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움의 시대, 무거운 진실을 짓는 고독한 느림
“사람들은 재미없는 진실보다,
위트 있는 거짓에 더 많은 점수를 준다.
두서없는 진실보다 논리적인 거짓에 고개를 끄덕이고, 침묵하는 진실보다 소리치는 거짓에 더 깊이 귀 기울인다.
아주 단순한 사실이 너무 쉽게 왜곡되는 장면은,
우리가 진실을 감각하는 능력의 취약함을 환기한다.”
- 김은주, 「1cm」
'글의 길이'는 내게 단순한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결을 가늠하게 하는 질문처럼 다가온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해류가 일상이 된 지금, 블로그와 각종 SNS, 브런치 같은 플랫폼은 무수한 파편의 언어를 쏟아내고, 그 속에서 나는 언제나 '길이'라는 족쇄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린다. 글이 너무 길면 시대와 어긋나고, 너무 짧으면 스스로의 사유를 배반하는 듯한 이 모순 속에 오래 머물러 왔다.
기억을 더듬어 '라떼'라 불리던 시절을 소환해 본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우리는 손끝에 힘을 실어 리포트를 눌러 쓰곤 했다. 종이 뒷면이 울퉁불퉁해질 만큼 정성을 들이던 그 시대에는 글의 물성이 곧 글의 무게였다. 그러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니 캠퍼스는 이미 '컴퓨터 제출'이라는 디지털의 역습을 맞이하고 있었다. 개인용 PC가 사치처럼 느껴지던 가난한 고학생에게 전산실과 과방, 도서관의 공용 PC는 일종의 기착지였고, 나는 그 사이를 떠돌며 글을 이어 붙이던 초라한 유목민이었다. 지금 유행하는 '디지털 노마드'의 초기 형태가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손글씨에서 출력물로 전환되었어도 글의 평가 기준은 여전히 '양(量)'이었다는 점이다. '리포트 10매 이상', '원고지 20매 이상' 같은 규칙은 절대적이었고, 선풍기 바람에 가장 무겁게 떨어진 리포트부터 학점을 준다는 소문은 농담 같으면서도 묘하게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두꺼운 종이를 쓰고, 사진을 인화해 붙이고, 사소한 무게라도 보태려 애쓰며 글에 물리적 존재감을 부여했다. 그 시절 나는 글에도 손에 잡히는 무게가 필요함을 처음으로 자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게의 기준은 장치, 도구의 진화와 함께 빠르게 변모했다. 펜보다 키보드가 익숙해지고, 중지의 굳은살이 사라질 즈음 글들은 작은 화면 속에 압축되었다. 랩탑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순간, 글의 길이는 화면의 크기에 종속되기 시작했고, 한눈에 읽히는 문장만이 살아남는 흐름이 자리 잡았다. 신문은 깊이를 잃어 갔고, 블로그에는 성찰적 비평 대신 가벼운 '리뷰'가 넘쳐났다. 경박단소(輕薄短小)의 시대는 글의 길이를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묻는다. 글이 짧아질수록 사유도 함께 축소되는 것은 아닌지, 빠른 소비의 구조가 언어가 감당해야 할 깊이를 잠식하는 것은 아닌지. 길이에 대한 고민은 결국, 얼마나 천천히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가에 대한 내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진실의 길이를 더듬는 손
온통 가벼운 글들이 부유하던 중, 내 시선을 단숨에 붙잡은 칼럼 하나가 있었다. 그 글은 경박한 흐름을 거스르며, 이 가벼움의 시대에 던져진 묵직한 돌직구처럼 느껴졌다.
https://www.khan.co.kr/article/202202100300085/amp
과거는 늘 ‘찢어진 책’과 같다고 칼럼은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조각난 페이지들을 주워 모으며 끝없이 복원하려 한다. 아무리 성실히 정보를 수집해도 그것은 결국 불완전한 기록일 뿐이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간은 ‘다 알 수 없음’이라는 근원적 겸허함을 배운다. 이 겸허함이 결론에 도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신중하게 이끈다.
이 칼럼이 지적하듯 '진실'이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영역에 놓여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파편화된 사실들을 더듬어 모으고, 반복해서 검증하며 그 위에 진실의 형상을 상상하듯 세우는 일뿐이다. 사실의 전달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사실이라는 것조차 육하원칙을 적용하는 순간 스마트폰 화면 한 바닥을 훌쩍 넘어갈 만큼 복잡해진다. 한 사건을 정직하게 기술하는 일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언제나 난해한 여백을 동반한다.
진실은 언제나 사실들의 나열 바깥에서, 행간의 미세한 온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진실은 결코 사실의 산술적 총합이 아니다. 특히 문자만으로 소통되는 글에서는 발화자의 음색, 얼굴의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 숨을 고르는 리듬 같은 비언어적 층위가 제거된다. 뛰어난 문장가는 짧은 글로도 그 깊이를 전달할 테지만, 나 같은 보통의 글쟁이에게는 아직 먼 능력이다. 사실이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설명이 더욱 세밀해지고, 묘사가 풍성해져야만 한다. 글이 길어진다는 것은 곧 사유가 한 겹 더 깊어졌다는 증거일 때가 많다.
결국 나는 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변명을 한참 늘어놓고 만다. 하지만 굳이 글의 길이를 잘라내며 시류에 편승할 생각은 없다. 퇴고의 과정에서 덜어내야 할 것은 문장의 불필요한 ‘중복’과 억지스러운 ‘중언’, 본질을 흐리는 ‘부차 정보’이지, 생각의 결 자체가 아니다. 읽는 이에게 닿기 위해 문장을 명징하게 연마하는 일은 여전히 내 숙제지만, 물리적 길이를 칼로 도려내듯 축소해버리는 일은 진실의 윤곽을 찌그러뜨리는 폭력이라 여긴다.
나는 글의 무게를 '진심의 무게'라고 부르고 싶다. 길고 짧음, 화려함과 수수함을 떠나, 어떤 문장은 말랑한 어투 속에서도 천근만근의 진실을 품는다. 나는 그런 글을 부러워하며, 언뜻 편안해 보이지만 내면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문장을 서두르지 않고 써 내려가고 싶다. 세상이 TMI(Too Much Information)를 피로해할지라도, 우리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선 충분한 정보―나는 그것을 ‘ETR(Enough information to reach Truth)’이라 부르고 싶다―가 반드시 필요하다.
IT 업계의 금과옥조처럼 반복되는 "Less is more"라는 미니멀리즘 철학은 글쓰기에 적용될 때 종종 오해를 낳는다. 맹목적인 ‘덜어내기’에 집착하다 보면 문맥은 쉽게 절단되고, 진심의 온도는 기형적으로 변질된다. "방에 들어가신 아버지"가 조사 하나, 띄어쓰기 하나의 생략으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가 되어버리는 그 난센스 같은 왜곡. 오늘날 ‘기레기’나 ‘가짜 뉴스’라고 불리는 현상들은 기자의 악의라기보다, 이러한 형식적 강박과 기계적 축약이 초래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미국의 TIME이나 Fortune 같은 잡지들이 지금도 깨알 같은 활자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모습을 보면, 그것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치열한 투쟁처럼 느껴진다.
진실은 긴 호흡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 번 되뇌게 된다.
현시의 그림자와 글의 윤리
솔직히 고백하건대, 글을 짓는 내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속 좁은 욕망이 숨어 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면에 넘쳐흐르는 말을 다듬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현시욕에서 시작한다. 그 누군가가 타인이든, 혹은 미래의 나 자신이든, 읽히고자 하는 욕망은 글쓰기의 오래된 연료이자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
건강이 악화되어 정식 기고를 쉬게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본디 병증에 가까워서, 쓰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병의 체질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다. 다시 펜을 들었을 때, 단순한 치유의 목적을 넘어선 욕망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어느 날 나는 ‘오마이뉴스’나 ‘민들레 언론’ 같은 참여형 플랫폼을 기웃거렸다. 내 글이 다른 기사들과 나란히 걸려 있는 그 수평적 풍경, 외롭지 않은 활자의 자리배치는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플랫폼의 채택 기준, 노출의 강도, 그리고 클릭 수라는 달콤한 지표들에 중독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점차 나는 플랫폼이 좋아할 만한 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글감 선정은 시대의 조급함에 영합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고, 한 번 더 곱씹어야 할 고전보다 즉각적인 이슈와 화제성 있는 영화가 우선순위에 올랐다. 누군가 선점할까 조바심을 내며 사유의 시간을 줄였고, 문장은 짧아졌으며, 문단은 ‘가독성’이라는 미명 아래 무참히 분절되었다. 제목은 오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낚시성 문구로 점철되었다. 그것은 어느 날 문득 나의 글에 닥친 치명적인 재앙이었다.
"국민 모두가 언론인이 되면서 발생한 재앙"이라는 신형철 평론가의 지적은 정확히 내 것이었다. 심지어 민들레 언론의 에디터는 내 글 곳곳에 빨간 줄을 그으며 ‘간결한 문장’, ‘수사의 최소화’, ‘어렵고 복잡한 사유의 탈피’를 요청했다. 반려된 문서를 바라보며 처음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클릭 장사꾼이 되어버린 내 모습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 더 깊었다. 내 글은 더 많이 읽히기 위해 더 적게 생각하려는 방향으로 미끄러지고 있었고, 그 미끄러짐이 바로 글쓰기의 타락임을 새삼 깨달았다.
"인간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며 타인의 진실이란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를 편리하게 망각한 채로 행하는 모든 일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의 문장은 서늘한 처방전처럼 내 손에 들어왔다. 타인의 진실을 다루는 일, 그 복잡하고 미세한 결을 무시한 채 편리하게 요약하고 재단하는 행위가 바로 폭력이라는 지적은 나를 매섭게 후려쳤다. 느리고 신중한 의견은 언제나 광장에 늦게 도착한다. 그러나 나는 그 광장의 빈자리가 두려워 너무 서둘러 말했고, 그 성급함 속에서 얼마나 많은 진실을 놓치고, 상처를 건드리고, 의미를 도려냈을까. 그 자각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글을 짧게 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사유의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문제였다. 욕망이 더 많이 드러날수록 진실은 더 깊이 숨어버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며, 글쓰기의 윤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느린 문장의 윤리와 고독한 걸음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일은 말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는 행위와 닮아 있다. 말이 글에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도, 글이 말처럼 가벼운 즉흥성으로 흘러버리는 순간을 경계하게 된다. 신형철이 말한 그 섬세한 균형, 곧 언어가 지닌 고유의 무게를 잃지 않으면서도 독자에게 다가가는 태도는 문학이 품어온 오래된 문법이자 책무에 가깝다. 문학은 명쾌한 해답을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한 진리의 측면들을 더듬으며 질문을 이어가는 과정 속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조롱이 진지함을 압도하고, 속도와 쾌락이 사유의 시간을 잠식하는 풍경이 일상이 되었더라도 문학이 지켜야 할 중심축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재미와 흥미는 표면적으로 닮아 있으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낸다. 웃음을 건네는 재미가 일상의 숨을 틔운다면, 삶의 다층적 결을 파고드는 흥미는 인간이 가진 인식의 반경을 넓힌다. 뜯어보고, 곱씹고, 천천히 걸려 들어가는 흥미는 어느 지점에서 사유의 윤리를 건드리기에, 나는 그 길을 성급한 질주로 바꾸고 싶지 않다. 인문이라는 도로 위를 뚜벅뚜벅 걷는 일에는 종종 외로움이 따라붙지만, 그 고독은 사유가 자신의 온도를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장막처럼 느껴진다.
이런 나의 걸음 앞에서 가장 정확하면서도 두려운 독자는 아내다. 글을 완성하면 나는 맨 먼저 아내에게 조심스레 건넨다. 그녀는 "접근이 좋다", "주장이 지나치다", "어렵다", "오탈자가 보인다"와 같은 직설적 평을 망설임 없이 내놓는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절대 먼저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는다. 타인의 공감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글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한다는 무언의 가르침이 늘 담겨 있다.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배움이 일상의 습관처럼 다가오는 순간, 나는 이 꾸준한 긴장과 애정에 감사하게 된다.
이제 다시 문학의 쓸모와 글쓰기의 태도에 관한 오래된 물음을 떠올린다. 이성복 시인이 말한 "공이 작품이라면 차는 발은 정신"이라는 문장은 글쓰기의 본질을 명료하게 비유한다. 글은 결국 내가 찬 공이며, 그 궤적은 내 태도의 각도에 따라 결정된다. 골대를 벗어난 실패조차 내 정신이 만든 궤도라는 점에서, 공을 차는 그 자체가 문학의 한 형태가 된다. 정답보다는 질문을 견디는 힘, 성공보다 실패를 감내하는 고집이야말로 인문학이 품은 본령에 가깝다.
질문은 언제나 실패의 그림자를 동반하고, 그 그림자 속에서만 진실의 미세한 결이 드러난다. 나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다시 속도를 늦추려 한다. 말과 글 사이의 거리를 일부러 넓혀두고, 그 여백에 오래 눌러 앉아 무게 있는 마음을 적셔 넣고 싶다. 사유를 굳이 단정하지 않고, 문장을 과도하게 경쾌하게 만들지 않으며, 감정의 밀도를 최대한 보존하려는 이 느린 걸음이 나에게는 작은 윤리로 다가온다.
복잡하고 난해한 세계를 가능한 만큼 풀어내려 애쓰는 모든 작가들에게 나는 깊은 존경을 보낸다. 이해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기 고유의 문장으로 세계의 틈을 비추는 일이 얼마나 고된 수련인지 알기에, 그들의 걸음은 언제나 귀하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이 무겁고 느린 글을 끝까지 따라와 줄 단 한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로 그 믿음 하나로 나는 다시 고독한 자리에서 자판을 두드린다. 언어의 속도를 늦추고, 사유의 온도를 지키며, 누군가의 내면에 닿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