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관한 이런 저런 생각들: 예수, 장미, 그리고 나
광야에서 부르는 이름
“목자들은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다. 여드레 뒤 그 아기는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루카 복음 2장
곤경 속에서 마지막 힘으로 불리는 이름 중 하나가 ‘예수’라는 생각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오, 예수님”이라는 절규는, 기대할 곳이 더 이상 없을 때 인간이 남겨 두는 마지막 구조 신호처럼 들린다. 서양에서도 “Oh my God”과 함께 “Jesus Christ”라는 외침이 놀람과 두려움의 순간에 거의 자동처럼 흘러나온다. 숨 막히는 자리에서 본능적으로 찾아오는 이름, 그 이름이 예수라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을 스친다.
베들레헴 마구간, 짐승 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태어난 아기가 여드레 뒤 예수라는 이름을 받는 장면은 복음의 한 순간을 이룬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유대인에게 흔한 ‘여호수아’에서 비롯되었으나, 복음사가의 손을 거치며 평범함을 넘어 시대와 영혼을 관통하는 빛을 얻었다.
예수라는 이름에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이 담겼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광야의 방황을 끝내고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사건처럼, 이름 속에는 역사적 구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같은 땅 위에 다시 어둠이 내려앉았다. 정치적 억압과 영적 피로가 겹겹이 쌓이고, 백성의 내면에는 또 다른 광야가 자라났다. 더 깊은 회심과 더 분명한 빛이 요구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신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왔고, 그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절망 속 마지막 외침에서 불려 온 이름, 어두운 골짜기에서 길을 잃은 영혼이 더듬어 찾는 한 줄기 빛 같은 이름이다. 오늘 우리의 광야에도 각자의 부름이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부름의 시작을 조용히 밝혀 주는 촛불 같다.
“Jesus!”라는 외침에는 거의 자동으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따라붙는다. 히브리어 메시아(מָשִׁיחַ, mashíakh)를 그리스어로 옮긴 Χριστός에서 비롯되었고, 라틴어권을 거쳐 Christos로 정착하며 한문 음차 ‘기독’이 되었다. 오늘 ‘기독교’라는 명칭도 이 긴 언어의 여정을 거쳐 탄생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왕과 제사장, 선지자에게 부여되던 표지다. 예수의 경우, 특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계보적 의미가 강하다. 통일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세 번 기름 부음을 받았기에,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가 왕, 대제사장, 예언자라는 중대한 소임을 통합적으로 지닌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 전통은 유대교와 교회 안에서 지금도 이어진다.
예수는 서른 해 가까이 나자렛의 평범한 삶을 살다가 공생활을 결심하며 그리스도의 길에 들어섰다. ‘거룩한 변모’라 불리는 이 시점에서, 역사적 인격 예수와 신적 표징 그리스도는 겹겹이 포개진다. 이름 하나에 인간성과 신성이 함께 숨 쉬는 셈이다.
이 이중성 때문에 “예수를 믿으라”보다 “그리스도를 믿어라”가 신학적으로 더 정밀하다. 나자렛의 목수 예수와 하느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 속 변모로 이어진다. 인간의 시간에서 시작된 존재가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건너가는 결의, 그 결의가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응축되어 있다.
나자렛에서 부르는 이름
예수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다. 나자렛 출신이라는 뜻에서 ‘나자렛 예수’ 혹은 ‘나사렛 예수’라 부르기도 한다. 두 표현은 같은 지명을 다른 방식으로 옮긴 결과다. 성경 번역의 역사적 사정이 혼란을 깊게 만들었다. 신구교가 공동번역성서를 편찬했으나, 개신교 측이 가톨릭을 ‘마리아의 교회’라 폄하하며 결속이 깨졌고, 공동번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가톨릭은 ‘나자렛’을, 다수 개신교는 ‘나사렛’을 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식 표기가 당시 발음에 더 가깝다. 라틴어 표기 Iesus Nazarenus가 그 흔적을 남겼다.
기원 전후의 세계에는 성(姓)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다. 사회적 문화로 굳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인물을 두 방식으로 식별했다. 하나는 ‘누구의 아들 누구’라는 계보적 방식이다. 열두 제자 중 이름이 같은 두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라 불렸다.
다른 하나는 지명을 넣는 방식이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본명이 시몬이었기에 ‘갈릴래아의 시몬’이라 불렸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또 다른 시몬은 ‘퀴레네의 시몬’으로 구별되었다.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자렛 예수’라 불리는 이유는 그의 유년기와 일상이 그곳에서 이어졌기 때문이다. 요셉의 고향이기도 해서 세속적 구분상 자연스러운 호칭이지만, ‘요셉의 예수’라 부르지 않는 이유는 동정녀 잉태 교리에 따른 신학적 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임마누엘’이라 불리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기독교 세례명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없다. 신의 이름을 직접 따르지 않는 전통과 전례 규범 때문이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이며, 이사야의 예언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세부 논의는 성경학적 영역이지만, ‘그런 해석이 있다’ 정도로 이해하면 충분하다.
십자가 고상을 본 적 있다면, 그윽한 고통 위에 붙은 작은 표지 ‘INRI’를 보았을 것이다. 이는 예수에게 씌운 죄명이다. 당시 유대는 로마법 아래 있었고, 십자가형은 극악한 반역자나 체제를 뒤흔드는 자에게만 내려졌다. 예수는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인물로 몰려 처형되었다. 종교적 의미를 넘어, 오래된 체제의 부패와 폭력을 드러내는 정치적 단면이기도 하다. 십자가의 의미가 단순한 고난을 넘어 ‘구원’과 폐허가 된 질서에 대한 혁명적 기운을 품는 이유다.
당시 좀도둑이 아니었던 예수는, 죄명을 적은 명패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갔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십자가 고상과 이콘은, 일부 개신교의 우상 경계 흐름을 제외하면, INRI 표식을 그대로 간직한다. IESVS NAZARENVS REX IVDÆORVM, 곧 “나자렛 사람 예수, 유다인의 왕”의 머리글자다. 헬라어 성경이 라틴어로 옮겨지며 형성된 관습으로, 약자만 보고 의미를 즉각 짚기 어렵다. 그러나 이 네 글자는 고통과 구원의 역사가 한 점에 응축된 표지처럼, 십자가의 정점에 묵묵히 남아 있다.
시간과 운명을 접는 이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오래된 말이 있다. 이 진술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하는 사례가 어쩌면 ‘예수’일지 모른다. 예수가 사람이자 신이라는 난해한 신앙 고백을 잠시 제쳐두더라도, 그의 생애와 기록이 인류 정신사에 남긴 파문은 부정할 수 없다. 믿든 믿지 않든, 인간은 결핍과 난망 속에서 어떤 존재에게 기대고 싶어하며, 그 기대의 형식을 우리는 기도라 부른다.
예수는 가장 낮고 낯선 이들에게 첫 모습을 드러내며 ‘예수’라는 이름을 얻었다. 왕도 아니었고, 예언자도 아니었으며, 선지자의 표지도 없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흔하디흔한 이름, 우리 식으로 하면 ‘철수’쯤 될까. 그는 그렇게 서른 해를 걸었다. 그러나 거룩한 변모와 각성의 시간을 지나 그리스도로 나아간 뒤의 3년은 신약성경의 중심이 되었고, 오늘 세계 수많은 신앙의 근간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인간의 시간과 하느님의 시간이 맞닿는 깊은 의미가 놓여 있다.
돌아보면, 인류가 만들어낸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발명 중 하나가 ‘이름’일지 모른다. 단순한 표식을 넘어, 존재의 속성과 운명을 끌어안는 기호. 이름 속에는 주인의 역사와 숨결이 담긴다. 값비싸게 지어졌든, 무심히 던져졌든, 일단 붙는 순간 그 이름은 삶의 동반자가 되고 운명의 울타리가 된다.
예수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름은 무엇을 품는가. 이름은 어떻게 한 인간의 생을 넘어 시대와 세계를 건너가는가. 그 오래된 물음에 응답하듯, 오늘 우리는 ‘이름’이라는 존재의 무게를 조용히 되새기게 된다.
이름밖에 남지 않은 장미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에코의 첫 장편 소설은 영화 <장미의 이름>(1986)으로 먼저 접했다. 흥미롭게 본 뒤 두툼한 책을 펼쳤지만, 진도는 좀처럼 나가지 않았다. 서문에서 같은 구절을 반복해 읽어도 의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이해 불가의 이야기였지만, 몇 년 후 『젊은 소설가의 고백』과 『창작 노트』를 통해 그 난해한 서문의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험한 산을 오르는데 어찌 처음부터 순탄한 길을 가려 하는가. 각오와 끈기를 넘어야 진짜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그때의 고백은 욕지거리가 나올 법도 했지만, 읽는 힘과 습관을 길러 주는 일종의 훈련 같았다. 드라마 시리즈로도 리메이크된 이 작품은, 기호학자이자 언어학자, 철학자인 에코의 풍부한 역사적 고찰과 신학, 종교, 상징, 기호 탐구를 보여 준 역작이다.
그러나 여전히 제목 『장미의 이름』의 의미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장미’에 대한 서사는 없고,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선문답 한 줄이 전부다. 작가 역시 독자들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제목의 의미를 해설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원래 집필 당시 제목은 『수도원의 범죄 사건』이었고, 사건 중심 추리로 집중할 것 같아 화자 이름을 넣어 『멜크의 아드소』로 수정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출판계의 고유 명사 기피 때문에 결국 『장미의 이름』으로 결정되었다.
“이 책이 출판된 뒤 수많은 독자들이, 책 말미에 실린 6보격 시구의 의미와 제목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비로소 대답하거니와,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그 이름을 남긴다. 이름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를 멈춘 것까지 드러낼 수 있다. 이 이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의 해석은 독자의 숙제로 남기고자 한다.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화자가 해석하고 들어가는 글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수많은 해석을 창조해야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젊은 소설가의 고백』
‘독자의 숙제’라는 대답은 에코 특유의 여운과 지적 장난기를 보여 준다. 다양한 해석도 덧붙여졌다. ‘장미’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는 신앙적 해석, Rosa가 Roma로 잘못 읽혔을 가능성, 14세기 교회 권위가 약해지던 시기 수도원의 봉쇄적 행위에 대한 해석까지, 설득력 있는 논의가 이어진다.
나의 개인적 해석은 조금 다르다. 『장미의 이름』은 거꾸로 읽으면, 제목의 단초가 된 “이름밖에 남지 않은 장미”로 해석된다. 과거의 권세와 영광이 사라져도 결국 ‘이름’은 남는다. 씁쓸할 수도, 다행일 수도 있는, 지금과 미래를 동시에 성찰하게 하는 순간이다.
내 것이면서 모두의 것
‘내 것이지만 남들이 많이 쓰는 것은?’
어릴 적 수수께끼 단골 질문이었다. 답은 ‘이름’이다. 이름은 다른 무엇과 구분될 때 탄생하는 마법의 기호다.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식물과 동물, 생활 속 사물, 산과 강, 사고와 개념, 정의와 개념틀 모두가 특별하게 구분될 때 이름을 얻는다.
이름의 기원과 유래, 역사를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꿈꾸는 순간부터 이름은 탄생했으리라. 신앙인은 하늘이 붙인 아담과 하와를 이름의 시작이라 하고, 신화적 상상에서는 태곳적 곰이 만들어 낸 아이의 이름이 시조가 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인지하는 순간 이름도 함께 태어났을 것이다.
‘일컫다’가 ‘이르다’에서 파생되었다는 수업 시간 이야기도 길게 하지 않겠다. 존재하기 시작하는 모든 것, 사라지는 모든 것은 이름을 남긴다. 『장미의 이름』 속 ‘장미’가 누구의 이름인지, 무엇의 명칭인지, 어떤 상징인지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이름뿐이다.
아까운 젊음이 사그라진 10.29 참사 이후 많은 날이 지났다. 위패 없는 분향소, 영정 없는 조문, ‘명단 공개 논란’이라는 말싸움이 본질을 가렸다. 남은 가족들의 이야기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태원 유족들은 기자회견에서 “정부는 공개를 희망하는 유가족의 뜻을 확인하고, 유가족 의사에 따라 희생자의 이름을 온전한 기억과 추모를 위해 공개해야 한다. 공허한 애도가 아니라 참사의 재발 방지와 사회적 추모를 위한 공적 조치가 필요하다. 유가족과 함의해 희생자의 명예 회복과 기억, 추모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유족들의 목소리는 ‘이름 논쟁’을 끝냈다. SNS에서 법과 도리를 들먹이며 벌어진 찬반 공방 속에서 빠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이름이 남긴 ‘의미’였다. 위패 하나 없는 분향소의 결정에도, 소중한 가족의 이름을 기억할 권리를 요구하는 유족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일부 지식인이 ‘부끄러운 죽음’을 은연중 강요하는 발언을 했을지라도, 그들에게 이름은 비수가 아니라 삶의 흔적이다.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내지 않는다’는 말처럼, 모든 이들은 이름을 가져 마땅하다. 존재하는 순간 들에 핀 하루살이 꽃도 이름을 달고 시들어 간다. 이름 없는 풀은 잡초라 불릴 뿐이다. 요리에서 주재료가 이름을 갖듯, 이름은 의미와 의의를 줄 때 온전한 꼴을 갖춘다.
『장미의 이름』은 결국 ‘추호의 의심 없는 인간의 믿음’에 대한 풍자다. 에코는 “의심 없는 믿음은 악마”라 말한다. 자신의 아집과 인지의 부조리에 갇혀 확증 편향에 빠진 모두에게 보내는 경고다. 믿는 것을 이유로 타인의 소중한 이름을 가리거나 짓밟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에코는 방대한 역사와 철학 이야기를 ‘이름’ 때문에 집필했다고 전한다. 편집자의 권유를 거절하고, 책상 속 ‘중세 수도사들의 이름’ 메모에서 글을 시작했다. 운명 같은 일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 말했다. 이름이 운명을 결정하진 않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동행하는 고유한 식별자임에는 틀림없다. 내 것이지만 남들이 더 많이 쓰는 이름, 그 묘한 울림과 무게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름을 부르는 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꽃〉
글을 쓸 때 나는 세례명을 필명으로 주로 쓴다. 앞으로 순수 본격 문학 작품을 공개한다면, 필명을 다시 고민할 계획이다. 지금 마음에 둔 필명은 ‘선문(善文)’이다. 인문학의 첫 스승이었던 조부의 함자이기도 하다. 글쓰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여러 사연과 기억을 담은 이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내 실명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글쓰기에 주저하게 만들었던 탓도 크다. 요즘 내 이름 석자를 되뇌며, 그 속에 스며든 여러 생각을 마주한다.
내 이름은 부친이 하루하루 버거운 일상 속, 출생신고 과태료에 쫓겨 육교를 건너 동사무소로 향하던 순간 지어졌다. 무협지를 좋아하던 부친은 ‘영웅’의 ‘웅(雄)’자를 점찍어 두고, 밝고 슬기로운 우두머리를 뜻하는 ‘철(哲)’을 더해 이름을 완성했다. 머리 둘레만큼은 우두머리 기질을 유지했으나, 슬기까지 담겼는지는 미지수다.
두 살 터울 형은 작명 대가의 손길을 거쳐 조부모가 직접 지었다. 경상도 보수적 집안에서 둘째인 나는 존재감이 미약해, 아주 ‘싼값’ 이름으로 지어졌다. 형은 병원에서, 나는 집에서 산파가 받았다. 성년이 되도록 모친이 간직한 제 배넷저고리 속 내 탯줄에는 털실이, 형의 탯줄에는 하얀 의료용 실이 묶여 있었다. 작은 흔적이지만, 출생 사이에 담긴 이야기는 깊다.
내 이름은 자부심과 애정을 담고 있으나, 불편함도 많다. 발음이 어렵고, 외국인들은 세 글자의 강한 받침에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서 이름을 물으면 버릇처럼 ‘박·철·웅! 이요’ 하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한다. 그럼에도 ‘철훈?’, ‘철홍?’, ‘철우?’, 심지어 ‘초롱?’ 같은 정답 없는 메아리가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니까. 그러나 며칠을 울며 모친에게 개명을 요구하던 날도 있었다.
이름에 드리운 그림자
1979년 6월, 신문과 방송은 희대의 살인 사건으로 도배되었다. ‘금당 살인사건’이라 불린 다중 살인·매장 은닉 사건이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골동품 가게 ‘금당’에서 주인 부부와 운전사가 살해되었고, 시신은 집 마당에 묻혔다. 사회는 공포와 충격 속으로 잠겼다.
당시 38세의 범인은 사업난 속에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우연히 눈에 띈 ‘금당’을 범행 대상으로 점찍고, 주인을 납치해 금품을 요구했다. 그러나 곧 남편은 이미 숨진 뒤였고, 부인과 운전사 역시 차례로 살해되었다. 시체는 범인의 가족—남동생과 내연녀—손을 거쳐 집 마당에 숨겨졌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졌다. 경찰은 피해자의 동선 대신 골동품상 주변과 거래망만 살폈고, 별건 기소만 이어졌다. 그러다 한 고발 사건에서 사위의 신분을 확인하던 중, 금당 살인과의 연결이 드러났고, 범인은 결국 범행 전모를 자백했다. 조경수 밑에서 시신 3구가 발굴되며 사건은 공개되었다.
범인은 연극영화과를 중퇴한 중산층 가정의 장남, 박철웅이었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고, 사건 발생 약 16개월 만에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1982년 7월,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 여파는 일곱 살, 국민학교 1학년 입학한 지 몇 달 된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한 꼬마에게까지 미쳤다. 왼쪽 가슴에 단 노란 이름표—‘1학년 XX반 OO번 박철웅’—은 곧 조롱의 표적이 되었다. 고학년 형들과 동네 사람들은 사건과 이름을 연관 지으며 히죽거렸다. 이름 하나가, 한 아이의 일상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때 집안 어른들은 진지하게 개명을 고민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름의 원작자인 부친은 단호히 반대했다. 나의 탄생을 그는 늘 ‘복덩이’라 불렀다. 조부가 도산하며 졸지에 20명이 넘는 대식구의 가장이 된 한량의 분투, 그 험난한 시간을 나는 알지 못했지만, 부친은 말하곤 했다. 입만 늘었다며 불편해하는 구성원들도 있었지만, 나의 탄생 이후 그는 해외 파견 근로자로 정규직을 얻고, 각종 수당과 아파트 분양 0순위라는 특전으로 집안을 다시 일으켰다. 부친은 그 모두가 ‘이름’의 기운일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그 사건 이후 이름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었다. 종교 덕에 세례명, 즉 스테파노라는 본명을 얻었고, 외국계 회사에서는 CW라는 이니셜로 오래 익숙하게 지냈다. 가끔 동명이인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밀접히 교류한 경우는 드물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들이 내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점은 한편으로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물론 가끔 스쳐 지나가는 장면도 있었다. 드라마 <유리구두> 속 소지섭이 연기한 캐릭터의 이름이 ‘철웅’이었고,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감금시설 관리인 오달수가 ‘박철웅’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부름의 순간, 이름이 빛나는
돌이켜보면, 이름 하나에도 수많은 사연과 기억이 스며 있다. 부친이 지켜 준 이름에 부응하며 살아왔는지,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 이름을 지켜 주지 못한 날들이 무겁게 마음을 누른다. 날 선 사회 속에서, 실수와 실패, 비루함으로 이름을 부끄럽게 만든 순간도 많았다. 한때 전투적 키보드 워리어였고, 신념만으로 선동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남긴 상처들이 지금도 흔적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또 다른 이름을 앞세운다. 글 친구들이 보내 준 응원의 힘 덕분이다. 내 필명, 박 스테파노는 조금 더 괜찮은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쉽지 않은 투병 속에서도 이야기를 한 줄씩 써 내려가고자 한다.
세 이름은 서로 다른 시공 속에서 메아리쳤다. 예수는 시간과 역사 위에서 우리를 묶는 성스러운 표식이었고, 장미는 그 위에 내려앉은 고요한 미의 결정이었다. 나는 그 두 이름이 만든 간극 속에서 숨을 고르고, 나 자신의 흔적을 좇았다. 이름은 단순한 표제가 아니라, 기억과 경험의 깊은 층위에서 서로를 감응시키는 장치였다. 예수를 떠올리며 인간이 견뎌야 할 고통과 기다림을 느꼈고, 장미를 보며 그것이 잠시나마 미와 희망으로 덮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 내 존재는 아주 작지만 필연적인 흔적을 남기는 지점으로, 역사와 미학, 개인적 체험을 잇는 매개가 되었다.
세 이름은 이제 서로를 끌어안는다. 예수의 고통과 장미의 아름다움이 나의 순간과 겹쳐지는 곳에서, 나는 이름이 존재와 세계를 잇는 힘을 이해한다. 이름은 단순히 부르고 기억하는 행위를 넘어, 살아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최소한의 성소였다.
이 모든 사유의 끝에서, 나는 다시 내 숨결과 마주한다. 세상의 끝자락과 나 사이, 나는 작지만 확실한 흔적을 남기며 서 있다. 예수와 장미가 만들어 낸 울림 속에서, 나는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상상한다. 이름은, 결국,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가장 오래된 예언이며, 조용한 기적이자, 존재를 깨우는 가장 긴 호흡의 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