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행으로 나의 안도를 사는 시대
상술의 날, 관음의 시대
아침마다 바나나 한 개는 아내와 나에게 일종의 의식처럼 자리 잡았다. 간단하지만 하루를 여는 첫 영양의 균형이다. 편의점의 ‘반값 바나나’ 덕에 우리는 일주일에 두세 번 그곳을 찾는다. 지난주부터 그 익숙한 편의점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매대 안팎으로 초콜릿이 묻은 막대 과자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포장은 제법 고급스러웠고, 그 위에는 짐짓 달콤한 미소가 인쇄되어 있었다. 아내와 눈이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녀 중 누가 주는 날인지조차 가물한, ‘상술의 날’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SNS에는 초콜릿 막대 과자 사진이 연신 떠다녔다. 그 덕에 오래전 해외 출장길에서 귀환 인사로 건네곤 했던 ‘고디바 초콜릿’이 떠올랐다. 그때의 브랜드명이 실은 ‘레이디 고다이바’에서 비롯된 것임을, 문득 다시 생각했다.
고다이바 부인(Lady Godiva)은 10~11세기 무렵 머시아 왕국, 지금의 영국 코번트리 지방의 백작부인으로 전해진다. 남편 레프릭 영주가 가혹한 세금을 거두자 백성들이 고통에 신음했다. 그녀는 그 세금을 감면해 달라 간청했으나, 영주는 조롱하듯 말했다.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생각해 보겠다.” 고다이바는 그 모욕적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진심을 다해 마을을 돌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고 그 시간 동안 누구도 창문을 열지 않기로 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전설로만 남지 않는다. 영주는 데인족(바이킹의 후예)으로, 고다이바 부인은 토착민인 앵글로색슨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 전승은 토착민의 수난사이자, 폭력의 권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는 한 여성의 저항의 은유로 읽혀왔다. 실제 역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결단이 민중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윤리적 행위였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에서 ‘관음증(Peeping Tom)’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고다이바가 말을 타고 마을을 돌 때, 아무도 창문을 열지 않았으나 오직 한 사람, 재단사 톰(Tom)만이 몰래 그녀를 훔쳐보았다. 그는 곧 하늘의 벌을 받아 장님이 되었다. 톰이 훔쳐보았다(peep)는 행위가 이름과 결합되어, 타인의 수치와 비밀을 엿보는 욕망의 이름이 된 것이다.
타인의 괴로움은 종종 세상에서 가장 쉬운 구경거리가 된다. 누구도 발설해서는 안 될 이야기가 ‘의견’이라는 이름으로,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전시되곤 한다. 어떤 무리들은 타인의 고통을 논평하며 정의를 말하지만, 정작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확성기를 든 구경꾼의 행위에 더 가깝다. 그들의 확성기는 공론의 이름을 빌리지만, 실은 타인의 침묵을 깨뜨리는 폭력일지도 모른다.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의 말은 언제나 위험을 내포한다. 경험, 주장, 추측으로 엮인 말들은 진실의 자리에 관념을 세운다.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는 식의 배타적 논리가 그 안에 숨어 있다. 그러한 말의 풍경은 종종 도덕의 탈을 쓰지만, 내면에는 불안과 허영, 그리고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 타인의 불행에서 은밀한 쾌감을 얻는 심리가 서성인다.
어쩌면 ‘빼빼로데이’라는 기념일의 과잉된 소비 속에서도 우리는 이 심리를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서로의 애정과 관심을 확인한다는 명분 아래, 상품의 교환은 감정의 대체물이 되고, 진심은 포장지의 광택 속에서 빛을 잃는다. 사랑을 나누는 날에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진을 찍고, 그 이미지를 타임라인에 올리는 행위가 하나의 ‘보여줌의 의례’로 작동한다. 이 모든 것이 고다이바 부인의 침묵의 행렬과 얼마나 먼가를 생각한다.
고다이바의 이야기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이유는, 그녀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선 용기 때문이 아니라, ‘보지 않음’이라는 집단적 윤리의 가능성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녀가 드러낸 것은 육체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눈을 감음으로써 연대의 방식을 택했다.
오늘의 세상은 눈을 감지 못하는 시대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기록하고, 재생산한다. 타인의 고통은 뉴스의 헤드라인으로, 개인의 불행은 댓글의 유희로 소비된다. 우리는 점점 더 ‘톰의 시대’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희망은 있다. 고다이바 부인의 이야기처럼, 보지 않음이 곧 존중이 되는 순간, 인간은 다시 존엄의 문턱으로 돌아올 수 있다.
사랑과 관심을 나눈다는 상술의 시기에, 나는 그 초콜릿의 달콤함보다 눈을 감는 윤리를 생각한다. 어쩌면 진짜 연대는 보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눈을 감고 마음을 여는 일. 그것이 레이디 고다이바가 남긴 오래된 침묵의 가르침이다.
불행을 소비하는 시대
지난 정권의 대통령 순방 중, 비공개 일정에서 촬영된 전직 대통령 부인의 사진 한 장이 공개되며 논란이 일었다. 세간과 일부 야당 의원은 그 장면을 ‘빈곤 포르노’라 불렀고, 여당과 지지자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선의를 왜곡했다”, “국모에게 포르노라니 인신모독이다”라는 말이 뒤섞였다. 하지만, 정말 그 단어가 그렇게 음담한 의미로만 통용되는 것일까? 혹은 단지 영어 사전 속의 단어가 정치적 오해로 비틀린 것일까?
우선 개념을 살펴보자.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는 시사 상식 사전에서 “모금이나 동정심 유도를 위해 가난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영상 혹은 사진”을 뜻한다. 1980년대 국제 구호 단체들이 아프리카의 기아 어린이들의 참상을 그대로 드러내며 기부를 호소하던 장면들에서 비롯된 용어다. 캠페인은 폭발적 반응을 얻었고, 그 성공은 곧 모방의 전염을 불렀다. 이후 텔레비전과 광고 속에는 불쌍한 타인이 상품처럼 등장했고, 그들의 고통은 연출의 소재가 되었다.
이 문제를 두고 논의는 갈린다. “이렇게라도 알려야 돕는다”는 불가피론과, “가난을 연출하고 인격을 침해한다”는 불필요론. 나의 입장은 단호히 후자, 즉 ‘절대 불가론’에 가깝다. 빈곤의 본질은 구조적 문제에 있다. 그러나 빈곤 포르노의 서사는 언제나 개별적 비극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제도와 불평등의 구조, 불합리한 자본 분배의 현실은 감춰지고, 카메라는 오직 한 사람의 눈물과 상처만을 확대한다. 연민을 가장한 이 타인의 고통의 전시는, 결국 편견과 낙인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
실제 방송의 사례는 더 노골적이다. 한 방송사가 에티오피아의 식수난을 다룰 때, 부족한 식수 사정을 과장하기 위해 썩은 물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연출을 강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 장면은 극적 효과를 얻었지만, 사실은 진실의 윤리를 배반한 폭력이었다. 연출의 작위성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쇼’가 된다.
이 지점에서 또 하나의 논쟁이 겹친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정우성이나 김혜자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해외 구호 캠페인도 빈곤 포르노인가?” 나의 대답은 단호하다. “그렇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치밀한 기획과 연출, 그리고 이미지 마케팅이 결합된 캠페인이다. 무료 봉사라는 수식어 뒤에는 브랜드의 계산이, 인간의 선의 뒤에는 시선의 장치가 작동한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 ‘불행 포르노(Misery Porn)’의 시대를 살고 있다. 방송 예능과 다큐멘터리, 심리 상담 프로그램들마저도 타인의 상처를 전시한다. 대표적으로 ‘오은영 신드롬’이라 불리는 현상이 있다. 그의 프로그램은 분명한 사회적 효용을 지니지만, 동시에 한계도 있다. 개인과 가족의 갈등을 극화하고, 불행을 정제된 스토리로 재가공한다. 카메라는 눈물의 클로즈업을 통해 감정의 절정을 포착하고, 시청자는 그 장면을 소비한다. 불행이 상품이 되고, 공감이 연출된다.
그 와중에 더 큰 불행의 구조 ― 능력주의의 폭력, 세대 간 단절, 교육 불평등, 자본의 격차, 무너진 공교육의 현실 ― 은 조용히 사라진다. 사회적 모순이 한 가정의 문제로 환원되고, 우리는 타인의 불행에 분노하며 일시적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저런 집도 있구나” 하는 말 속에는 은근한 위안과 비교의 쾌락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불행 포르노의 핵심이다. 타인의 비극이 내 일상의 안정을 확인시켜주는 무의식의 제도, 그것이 오늘의 미디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은밀한 쾌감이다.
문학과 예술에서도 불행 포르노는 낯설지 않다. 서사학적으로 이 용어는 인물에게 비현실적이거나 작위적인 불행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그 고통의 장면을 반복적으로 노출하는 작품을 가리킨다.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불행 그 자체가 상품이자 서사의 에너지로 기능하는 구조다.
북유럽의 도그마 선언 이후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들 ― 〈어둠 속의 댄서〉, 〈님포매니악〉, 〈도그빌〉 ― 은 불행의 전시가 어떻게 예술의 윤리와 맞닿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레바논의 〈가버나움〉, 일본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경우 〈인간실격〉, 〈나의 아저씨〉, 김기덕의 일련의 작품들이 그 계보 안에 놓인다. 이들 작품은 한 인간이 겪는 극단의 고통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묻는 미학적 실험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모방적 작품은 불행의 과잉을 미학이 아닌 자극의 도구로 사용한다. 영화 〈호흡〉의 논란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포르노라는 단어가 주는 본능적 거부감은 어쩌면 그 어원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어 포르노그라피아(Πορνογραφία) 는 πόρνη(포르네, 매춘부) 와 γράφειν(그라페인, 기록하다) 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매춘부의 기록’을 뜻한다. 그러나 언어는 시대의 욕망과 함께 변한다. 오늘날 포르노는 단지 성적 자극이 아니라, 특정 감정이나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적 재현이라는 확장된 의미로 쓰인다.
그래서 우리는 ‘음식 포르노(Food Porn)’, ‘여행 포르노’, ‘건강 포르노’, 그리고 ‘불행 포르노’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이것은 모두 자극을 위한 콘텐츠의 이름이다. 하지만 비판의 대상이 되는 ‘~포르노’는 단순히 강렬한 이미지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재를 자극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방식을 뜻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감정의 주체가 아닌 소재가 된다.
요컨대 ‘빈곤 포르노’나 ‘불행 포르노’의 문제는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윤리의 결여에 있다. 타인의 불행이 메시지가 아니라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그 콘텐츠는 인간의 존엄을 훼손한다. 그것이 실제 구호 활동의 현장이든,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이든, 혹은 한 편의 예능 프로그램이든 말이다.
그러므로 이번 논란의 핵심은 단어의 품격이 아니라 시선의 윤리에 있다. 그 사진의 의도가 선의였는지, 연출이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이다. 빈곤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이미 스스로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엿보는 사회, 사라진 진실
요즘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과 사고의 보도가 연일 뜨겁다. 들리는 말들은 낯설고, 그 개념조차 떠올리기 힘든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열기를 지탱하는 힘은 언제나 본질이 아니라 변죽에서 울린다. 논리의 근거보다 감정의 과잉이, 사실의 맥락보다 자극의 언어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그럴수록 이념이나 주장이 아니라 진실과 상식이 먼저 작동해야 한다. 제대로 된 세상이란 언제나 상식 위에서만 세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자주 그 반대로 흐른다. 관념과 이념의 뒤편에 사건의 진실은 가려지고, 합리적 의심을 품은 고의적 비판자는 진보의 변절자로 지목된다. 이 시대의 가장 슬픈 풍경은, 의심이 미덕이 아니라 배신으로 간주되는 장면일지 모른다.
누군가 정치적 관음증의 예로 레이디 고다이바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인용은 어딘가 어긋나 있다. 엿보는 일과 판단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정치관이나 세계관, 가치관은 비교하고 견주는 행위가 필요하지만, 개인의 병력이나 가족 구성, 혹은 외모의 변화 같은 것은 판단의 영역이 아닌 엿보기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관음의 시대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게 된다. 스스로 피사체가 되어 돈을 버는 관찰 예능이 대세이고, 실체조차 불분명한 빈곤의 일상을 연출해 선의를 요구하는 기부 마케팅이 넘쳐난다. 우리는 엿보는 일에 익숙해진 나머지, 정작 제대로 보는 법을 잊어버렸다.
세간에서 이러한 관음의 장치를 부르는 이름도 다채롭다. 자극을 극대화한 ‘푸드 포르노’, 장애인이나 소외계층의 이야기를 감동으로 포장한 ‘감동 포르노’, 문제아로 낙인찍은 아이를 상품화한 ‘아동 불행 포르노’, 공허한 위로의 말만 남발하는 ‘감성 포르노’, 그리고 선의의 외피를 쓴 ‘빈곤 포르노’까지. 언어가 이미 그 자체로 병리의 징후가 되어버린 셈이다.
특히 셀럽이 등장하는 빈곤 포르노식 모금 광고는 그 제작비만으로도 수억 원이 들어간다. 모델료라 부르지 않지만 ‘거마비’라는 이름의 비용이 지불되고, 이를 다시 기부하는 선한 사례도 있지만, 기부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촬영과 편집, 후반작업, 방송 편성비까지 합치면, 이 모든 것은 결국 기부자들의 선의로 마련된 돈으로 충당된다. 일부 단체에서는 실제 배분 사업비보다 모금 사업비가 훨씬 많아지기도 한다. 직원들의 급여, 선교비, 종교시설 건립비 등을 제외하고 나면 정작 가난한 아이들이나 북극곰에게 돌아가는 몫은 터무니없이 줄어든다.
그리하여 자극의 극대화가 전가의 보도처럼 남게 된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한 계산 속에서, 진실보다 자극이, 연민보다 연출이 앞선다. 기부와 모금의 행위 뒤에 ‘사업’이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는 간단하다. 남기기 위해서다. 남겨야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포르노의 가성비는 생각보다 좋지 않다. 그저 선한 척하는 홍보의 장치, 자아 도취적 윤리의 연극일 뿐이다. 사람들의 선한 본성을 이용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정작 가장 적절한 도움은 아파하는 사람의 아픈 곳을 직접 치유하는 일이다. 지난 정권의 해외 순방 때, 주치의를 대신 보내 현지 진료와 수술을 지원하고 그것이 ‘윗 선의 뜻이었다’고 전했다면 어땠을까. 식수가 부족한 곳에는 식수를, 북극곰을 위해서는 환경 정책을, 가난과 기아에 처한 이들에게는 현금과 현물을, 그리고 빈곤에 대해서는 그 원인 규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찬송가도, 성경 구절도, 교회의 이름도 아니다.
캄보디아의 심장병 어린이가 얼마나 아픈지, 그가 어떤 치료를 필요로 하는지, 남아시아의 의료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어떤 외교적 노력이 필요한지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포르노라는 말의 원초적 의미처럼, 불행 포르노 역시 영혼을 갉아먹는 자극의 콘텐츠다. 그 자극 말고 남는 것이 없기에, 지금은 정말로 ‘불행 포르노의 전성시대’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포르노라는 자극적 후일담조차 빈곤이라는 실체를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대의 비극은 고통의 현장이 아니라, 고통을 소비하는 시선의 무감각에 있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사건이 아니라 콘텐츠로 받아들이며, 연민의 언어 대신 클릭의 숫자로 반응한다. 진정한 구원은 기부금의 액수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보지 않던 것을 제대로 보는 일에서, 엿보기의 욕망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잠시 머무는 그 시선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