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도, 나는

작은 기도를 내어놓는다


덩굴처럼 손을 뻗어 빛을 더듬듯이

사랑을 위한 가난은 비어 있기에, 더

투명하다


가난한 기도.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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