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미학, 사라짐의 기록: 정우영 시인 <순한 먼지들의 책방>
지금은 모른다. 그래서 하나만 붙잡고 슬퍼할 이유도, 하나만 보고 기뻐하거나 분노할 이유도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언제나 불완전한 이해 위에 놓여 있다.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태도 자체가 우리에게 요구되는 최소한의 윤리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모른다.
이리 쏠려 소곤대던 사람들이 어느새 저리 쏠려 추모의 말을 던진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람을 이해한다고 말할 때도, 안다고 단정할 때도 아니다. 다만 안타깝다는 감정 하나로도 이미 벅차다. 하나만 보고 슬퍼하지 말자. 조각난 사실이 아니라, 전부를 헤아리려는 마음으로 안타까워하자. 당사자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결국 당사자만이 건넬 수 있다. 그 이야기가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터다.
세상에 당연한 죽음은 없다. 죽어 사라지는 모든 존재는 추모받을 권리가 있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일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우주를 함께 견뎌냈기 때문이다. 최근 잇따라 전해진 ‘이른 죽음’의 부고 앞에서 마음 한켠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들에게 2026년의 도래는 더 이상 예정된 시간이 아니라,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으로 남았다. 나는 이들의 죽음을 떠올리며, 애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한 허무한 죽음들을 함께 기억해 보았다.
죽음을 오래 생각한 탓일까. 실로 오랜만에 한 해의 정리와 소회를 건너뛰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마무리’라는 맺음의 기운을 잠시 밀어내고 싶었다는 말이 가장 솔직하다. 무엇보다 무리에 가깝게 써 내려온 글들을 돌아보거나 멈추고 싶지 않았다. 잠시 쉼표를 찍고, 다시 써 보기 위한 기운을 재정비하고 싶다는 마음만 남아 있었다.
매일이 비슷비슷해 보여도 한 해를 버텨낸 데에는 할 말이 많다. 다만 그것들을 접어 둔다. 힘들었으나 어느 순간에도 거짓은 없었다. 하루가 저물면 또 하나의 시작이 온다. 그 시작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하길 기도한다. 나는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아팠던 시간들도 결국은 지나간다. 모두 지나가 사라지고, 눈물은 꽃으로 핀다. 지나감 끝에서 ‘다시’를 마주하는 일, 이 또한 행운처럼 다가온다.
새해의 문턱에서 시집 한 권을 펼쳤다. 표제가 된 정우영의 시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라는 문장이 오래 눈에 머물렀다. 시인은 친한 후배가 연 책방의 개업식에 가지 못해 대신 시를 건넨 듯하다. 이제 막 정착을 시작한 후배에게 시인은 먼지를 보낸다. 거기 가서 오래 머물 먼지. 개업 선물로 먼지라니, 얼마나 시적인 발상인가.
먼지는 존재의 종말인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물질적 상징이다. 거대한 건축물이 무너진 뒤 남는 잔해이자, 인간의 피부에서 떨어져 나온 생명의 파편. 불결함의 대명사로 취급되지만, 미학의 시선으로 보면 먼지는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는 거의 유일한 지표에 가깝다. 보이지 않던 입자들이 빛의 줄기 속에서 떠오를 때, 우리는 정지해 있다고 믿었던 공간이 사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공간은 먼지로 인해 정동이 오가는 실존의 텅 빔이 된다.
이 미시적 존재들은 거시적 우주의 축소판처럼, 우리가 애써 잊고자 하는 ‘시간의 퇴적’을 증명한다. 발터 벤야민은 수집가의 방에 쌓인 먼지를 통해 과거의 흔적을 읽어내려 했다. 그에게 먼지는 제거해야 할 오염이 아니라, 사물의 아우라가 세월과 만나 형성한 보호막에 가까웠다.
미술과 영화에서 먼지는 멜랑콜리의 정서를 증폭시키는 장치로 자주 호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83)에서 안개와 먼지처럼 부유하는 입자들은 고향을 잃은 존재의 내면적 황폐와 그리움을 시각적으로 전이한다. 고정된 카메라로 먼지가 내려앉은 공간을 오래 응시하게 만드는 그의 연출은 관객으로 하여금 물질의 소멸과 시간을 함께 견디게 한다. <노스탤지어> 속 먼지는 배경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는 주체로 자리한다.
현대 미술가 마르셀 뒤샹 역시 먼지를 예술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는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벌거벗겨진 신부, 조차도> 위에 6개월 동안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한 뒤, 그 퇴적층을 고정해 작품으로 남겼다. 작가의 손이 아니라 시간의 손이 완성한 공동의 창작물이었다.
오늘날 먼지는 ‘미세먼지’라는 이름으로 위협의 상징이 되었지만, 여전히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으로 남아 있다. 김애란의 「하루의 축」은 인천공항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하는 '기옥'의 시선을 통해 먼지와 쓰레기, 그리고 인간의 흔적을 다룬다. 작가는 누군가 남기고 간 사소한 흔적들을 지워내며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을 통해 존재의 무게를 조명한다.
"세상은 누군가 어지럽히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았다.”
먼지는 치우는 사람만큼 성실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먼지는 쌓였고, 그것은 성실함이라기보다 실존에 가까웠다.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유일한 흔적으로서의 먼지. 이는 거대 서사에서 밀려난 이들이 각자의 좁은 틈에서 묵묵히 견뎌낸 시간 또한 저마다의 실존의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조용히 증언한다. 먼지는 소멸해 가는 인간이 세상과 맺는 마지막 관계의 형식이며, 김애란은 그 낮은 목소리의 존엄을 섬세하게 비춘다.
집 안 구석에 쌓인 먼지는 우리가 읽었던 책의 종이 가루이자, 사랑하는 이의 머리카락이며, 창밖에서 흘러든 이름 모를 거리의 풍경이 뒤섞인 기억의 총합이다. 그러니 먼지를 털어내는 일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과거와의 연결을 잠시 끊고 현재를 회복하려는 작은 의식에 가깝다. 먼지는 결국 우리가 돌아갈 근원적 상태다. 별먼지(stardust)에서 비롯된 인간이 다시 미세한 입자로 환원되는 과정은 가장 조용하면서도 숭고한 순환의 미학을 보여준다.
다시 <순한 먼지들의 책방>으로 돌아간다. 책방에 도착한 먼지는 머물고 떠나는 사람들의 숨결과 손때를 머금으며 점점 몸집을 키울 것이다. 돈을 둘러싼 설움과 차별은 주인장의 마음씀으로 조용히 걷어내고, 시인이 보낸 성실한 먼지는 시간의 무게를 두께로 만들어 속엣말들을 모아 책의 자리를 마련한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 지구와 오늘 여기의 우주에 관해 나눈 모든 낮은 말들이 그곳에 쌓일 것이다. 시인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해질,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을 기원한다.
이 시를 여러 번 읽으며 한 해의 다짐처럼 마음에 새긴다. 가장 하찮아 보이는 먼지가 결국 가장 거대한 우주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이 우주를 끌어안고, 먼지 같은 글을 쓰고 싶다. 그 글을 고이 접어, 작고 미소한 먼지로 만들어 소중한 이들의 책장에 보내고 싶다. 그렇게 쌓인 먼지들이 속엣말을 품어, 우주를 꿈꾸는 작은 소망으로 피어나기를. 그 소망 하나만이 욕심으로 남는 시간의 무게를, 순한 먼지로 만들기를 바란다.
오래 묵을 순한 먼지를 보낸다.
그대들 모두의 수신함에,
새해의 축복과 지난 해의 감사를 담아.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할, 순한 먼지를.
< 순한 먼지들의 책방> - 정우영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