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 복사열의 은밀한 위로

접촉 없는 따뜻함, 복사열

by 박 스테파노

지난주 기온이 뜻밖의 속도로 꺾였다. 머무는 숙소는 상업용 건물을 개조한 곳이라 전기요금에 누진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난방비는 그 이점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가파르게 치솟는 편이다. 이 건물은 지은 지 20년을 훌쩍 넘었고 애초에 주거를 상정한 설계가 아니어서 웃풍이 쉽게 스며들고, 보일러는 낡은 폐관처럼 더딘 온기를 내놓는다. 예전 형편이 넉넉하던 시절에는 한겨울에도 반팔로 버티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몸의 한 겹 한 겹을 단단히 여미며 혹한과 맞서는 일이 일상의 첫 과제가 되었다.


면역이 취약한 데다 폐렴이라도 겹치면 의료진부터 호통을 들을 만큼 까다로운 병을 지니고 있어, 감기 한 번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이런 사정을 들은 아내의 지인 분이 1인용 전기매트를 두 개나 보내주셨고, 지난해 겨울의 막바지부터 이 작은 기계는 예상보다 더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사실상 처음 써본 것이나 다름없는 이 전기매트는 단순히 접촉 면을 덥히는 기능을 넘어, 마치 몸 전체의 체온 자체가 미세하게 달궈지는 듯한 전혀 다른 차원의 온기를 일으킨다. 그 비밀은 복사열에 있다. 접촉을 통해 전해지는 것은 전도지만, 몸 전체를 감싸며 웃풍을 일시적으로 잊게 만드는 그 미묘한 따스함은 공기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고 도달하는 복사열의 작용이라고 한다.


열전달의 유형. 에니클


직접적인 열감을 제공하는 전도, 기체와 액체의 순환을 통해 퍼져가는 대류와 달리, 복사에는 열에너지를 운반하는 매개가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이 새삼 낯설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원리는 인간의 관계에도 은근히 비유 가능해 보인다. 손을 맞잡고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처럼 선명한 연결이 있는가 하면,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삶의 균열을 적셔주는 온기 역시 존재한다.


만져지지 않고 흐르지도 않지만, 분명히 닿는 어떤 힘. 이 겨울, 오래된 건물의 찬 숨결 사이에서 전기매트의 미약한 복사열이 전해주는 위로가 그런 종류의 온기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듯하다.



사랑의 복사열, 거리와 침묵을 넘어


복사열(Radiation)은 뜨거운 물체가 매질—공기나 물 같은 전파의 통로—없이도 전자기파의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그 파동이 대상에 닿는 순간 비로소 열에너지로 전환되는 현상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체감하는 전도나 대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전달 방식이며, 태양이 수억 킬로미터의 진공을 건너 지구에 따스함을 건네는 일과 완벽히 닮아 있다. 매개 없이 도달하는 빛의 전언은 물리적 조건을 초월한 온기의 방식 그 자체로 읽힌다.


이 속성을 인간의 사랑과 관심에 비추어 보면, 그 비유적 울림이 한층 넓어진다. 복사열이 어떤 매질도 기다리지 않듯, 진정한 사랑과 관심 역시 직접적인 접촉이나 잦은 대화, 물리적 근접성이라는 ‘중간 물질’을 전제하지 않는다. 멀리 떨어진 이를 향해 건네는 조용한 시선, 말없이 조금씩 흘러가는 배려의 마음처럼, 사랑의 복사열은 언어보다 미세하고 접촉보다 깊은 파동의 형태로 다가온다.


사랑의 복사열은 거리와 시간, 때로는 감정적 단절이라는 진공 속에서도 약해지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상대에게 도달할 때 비로소 따뜻함으로 변환되듯, 마음의 깊은 곳에서 수신된 관심은 외로움의 결을 풀어내고 삶의 온도를 새롭게 조정한다. 아무리 강한 사랑일지라도 상대가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에야 온기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복사열의 작동 방식은 관계의 섬세한 윤리를 암시한다. 과장된 몸짓이나 시끄러운 표현을 넘어 존재 자체의 온도로 이루어지는 헌신, 그 조용한 에너지가 감지되는 순간에 사랑은 구체적 감각으로 변모한다.


2025 년 사랑의 온도탑. 뉴시스 제공


어떤 이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묵묵한 존재만으로 주변에 평온을 복사한다. 그의 정직함, 인내, 고요한 신뢰가 파동처럼 퍼지며 침묵 속에서도 감지되는 따스함이 된다. 복사열은 에너지를 방출하며 상대를 성급히 재촉하지 않고, 그가 받아들일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조용한 기다림을 이어간다. 사랑이 일방의 요구가 아니라 상대의 자유를 전제한 존중의 태도라는 점에서, 이 기다림은 복사열의 미학으로 확장된다.


결국 사랑의 복사열은 이렇게 속삭이는 것과도 같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당신을 향해 온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할 때, 이 따스함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질 없이 도달하는 영혼의 파동이며, 가장 순수하고 지속적인 형태의 관심이자 서로의 세계를 천천히 덥히는 빛의 언어에 가깝다. 나는 이 복사열으로 혹한을 넘는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글로 만난 이곳에서 진정한 위로와 응원을 얻었다. 감사하다는 쉬운 말로 마음을 다시 보낸다.



쓰다라는 동사의 온도


복사열과 사랑의 작용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한국어 동사 ‘쓰다’가 불러올리는 복합적 의미의 지층이 눈에 들어온다. ‘쓰다’는 단일한 어원을 갖지 않고, 최소 세 갈래의 뿌리가 서로 다른 감각과 사유의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고유한 의미망을 형성하는 동사다. 사용과 투입, 소진을 담아내는 이 낱말은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 있으면서도, 언어적 직관의 저변에서는 훨씬 더 넓은 심리·미학적 구조를 예고한다.


먼저 덮어 씌움과 보호(戴, Wear) 계열이 있다. 무엇인가를 신체 위에 얹거나 감싸는 행위, 곧 ‘모자를 쓰다’, ‘가면을 쓰다’, ‘안경을 쓰다’와 같은 용법이다. 이는 몸의 경계를 덮어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며, 정체성의 형태를 갖추는 행위로 확장된다. 비유적 착용 역시 이 계열에 속한다. ‘누명을 쓰다’, ‘책임을 쓰다’처럼 원치 않는 에너지가 한 사람에게 덧씌워져 내부로 흡수되는 과정은, 자아와 외부 사이에 놓인 경계가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어떻게 부정적 복사열처럼 스며드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다음으로 가장 활발하게 쓰이는 사용·기록(筆, Write, Use)의 계열이 있다. 무엇인가를 ‘활용하고 동원하는 행위’, 혹은 정보를 ‘기록하여 남기는 행위’라는 두 축이 이 계열의 중심이다. ‘연필을 쓰다’, ‘컴퓨터를 쓰다’, ‘시간을 쓰다’, ‘돈을 쓰다’는 자원과 도구의 활용을 나타내고, ‘머리를 쓰다’, ‘힘을 쓰다’, ‘애를 쓰다’, ‘꾀를 쓰다’는 내부의 능력과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는 형태를 드러낸다. 이때 내부 자원이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과정은 복사열의 방출과 닮아 있다. 집중된 에너지가 특정한 목적을 향해 퍼져나가며, 주어진 세계를 조금씩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약을 쓰다’, ‘방편을 쓰다’와 같은 표현은 수단과 처방의 선택을 통해 상황에 개입하는 능동성을 보여준다.


이 계열의 절정은 기록의 의미, 곧 사유의 흔적을 기호로 고정하는 행위에서 드러난다. ‘글을 쓰다’, ‘편지를 쓰다’, ‘일기를 쓰다’, 더 나아가 ‘소설을 쓰다’, ‘시를 쓰다’는 무형의 생각과 기억, 감정을 문자라는 파동으로 변환해 종이나 화면이라는 매체에 정착시키는 일이다. 이때 ‘쓰다’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 한 인간의 내면이 타인에게 도달하는 경로가 된다. ‘이름을 쓰다’, ‘역사를 쓰다’의 경우는 한 존재를 명시하고 한 시대를 기입하는 은유로까지 확장된다. 결국 글쓰기라는 행위는 정신의 열원을 외부로 복사시키는 과정이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정서적 복사열을 발생시키는 일에 가깝다.


애쓰며 글을 쓰다. AI Sora


마지막으로 맛과 감각(苦, Taste Bitter) 계열이 있다. ‘맛이 쓰다’, ‘약이 쓰다’처럼 감각적 반응에서 출발한 의미지만, 점차 정서적 상황으로도 확장되어 ‘인생이 쓰다’, ‘표정이 쓰다’처럼 형용사적 용례로 자리 잡는다. 이 ‘쓰다’는 외부 자극이 내부 감각에 침투하며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상태를 가리킨다. 물리적 복사열이 피부에 닿아 강한 열감을 남기듯, ‘쓴맛’이라는 감각은 삶의 고통이 영혼에 닿는 순간의 진한 떨림을 은유한다. 뜨거움과 시림, 달콤함과 씀의 경계를 오가며 인간의 정서를 조형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쓰다’라는 동사는 착용과 보호, 활용과 기록, 감각과 고통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들을 한 몸에 품고 있다.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거나, 내부의 에너지를 방출하거나, 직접 닿지 않는 힘을 전해 받는 과정까지 아우르며, 언어 속에서 복사열의 원리를 은밀히 반복한다. 그리고 복사열이 매질 없이 도달하는 따스함을 품고 있듯, ‘쓰다’는 인간의 경험 전체를 통과하며 그 온도를 조정하는 깊은 파동을 지닌다.



쓰다의 사유, 방출의 형식


‘쓰다’라는 동사는 주체가 내적 혹은 외적 에너지를 발휘해 세계에 개입하고, 그 표면에 미세한 변화의 흔적을 남기는 능동적 작용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원한 형태는 글쓰기다. 보이지 않는 사유를 보이는 문장으로 복사(방출)하여 영속성을 부여하는 이 창조적 행위는, 인간이 자신 안의 에너지를 세계로 내보내는 가장 정교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착용하거나 고통을 느끼는 경험 역시 자아와 외부 세계가 접촉하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에너지의 교환, 혹은 경계 설정의 원초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쓰다’의 의미망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따라서 ‘쓰다’는 단일한 동작을 넘어, 에너지의 방출과 변환, 그리고 외부 세계와의 상호작용이라는 폭넓은 철학적 지평을 품고 있다. 이 동사를 복사열의 작용에 비추어 바라보면 두 가지 핵심 연결 지점이 드러난다. 하나는 내부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하며 전달하는 힘, 다른 하나는 비물리적인 것을 형태화하여 세계 속에 남기는 능력이다. 이 두 속성은 어원의 분기에도 불구하고 ‘쓰다’의 용례 전반을 관통하는 심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쓰다’는 현대 한국어에서 서로 다른 계통의 어원적 뿌리가 합류하여 형성된 동사다. 그러나 용례를 따라가다 보면, 이 낱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방향은 내면에 응축된 에너지를 외부로 밀어내어 세계에 흔적을 남기는 행위다. ‘힘쓰다’, ‘애쓰다’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한 점에 모여 외부의 목표를 향해 밀려 나가는 움직임은, 뜨거운 물체가 자신의 내부 열을 파동으로 방출하는 복사열의 작용과 닮아 있다. 노력은 가시적이지 않지만, 방향성을 지닌 에너지의 분출이며, 세계에 구체적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내적 열원의 발화다.


기록과 착용의 ‘쓰다’에서도 동일한 연동성이 나타난다. 착용한다는 것은 외부의 무엇을 자아의 표면에 덧입히는 일이자, 경계를 재조정하는 사건이다. 반면 기록한다는 것은 무형의 정신 에너지를 유형의 문자로 변환하여 바깥으로 방출하는 일이다. 특히 ‘글쓰다’는 이 두 작용이 가장 복합적으로 포개지는 지점이다. 생각·감정·사상이라는 내부 에너지가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파동처럼 바깥으로 흘러나가고, 문장이라는 형태를 입어 독자의 정신에 닿는 순간 새로운 열에너지로 변환된다. 복사열이 진공을 가로질러 전해진 뒤, 대상이 그 에너지를 흡수할 때 비로소 비열(比熱)이라는 구체적 따스함으로 돌아오는 현상과 겹쳐 보인다.


나의 에너지를 보내는 일. AI Sora


여기에서 복사열의 핵심 속성인 ‘매질 없는 전달’과 ‘에너지의 변환’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내부의 열원이 곧장 외부로 발현된다는 점에서 ‘힘쓰다’의 노력과 ‘글쓰다’의 사유는 중간 매개 없이 드러나는 직접성의 본질을 공유한다. 글쓰기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넘어 사유의 파동을 먼 곳으로 보내는, 가장 복사열적인 인간적 행위다. 그리고 이 파동이 새로운 의미로 변환되려면, 독자의 흡수·수용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맞물려야 한다. 복사열이 대상에 닿지 않으면 열이 되지 못하듯, 노력은 인정되거나 결과로 이어질 때 완결되고, 글은 읽히고 이해되는 순간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쓰다’는 이처럼 내부의 잠재된 힘이나 사유를 외부로 강하게 밀어내어 세계를 변형시키려는 인간의 근원적 충동을 포괄한다. 착용·사용·감각이라는 다양한 용례가 존재하지만, 그 바탕에는 행위자의 의도만으로는 완결되지 않는 어떤 관계의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글쓰기의 경우가 가장 극적이다. 진정한 종결은 쓰는 자의 손에서가 아니라, 읽어주는 이의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때 비로소 방출된 열이 온기에 이르고, 파동이 의미로 변환된다. 인간의 모든 ‘쓰다’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멀리 도달하는 행위가 글쓰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유의 온도를 쓰는 일


"글쓰기는 단순히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궁극적으로 타인의 사고에도 영향을 미친다."

- 수전 손택


글을 쓴다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책을 쓰는 일에 가깝다. 그러나 문자 배열을 눈으로 스치는 것이 곧 독서의 의미를 모두 설명하지는 않는다. 읽는다는 일은 결국 생각을 다시 써내려가는 과정이며, 그 생각이 타인에게 작용할 가능성을 여는 일이다. 『전망 좋은 방』의 작가 에드워드 M. 포스터가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기 위해 글을 쓴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유가 언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그 드러남이 독자의 이해를 거쳐 완성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셈이다. 글쓰기는 사유의 발아이며, 그 발아는 독자의 의식 속에서 비로소 꽃을 맺는다.


글쓰기란 침묵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가장 강렬한 복사열의 운동처럼 느껴진다. 태양이 매질 없는 우주를 건너 지구에 온기를 전하듯, 작가는 언어라는 파동을 통해 자신의 내적 열을 세계로 내보낸다. 이 행위는 단순히 ‘쓰다’에서 머물지 않고, 존재의 심부에서 발원된 에너지가 언어라는 껍질을 획득하며 외부로 변환되는 일종의 영혼적 연소에 가깝다.


모든 글은 내부의 연소가 남긴 흔적을 감춘 채 품고 있다. 사유는 끊임없이 타오르는 열원이며, 감정은 그 아래서 이동하는 용암처럼 진동한다. 이 뜨거운 에너지는 언어를 만나기 전까지 응축된 잠재의 형태로 조용히 웅크려 있다가, 글쓰기라는 변환 장치를 통과하며 전자기적 파동처럼 바깥으로 발산된다. 복사열이 전도나 대류처럼 매질의 이동이나 접촉을 필요로 하지 않듯, 글쓰기 또한 독자와 물리적으로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사유의 파동을 멀리 보내는 일에 성공한다. 종이와 화면 위의 문장은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건너며 여전히 유효한 열을 지닌 채 타인의 정신에 도달한다.


여기에는 ‘애쓰다’, ‘힘쓰다’라는 어원적 의미가 은근히 스며 있다.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밀어내는 이 노력은 주변 환경의 온도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파동을 내보내는 복사열의 자기 주도성과 닮아 있다. 작가는 즉각적 인정이나 반응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열원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고독한 집중을 이어간다. 글쓰기는 결국 스스로의 열을 유지하며 바깥으로 빛을 쏘아올리는 지속적인 노동이다.


저널리스트 조지 플림턴의 책상. 교보문고


복사열의 절정은 그 파동이 대상에 닿는 순간, 독자가 문장을 받아들이는 찰나에 도달한다. 진공을 건너온 빛이 물질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열로 바뀌듯, 문자를 통해 복사된 사유도 독자의 의식 속에서 의미와 감정의 온도로 변환된다. 독자의 경험과 정신적 결에 따라 그 온도는 달라지고, 같은 문장이 어떤 이에게는 위로가 되고 다른 이에게는 냉혹한 깨달음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단지 파동을 보낼 뿐이며, 그 파동이 어떻게 흡수되는지는 독자의 감응에 맡겨진다.


독서는 복사열을 흡수하는 일에 가깝다. 독자의 눈은 파동을 받아들이는 표면이 되고, 침묵에 머물던 문장은 독자의 내면에서 새롭게 타오른다. 복사열이 매질의 제약 없이 가장 먼 거리까지 도달하듯, 글도 작가의 생애가 끝난 뒤까지 이어지는 파동을 지닌다. 언어라는 응고된 파동 속에 담긴 사유는 죽음이라는 진공 속에서도 열원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는다. 글쓰기의 미학은 이 지속성과 영속성의 기적에 깃들어 있다.


결국 글쓰기는 고독한 존재가 우주를 향해 던지는 가장 절실하고 서정적인 신호처럼 남는다. “나는 여기에 있었고, 당신에게 온기를 보냈습니다. 이 침묵의 파동을 받아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영혼의 복사열이자, 끝없는 궤도를 도는 사유의 빛이다.


keyword
목요일 연재
이전 08화진심의 무게, 글의 깊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