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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악마, 뿔이 세개나 달린

가난은 추억에서 밀어내고 싶은 기억일까

by 박 스테파노

기억은 어쩌면 망각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습관처럼 오래된 시간을 차례로 세워보곤 한다. 깊은 수렁 같던 어느 시절, 읽고 쓰는 일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때, 나는 기억의 처음부터 가장 가까운 시점까지 번호를 매겨 써 내려간 적이 있었다. 덕분에 지난 기억들은 나름의 질서 속에 정돈되어 남았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번호 매김은 쇠퇴해 가는 기억을 깨우고 보완하는 연습장처럼 되뇌어진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계단 밑의 단칸방이다. 흑백사진처럼 바랜 그 공간에는 화장실도, 세면대도 없었다. 쪽문을 열면 좁은 틈 같은 통로가 있었고, 그 끝에는 1층인지 2층인지 모를 어정쩡한 계단이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 시멘트를 덧바른 투박한 계단 끝에 합판으로 만든 비틀린 문이 하나 있었다. 샤시라곤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부엌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공간이 있었다. 강원도 외가의 아궁이를 닮은 작은 실내였다. 연탄을 욱여넣은 화구 옆에는 손때 묻은 양은 냄비와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허술한 선반 위에 얹혀 있었다. 솜씨 서툰 목수가 만든 듯한 그 선반 위로는, 어머니의 고단한 허리 펴기가 겹겹이 포개져 있다. 석유곤로의 불길 위에서 밥과 국을 나르던 어머니의 땀방울, 손님이 오면 좁은 방의 아랫목을 내어주던 쩔쩔맴이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 그것이 진짜 기억인지, 어른들의 구술이 섞인 상상인지조차 아득하다.


손님이라곤 중동으로 나가 있던 아버지를 대신해 식솔을 돌보러 오던 조부모와 고모들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전기포트에 물을 올려 커피를 탔다. 뜨거운 물김이 방 안을 감쌌고, 분유처럼 뿌연 프림 냄새가 배어들었다. 나는 그 옆에서 형이 데운 컵을 엎지르고 화상을 입어 울부짖던 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다섯 살 무렵의 기억인지, 더 이전인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아마 기억과 상상이 섞인 흔적일 것이다.


당시 서민 주택가. 추억의 편린 제공


그 뒤의 시간부터는 분명히 내 기억이라 할 수 있다. 그 장면들 속엔 내 얼굴이 없다. 대신 손과 발, 팔과 다리, 몸통과 그림자만이 존재한다. 세상을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먼저 기억하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의 근면과 성실 덕에 우리는 작은 단층집으로 옮겨갔다. 여전히 셋방살이였고 주방은 다른 집과 함께 써야 했지만, 계단 밑이 아닌 반 층을 올라 알루미늄 샷시 문이 달린 현관이 있는 집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곳은 어린이대공원 후문 옆의 서민 주택가였다.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단 하나, 주민들만 알던 개구멍이었다. 나는 그 개구멍을 통해 대공원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 시절의 하늘엔 커다란 새 한 마리가 있었다. 손바닥처럼 활짝 편 날개로 하늘을 가르며 유영하던 맹금류의 비행은 오래된 필름의 한 장면처럼,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천천히 영사되고 있다.



조금 덜 가난해서 행복해


그 중곡동의 집에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이제 확실치 않다. 길어야 일 년 남짓이었을 것이다. 주민등록 초본을 발급해 본 적이 있는데, 초등학교에 들기 전까지 열댓 번의 전입신고가 찍혀 있었다. 정착이란 단어는 우리 가족의 사전에는 없었다. 이사짐은 늘 상자 몇 개로 족했고, 언제나 내일처럼 급한 오늘을 살았다. 그럼에도 그 집의 풍경이 오래 남은 것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가난을 조금은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미한 기대가 움튼 까닭이었다. 동시에, 가난이 무엇인지 몸으로 알아버린 첫 기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 집에는 첫 전축이 있었다. 생필품이라기보다 생존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해준 사치품이자, 내게는 음악의 첫 문이었다. ‘독수리 전축’이라 불리던 국산 브랜드였다. 군 통신장교 출신이 세운 성우전자에서 만든 제품으로, 당시에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전축이었다. 훗날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중동 건설현장으로 떠나기 전 아버지는 전축 외판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실적을 위해 부유한 첫째 고모부에게 억지로 한 대를 팔았는데, 그가 쓰지 않은 채 새것 그대로 우리 집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셋방살이에 티브이조차 없던 그 시절, 음악이 흘러나오는 전축은 작은 성전처럼 느껴졌다.


그 전축의 용도는 주로 라디오 수신이었다. 레코드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만화영화의 OST였다. 휴가를 나온 아버지가 가족의 손을 잡고 극장에서 <마루치 아라치>나 <로보트 태권브이>를 보고 난 뒤, 기념처럼 한 장씩 사오시던 음반이었다. 우리는 그 판을 닳도록 들었다. 아버지의 취향이던 아바(ABBA), 나나 무스꾸리, 닐 영의 음성은 낯설고 근사했다. 클래식 테이프도 몇 개 있었다. 가난 속에서도 음악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위로였다.


그 전축에는 또 하나의 용도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음성편지를 녹음하는 일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아직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어머니가 큼직하게 써준 대여섯 줄의 편지를 따라 ‘그리는’ 것이 전부였다. 글자는 삐뚤빼뚤했고, 문장보다는 선의 형태에 가까웠다. 아버지에게는 분명 기특한 흔적이었겠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을 전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생각해 낸 것이 카세트테이프였다. 공테이프를 전축에 넣고 내 목소리를 녹음했다.


“아빠, 보고 싶어요.”

그 짧은 말 다음에는 동네에서 놀던 이야기, 비석치기나 흙장난 같은 하루가 이어졌다. 테이프의 여백이 남으면 노래도 불렀다. 때로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국제전화는 너무 비쌌고, 대신 매주 충무로의 아버지 회사로 들러 ‘인편’을 맡겼다. 출국하는 노동자들이 편지와 테이프를 대신 가져다주는 일종의 품앗이였다. 그렇게 우리의 음성은 사막의 도시로 건너갔다. 먼 타국에서 그 테이프를 듣던 아버지의 표정을 나는 상상으로만 그릴 수 있었다.


독수리표 전축 복원. '행복한 크리스' 블로거 사진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내 글쓰기의 첫 출발점이었다. 손으로 쓴 편지 대신 목소리로 말을 걸며, 나는 문장의 리듬을 배웠다. 그때부터 편지를 쓰는 일을 좋아했다. 학교에서는 교장 선생의 생일 축하 편지를 맡았고, 성당의 성모의 밤에 바치는 글을 대표로 읽었다. 군대에서는 선임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렇게 언어는 내게 감정의 통로이자 생존의 기술이 되었다.


전축은 또한 세계의 창문이기도 했다. 클래식에서 재즈, 블루스와 팝송, 그리고 국내가요까지, 장르의 경계를 모르고 들었다. 음악은 들을수록 넓어지는 풍경이었다. 아버지가 휴가 때마다 데려가던 극장 나들이, 주말마다 본 영화 프로그램, 그리고 인편으로 받은 비디오플레이어. 그 모든 것이 훗날 내가 영화를 사랑하게 된 밑그림이 되었다. 가난의 기억 속에서도 예술은 끈질기게 틈을 찾아 들어왔다.


하지만 그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난의 냄새를 알았다. 그것은 굶주림보다 더 은근한 감각이었다. 늦은 봄과 이른 여름 사이였던 듯하다. 반바지에 하얀 타이즈를 입고 놀다 넘어졌던 날, 무릎에 구멍이 나 있었다. 빨갛게 물이 들어 있었고, 까진 상처가 마르지 않아 옷자락에 달라붙었다. 그때의 나는 걷는 법보다 상처를 달래는 법을 먼저 배웠던 것 같다.


기억의 장면은 한낮의 골목길로 남아 있다. 해를 등지고 걸을 때, 눈앞에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가운데 하나, 왼쪽 하나, 오른쪽 하나. 그것은 뿔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다. 어머니가 고무줄로 동여맨 머리끈이 햇빛을 받아 그림자 속에서 뿔처럼 흔들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처연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순간 나는 가난의 실루엣을 본 듯했다. 설명할 수 없었으나, 세상이 내게 들려주는 어떤 무거운 언어를 처음 들은 날이었다.


그 집의 기억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바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삶의 여러 첫 장면들이 함께 있다. 음악의 시작, 글쓰기의 시작, 그리고 세계를 향한 감각의 시작.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가난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난은 절망의 색이 아니었다. 결핍이 깊을수록, 세계는 더 선명한 빛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그 집은, 모든 상처와 희망이 동시에 숨 쉬던 내 기억의 가장 오래된 무대였는지도 모른다.



가난과 행복의 부등식


남자아이의 머리를 세 갈래로 묶은 이유는 단순했다. 시간과 돈, 둘 다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살림을 떠받친 어머니의 하루는 늘 바빴다. 봉투 가득 부업거리를 받아다 재봉틀 앞에 앉으면, 밤은 그제야 일터로 바뀌었다. 돈은 더더욱 귀했다. 살아내는 데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쓸 수 없었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내 머리카락은 하루가 다르게 무성히 자라났다. 어머니는 시간을 내어 커다란 재봉가위로 대충 머리 모양을 잡아 주곤 했지만, 그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일이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땀이 많던 나는 늘 뒷머리가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궁여지책이 머리를 묶는 일이었다. 모양도 체면도 없었다. 그저 시야를 트고 땀이 마를 수 있게, 노란 고무줄로 대충 묶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이 머리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는 날이 있었다. 아버지가 귀국해 휴가를 보내는 시기였다. 그날이면 우리는 새 옷을 입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이발소’는 어린 내게 신세계였다. 유리문을 열면 바삭한 비누 냄새와 로션의 향이 섞여 있었다. 하얀 가운을 두른 이발사는 빗과 가위를 가슴주머니에 꽂고 있었다. 의자 위에는 나무판자를 얹어 작은 키를 보완했고, 거울 너머로 흰 수건을 두른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가위가 오르내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공기 중에 흩날렸다. 간지러워도 꾹 참았다. 이발이 끝나면 타일로 둘러싼 세면대에서 뜨겁고 차가운 물이 번갈아 쏟아졌다. 이발사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그 시간은 세상의 어떤 손길보다도 부드러웠다.


아이의 차례가 끝나면, 나는 늘 아버지의 의자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버지는 단정한 머리를 더 단정히 다듬으며 거울 속의 자신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한 해에 한 번뿐인 귀국 휴가, 그 몇 시간 동안 아버지는 잠시 ‘노동자’가 아닌 ‘아버지’로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언젠가 내 머리도, 내 삶도 저 거울 속처럼 가지런해지길 바랐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가위는 늘 ‘재봉’의 도구였지 ‘이발’의 도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난은 도구의 용도를 바꾼다. 재단용 핑클 가위가 내 머리를 일자로 잘랐고, 머리 모양은 언제나 ‘바가지’였다. 귀를 자르지 않으려면 숨도 크게 쉬지 말라는 어머니의 엄포 속에서, 나는 머리칼보다 숨을 먼저 눌러 참는 법을 배웠다. 머리는 바가지였지만, 그 안에는 어린 날의 여름 냄새와 땀띠, 그리고 살짝 시큼한 가난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시절 이발소의 추억. AI Sora


어린 날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운가.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게의 체감으로만 본다면, 그날의 가난이 더 직접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허기를 달래는 일, 학교 준비물을 사지 못해 손으로 그려 넣던 날들, 그것은 생활의 절벽 같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가난은 더 깊다. 그것은 책임의 무게가 아니라, 그 무게를 짊어지고 걸어야 하는 ‘깊이’ 때문이다. 가난한 자의 길은 얕지 않다. 질퍽한 늪과 같아서, 한 발을 떼면 다음 발을 디딜 곳을 찾아야 한다. 걷는다는 행위가 더 이상 ‘전진’의 동사가 아니라, 빠져드는 것을 피하기 위한 ‘탈출’의 동사가 되는 것이다.


그때의 가난은 물질의 결핍이었으나, 지금의 가난은 관계의 결핍, 시간의 결핍, 세계에 대한 신뢰의 결핍으로 옮겨왔다. 그때는 주머니가 가벼웠지만 마음의 언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다. 언어조차 피로를 느낀다. 문장 하나를 세우는 일이 밥 한 끼를 벌어들이는 노동보다 더 고단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절의 머리칼을 떠올린다. 세 갈래로 묶인 머리는 어머니의 손길과 가난의 인내, 그리고 묵묵한 생의 방식을 상징한다. 그 고무줄은 단지 머리카락을 묶은 것이 아니라, 무너질 듯한 일상의 질서를 간신히 묶어 두었던 밧줄이었다. 그 끈이 없었다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흩어지는 머리칼처럼 흩날렸을 것이다.


성장기의 나는 제법 글을 쓰며 살았다. 필명은 ‘꼬마 악마’, 영어로는 Devilkin이라 적었다. 어설픈 현시였으나, 그 안에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 바로 그날의 기억, 세 갈래로 머리를 묶어 그림자에 악마를 그린 날에 대한 헌정이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멀어진 작은 존재로서, 나는 그저 나만의 언어를 갖고 싶었다. 현진건과 김동리의 단편들을 탐독하며,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도 끝내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인물들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들의 문장은 가난을 낭만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의 질감 속에서 인간을 정직하게 드러냈다. 나는 그런 문장들이 좋았다.


그래서 어린 날의 나는, 세상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흔들리던 작은 존재들을 내 글 속에 데려왔다. 그들을 그림으로, 노래로, 때로는 낡은 공책 속 연필글씨로 되살리며, 가난이 남긴 감수의 잔향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그것이 유치한 흉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글쓰기는 이미 일종의 감사의 의식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나를 살게 한 감정의 세례, 그 고요한 빛에 대한 서투른 감사였다.


김기찬 유작 사진집 <골목 안 풍경 전집>. 1989년 아현동


지금도 다르지 않다. 여전히 나는 그 시절 포장조차 되지 않았던 흙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언덕으로 이어지고, 언덕 너머에는 어쩐지 아직도 초록색 웃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웃음을 찾는 일이 내 문학의 길이 되었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그때의 꼬마 악마처럼 세상을 배우며 쓴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모든 가난은 나를 파괴하지 않고 지탱했다. 아버지 머리 위의 가위질, 어머니의 재봉가위, 그 소리들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내 성장의 시간을 재단했다. 그 소리의 울림이 지금의 문장에도 남아 있다. 나는 여전히 가난 속에서 문장을 깎고, 삶의 결을 다듬는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세 갈래의 머리를 묶으며 그 시절의 냄새를 떠올릴 것이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묶던 그 고무줄 하나가, 훗날 내 삶의 윤리이자 문학의 근원이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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