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꼴값을 다하고 살았는가?
가장 오래된 기억은 대개 그럴듯한 거짓말로 덮여 있다. 그것이 내가 직접 겪은 일인지, 혹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착각한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세월이 갈수록 그 경계는 더욱 희미해진다. 그럴 때면 나는 기억의 장면을 하나씩 떠올려 본다. 그 속에 내 얼굴이 선명히 드러나 있다면, 오히려 만들어진 기억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진짜 기억 속의 나는 늘 손과 발, 몸의 일부로만 존재하니까. 그러나 이 가설도 결국 증명되기 어렵다. 첫 기억에는 이미 나도 모르게 색이 입혀지고, 선명하지 않은 윤곽이 보정되어 있을 테니. 그렇게 오래된 기억은 언제나 모호하고, 가장 깊이 남은 장면들은 날짜나 순서를 잊은 채 불현듯 떠오르곤 한다.
회상과 기억에 대해 말하려니, 유치원 시절의 첫 봄소풍이 문득 가장 선명하게 스친다. 장소는 뚜렷하지 않다. 조선의 어느 왕릉이었는지, 뚝섬이었는지, 혹은 서울 외곽의 유원지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침 일찍 대절버스에 부모님들과 함께 올라탔던 설렘만은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도착한 곳에서 우리는 율동을 배우고, 노래를 부르고, 수건돌리기와 보물찾기를 하며 낯선 흥분 속에 도시락을 펼쳐 들었다. 모두가 원을 그리며 앉은 자리에서 한 사람씩 나와 노래와 율동을 선보이던 순간이 이어졌다. 그때의 기억은 훗날 내 삶의 여러 국면 속에서 여러 차례 되살아난 아찔함의 기원이 되었다.
그날 나의 지정곡은 <사과 같은 내 얼굴>이었다. 동그란 손짓으로 꽃받침을 만들고 고개를 들어 올리는 찰나, 눈앞이 빙 돌았다. 모두가 웃는 듯했고, 아니, 다른 순서보다 훨씬 더 크게 웃음이 터졌던 것만 같았다. 노래를 끝내기가 어려울 만큼 어질하고 답답한 감각이 밀려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때가 내 생애 첫 공황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이후로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음악 실기 시험이나 군 시절의 억지 무대 외에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노래방 문화가 한창이던 시절에도 나는 노래방 문턱을 넘지 않았다. 대신 그 앞 편의점에서 소주를 기울이며 친구들의 열광이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모친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그 유치원 시절의 노래가 떠올랐다. 사람들은 왜 내 노래에 웃었을까. 내 음정이 엉망이었을까, 박자가 어긋났던 탓이었을까. 그렇게 묻자 모친의 대답은 뜻밖에도 단호하고 간결했다.
“네 얼굴이 똥그라니까.”
그 한마디에 오래 묻혀 있던 수수께끼가 풀리듯 웃음이 났다. 나이가 들며 얼굴의 원심이 조금씩 풀리고 원주는 길어졌지만, 여전히 부친을 닮은 내 얼굴은 컴퍼스로 그린 듯 둥근 윤곽을 지녔다. 어릴 적 볼살 가득하던 시절의 나는 더욱 달덩이 같았을 것이다. 커다란 머리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얼굴로 ‘사과 같은 내 얼굴’을 부르며 양팔로 원을 그려 꽃받침까지 만들었으니, 그 장면에 웃음을 감추는 일이야말로 오히려 동심의 꽃밭에 침을 뱉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기껏 휴일을 내어 아이들의 기를 세워주려 따라나선 부모들에게, 그 웃음은 잠시나마 세상의 팍팍함을 잊게 해주는 파안대소였을 것이다. 조롱이 아니라, 빡빡한 1970년대의 생을 버텨내던 사람들의 작은 희망의 미소였을지도. 노란 유치원 모자를 턱끈까지 단단히 매고, 동그란 얼굴의 아이가 사과처럼 둥근 제 얼굴을 노래하니 웃음이 터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모친의 이 늦은 해석 덕분에 나는 오랜 세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꺼리게 된 이유를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모진 세상을 견디듯 노래를 부르고, 어쩌면 스스로에게 덮어씌운 오해의 굴레를 풀기 위해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이 오십이 넘어도 외양이라 부르는 겉모습이 신경 쓰인다. 살이 찌면 그 나름대로, 빠지면 빠진 대로, 거울 앞에서 나는 늘 지난 시간을 마주하며 한숨처럼 긴 숨을 내쉰다. 하루 동안 내가 내 얼굴을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남들보다 훨씬 적다는 결론에 닿는다.
남들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을 내 기준으로 다듬고 가꾼다는 것은 본래 모순이 아닐까. 내 삶은 남들이 그어 놓은 그래프 위에 서 있으면서도, 정작 내 겉모습은 언제나 내 마음속 이상향에 머문다. 뉴스가 전하는 평균치를 스스로의 바닥이라 여기며, 외양의 치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마음 깊은 곳의 결여에서 비롯된 일인지도 모른다.
“보시니, 참 좋았다.” ― 창세기 1.31
세상이 창조되던 그 마지막 날, 창조주는 쉼을 가지며 스스로 만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빚어낸 세계가 참 좋았다고. 특히 자신의 모상(模像)으로 만든 인간의 얼굴을 더욱 아꼈을 것이다. 부모의 마음과도 닮았다. 자신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 에덴의 한복판에서 숨 쉬고, 행복과 자유를 누리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의 ‘꼴값’을 감당하지 못해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꼴’이라는 말은 본래 모양과 형태를 뜻하지만, 언제부턴가 비하의 어조를 띠기 시작했다. 원래는 ‘삼각꼴’, ‘마름모꼴’처럼 사물의 형태를 가리키던 통칭이었으나, 이제는 ‘꼴에~’, ‘꼬라지’, ‘꼬락서니’ 같은 말로 사람의 행색이나 처지를 낮잡아 부르는 쪽으로 쓰인다. 그 속에는 ‘값’의 의미가 숨어 있다. ‘얼마 얼마 꼴’이라 표현하듯, 꼴에는 언제나 값이 매겨진다. 모양에 값이 붙는 세계, 어쩌면 인간이 낙원에서 잃어버린 첫 질서이자 지금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첫 얼굴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회고의 이야기를 곁들여 외모 한탄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꼴값’을 다하였는가에 대한 쉽지 않은 평가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부친과 판박이로 닮았다는 말은 처음엔 좋았으나, 점점 짜증이 되는 말로 바뀌었다.
앞서 말한 유치원 소풍에도 부친은 자리하지 못했다. 열사의 땅, 사우디라 통칭하던 아라비아 반도와 그 주변 산유국에서 건설회사 파견 직원으로 십수 년을 버티셨다. 소풍은 물론 입학식, 졸업식에서도 부친의 부재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어버이날마다 만든 카네이션은 모친의 양가슴에만 달려 있었다. 부친은 언제나 긴 출장 중이었다.
열 해 전, 나는 부친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요양원 호스피스 병실에서 마지막을 기다리다, 잠시 집에 들른 사이에 소천하셨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깊은 절망 속에 있던 시기였다. 처지나 상황으로 보자면 지금이 더 최악이라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사십 년 인생에서 가장 크게 무너졌던 때였다. 고통스런 통증의 시간을 줄이고 조금만 더 일찍 돌아가셨더라면 장례라도 근사히 치를 수 있었을 텐데. 넘어져 있던 이로서 상주의 자리에 앉는 일은 가슴이 터질 듯한 일이었다.
분당의 큰 성당 지하에 차려진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부친의 영정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닮았네.” 그 말이 그렇게도 여러 번 들려왔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당신의 꼴을 하고 태어난 내가, 당신의 버거운 삶을 온전히 빛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친은 가톨릭 병원에 자신의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셨다. 그래서 발인과 안치는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카메라를 좋아하던 부친은 귀국 때마다 가방에 장비를 가득 담아와 가족사진을 찍곤 하셨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가족의 중심에서 비껴나자, 그 습관도 사라졌다. 그 결과 가족사진은 오래된 기억 속 한 장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내게 남은 아버지의 마지막 사진은 대학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병원 복도를 탐색하던 어느 날의 뒷모습이다. 부친과 나는 호기심이 닮았고, 특히 새로운 공간에 대한 궁금증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참 닮은 꼴이다.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왜 그때 그 장면을 찍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왜소해진 몸의 그림자가 유난히 가슴에 닿았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훗날 내가 휠체어에 기대어 살아가던 시간에 대한 예감이었을까. 어느새 그 뒷모습 위로 내 얼굴이 겹쳐졌다. 닮음의 계보가 그렇게 이어졌다.
‘꼴값을 다하자.’ 학창 시절 수첩에 자주 적어 넣던 다짐이었다. 말하자면 나의 모토이자 작은 경전이었다. 부친이 물려주신 나쁘지 않은 외양에 걸맞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는 약속이었다. 그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깊은 신앙으로, 그리고 물려받은 성실함으로 인정받으며 살았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이 남겨준 ‘꼴’ 덕분이다.
하루가 다르게 계절이 깊어진다. 주저앉을 뻔한 내 삶의 마지막 결심은 여전히 같다. 꼴값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 그 결심 위에서 욕심을 덜어내고, 내면의 질서를 지켜내는 글을 쓰고 싶다. 꼴값에 맞게.
※ 어제 손가락이 둔한 탓에 잘못 발행되었답니다. 읽어 주신 분들과 댓글까지 달아 주신 분들께 죄송한 사과의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