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과 벙어리 목동, 그리고 로즈마리
침묵으로 아버지가 된 사람 — 요셉과 성탄의 윤리
성탄의 서사는 늘 소리로 충만하다. 하늘에서는 천사가 노래하고, 들판에서는 목자들이 달려오며, 먼 나라에서 별을 좇아온 이방의 현자들이 질문을 던진다. 성탄은 말해지고, 전해지고, 반복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환한 언어의 중심에는 끝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한 사람이 서 있다. 요셉이다. 그는 성탄의 핵심 인물이면서도, 가장 조용한 존재다. 복음서 어디에도 그의 음성은 기록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침묵뿐이다.
마태오 복음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의로움은 설명되거나 증명되지 않는다. 요셉의 의로움은 문장이 아니라 선택으로 드러난다.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 그는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다. 해명을 청하지도, 분노를 앞세우지도 않는다. 그가 택한 길은 ‘조용히 물러나는 길’이었다. 공개적 파혼이 허용되던 시대에, 그는 침묵을 선택함으로써 한 여인의 몸과 명예를 동시에 지키려 한다. 요셉의 윤리는 처음부터 말의 문제가 아니라, 거리와 방향의 문제였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오복음 1장 24절- 대림4주일 복음
꿈을 통해 주어진 답 앞에서도 요셉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꿈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해석된 삶을 산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도망쳐야 할 때도, 다시 돌아와야 할 때도 그는 묻지 않는다. “왜 나인가”,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은 그의 입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다. 요셉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결단이다. 오리게네스가 말했듯, 이는 신비 앞에서 언어가 스스로 물러서는 태도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뜻에 가깝다.
요셉의 침묵은 종종 오해된다. 그는 이야기의 주변부로 밀려나 배경처럼 취급된다. 그러나 그 침묵을 오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무력함이 아니라 중심을 비워내는 용기에 가깝다. 성탄의 사건은 누구도 완전한 주인공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아이조차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 채 울음으로만 존재를 알린다. 그 곁에서 요셉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탄의 리듬에 가장 깊이 동조한다.
외경인 「야고보 원복음서」는 요셉의 불안을 더욱 적나라하게 전한다. 그는 늙은 몸으로 젊은 여인의 임신을 책임져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고,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당혹해한다. 그러나 그 당혹은 곧 책임으로 옮겨간다. 요셉은 끝내 자신을 해명하지 않는다. 설명 대신 동행을 택한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황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무게를 고스란히 떠안는 일이다.
요셉의 침묵은 오늘의 세계에서 더욱 낯설다. 우리는 언제나 입장을 요구받고, 설명을 강요받으며, 침묵은 곧 방관이나 무책임으로 의심받는다. 그러나 요셉의 침묵은 방관이 아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가장 오래 머문다. 마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아이에게 이름을 부여하며, 위험이 닥치면 가장 먼저 길을 나선다. 말하지 않는 대신 그는 움직인다. 그의 침묵은 행동의 다른 이름이다.
성탄은 흔히 ‘기쁜 소식’으로 번역되지만, 그 기쁨은 소란이 아니라 깊은 정적에 가깝다. 마굿간은 환호보다 숨소리로 가득 차 있고, 밤은 노래보다 긴 침묵을 품고 있다. 요셉은 그 정적을 깨뜨리지 않는다. 그는 성탄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성탄이 자신을 통과하도록 내어준다. 그 침묵 속에서 요셉은 아버지가 된다. 혈연이 아니라 책임으로, 언어가 아니라 지속으로.
그래서 요셉은 오늘 우리에게 조용한 질문 하나를 남긴다.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야 책임질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곁에 설 수 있는가. 성탄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머물 수 있는지를 묻는다. 요셉은 말하지 않았지만 떠나지도 않았다. 그의 침묵은 지금도 성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말보다 먼저 책임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조용히 증언한다.
말보다 먼저 떨린 자리 — 벙어리 목동과 성탄의 시작
성탄의 장면은 대개 노래로 기억된다. 하늘에서는 천사가 찬미가를 부르고, 들판에서는 목자들이 응답하며, 교회는 세기를 건너 캐럴을 되풀이해 왔다. 성탄은 그렇게 소리의 기억으로 축적된 사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래된 유럽의 성탄 연극, 이른바 미스터리 플레이의 한 장면에는 이 합창의 질서에서 살짝 비켜 선 인물이 등장한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목동이다. 그는 노래하지 못하고, 외치지 못하며, 기쁨을 언어로 증언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성탄의 가장 안쪽에 서 있다.
이 전승은 정경의 문장 어디에도 직접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중세 이후 유럽 전역에서 반복 재현되며, 성탄의 감각을 몸으로 전해 온 이야기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찬양을 준비하는 동안, 그 소년은 침묵 속에 남아 있다. 기쁨을 알지만 말로 옮길 수 없는 존재.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유 앞에서 울음을 삼키고, 손에 쥔 작은 피리를 조심스레 불어 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혀가 풀리고 노래가 시작된다.
이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는 기적의 장면 그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시간, 말하지 못한 침묵 때문이다. 벙어리 목동은 결핍된 인물로 등장하지만, 동시에 가장 진실한 증인이다. 그는 천사의 말을 반복하지 않는다. 교리의 문장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말할 수 없음의 상태로 성탄 앞에 선다. 이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조건이다. 언어를 갖지 못한 몸이 어떻게 기쁨에 응답하는지를 묻는 자리다.
중세 성탄 연극에서 이 소년은 대개 가장 어린 인물로 설정된다. 사회적 발언권도, 신앙적 권위도 없는 존재. 그럼에도 그는 구유 앞에서 가장 먼저 감응한다. 눈물은 말보다 앞서 흐르고, 숨결은 문장보다 먼저 떨린다. 여기서 피리는 중요하다. 피리는 언어가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교리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호흡을 소리로 바꾼다. 몸의 진동이 곧 음악이 된다. 벙어리 목동의 피리는, 언어 이전의 찬양이다.
이 전승은 성탄을 다시 묻게 한다. 하느님의 탄생은 왜 말이 아니라 울음으로 시작되었는가. 왜 구원은 명제가 아니라 숨결과 체온으로 먼저 다가왔는가. 벙어리 목동은 이 질문에 몸으로 응답한다. 그는 말하지 못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성탄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성탄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감응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혀가 풀리는 순간은 기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장면이 앞에 있다. 말하지 못한 채 울고, 피리를 불던 시간. 그 시간 동안 그는 이미 충분히 참여하고 있었다. 찬양은 언어의 소유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 진심은 언제나 문장보다 먼저 도착한다. 중세의 이 전승은 그렇게 속삭인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말 잘하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떨리는 존재라고.
이 이야기는 말하지 않는 요셉의 침묵과도 조용히 호응한다. 요셉이 설명하지 않음으로 책임을 감당했다면, 벙어리 목동은 말하지 못함으로 기쁨을 더 순수하게 건넨다. 둘 모두 언어의 결핍 속에 서 있지만, 그 결핍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충만에 가깝다. 성탄은 언제나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천사의 말이 끝나는 자리에서, 인간의 말은 종종 멈춘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몸이 말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성탄은 지나치게 많은 말로 둘러싸여 있다. 의미를 설명하고, 메시지를 정리하고, 감동을 요약한다. 그러나 벙어리 목동의 이야기는 우리를 한 걸음 멈춰 세운다. 우리는 너무 빨리 말하려 들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 울어야 할 자리를 서둘러 건너뛰고 있지는 않은가. 성탄은 해석 이전에, 숨을 고르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구유 앞에서 소년이 불던 피리는 완성된 노래가 아니었을 것이다. 서툴고 가늘며,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충분했다. 언어가 풀리기 전에도 이미 찬양은 시작되고 있었다. 성탄은 그렇게 온다. 말이 풀리기 전에, 혀가 아니라 심장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으로. 벙어리 목동은 그 오래된 진실을 지금도 성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조용히 연주하고 있다.
그늘이 되어 남은 잎 — 루피너스와 로즈마리의 성탄 이후
성탄 이후의 시간은 흔히 고요로 오해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다음 장면은 곧장 이동과 도주, 숨김과 긴장의 서사로 접어든다. 헤롯의 폭력 앞에서 성 가족은 길을 떠난다. 별과 노래의 밤은 지나가고, 낮의 먼지와 밤의 공포가 겹친다. 이 피난의 시간에 덧붙여진 전승들 가운데, 식물의 언어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화려한 루피너스와 작고 향기로운 로즈마리의 대비다.
전승 속에서 루피너스는 풍성한 꽃을 피운다. 햇빛을 받아 빛나고, 먼 곳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반면 로즈마리는 키가 낮고 잎이 푸르다. 화려하지 않으나 향을 지니고, 바람에 쉽게 흔들리되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군사들이 다가올 때, 루피너스의 화려함은 시선을 끌어 위험을 부르고, 로즈마리의 푸른 잎은 그늘을 만들어 가족을 숨겨준다.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위태로움이 되고, 숨는 성실함이 보호가 되는 순간이다.
이 이야기는 식물의 성정을 빌려 윤리를 가르친다.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살리는가’를 묻는다. 성 가족을 구한 것은 눈부신 색채가 아니라, 낮은 자리의 지속이었다. 로즈마리는 길 위에서 화려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잎을 내어 그늘을 만들고, 향으로 흔적을 남긴다. 전승은 조용히 말한다. 구원은 언제나 드러나는 방식으로만 오지 않는다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장면에서, 로즈마리는 성모의 옷을 말리는 자리로 불린다. 그 위에 얹힌 옷의 물기가 마르며, 잎 사이로 푸른 꽃이 핀다. 향이 생긴다. 이 변화는 보상의 서사로 읽히기 쉽지만, 전승의 결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꽃과 향은 ‘보답’이 아니라 ‘표식’에 가깝다. 이미 헌신했던 존재가, 비로소 기억 속에서 이름을 얻는 순간이다. 드러나지 않던 역할이 시간이 지나 의미로 환원된다.
로즈마리의 푸른색은 성탄의 색채와도 닿아 있다. 밤의 검은색과 눈부신 금색 사이에서, 푸른색은 기다림과 보호의 색이다. 급하지 않고, 소리 높이지 않으며, 오래 곁에 머무는 색. 성탄의 중심에 있는 아기는 말하지 못하고, 요셉은 말하지 않으며, 로즈마리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침묵의 연쇄 속에서 구원은 진행된다. 언어와 과시가 아니라, 지속과 곁섬으로.
루피너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화려함 자체가 죄는 아니다. 문제는 위기의 순간에 화려함이 맡게 되는 역할이다. 드러남이 보호가 되지 못할 때, 오히려 위험을 증폭시킨다. 전승은 식물의 대비를 통해 인간의 태도를 비춘다. 우리가 선택하는 빛은 어떤 빛인가. 멀리서 보이는 빛인가, 가까이서 그늘을 만드는 빛인가.
이 이야기는 오늘의 삶에도 오래 남는다. 우리는 종종 성과와 가시성을 향해 나아가고, 말해짐과 노출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기의 시간에 필요한 것은 다른 종류의 미덕일지 모른다. 눈에 띄지 않게 자리를 내어주고, 이름 없이 책임을 감당하며, 향처럼 남는 일. 로즈마리는 그렇게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동안 가장 많은 것을 지켜낸다.
성탄은 탄생의 축제이면서, 동시에 보호의 윤리다. 태어난 생명이 살아남도록 돕는 수많은 손길과 그늘이 필요하다. 전승 속 로즈마리는 그 그늘의 상징이다. 화려하지 않되 사라지지 않고, 낮게 있으되 향을 잃지 않는다. 성 가족이 지나간 길목에서, 로즈마리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잎을 내어주고, 바람을 가른다.
어쩌면 성탄의 미학은 여기서 완성된다. 드러나는 영광이 아니라, 숨겨진 헌신. 박수보다 그늘, 환호보다 지속. 로즈마리의 푸른 잎은 지금도 묻는다. 우리는 어떤 식물로 이 계절을 건너고 있는가. 눈에 띄는 꽃으로, 아니면 누군가를 숨길 수 있는 잎으로. 성탄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늘을 만들 수 있는지를 조용히 묻고 있을 뿐이다.
말하지 않는 것들의 연대 — 성탄을 지탱한 침묵의 의미
성탄은 흔히 ‘선포의 사건’으로 기억된다. 하늘의 사자가 나타나 탄생을 알리고, 별이 길을 가리키며, 기쁨의 소식이 세상을 가로지른다. 그러나 그 화려한 고지(告知)의 이면을 오래 들여다보면, 성탄은 오히려 말해지지 않은 것들의 연합으로 완성된다. 소리는 있었으되 중심은 아니었고, 빛은 있었으되 길의 전부는 아니었다. 성탄의 의미는 고지된 탄생 그 자체보다, 그 탄생을 끝까지 지켜낸 침묵과 낮음, 그리고 숨겨진 헌신에 더 가까이 닿아 있다.
요셉은 그 첫 자리에 서 있다. 그는 천사의 고지를 받지만, 그것을 전파하지 않는다.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견뎠기 때문이다. 요셉의 삶에서 성탄은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수행의 길로 남아 있다. 그는 묻지 않고 떠나며, 항변하지 않고 보호한다. 아이의 정체를 말로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아이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의 궤적을 조용히 틀어 놓는다. 예수의 탄생은 고지되었으나, 그 길은 요셉의 침묵 위에서만 열렸다. 말하지 않는 아버지, 그러나 끝내 떠나지 않는 보호자. 성탄은 이렇게 ‘말하지 않음으로 책임지는 인간’의 형식을 처음으로 드러낸다.
그 길의 시작에는 가장 낮은 존재가 함께한다. 베들레헴 들판의 벙어리 목동이다. 그는 소식을 들었으되 노래할 수 없고, 기쁨을 느꼈으되 말로 증언하지 못한다. 중세의 성탄 연극은 이 소년을 통해 묻는다. 언어를 갖지 못한 존재도 성탄에 참여할 수 있는가. 전승의 대답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가 가장 먼저 응답한다. 울음과 숨결, 서툰 피리 소리로. 혀가 풀리기 전에도 이미 찬양은 시작되고 있었다. 성탄은 이해의 축제가 아니라 감응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자리, 가장 말 없는 존재가 그 중심에 닿는다.
그리고 성탄은 곧 피난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고지는 끝났으나 길은 험하다. 헤롯의 폭력 앞에서 성 가족은 숨어야 했고, 그 숨김의 순간마다 이름 없는 조력들이 필요했다. 전승 속 로즈마리는 그 조력의 상징이다. 화려하게 피어 시선을 끄는 루피너스가 아니라, 낮고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드는 식물. 로즈마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생명을 지킨다. 성모의 옷을 말려 주던 그 잎 위에서 꽃이 피고 향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헌신이 보상받았다는 서사라기보다 이미 이루어진 헌신이 뒤늦게 기억되는 방식에 가깝다. 그리스도의 삶은 언제나 이런 로즈마리들 위를 지나간다. 이름 없이, 기록 없이, 그러나 없었다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던 존재들.
요셉, 벙어리 목동, 그리고 로즈마리. 이 세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하나의 윤리로 수렴한다. 성탄은 중심에 서는 법이 아니라, 중심이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서는 법을 가르친다.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머무는 능력, 드러나는 신앙이 아니라 지속되는 책임. 예수의 탄생은 하늘에서 고지되었으나, 그 길은 인간의 침묵과 낮음과 숨김 위에서만 가능했다.
오늘의 성탄은 너무 많은 말과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의미를 설명하고, 메시지를 요약하며, 감동을 전시한다. 그러나 성탄의 본질은 여전히 말하지 않는 요셉의 걸음 속에 있고, 노래하지 못한 목동의 눈물 속에 있으며, 그늘을 내어준 로즈마리의 잎 사이에 있다. 성탄은 묻는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 고지를 전하는 자인가, 길을 감당하는 자인가. 빛나는 꽃인가, 아니면 누군가를 숨길 수 있는 잎인가.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서 드러난다. 하느님은 말로 오지 않았다. 아기는 울음으로 왔고, 그 울음은 수많은 침묵과 헌신 위에서만 살아남았다. 성탄은 기념할 사건이 아니라, 반복해야 할 태도다. 말하지 않되 떠나지 않고, 낮아지되 사라지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되 끝까지 곁에 머무는 것. 그 오래된 윤리는 지금도 성탄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소리 없이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