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서울의 하늘은 좁디 좁다
일본의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는 『느슨하게 철학하기』에서 도쿄의 언덕 이야기를 들려준다. 도쿄는 서쪽이 고도가 높고 동쪽에는 충적 평야가 펼쳐진, 언덕이 많은 도시라고 설명한다. 지형학이나 도시 계획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길을 자주 걷지 않는 사람에게는 느끼기 어려운 경험을 이야기한다. 언덕이 그리는 비탈을 오르내리면, 도시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군상들이 각자의 땅을 모아 만든 모자이크처럼 느껴진다고.
아즈마는 자신이 사는 오타구에서 고도와 소득 분포가 일치하는 양태를 발견한다. 언덕 위에는 소득이 높고, 아래에는 낮다. 등고선이 사람들의 소득 격차를 나누는 사회적 경계처럼 보이지만, 그는 이를 단순한 불평등으로 직접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가 다양한 삶을 만들어낸다고 에두른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언덕은 눈에 보인다. 격차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둘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보지 않은 채 살아간다. 보는 거라곤 스마트폰 지도뿐이다. 언덕투성이인 마고메는 이런 맹점을 깨닫게 해준다. 마음에 든다.”
- 『느슨하게 철학하기』 중에서
이 생각에 서울을 비추면, 도쿄를 언덕이라 부르는 지형적 감각이 어설프다는 생각이 든다. 도쿄가 간토 평야 중심의 평지형이라면, 서울은 분지와 산으로 둘러싸인 진정한 언덕의 도시다. 북한산, 도봉산, 인왕산, 관악산 같은 큰 산과, 조선 시대 도성 경계였던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주변의 구릉까지, 길을 걷거나 운전할 때 오르막과 내리막이 잦다. 강남도 상대적 평지일 뿐 경사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이 지형적 특징은 서울의 도시 경관과 주거 형태에도 영향을 준다. 북촌, 정릉, 창신동, 부암동 등에서는 언덕 위 주택가와 골목길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서울의 언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삶과 시선, 일상의 리듬까지 함께 만드는 존재다.
등고선으로 보는 서울
등고선으로 서울을 읽으면, 이 도시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구조를 지닌 도시로 다가온다. 북한산(837m)과 도봉산(740m), 불암산(508m)과 수락산(638m), 관악산(629m)과 청계산(493m), 그리고 내부의 북악산(342m), 인왕산(338m), 남산(262m), 낙산(111m)이 서울을 감싼다. 중앙부, 즉 종로·중구 일대는 해발 20~60m의 낮은 분지 평야가 형성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궁궐과 행정 중심지가 이곳에 자리했다.
등고선상의 서울은 ‘산악성 분지도시’라 부를 만하다. 해발고도는 외곽으로 갈수록 급격히 상승하는 원형 구릉 구조를 이루고, 내부에는 청계천·중랑천·안양천 등 하천이 산 사이를 따라 배수로처럼 놓인다. 이런 분지형 구조는 열섬 현상이나 공기 정체 현상과 맞닿아, 도심 인프라가 밀집한 지역에서 호우와 폭염이 잦은 이유의 한 축이 된다.
서울의 등고선 밀도는 높다. 절대 고도보다 경사의 체감이 급하다는 뜻이다. 대부분 구릉성 지형이라 평지가 드물고, 남서부 목동·가리봉·성산동·강남 일대에서도 그 특성이 나타난다. 한강 유역만이 상대적 저지대 평탄지이며, 강북은 침식·풍화된 화강암 지대, 강남은 한강 퇴적 평탄면이다. 한강 벨트와 강남 부동산 이야기가 금세 떠오른다.
산들이 이중으로 도심을 둘러싼 구조는 외세 침입에 수성이 용이한 자연적 방어 장치이기도 하다. 내사산(북악·낙산·남산·인왕산)은 도심부를 감싸 한양도성 경계가 되었고, 외사산(북한산·관악산·덕양산·용마봉 등)은 서울 외곽을 감싸 도시 전체를 폐쇄형으로 만들었다. 등고선으로 본 서울은 평지가 거의 없는 복합 구릉분지형이며, 중심부는 낮고 사방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자연 요새형 도시다.
이런 지형적 관점을 아즈마 히로키의 도쿄 이야기와 맞대면, 흥미로운 시선이 생긴다. 도쿄에서는 소득 격차가 등고선과 연관된다는 발견이 있었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떠할까. 결론적으로, 서울 역시 지형이 소득 계층의 공간적 분리에 영향을 미쳐 왔지만, 구릉과 분지라는 특성 때문에 그 양상은 도쿄와는 다소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서울의 등고선과 소득 격차
서울의 지형과 소득 격차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오랜 인식대로 ‘달동네는 고지대’, ‘신흥 부촌은 저지대’라는 경향이 현재의 서울에도 남아 있다. 달동네는 주로 산기슭 고지대에 형성되었다. 1960~7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청계천, 왕십리 등 도심 저지대의 빈민들은 철거와 이주 정책으로 경사가 심하고 개발이 어려운 외곽 산비탈로 밀려났고, 그곳이 달동네가 되었다.
이 지역은 건축이 어렵고 도로, 수도 등 기반 시설 설치가 힘들어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자연스럽게 저소득층이 자리 잡았고, 성동구 금호동·옥수동(재개발됨), 종로구 창신동, 노원구 백사마을(마지막 달동네 중 하나) 등이 대표적이었다.
반대로 신흥 부촌은 대체로 저지대 평탄지에 형성되었다. 한강의 퇴적 작용으로 만들어진 강남 일대는 1970년대 이후 급속히 개발되며, 넓고 평탄해 계획적 도시 개발과 고급 주거 단지 조성이 용이했다. 투자를 통해 자산 가치가 급등하면서 고소득층이 밀집했고, 반듯한 도로망과 교육·인프라가 잘 갖춰져 주거 선호도가 높았다. 그러나 지형적 취약성으로 여름철 강우 때마다 물난리를 겪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서울의 전통적 부촌 일부는 고지대에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성북동, 평창동, 한남동(일부)은 부유층이 산의 경사면을 선택해 조망과 프라이버시를 확보했다. 달동네와 달리, 개발에서 밀려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고지대를 선택한 경우다.
이처럼 서울의 지형은 과거 도시화 과정에서 계층 간 공간적 분리를 심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일본 도쿄와 달리, 서울은 전통 부촌과 달동네가 고지대·저지대 양쪽에서 병존하며, 복합적인 양상을 띤다. 확실한 것은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기득권 의식이 강화되었고, 그 의식에서 원하는 등고선은 항상 높은 곳, 더 높은 곳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고층 마천루와 높은 주거 지대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스스로를 남과 구분짓는 상징적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서울의 언덕 위 삶과 계층적 풍경
서울의 등고선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는 단순한 건물과 도로의 집합이 아니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만들어낸 삶의 리듬 속에 존재한다. 달동네라 불리는 산기슭 고지대는 과거 철거와 이주로 밀려난 저소득층의 흔적을 담고 있다. 좁고 굽은 골목길, 계단과 경사로가 연결된 주거지, 도로와 수도 등 기반 시설이 불완전한 채 남아 있는 풍경은 단순한 도시의 흉터가 아니다. 거기에는 생존과 적응, 소속과 단절이 교차하는 도시적 체험이 스며 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오르막을 타고 내리막을 굽이치며, 도시가 제공하는 공간적 압력과 무게를 몸으로 느끼게 한다.
반대로 저지대 평탄지의 신흥 부촌, 강남 일대는 또 다른 도시적 리듬을 가진다. 한강의 퇴적 평탄면 위에 계획적으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와 반듯한 도로망은 안정된 삶의 질과 높은 주거 선호를 상징한다. 여유로운 조망과 잘 갖춰진 인프라는 고소득층의 편안한 일상을 지탱하고, 여름철 물난리와 같은 지형적 취약성마저, 어쩌면 삶의 일부로 감각되기도 한다.
서울의 전통적 부촌은 달동네와는 다른 고지대의 의미를 보여준다. 성북동, 평창동, 한남동 일부의 주택들은 경사면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조망과 프라이버시를 확보하는 선택적 고지대다. 이곳은 의도적 선택의 결과이며, 개발의 배제나 제약으로 형성된 공간이 아니다. 고도는 단순한 높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삶의 품격과 사회적 위치, 그리고 스스로를 남과 구분짓는 상징이 된다.
서울의 언덕과 등고선 위 삶은 단순히 고저의 문제만이 아니다. 오르내림을 따라 형성된 사회적 계층, 선택과 배제, 그리고 기득권의 시선이 중첩된 풍경이다. 발을 디딜 때마다 체감되는 경사와 골목길의 구부러짐은, 도쿄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등고선과 소득 격차의 연관’을 서울의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확인시킨다. 다만 서울은 달동네와 신흥 부촌, 전통 부촌이 고지대와 저지대 양쪽에서 교차하며, 등고선과 사회적 계층이 더욱 복합적으로 얽힌 도시다.
결국 서울의 언덕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삶의 호흡과 사회적 구조를 함께 빚어낸 존재다. 오르막길을 오를 때, 발바닥에 느껴지는 경사의 저항과 골목 너머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 좁은 계단 끝에서 마주하는 조망과 햇살, 그런 체험이 모여 도시의 계층적 풍경과 개인의 삶을 동시에 읽게 한다. 서울의 언덕은, 높낮이의 차이를 넘어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 선택과 기회의 풍경을 각인시키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서촌에는 싸전이 있었다
서울의 전통 부촌이 고지대에 형성된 데에는 과거 풍수지리적 관점과 일제강점기 또는 근대 이후 특정 계층의 주거 선호가 얽혀 있다. 그러나 전통 주거지 중 오래된 종로의 서촌에 가면 조금 다른 설명이 필요해진다. 서울 서촌을 걸어본 적이 있는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올라선 서촌의 하늘은 유독 넓어 보인다. 근처 청와대가 있고, 경복궁과 사직이 있는 문화재 인접 지역이라 서촌은 건물의 고도 제한이 있다. 그래서인지 광화문 일대의 세종로 높은 마천루가 갑자기 꺼져 내려 사라지는 스카이라인이 넓고 낮게 펼쳐진다. 서촌의 매력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서촌은 경복궁의 서쪽 지역을 일컫는 지명에서 유래한다. 성곽으로 에워싸인 조선시대 한양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우대(웃대, 上村), 장동(壯洞), 북리(北里)라고도 불렸다. 한성부의 행정구역인 방 구분에서 북부로 포함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행정동은 매우 잘게 나누어져 있다. 역사와 문화적 의미가 있는 사직동, 체부동, 통의동, 수많은 예술가들을 품은 누하동, 통인동, 살아있는 박물관 같은 옥인동 일대, 그리고 현대사의 서늘함과 함께 기억되는 효자동, 궁정동, 신교동, 청운동 등, 각 골목마다 층층이 이야기가 쌓여 있다.
사극이나 역사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종묘사직’을 접하게 된다. 바로 그 종묘사직의 사직단이 교회 네거리 서쪽 길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아시다시피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곳으로,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한다. 다른 한편 ‘사직단’은 국가에서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결국 종묘와 사직은 나라와 왕실의 전통과 관습을 담은 상징이 된다. 그래서인지 서촌에는 참 신묘한 기운이 흐른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옥인동 일대에는 서촌의 문인 이상을 비롯해 천경자, 노천명, 이상범과 같은 예술·문인들이 거주했지만, 난개발이라는 흑역사도 있다. 더욱 뼈아픈 역사도 숨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 받은 거금으로 매입하고 집을 지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자수궁터 양쪽으로는 매국노 중 투톱인 이완용과 윤덕영의 집터가 널찍하게 자리 잡았다. 현재 자수궁터는 군인 아파트 자리로 변했고, 앞길은 겸재 정선이 놀던 곳이라 겸재길이라 명명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청계천, 광화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등을 돌아 금천교, 보안여관, 김가진 가문, 이상과 구본웅의 이야기가 서촌에 있다. 잘 알지 못했던 지역과 역사 속 인물의 이야기들은 일제 침략과 전쟁, 그리고 아픈 현대사(4·19, 10·26, 12·12 등)를 관통한다. 역설적으로, 여러 제약 때문에 개발될 곳이 없어 부상하고 있는 지역이 된 서촌. 역사적으로도, 현재에도, 서촌은 수많은 깊은 이야기가 숨 쉬고 있고, 거쳐 간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다.
서촌은 서쪽의 인왕산과 북쪽 계곡들로 이어진 지형이라, 서북쪽 높은 지대에서 경복궁 영춘문 앞 평지로 이어지는 구조다. 앞서 이야기한 상승 지대의 욕구로, 서북쪽 높은 지대에는 고관대작들의 기거처가 자리 잡았고, 평지로 내려오는 골목에는 그 댁들의 녹을 먹는 각종 출신 성분의 중인, 서민들이 자리 잡았다고 전해진다. 북촌은 실세가 살았고, 서촌은 은퇴자나 권력에서 먼 중등 관리의 집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조선 초기 한양 천도 후 고관대작들이 자리 잡은 곳은 틀림없다.
오늘날에도 그런 동네 구성은 일부 살아 있다. 인왕산 자락에는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본가가 있고, 정 회장 기일이면 현대가들이 총집합한다. GS그룹 창업자 구 씨 가문의 본산인 효자동 언덕길에는 연수원이 자리 잡았다. 흥미로운 점은 도로변까지 내려오면 있는 시장이다. 기름 떡볶이와 엽전 도시락으로 유명한 통인시장도 있지만, 경복궁역 1·2번 출구 앞 골목 속 영천시장(체부동 먹자골목)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설과 유래가 있지만, 영천시장은 ‘상미전’이라고 하는 ‘싸전’이라는 이름이 유력하다. 상미전(上米廛)은 조선시대 종로 서쪽에 있던 싸전으로, 종로 동쪽의 싸전인 하미전(下米廛)에 상대되는 명칭이다. 특히 품질이 좋은 쌀을 파는 점방으로 소문이 났는데, 그 이유는 고관대작의 녹봉을 쌀로 받는 서촌의 서민과 노비들이 쌀과 다른 물품·화폐로 교환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녹봉의 ‘정부미’는 양질의 품목이 되어 제법 값을 쳐 받을 수 있었다.
서촌의 언덕과 골목, 싸전의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오늘날의 도시 풍경 속에도 그 삶의 흔적과 계층적 구조, 그리고 역사적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서울도 고향이 될 수 있을까
서울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곳이다. 잠시 수도권 신도시와 대전에서 지낸 시절도 있었지만, 군 복무를 포함하지 않으면 45년 넘게 이 서울에 몸을 두었다. 초·중·고를 서울에서 마쳤고, 대학도 직장도 대부분 서울이었다. 아내도 서울 토박이로, 중학교 동창이라 이 도시는 내게 깊은 의미를 가진 장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늘 이질감을 느낀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다.
한때 성공과 부를 좇아 달리다가 멈춘 적이 있었다. 그때 몸을 추스르고 서울을 걸었다. 사직에서 종묘, 종묘에서 동대문, 낙산을 넘어 성균관까지. 이어 삼청동, 재동, 가회동, 성북동으로, 며칠 뒤 서촌을 지나 세검정, 부암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처음 서울의 길이 동에서 서로 이어지면 종로, 퇴계로, 을지로처럼 ‘로’가 되고,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면 1가, 2가처럼 ‘가’가 된다는 사실도 알았다(세종로가 생뚱맞은 이유다).
종로, 을지로, 퇴계로를 걸어 보고 남산을 두어 번 넘어 보았다. 국립극장에서 타워로 올라 회현동, 리라초등학교를 넘어 해방촌을 가로질렀고, 연대 앞에서 합정까지도 우습게 느껴졌다. 왕십리와 화양리의 대학가, 어린이 대공원과 어린이회관을 돌며 한강 다리도 자연스레 건너 보았다. 강남 테헤란로를 끝에서 끝으로 걸어 송파대로를 가락시장까지, 목동과 오목교, 봉천동의 고갯길과 사당에서 인덕원으로 이어지는 길도 따라보았다. 과천의 서울대공원까지, 서울의 면면이 발끝에 닿았다.
몇 년 뒤 짧은 공적 경험으로 서울 25개 구의 면면을 마주했다. 동네를 살피고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걷고 싶은 거리를 그려 보고, 넓은 하늘을 위해 고도 제한도 고민했다. 지난 시간 속에는 섣부른 욕심도, 이해시키지 못한 진심도, 뒤집혀 버린 성심도 남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을 생각하면 바라는 것이 있다. 고향이 되고, 동네가 되는 서울. 명절마다 고된 귀성길에 오르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나에게 없고, 그들에게 있는 것이 바로 고향 같았기 때문이다. 고향이 없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서촌의 싸전은 ‘시장’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시대의 구조 속에서 태어나 계급을 부여받지만, 계급을 떠나 한 동네에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갔다는 증거가 ‘싸전’에 남아 있다. 귀족과 관리, 기득권층은 일자리를 만들고, 녹봉을 내려 시장을 형성했다. 계급이 한 동네에 공존한 모습은 다른 문화에서 찾기 어렵다.
공직에 있을 때 서울 25개 자치구, 110여 행정동, 2200여 투표소의 과거 투표 성향과 소득 수준을 비교하다가, 지표에서는 유의미한 관계를 찾기 어려웠다. 전체 그림을 보다 얻은 인사이트는 역설적이었다. 서울에는 ‘부자만의 동네’, ‘가난한 이들의 동네’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파트’에 의해 나뉠 뿐, 강남 3구에도 빈곤층이 공존하고, 상대적 소외지역 역시 극빈의 지표는 소득으로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주택’, 특히 아파트의 개발과 부동산 가격 형성에 따라 자산이 달라지고, 이는 곧 정치적 성향으로 이어진다.
‘계급 배반투표’라는 표현처럼, 경제 계층의 이익과 반대되는 투표 성향도 아파트 가격에 따라 좌우된다. 강남 3구의 아파트 가격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권 때 큰 상승 혜택을 누렸지만 투표는 반대였다. 극빈 지역 주민은 복지보다, 세입자 보호도 미흡한 ‘뉴타운’ 공약에 표를 몰아주었다. 토건과 부동산 투기 세력에게 돌아갈 혜택이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올 수 있다는 공리적 개인주의, 즉 보수적 투표 성향이 형성된다.
정치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수백 만 호 이상의 ‘수도권 아파트 공급’을 경쟁하듯 공약한다. 모든 부동산과 서민 경제가 아파트에 집중되는 현실. 빈곤층마저도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아파트에 기대야 한다. 서울이 고향이 되기 힘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울려 살던 동네는 비싼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담장으로 가로막히고, 넉넉한 이들의 기부는 오롯하게 자신의 호주머니로 되돌아가며, 시장의 자영업자들은 빚으로 살아가는 이웃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오늘따라 서촌의 넓은 하늘이 그립다. 신분과 재물이 달라도, 권문세가이든 기술 좋은 중인이든 노동하는 서민이든 한 동네를 이어가던 곳. 나라님 녹봉으로 모인 쌀이 싸전으로 흘러 작은 경제 공동체를 이루던 그곳, 서촌의 하늘 말이다. 누가 이런 내일을 약속해 줄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지만, 고향이라 부르기 망설여지는 쉰하고 세 살 아재의 바람은 그저 꿈일까. 그래도 꿈꾸어 본다. 고향이 되는 서울, 그런 대한민국.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함께 꾸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