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적 비판자의 글쓰기
요즘 세상이 유난히 소란스럽다. 텔레비전에서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국정조사 장면과 세계 뉴스가 하루 종일 흘러나온다. 오늘은 지난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던 관료들이 줄줄이 자리를 차지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영화 제목에나 어울릴 법한 변명이 사과와 송구를 대신한다. 낯 뜨거운 언어의 잔치가 끝없이 이어지고, 귀마저 더럽혀질 말들이 위정자들의 입에서 흘러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큰 분노는 일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장면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 것이다.
정작 나를 더 분노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스스로 진보적이라 자부하던 선배들의 아전인수식 변명, 그것이 더 뼈아팠다. 지난날 아이들 교육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각종 일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유를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남의 일엔 권력남용이라 비판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는 인지상정을 내세웠다. 지금 청년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단어가 그들의 입에서 얼마나 공허하게 울리는지, 듣고 있자니 속이 뒤틀렸다.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오래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며 내 안쪽을 긁어내는 느낌이었다. 잊은 줄 알았던, 마음 깊숙이 구겨 넣은 기억의 조각들이 낯선 냄새를 풍기며 되살아났다.
국민학교 입학 전이었다. 조부모와 고모, 삼촌들이 함께 사는 방 세 칸짜리 셋집에서 살았다. 9남매의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조부의 사업 부도로 내가 태어나기 직전에 상경했다 한다. 조부모와 출가했으나 다시 돌아온 고모의 네 식구, 그리고 아직 출가 전인 고모와 삼촌들까지, 그 집은 언제나 북적였다. 남한산성 자락의 거여동 슬레이트 지붕 집을 거쳐, 우리 형제가 취학을 앞두었을 무렵엔 성내동 골목의 1층 가겟집 위층으로 옮겨왔다. 벽지는 군데군데 뜯겨 있었고, 장마철이면 지붕 틈으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 시절 나는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철이 일찍 들어서라기보다, 매일 고단한 어머니의 눈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대식구의 살림을 꾸리며 경제적 회복을 도모하던 아버지는 곧 중동 파견 근로자로 떠났다. 그때부터 긴 부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남겨진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과 노부모, 여러 식구의 삶을 홀로 감당해야 했다.
그 안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 힘없고 어린 막내였다. 조부의 도산 이후, 없는 살림에 입 하나 더 늘어난 불청객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나를 드러내게 챙겨줄 수 없었던 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럴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형은 장손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나는 태어나던 순간부터 재앙의 상징으로 불렸다. 생일상은커녕 새 옷 한 벌 입어본 기억도 희미했다. 방은 물론, 공부를 위한 작은 교자상 하나 얻기까지도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이 내게는 어린 나이의 숙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결심했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나를 ‘미술학원’ 간판이 걸린 유치원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는 열 남매의 막내로, 한때 지역 향교의 전교(典校)였던 외조부가 가장 아꼈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런 막내였던 그녀가, 이제는 가난의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의 막내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그 눈빛 속에는 지난 혈통의 자존심과,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가난의 그림자가 섞여 있었을 것이다.
유치원에서 나는 처음으로 ‘나만의 세계’를 얻었다. 그곳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크레파스의 색이 종이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나는 비로소 세상과 화해할 수 있었다. 집에는 스케치북도, 크레파스도 없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면, 버려진 일력의 뒷면이나 족보책 여백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 가난한 즉흥의 도화지들이 내게는 가장 정직한 일기장이었다.
그림을 향한 몰입은 어른들의 눈에도 비쳤다. 어느 날 원장 선생님은 전국 사생대회 출전을 권했다. 일요일 아침, 많은 식구의 끼니를 챙겨야 하는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나의 손을 잡았다. 덕수궁 석조전 앞 잔디밭에서 열린 대회였다. 모처럼 단둘이 나선 길, 어머니가 직접 싼 김밥 도시락과 보리차가 담긴 보온병이 있었다. 그날만큼은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은 잔디밭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크레파스로 인물을 그리고, 배경은 수채물감으로 채색할 참이었다. 그림도 마음도 순조로웠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순조로움의 끝에는 예기치 않은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양보다 많이 먹은 김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랜만에 마신 음료수 때문이었을까. 배가 뒤틀리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변의가 치밀어 올라 참다 못해 어머니에게 화장실이 급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이 중요한 시간에 괜찮겠니?”라며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내 손을 잡고 화장실로 데려가 주었다. 서둘러 용변을 보고 돌아왔을 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나는 남은 물감으로 빠르게 배경을 채웠다. 어설펐지만 마음은 후련했다. 어린 나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문제는 그 뒤에 있었다. 대회는 당일 심사, 당일 시상이었다. 무대 위에서 이름이 하나둘 불렸다. 참가상, 가작, 장려상… 그리고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놀라고 기쁜 마음에 무대로 올라 상장을 받았다. 상장을 두 손에 쥐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머니의 얼굴빛은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무언의 한숨이 얼굴에 번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아이였던 나는 묻지 않았다. 그저 내가 뭔가 잘못한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만 들었다. 그렇게 일요일 저녁을 보내고, 어머니 곁에서 잠이 들었다. 오랜만의 나들이로 지친 몸은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나 잤을까. 어머니의 손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
잠결에 눈을 뜨자, 어머니의 손이 내 등을 세게 내리쳤다.
네가 화장실만 안 갔어도 우수상이나 최우수상 받았을 거야! 넌 종이 한 장이지만, 아무개랑 아무개는 트로피 받았잖아. 아무리 급해도 끝까지 했어야지!
그날 나는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말의 뜻을 몰랐지만, 그 속담의 체온을 내 등으로 배웠다.
그날의 일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남았다. 왜 그토록 화를 냈을까, 왜 그날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했을까.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되고, 비상과 추락, 여러 생의 굴곡을 지나 어느 겨울 밤,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지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그때 왜 그랬어? 나 화장실 갔다고 등짝 때렸잖아.
한참을 침묵하던 어머니는,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원장님이 그러더라. 주최 쪽에서 네 그림 보고 최우수상 준다고 연락이 왔는데, 찬조금 좀 내달래. 근데 우리가 그때 형편이 어땠니. 내줄 돈이 어디 있었겠어. 못 냈지. 그랬더니 이층 집주인 아들이랑 건넛집 아무개가 트로피 받았잖아. 그게 너무 속상했어. 나한테 속상했는데, 그걸 풀 데가 없더라고. 넌 코 골며 자고 있었고… 미안했다. 엄마가. 많이 아팠니?
어릴 적 그 등짝의 통증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의 일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지워진 듯 묻혀 있었고, 어머니의 사과도 이상하리만치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세상의 곳곳에서 들려오는 부끄러운 변명들을 듣다 보니 그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아픈 것은 가난이 아니었다. 그때의 가난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그 가난을 견디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세대를 넘어 되풀이되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서늘한 슬픔이 밀려왔다. 어릴 적 어머니가 느꼈던 무력함, 지금 내가 바라보는 이 사회의 변명들이 겹쳐졌다.
나는 열심히 살아왔다고 믿었다. 나의 일상이, 나의 성실함이 세상의 변화를 향한 작은 파문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오늘, 그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다시, 어릴 적 그 잔디밭 위의 그림이 떠오른다. 색이 번져가던 하늘 아래, 나는 분명 행복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 행복을 오래 두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가능했을 법한 비정상의 거래가, 45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성립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프다. 소년 노동자가 대통령이 된 시대라지만, 아이들과 청춘들의 꿈과 희망은 여전히 풋풋하고 찬란한 반면, 세상의 어른들은 부끄러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이 사실만으로도 고의적인 비판자가 될 이유는 충분하다. 이제 그만하라 말하는 사람들의 진의도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은 멈출 때가 아니라, 이제 막 다시 시작할 때라는 것을.
내 안의 비관적 견해는 차고 넘친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피곤하지만, 동시에 나태해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책이 된다. 진정한 비판은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중심과 맞서는 일이다. 그 중심의 심연이 우리를 두렵게 할지라도, 사유를 멈출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판을 멈추는 이유는 바로 그 깊은 두려움에 있다. 생각하는 방법은 곧 선택하는 방법이며, 선택은 결국 인간 존재의 윤리를 결정한다.
글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실수는 ‘초기 설정’을 되풀이하는 일이다. 아무리 많은 독서와 글쓰기를 이어가더라도, 선택의 기준을 무심히 초기 상태로 되돌려버리는 순간, 지금까지의 사유는 무위로 돌아간다. 컴퓨터의 초기화처럼 모든 가능성을 처음으로 되돌리는 일, 그것이 글을 무력하게 만든다. 산다는 것은 그저 유의미하거나 혹은 허무한 일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언제나 선택의 진지함 속에서, 그 결단의 순간마다 새로이 만들어진다.
선택을 위한 사유의 반죽을 치대는 일, 그것이 읽기와 쓰기다. 그러나 오늘의 세상에는 책을 내고 싶어 하면서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 속에서 홀로 글을 쓰는 일은, 어쩌면 절망적인 시대에 맞서는 가장 숭고한 행위일지 모른다. 나는 그 무거운 고독의 시간 속에서 단 한 가지를 소망한다. 정확한 선택의 지혜를 얻는 일. 그것이야말로 나를 쓰게 하는 마지막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