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종의 투병기
2023년 12월 28일
눈이 부셨다.
세상이 지나치게 환했다. 마치 백라이트닝이 고장 난 텔레비전 화면처럼, 명암의 조절을 잃은 채 흰빛만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 과도한 밝음 속에서, 나는 이미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던 원룸의 천정은 기억 속에서 금세 사라졌고, 대신 좁고 단단한 공간이 몸을 감쌌다. 차 안이었다. 귀를 세우려 애썼다.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들려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이 먼저 닿았다.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의식은 자꾸만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BP가 불안정해요. 산소 포화도가 떨어져 있으니 산소를 달겠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그 말은 설명이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웠다. 코로 들어온 투명한 튜브, 손가락을 집어 문 작은 기계. 그제야 알았다. 나는 이미 ‘환자’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구급차는 멀리 가지 않았다.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이라는 말이 공기처럼 흘렀고, 침상은 미끌리듯 이동했다.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 겹쳐지는 발걸음, 동시에 쏟아지는 말들. 그 모든 소음 위로 어지럼이 한 겹 더 포개졌다. 혼이 있다면, 육체를 빠져나와 침상 아래로 가라앉고 있을 것 같았다.
“멜라니아(혈변)를 일주일 동안 보셨고, 토혈도 오늘 아침에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맥이 약하고 산소포화도 떨어졌는데 최근 한 달 동안 복통에 소화부진이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고’라는 말 뒤에 무엇이 붙을지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접속사 하나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문장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고 있다는 느낌만이 또렷했다. 내 손을 잡은 아내의 체온이 희미해질 즈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사고가 아니라, 삶의 문법이 바뀌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 과도하게 밝은 세계가, 나를 환하게 비추는 빛이 아니라 하얀 현기증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응급 구조사와 의료진의 대화는 떠나간 기차처럼 점점 멀어졌다. 내 손을 꽉 쥔 아내의 온기도 희미해졌다. 졸음인지 기절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무기력이 큰 파도처럼 덮쳐왔다. 힘을 내야 할 것 같았지만, 힘을 내기 싫을 만큼 애매한 귀찮음이 자리를 잡았다. 응급실에 실려 온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무력감은 낯설었다.
응급실 가장 안쪽 침상에 누웠을 때, 시간은 이미 정상적인 속도를 잃고 있었다. 팔에는 정맥 라인이 잡혀 있었고, 수액은 투명한 속도로 내 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의료진은 말수가 줄었고, 대신 움직임이 빨라졌다. 채혈을 위해 바늘이 또 다른 팔에 들어왔고, 곧 CT 검사가 있을 거라는 말이 덧붙었다. ‘잠시’라는 말은 응급실에서는 늘 불확실한 부사였다.
고개를 돌리기 어려워 눈동자만으로 주변을 살폈다. 침대 발치에는 ‘고위험군-낙상주의’라는 노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저 문구가 지금의 나를 지칭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실감 나지 않았다. 주변 침상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응급실이 늘 붐빈다는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 현실은 이렇게 뜻밖에 고요했다.
이 고요 속에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응급실 유랑이 다반사라더니, 여유롭기만 하군. 여하튼, 보도나 미디어는 늘 블러핑이구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몸은 분명 비상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머리는 여전히 세상만사를 논평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기 위한 오래된 습관이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농담이나 훈수로 거리를 벌려 두려는 반사적인 몸짓.
그러나 그 거리감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내의 눈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연신 “괜찮아”를 반복하던 그 표정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제야 현실이 초점을 되찾았다. 나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한 장면 전체가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몸이 먼저 도착한 진실
젊은 의료진이 다가와 코로 튜브를 밀어 넣었다. 전공의인지 수련의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의 손놀림은 단호했다. “꿀꺽꿀꺽 침 삼키듯이 삼켜 주세요.” 말은 간단했지만, 몸은 잘 따르지 않았다. 겨우 위까지 내려간 튜브를 통해 앰부 펌프질이 시작되자, 찬 기운이 뱃속을 채웠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눈앞에 놓인 커다란 비커에는 옅은 적갈색이 번졌고, 바닷속 해초처럼 기다란 무안가가 소용돌이치며 흔들렸다.
“마지막 식사는 미역국 드셨나 봐요?
출혈은 일단은 멈춘 것 같은데 정확한 검사를 위해 내시경 검사가 꼭 필요합니다. 진정 내시경은 비보험이지만, 현재 상태를 고려해 가능하시면 비수면으로 진행하시죠. 괜찮겠습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는 늘 그렇게 작고 조용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뒤에 따라오는 생각은 결코 작지 않았다. 비용이 머릿속을 스쳤다. 십 수만 원이라는 숫자는 진단명보다 먼저 다가왔다. 그렇다고 검사를 거부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몸은 이미 선택의 여지를 남겨 두지 않고 있었다.
묶여 있는 동결 자산, 미동도 없는 계좌, 끼니를 겨우 이어 가는 생활, 수개월 밀린 숙소 대금. 병원비는 공단 대납이나 추후 후납으로 가능하다는 경험적 기억에 기대어, 일단 원인을 찾고 나중을 도모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생존은 늘 이렇게, 가장 하수의 방식으로 먼저 결정된다.
그 사이 응급실의 공기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한산하던 공간에 의료진의 움직임이 잦아졌다. 혹시 나 하나 때문일까 하는 생각은 과장처럼 느껴졌지만, 곧 현실이 되었다. 또 다른 의사가 다가와 다소 격앙된 어조로 질문을 쏟아냈다.
“환자 분! 검진받으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최근 체중감소, 발한, 오심, 현기증 같은 것들을 느끼셨다면서 병원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나 봐요?
강직척추염 진료는 왜 중단하셨어요?
일반 의약품 진통제 말곤 드시는 약제는 없으신가요?
지금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시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방치한 거예요?”
방치라.
몰아치는 질문은 기소를 앞둔 검사의 신문처럼 들렸다. 내 형편이, 내 상황이, 내 여유가 병원 진료를 우선순위에 둘 수 없었다는 구차한 변명이 가슴 밑에서 일렁였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력이 부족해서였을 수도, 몰아붙이는 질문 속에서 틈을 찾을 기민함을 오래전에 잃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어진 말 한마디가, 슬로 모션이 걸린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전두엽을 후려쳤다.
“혈액수치 중 적혈구 수치인 헤모글로빈 수치는 일반 성인 남성의 절반도 안되요. 혈변, 토혈 증상으로 보아 내출혈이 의심되니 추후 검사로 찾아내고, 우선 수혈을 하겠습니다.”
빙글빙글 돌 만큼의 어지럼이 있었으니, 예상 못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수혈은 보험이 되는지, 비용은 얼마나 될지 계산이 먼저 앞섰다. 그 빌어먹을 돈 걱정은 곧 사그라들었다. 비현실이 현실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기묘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낯섦은 잘 꾸며진 이야기책에서나 만나는 법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혈구 수치인데, 보통 성인 남성의 수치가 4,000에서 10,000이에요. 환자 분은 400,000 가까이 나왔어요. 그리고 엑스레이상 비장도 커져 있어요. 보통 10센티 정도인데 24센티가 넘게 비대해져 있더군요. 이렇게 되기까지 뭐 하시느라 검진도 안 받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심각합니다.”
의사는 숨을 고르더니, 중대 발표라도 하듯 말을 이었다.
“백혈병이나 다른 혈액암이 강하게 의심 듭니다. 이것은 전문의 선생님이 다시 판단하실 거예요. 혈종과(혈액종양내과)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오셔서 자세히 설명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뒷말은 페이드아웃처럼 멀어졌다. 구급차 안에서 경험했던 현기증이 다시 올라왔다. 눈앞이 어두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하얗게 포커스 아웃되며, 시야를 환하게 덮었다.
하얀 현기증이, 다시 나를 덮쳤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몸은 오래전부터 신호를 보내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미루고, 견디고, 무시해 왔다는 사실을. 투병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삶의 태도에 대한 결과 보고서에 가깝다.
다시 시작이라는 말의 무게
절망은 희망을 위한 단계이며,
불행은 희망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 『심연』, 배철현 중에서-
중환자실의 고비를 건너 골수검사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고, 연이은 의사들의 진료 기피 끝에 서울성모병원으로 전원되었다. 응급 입원과 동시에 세포독성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다. 이후 결과에 따라 1차 표적 항암제를 사용했고, 정확히 백 일이 지났을 즈음 판정이 나왔다. 혈액학적 반응은 있었으나, 분자유전학적 반응과 염색체화학반응 모두 ‘Fail’. 만성기를 지나 가속기와 급성기의 경계에서 병을 발견한 점, 기저의 면역질환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알 수 없는 유전학적 돌연변이의 가능성까지. 결국 1차 약제는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2차 약제로 전환되었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장 고용량을 선택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아직 방법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먼저 감사하려 애썼다. 그러나 고용량 항암의 부작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구토, 발한, 고열, 발진은 이미 익숙했고 어느 정도 단련되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박동처럼 밀려오는 극심한 두통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복약 후 심야의 다섯에서 여섯 시간을 점령했다.
혈액 항암은 필연적으로 체내의 면역과 항체를 강제로 무력화한다. ‘관해’라 불리는 과정이다.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는 기준치의 4분의 1 이하로 떨어졌고, 특히 백혈구 내 호중구 수치가 급격히 낮아지면서 모든 감염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 틈을 타 독감과 대상포진이 연이어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버텨내던 시간들 사이로,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내 독감을 가져가 버렸다. 막힌 코와 끓어오르는 가래로 힘들어하면서도, 제 몸보다 내 병간호가 우선이라 했다.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개인적으로 회복 탄력성이 좋은 편이라고들 말한다. 주변의 평가이기도 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이유를 곱씹어 보면, 성장기와 청년기는 고난과 위협의 연속이었다.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가 반복되다 보니, 웬만한 위기는 더 이상 서프라이즈가 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를 시절에 겪은 위기 극복의 경험들이 감당할 ‘체력’을 길러 주었고, 그 체력이 ‘정신력’을 담보해 주었던 것 같다. 그냥 헤치고 나왔을 뿐인데, 마음에는 어느새 근육과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 체력이 소진되자 마음이 먼저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극복과 회복을 떠올리며 구약 성경의 ‘요나’를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요나만큼 독특한 인물도 드물다. 무슨 배짱인지 그는 늘 신에게 대들었다. 그러다 고래인지 백상아리인지 모를 거대한 물고기의 뱃속에 갇혀 사흘을 보내고,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다. 한 도시의 멸망을 예언하면서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스펙터클을 은근히 기대하는, 어딘가 삐딱하고 똘끼 있는 인물이다.
요나는 내게 ‘탄력 회복성’을 가르쳐 주었다. 무심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섭리’의 영역 앞에서, 매번 일희일비하며 자신을 소모하지 말자는 이야기다. 이미 끝난 프로야구 한 경기처럼 지나간 일에 매달리지 말고, 다음 경기를 기다리듯 시간이 필요한 일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탈진해 스스로 우울의 터널로 들어갈 필요도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나와 같은 처지의 이들에게 ‘조언’이라 부를 만한 말을 건넬 여유는 없었다. 다만 분명해진 생각 하나는 있었다. 회복 탄력성에는 생각보다 체력, 몸의 기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는 것. 그 가장 기본적인 일상이 회복의 시작이 된다. 그리고 그 일상을 지켜 내기 위해 ‘응원’은 분명 유효하다.
밤하늘의 별은 서두르지 않는다.
별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에 맞추어 빛난다.
점점 깊숙히 가라 앉는 날들
죽을 것 같이 힘들게 사는 것과, 죽을 각오로 살아 내는 일은 서로 등을 맞댄 동전처럼 보였다. 2차 항암제를 최고 용량으로 복용하며 네 주를 보냈고, 유전자 검사를 위한 채혈이 이어졌다.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그 일주일은 기대와 불안이 번갈아 하루하루를 점령하는 시간이었다.
고용량의 약은 표적 치료라 해도 혈액학적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백혈구 수치는 하한선에 겨우 걸쳐 있었고, 문제는 호중구였다. 백혈구 내에서 면역과 감염을 맡는 전위대인 호중구 수치가 800. 지난번보다 약 30퍼센트 더 떨어진 수치였다. 통상 1,500 이하면 항암 주의, 1,000 이하면 중단 고려, 500 이하면 중단이다.
800이라는 숫자를 앞에 두고 담당 교수는 잠시 고민하더니 밀고 나가자고 했다. 혈소판 역시 수혈 후에야 하한선인 50,000에 턱걸이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유전학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라 말했다. 치료 방향은 명확했다. 다음 주 유전자 수치가 의미 있게 떨어지면 용량을 줄이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수혈과 격리, 촉진제 등의 서포트를 병행하며 계속 간다. 삶의 질 같은 말은 교과서 속 문장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환자의 권리를 강조하는 병원답게, 의료인 총휴업일에도 자리를 지킨 의료진의 태도는 고맙게 다가왔다.
다음 주 진료 예약을 잡고 원외 약국에 들렀다. 다시 병원 셔틀을 타고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면 늘 들르는 곳이 있었다. 지하철 구내의 ‘1,000원 빵집’. 모든 빵이 천 원인 그곳에서 사흘 치, 아내와 두 사람이 먹을 저녁을 샀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왔다.
온라인으로 곁눈질한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알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읽고 싶은 책,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서, 가장 비루한 하루를 살아 내고 있는 사람이 아내라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장품은커녕 변변한 로션 하나 없고, 늘어진 티셔츠를 실내복 삼아 입고 지내는 시간. 가늘고 하얗던 손가락은 거칠고 붉어졌다. 모두가 내 탓 같아, 미안한 마음만 쌓여 갔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도 기도하며 버텨 보았다. 아내가 일상의 평화를 되찾기를. 이타적인 기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극히 이기적인 구복이었다. 그럼에도 염치없이 기도했다. 간절하고 구체적인 기도는 늘 응답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과 종교를 구분하려 애쓰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믿음만큼은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한다.
2차 고용량 약제로 바꾸고 두 달이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소소한 부작용은 무용담처럼 흘려보낼 수 있었으나, 혈액 수치의 감소는 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호중구는 중단 기준선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혈소판은 매주 수혈을 해도 기준 하한의 10퍼센트를 밑돌았다. 작은 멍 하나에도 응급 상황을 걱정해야 했다.
나는 매주 남의 피를 얻어 살아 내고 있었다. 혈소판이 바닥인 탓에 잠결에 눌린 손목에 멍이 깊고 넓게 들었고, 빈혈로 인한 박동성 이명과 비문증에 가까운 시야 협착 속에서 어지럼을 달고 살았다. 아직 호중구가 하한선에 걸려 있어 격리 입원은 피하고 있었지만, 이유는 단 하나였다. 골수 속 암세포를 죽이고, 다시 건강한 조혈을 기대하기 위해서였다. 그 목표 하나로 혈액 세포 유전자 검사를 반복했다.
완벽한 날들의 조건
‘기적의 탄환’이라는 이름처럼, 3·4세대에 이르는 표적 항암제의 발전 덕분에 이 병은 ‘관리 가능한’ 병이 되었다고들 말한다. 동병 환우들의 기록을 보면, 초기 몇 개월에서 일 년 사이에 일상을 되찾았다는 이야기가 넘친다. 보통 진단 후 3개월 이내에 유전자 지표를 40퍼센트대에서 10퍼센트 미만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삼고, 반 년이면 0.XXX퍼센트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처음 3개월 차에 18퍼센트에 머물렀고, 1차 약제 실패로 최고 용량의 약으로 교체했다. 부작용으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모두가 하한을 크게 밑돌았고, 그야말로 고위험군 가속기 환자로 버티고 있었다. 무엇보다 진단이 너무 늦었다. 골수 생검 결과 섬유화가 상당히 진행돼 조혈 환경이 척박해졌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 환경이 다시 좋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고, 남아 있는 여력이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라며 버티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약제를 바꾼 뒤 두 번째 유전자 검사 결과가 병원 어플에 올라왔다. 지난번 14.6퍼센트로 소폭 하락한 수치를 확인하며 기대와 우려를 반반씩 안고 기다렸지만, 결과는 16.1퍼센트. 다시 수치가 올랐다. 약제 교체로 인한 리셋이라 해도, 한 달 안에 10퍼센트 미만으로 떨어지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MBTI식으로 말하자면, 특대문자 T 성향이 이런 순간에는 차라리 도움이 된다. 실망은 무겁지만, 기대는 더 무겁게 여기지 않기로 오래전부터 연습해 온 덕분이다.
특히 2차 항암기 동안 매주 화요일은 가장 힘든 날이자, 가장 선명한 날이었다. 아내와 함께 조금 서둘러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갈아타 병원에 도착해 채혈을 하고, 키와 몸무게를 쟀다. 진료까지 남은 한 시간 남짓 동안 아내는 아메리카노 한 잔과 아몬드 쿠키를 사 와 앞에 놓았다. 우리는 마주 앉아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된 옛날 이야기, 요즘 뉴스, 그리고 알 수 없지만 뻔할 것 같은 날씨 이야기.
그 무렵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유난히 깊게 보았다. 생각해 보니, 나에게 ‘퍼펙트 데이즈’는 매주 화요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와 우려를 함께 안고서도 결국 하루를 살아 내는 날. 진료를 받고, 수혈을 받고, 아내는 불편한 병원 의자에서 나를 기다리는 시간.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역에서 천 원짜리 빵을 사서 사흘 치 저녁을 마련하고, 가끔 슈퍼에 들러 찬거리를 고르는 날. 그런 하루가 내게는 완벽한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영화 제목의 <퍼펙트 데이즈>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루 세 끼를 제때 소박하게 먹고, 요일마다 드라마를 챙겨 보고, 독서와 영화로 하루를 채운다. 야구 시즌이면 응원팀의 헛스윙에 욕을 내뱉다가도, 뜻밖의 역전 홈런에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를 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비슷한 아침을 맞는다.
이렇게 살아 내는 하루들이,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완전한 날들이다.
산을 넘지 못한 날들의 깊이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속리산>, 나희덕 중에서-
어느 날, <속리산>이라는 시는 내게 시가 아니라 일기가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을 두고 누군가는 ‘퍼펙트 데이’라 부르며 위로했지만, 제자리걸음 같은 발걸음은 좀처럼 가볍지 않았다. 걷고 또 걸어도 풍경이 바뀌지 않는 길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결국 2차 항암제 역시 최고 용량으로 밀어붙였지만 실패했다. 유전자 검사와 골수 검사 결과, 2차 항암제 실패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다. 유전자 수치는 지난번과 단 0.1도 어긋남 없이 10퍼센트 이상의 암이 잔존했고, 골수 검사에서도 염색체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단계에서조차 암세포의 감소는 보이지 않았다. 확진 후 아홉 달. 통상 이 시점이면 0.1퍼센트 미만을 향해 가는 구간이라 들었지만, 내 몸에서는 수치 대신 혈구들만 무너지고 있었다.
좌절할 틈은 없었다. 차주부터 3차 항암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마침 작년 초 보험 급여가 확정된 신약이었다. 기존 약제와는 다른 단백질 포켓을 타깃으로 한, 한 단계 진전된 약제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나처럼 차도가 없거나 돌연변이 유전자로 내성이 강한 경우에 특히 임상 효과가 좋다는 말에, 기대라기보다는 기도에 가까운 마음을 얹었다.
그 무렵부터 죽음을 이따금 떠올렸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하는 묵상의 끝은 이상하리만큼 감사로 닿았다. 지난겨울보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내가 서울 병원 전원을 서두르지 않았더라면, 의료대란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신약이 식약청과 건강보험에 등재되지 않았다면 치료를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그 모든 갈림길마다,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남아 있었다.
물질과 여유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 그 고비를 간신히 넘길 만큼의 도움이 찾아온 일도 감사였다. 그리고 아직 그렇게 살아 보고자 희망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 또 감사였다. 가장 절망에 가까운 시간에, 나는 감사의 시간을 건너고 있었다.
나희덕 시인의 말처럼, 내가 넘고 있던 것은 산이 아니라 산속에 갇힌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은 채찍이 아니라 시간으로 벌하신다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희망과 용기라는 힘을 함께 내어주시는 듯했다. 누군가는 단숨에 넘을 높이를, 내게는 길고 느리게 늘여 주신 것도 어쩌면 그 힘을 놓지 말라는 신호였을까.
우여곡절 끝에 3차 항암제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을 넘겼다. 촘촘한 수혈로 대비하며 첫 2주를 관찰 속에 보냈고, 유전자 수치를 점검하는 동안 그래프는 완만하지만 분명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검사 때마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이번에는 조금 더 나아간 소식이기를.
신약이 또 개발되어 임상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이번 시도가 실패할 경우 조혈모세포이식, 곧 골수이식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급성기적 폭발 이전에 이식이 효과적이라는 설명을 마음 한편에 두고, 조심스럽게 일상을 건넜다. 아직 섣부르지만, 그 최악을 피할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혈액 수치는 정상의 65퍼센트 이상을 회복했고, 특히 빈혈은 사라졌다. 골수 검사 결과 이후라면 안과와 치과 진료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여전히 쉽게 피로해 하루에 낮잠이 필요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지만 괜찮다. 암 환자에게 여명이 담보된다는 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이 모든 시간은, 약한 고리처럼 이어진 응원들 덕분에 여기까지 흘러왔다.
함께 건넌 시간
병원.
어릴 적부터 병원은 웬만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장소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왜 그랬는지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병원은 교통사고나 죽을병 같은, 삶이 급전직하하는 순간에만 호출되는 장소라는 막연한 인식 속에서 자라고 생활해 왔다.
무척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다. 미취학 시절, 유치원 노란 모자를 쓰기 전의 어느 날, 생애 첫 기절을 경험했다. 서울이라는 이름만 덮어쓴 강동구 성내동, 사실상 촌동네 골목에서 흙을 묻히며 놀던 날이었다. 몇 살 위의 형이었는지, 힘센 친구였는지 분명치 않다. 누군가 밀쳤는지, 제풀에 버둥이다 걸려 넘어졌는지도 이제는 묻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선 채로 뒤로 넘어졌고, 그 다음 기억이 끊겼다는 사실이다.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원이 아니라 안방 솜이불 속이었다.
아홉 식구가 방 두 칸 반 지하에 살던 살림에서, 막내를 업고 병원에 갈 여유는 현실의 담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을지 모른다. 더구나 나는 병원이 아닌 거여동 슬레이트 지붕 아래 방에서, 동네 산파 할머니의 손으로 받아낸 생이었다. 태생부터 병원은 내 삶과 깊이 얽힐 수 없는, 낯설고 먼 존재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져도 병원은 여전히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 곳이었다. 고열에 온몸이 달아올라도, 뼈가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져도 상비약을 바르고 교실 난로 앞에 엎드려 참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병원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응급실, 입원, 각종 영상 검사와 내시경, 시술, 중환자실, 수혈, 격리와 집중 관리까지. 병원이 제공하는 거의 모든 의료 서비스를 경험하고 있다. 한때 공공의료 개혁을 운운하던, 싹수없던 시절에 주워 들은 풍월로 의료진과 깊은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혈관이 모자랐는지, 골수까지 바늘에 내어주고서야 현실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제야 애써 외면해 왔던 두 단어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수고, 그리고 죽음.
생각은 때로 실타래처럼 풀리고, 때로 덩굴처럼 뻗어 나가지만 이 두 단어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미뤄 둔다. 비루한 글을 끄적이는 일에도 체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항암 치료 이후 새삼 알게 되었다. 항암제의 부작용 가운데 가장 집요한 것은 심혈관이나 간담도계의 부담이 아니라, 무기력을 동반한 깊은 피로였다. 그 피로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쓰고 싶은 마음조차 쉽게 일지 않는다.
얼마 전 우연히 인연을 맺었던 한 시사평론가의 부음이 마음에 오래 박혀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암 진단 이전에 맺은 약한 고리였고, 진단 이후 그의 힘찬 투병을 지켜보며 은근히 기대어 의지했는지도 모르겠다. 고통이 사라진 그곳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할 뿐이다. 그의 수고로운 시간을 미약한 기도 속에 기억하려 한다. 그러다 문득 묻게 된다. 나는 내 삶을 얼마나 진지하고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어렵사리.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되었다’는 옛말은 잠시 접어 둔다. 이미 삶의 과반을 건너왔으니, 살아온 옛날보다 살아갈 새날이 적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남은 시간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성찰로 채우고 싶다. 이것이 지금 내게 남은 꿈이자 희망일지 모른다. 장래희망은 아이들의 몫이지만, 꿈은 백수를 바라보는 노인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월요일에 주간 단상을 발행하고 뜻밖에 좋은 댓글들을 받았다. 금원의 지연으로 숙소 임대료마저 밀린 상황에서, 고마운 고교 동창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 그러며 말했다. 글을 계속 쓰라고. 시간이 걸릴 수는 있지만 네 글은 좋은 독자를 만날 거라고. 지난 부침의 시간 동안 실망도 미움도 있었겠지만, 결국 응원한다고. 계속 쓰라고.
고교 시절, 전교 50등까지 잘라 강당 빈 공간에 자율학습실을 만들고 석차별로 자리를 배치하던 때가 있었다. 늘 왼쪽 맨 앞에 앉았던 그 친구는 자신의 내적 방황을 건너 지금 내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지방 국립대학 사범대 학과장이 되어, 학생들의 진로와 대학의 미래, 세상의 이치를 두고 선한 고민을 나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
그리고 이곳 플랫폼에서 부족하고 비루한 글을 읽어 주고, 그 너머로 응원을 건네 주는 분들이 있다. 내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아내 여니. 중학 동창으로 우여곡절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고, 반품 생각이 들 법한 나의 곁을 여전히 지켜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다. 우리는 잘 견디며 여기까지 건너왔다. 이제, 봄날의 꽃을 그리자. 우리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