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모어의 미학, 어른의 2학년

지혜로운 바보의 학년, 미완성의 완성

by 박 스테파노

내 나이 쉰하고 넷이 이제 빈틈없이 차 오른다. 이 나이가 인생의 그래프 위에서는 어디쯤에 놓일까, 가끔 그런 생각에 잠긴다. 여러 해석이 있겠으나, 요즘 들어 유독 마음에 와닿는 하나의 가설이 있다. 현대의 사회적 나이를 선현들의 시대에 대입하려면 대략 0.75를 곱하면 된다는 이야기다. 그 계산법을 따라 54세를 환산해 보니, 어림잡아 마흔 언저리에 닿는다.


마흔. 어른의 명찰을 제대로 달기 시작한 나이. 그렇다면 나는 이제 막 어른의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문턱에 선 셈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난 10여년을 관통해 서있는 지금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내 어른의 시간 중에서도,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어설픈 구간. 지혜로운 척하되 실은 바보천치에 가까운 시절. 바로 그 소포모어의 시간이다.


소포모어(Sophomore)는 본래 대학 2학년 학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스포츠 신예 스타들이 겪는 이른바 ‘2년 차 부진’, 즉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표현으로 더 익숙하다. 그러나 이 단어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그보다 훨씬 흥미로운 결이 드러난다.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 닿아 있다. 소포스(σοφός, sophos)는 ‘현명한’, ‘지혜로운’을 뜻하고, 모로스(μωρός, mōros)는 ‘어리석은’, ‘미련한’을 의미한다. 이 둘이 결합한 소포모로스(sophomoros)는 문자 그대로 ‘지혜로운 어리석음’, 혹은 ‘현명한 바보’라는 역설을 품은 말이다. 배웠다는 자각은 있으나, 아직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상태. 알게 된 만큼 말이 앞서고, 확신만큼 성숙하지는 못한 과도기의 표정이 이 단어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포모어 신드롬. AI Sora


이 표현은 17세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처음 쓰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2학년생들은 “지식은 있으나 성급하고, 논쟁을 즐기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후 이 말은 미국의 교육제도로 옮겨가 고등학교와 대학의 2학년을 지칭하는 공식 용어로 자리 잡았다. 학문적 성장의 한가운데, 지식과 경험 사이에서 균형을 더듬는 학생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은 셈이다.


생각해보면, 내 지금의 시간도 그러하다. 어느 정도는 알게 되고, 그래서 더 쉽게 판단하며, 그만큼 자주 넘어진다. 지혜와 어리석음이 뒤섞인 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나날들. 가만히 더듬어 보고서야 그 시간을 부끄러움만으로 밀어내기보다, 하나의 학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른의 소포모어. 그 이름이 주는 씁쓸한 위안이, 요즘은 이상하게도 오래 남는다.



인식의 문턱에서


철학적으로 보자면 소포모어는 인간 실존의 가장 정직한 초상에 가깝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알아가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동시에 그 앎이 얼마나 조각나 있고 불완전한지를 깨닫는 과정 한가운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를 통해 남긴 핵심 또한 거기에 닿아 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지혜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는 역설. 이 관점에서 소포모어적 상태는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미숙함이 아니라, 진정한 지혜로 향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인식의 문턱’에 가깝다.


쉰넷이라는 나이에, 투병의 길 위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나의 실존은 어쩌면 그 문턱 앞에 가장 정직하게 서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쌓아온 삶의 ‘첫 번째 작품’이 건강과 사회적 성취라는 문법으로 쓰였다면, 지금의 고통은 나에게 다른 문법의 ‘두 번째 작품’을 요구하고 있다. 이전의 문장이 더는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서술을 고민하게 된다.


문학의 세계에서 말하는 ‘소포모어 징크스’ 역시 이와 닮아 있다. 첫 작품으로 찬사를 받은 작가가 두 번째 작품에서 겪는 극심한 부진. 이는 단순한 창작의 고통을 넘어, 자의식의 과잉과 타인의 시선이 얽히며 발생하는 실존적 위기다.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영향에 대한 불안』 (1973)에서,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의 거대한 그늘 아래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기 위해 치르는 투쟁을 집요하게 묘사했다. 두 번째 작품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묻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Thomas Mann - 'The Magic Mountain' (1924). Pinterest

투병 중에 느끼는 ‘길을 잃음’은 바로 이러한 소포모어 징크스와 닮아 있다. 젊음의 활력과 건강이라는 ‘선행된 문법’이 사라진 자리에, 질병이라는 낯설고 거대한 타자가 침입할 때, 인간은 자신의 생을 어떤 언어로 서술해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은 매끄러운 성공담에서보다, 균열과 실패의 틈새에서 피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럴 때마다 어리숙한 시절, 호기롭게 집어 들었던 토마스 만의 책이 떠오른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1924)에서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는 결핵 요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죽음과 질병을 응시하며 비로소 삶의 형이상학적 깊이에 다가간다. 그에게 질병은 일상의 유능함을 앗아간 저주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의 삶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사유의 세계로 이끄는 통로였다. 54세의 내가 겪는 투병 또한 사회적 생산성이라는 일차적 가치에서 벗어나, 생의 이면에 숨겨진 ‘지혜로운 어리석음’을 대면하게 하는 미학적 전환점일지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이 ‘성장’이라는 단선의 궤적이었다면, 지금은 그 궤도를 잠시 이탈해 생의 전체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길을 잃은 자의 두 번째 지혜


이전의 비평으로 다루었던 레프 톨스토이의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 (1886)은, 평생을 ‘품위 있고 적절하게’ 살아왔다고 믿은 한 판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서서히 죽음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이 소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길을 잃음’의 정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비추는 문학적 거울에 가깝다.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 성공과 건강이라는 견고한 성벽 안에서, 자신이 이미 모든 지혜를 소유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질병은 그를 단번에 ‘소포모어’의 자리, 곧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진 ‘지혜로운 바보’의 상태로 끌어내린다.


질병 앞에서 그가 평생 쌓아 올린 법전의 논리와 사회적 명성은 아무런 효용도 갖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고통은 육체의 통증보다 훨씬 깊다. 병상에 누운 그는 “내가 평생 살아온 것이 정말 옳은 것이었을까?”라는 파괴적인 질문과 마주한다. 이는 인생의 중턱에서 투병이라는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만난 내가 느끼는 당혹감과 정확히 포개진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의 입을 빌려, 인간이 진정으로 지혜로워지는 순간은 자신의 유능함이 완전히 해체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앞에 서게 될 때라고 말한다.


죽음이 임박한 순간,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돌보는 하인 게라심의 진심 어린 연민을 통해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생을 용서하는 지점에 이른다. 이 과정은 길을 잃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두 번째 지혜’의 정점을 보여준다. 고통은 삶을 방해하는 불청객이 아니라, 가식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존재의 핵심을 대면하게 하는 가장 가혹하면서도 정직한 인도자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스토너』. Amazon.com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 (1965)는 또 다른 결로 우리 앞에 놓인다. 이 소설은 화려한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견디는 삶’의 미학을 조용히 펼쳐 보인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문학에 매혹된 윌리엄 스토너의 삶은, 외형만 놓고 보면 실패의 연속처럼 보인다. 불행한 결혼, 학계에서의 소외, 그리고 끝내 찾아오는 병마까지, 그는 세상의 문법으로 보면 끊임없이 길을 잃은 인물이다. 그럼에도 스토너는 자신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에도 소포모어적인 태도, 곧 ‘배우는 자’의 자세를 끝내 놓지 않는다.


그는 고통과 고독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일부로 받아들인다. 스토너에게 지혜란 고통을 지워내는 기술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을 지키며 ‘그저 존재하는 것’의 무게를 견디는 힘에 가깝다. 내가 투병을 통해 길을 잃었다고 느끼는 이 시간 역시, 어쩌면 스토너처럼 나만의 ‘진실한 문장’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 할 긴 침묵의 구간일지 모른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평생을 바친 연구가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 과정 자체가 자신에게는 유일하고도 찬란한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당신은 무엇을 기대했는가?”

– 존 윌리엄스, 『스토너』


이 마지막 자문은 삶의 목적이 성취나 완성에 있지 않고, 존재 그 자체에 있음을 또렷이 환기한다. 투병은 나의 사회적 역할을 멈추게 하지만, 동시에 누구의 무엇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열어 보인다. 길을 잃은 상태란 목적지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내 발밑에 놓인 ‘지금 이 순간’이라는 길을 더 깊이 응시하라는 요청에 가깝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스토너』는 고통과 상실이 생의 종착점이 아님을, 오히려 소포모어적 성찰을 통해 생의 가장 비옥한 지혜가 길러진다는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다.



미완의 별을 향하여


투병은 인간을 가장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 동시에, 가장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세운다.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 (1978)에서 질병을 정치적·도덕적 은유로 소비하는 태도를 경계하면서도, 질병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타자성’의 감각에 주목했다. 육체의 고통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삶의 전제들을 하나씩 흔들어 놓는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은 머지않아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으로 수렴된다.


내 나이 54세는 생의 정점에 서서, 비로소 내리막을 응시하기 시작하는 나이다. 이 시점에 찾아온 투병은 나를 다시 소포모어, 곧 학습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이 배움은 청년기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청년의 소포모어가 세상을 향한 정복의 지혜를 꿈꾼다면, 중년의 소포모어는 자신을 향한 수용의 지혜를 배운다. 이 태도는 알베르 카뮈가 『시지프 신화』 (1942)에서 그려낸, 부조리한 운명을 긍정하며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모습과 조용히 맞닿아 있다.


길을 잃었다는 감각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의 존재를 암시하는 신호다. 질병은 육체를 구속할지 모르나, 사유는 오히려 세속의 중력에서 풀려나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 소포모어의 ‘모로스(어리석음)’가 외부의 시선에서 보이는 무능이라면, ‘소포스(지혜)’는 그 무능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긍정하고,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내면의 힘에 가깝다. 지금의 길 잃음은 방황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을 향해 내려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하강이다.


결국 소포모어라는 말은 우리에게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가르쳐 준다. 인간은 죽는 순간까지도 삶에 관해서는 영원한 2학년, 다시 말해 소포모어일 뿐이다. 완벽한 마스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늘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를 진동하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투병 중인 나에게 건넬 수 있는 철학적 위로는 “곧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 역시 내 생을 구성하는 중요한 문장”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문학에서 비극이 숭고미를 획득하는 이유는 영웅이 고난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은 채 자신의 운명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 1953년 판. Nocloo.com


『노인과 바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1952)의 노인 산티아고는 거대한 청새치를 상어들에게 모두 빼앗기고, 결국 뼈만 남은 채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그는 자신의 몸으로 증명한다. 나 역시 육체의 견고함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겪고 있을지 모르나, 그 틈으로 스며 나오는 영혼의 빛은 이전보다 더 선명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의 길 잃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길을 잃었기에, 나는 비로소 지도를 버리고 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별은 ‘지혜로운 바보’만이 볼 수 있는, 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빛나는 진실이다. 나의 투병은 단순한 소모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층위의 실존적 미학을 완성해 가는 숭고한 과정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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