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위에 오른 시대, 말을 잃은 플랫폼

주간 단상 - 이미지의 과잉과 본질의 망각

by 박 스테파노

1.

새해라는 시간의 감각이 또렷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날이다. 시간의 변화는 체감보다 풍경으로 먼저 다가온다. 비접촉과 비대면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달력의 장이 넘어가는 일조차 화면 속 이미지로 인식된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이른바 ‘말의 해’를 맞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붉은 갈기를 휘날리는 말 위에 올라탄 이미지들로 가득 찼다.


AI 기술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다. 사람들은 손쉽게 자신을 ‘적토마’의 기수로 설정하고, 이를 신년의 상징처럼 소비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AI가 대량 생산된 조악한 슬롭(slop)들은 불편한 잔향을 남긴다.


이 현상은 시각적 쾌락과 과시욕이 결합된 ‘스펙터클의 사회’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기 드보르는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실재는 이미지의 반영이 된다”고 짚었다. 병오년은 성찰의 대상 대신 콘텐츠로 박제되며, 말을 길들이는 형상은 자연과 운명을 인간의 의지 아래 두려는 기술적 오만을 암시한다. 발터 벤야민이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언급한 ‘아우라의 붕괴’는 이제 AI를 통한 무차별적 복제로 이어지며 절기 문화의 제의적 깊이를 희석한다.


십이지신도 중 말을 상징하는 ‘오신(午神)’.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명리학에서 병오(丙午)는 불꽃이 치열하게 타오르는 양(陽)의 극치로, 제어보다 경외해야 할 에너지의 분출을 뜻한다. 그러나 AI 이미지 속 인물들은 일관되게 말을 제압한다. 이는 자연을 도구화해온 근대적 주체의 관성을 반복하며, <엑스 마키나> (2015)에서 창조물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태도와도 겹친다. AI는 화려한 이미지를 구현하지만, 그 과정에서 야생성과 통제 불가능한 위험성은 제거된다. 기술이 맥락을 단순화해 개인의 장식품으로 치환하는 순간 운명론적 겸허함은 사라진다.


병오년은 스스로를 태워 본질을 드러내는 정화의 시간이다. SNS를 채운 이미지는 이러한 성찰보다 세속적 번영의 투영에 가깝다. “디지털 기술은 고통 없는 사회를 지향하며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은폐한다”는 한병철의 분석처럼, 적토마 이미지는 격동에 대한 두려움을 ‘성공 서사’로 덮어버린다.


이제 우리는 가상의 영웅에서 벗어나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무엇을 버려야 할지 묻는 쪽에 서야 한다. 기술의 픽셀은 전통의 깊이를 대신할 수 없다. 화면 속 적토마에서 내려와 현실의 뜨거운 지면을 딛고 병오년의 화염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 그것은 제압이 아닌, 말(馬)과 말(言)에 대한 진정한 동행의 상상력이다.



2.

어느 해의 일본 아사히신문 1월 1일자 전면광고를 우연히 마주했다. 광고의 주인은 코단사(講談社),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이자 세계 15대 출판사 명단에 이름을 올린 곳이다. 이 유서 깊은 출판사가 새해 첫날 주요 일간지 전면에 실은 문구는 뜻밖에도 단순했다. “서점에 가자.”


스타워즈 첫 장면의 스크립트 형식을 차용한 이 광고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분명 서점이다.]

서점에 가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고, 10,000km 떨어진 장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자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우리는 대화를 반복한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는, 그 자세 속에서, 사람과 사람은 이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단이 외쳐지는 것 같은 시대에, 그럼에도 서로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서점에 가자.


코단사(講談社)의 아사히 신문 광고. 아사히 신문


이 광고를 읽고 난 뒤 한국의 서점과 출판 현실을 떠올리자 마음 한켠이 씁쓸해졌다. 지난해 독서 관련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텍스트 힙’이었다.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풍경이 어느 때보다 활발히 펼쳐진 해였다. ‘텍스트 힙’을 시작으로 ‘독파민(독서 도파민)’, ‘오독완(오늘의 독서 완료)’ 같은 말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 키워드들의 표면과 이면을 들여다보면, 희망과 불안이 교차한다.


이 흐름을 이끈 주체는 의외로 1020세대였다. ‘요즘 세대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오래된 우려와 달리,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독서 문화를 향유한다. 온라인 세계의 과잉된 자극에서 잠시 물러나 활자에 몰입하고, 아날로그적 감각과 지적 호기심을 회복하며,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한다. 읽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마음에 남은 문장을 옮겨 적거나, 감상을 나누며 독서의 즐거움을 확산시킨다. 이런 작은 파동들이 겹치며 ‘텍스트 붐’이라 부를 만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현상이 일시적인 부밍(booming)에 그치지는 않을지 의문도 남는다. 숏폼에 올리기 위해 시집이 선호되고, 긴 호흡의 글보다 짧은 아포리즘 모음집이 각광받는다. 서사는 점차 뒤로 밀리고, 스레드에 올릴 수 있는 짧고 굵은 메시지가 전면에 선다. 읽기라기보다 소비에 가까운 독서, 남기기보다 전시하기 위한 텍스트가 늘어나는 풍경이다.


그래서일까. 꾸준히 머물며 글을 쓰는 이곳에서 체감되는 변화들은 마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서점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장소라는, 너무도 오래되고 단순한 명제가 오늘에 와서 다시 질문처럼 다가온다. 과연 우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그 질문에 성실히 답할 수 있을까.



3.

브런치에서 작가의 글을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방식이 ‘구독’에서 ‘팔로우’로 바뀌었다. 페이스북의 친구 맺기가 팔로우로 전환되었을 때처럼 관계의 온도와 거리감이 달라진 느낌에 마음이 편치 않다. 이는 단순 용어 교체를 넘어 콘텐츠 소비 방식과 창작자-향유자 간 심리적·사회적 관계를 재설계하려는 신호다. 유료 모델인 ‘멤버십 구독’과의 혼선을 피하려는 판단을 넘어, 텍스트 중심에서 관계 중심의 텍스트로 이동하려는 플랫폼 경제의 지향점이 읽힌다.


‘구독(Subscription)’은 신문·잡지 시대의 언어로, 정해진 주기에 신뢰할 만한 콘텐츠가 도착하리라는 독자와 발행인 간 계약이다. 이 관계의 중심에는 창작자의 인격보다 결과물인 텍스트가 놓인다. 반면 ‘팔로우(Follow)’는 SNS의 언어다. 콘텐츠보다 사람이 중요하며, 텍스트를 읽겠다는 결심보다 타인의 사유를 따라가겠다는 태도가 우선한다.


사회학적으로 이는 공중(Public)의 쇠퇴와 네트워크화된 개인의 부상을 뜻한다. 독자는 텍스트에 침잠하는 주체에서 창작자의 페르소나를 소비하는 팔로워가 된다. 이는 한병철이 『서사의 위기』 (한병철, 2023)에서 서술하듯, 서사적 몰입인 ‘구독’이 파편적 정보 흐름에 몸을 맡기는 ‘정보적 자극(팔로우)’으로 대체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신문 구독은 약속이 기반. 한국일보 기록 사진


철학적으로 팔로우는 창작자를 ‘권위 있는 저자’에서 ‘동행하는 매개체’로 이동시키는 순기능도 있다. 구독이 완결된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라면, 팔로우는 창작자의 사유 과정과 일상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관음적 연대다. 이는 미셸 푸코가 말한 ‘시선의 권력’이 수평적으로 확장된 형태로, 창작자는 팔로워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조율하고 팔로워는 따름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글의 가치보다 ‘글 쓰는 사람’이라는 브랜드를 앞세우는 변화는 불편하다. 도입될 유료 멤버십 역시 정보 구매보다 팬덤 기반 후원으로 정당화될 가능성이 크다. ‘응원하기’ 모델을 인간적 유대라는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하려는 플랫폼의 생존 전략이자, 글이 아닌 글쓴이를 파는 현재 콘텐츠 시장의 축소판이다.


결국 ‘팔로우’는 텍스트의 성채에 머물던 작가들을 광장으로 끌어내려, 존재 자체를 상품으로 규격화하려는 디지털 자본주의의 정교한 장치다. 구독이 약속이라면 팔로잉은 흥미의 지속이다. 그 차이는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4.

브런치의 변화는 기대보다 우려를 부른다. 운영 기획의 빈약함과 그 바탕에 있어야 할 기업가 정신 및 철학의 부재가 또렷하기 때문이다. 플랫폼 기업의 윤리적 빈곤은 우리 사회 전반을 잠식하는 구조적 위협이 되었다. 텍스트 플랫폼의 엉성한 운영은 문화가 자본 논리에 포섭되는 흐름을 가속한다.


디지털 자본주의가 문화라는 공공재를 효율성으로 재단하는 방식에 날카로운 비판이 요구된다. 거대 플랫폼의 서비스가 ‘성과지표(KPI)’와 ‘유료화 모델’에 매몰되는 과정은 텍스트의 고유한 아우라가 알고리즘 속에서 해체되는 장면과 겹친다. 플랫폼의 ‘사회적 기여’가 브랜드 관리를 위한 ‘문화적 분칠(Cultural Whitewashing)’에 머무는 경우도 적지 않다.


Illustration by Andrew Rae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생활세계의 식민화’처럼 창작의 자율적 영역이 자본에 의해 잠식되는 풍경이다. 효율성 극대화가 노동과 존엄을 수치화한 ‘쿠팡 사태’와 그 과정에서의 무비판적 태도는 자본 취득을 최우선하는 플랫폼의 현실을 보여준다.


브런치는 글쓰기 가치보다 이용자 데이터를 성과로 환산하는 단기 성과주의에 집중한다. 이는 작가 정신에 대한 인문학적 감각보다 지표에 반응하는 ‘플랫폼 관리자’ 정체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의 윤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용어 변경과 유료화 시도는 인격적 유대를 상품 계약으로 환원하려는 계산처럼 보인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1996)에서 경고했듯, 공적 영역이 사적 이익을 좇는 사회적 영역으로 변질될 때 담론은 힘을 잃는다. 운영진이 기대하는 트래픽은 휘발될 뿐이며 이는 창작자들에게 소외감으로 되돌아온다. 문제는 업무 숙련도가 아니라 콘텐츠의 정신적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빈곤이다. 이 지점이 아프게 감지되기를 바란다.



5.

쿠팡이 일으킨 물의는 단순한 법 위반을 넘어, 공동선으로 축적된 사회적 유산을 가로채고 엘리트와 이익을 결탁하며 몸집을 키운 방식의 문제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이를 ‘야매전기’에 비유했다. 과거 공공 전기선에 불법 접지해 전기를 훔치고 공무원에게 뒷돈을 주며 약탈을 지속하던 전기 도둑들과 쿠팡의 행태가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다.


쿠팡 성장의 발판은 계량 가능한 인프라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한 ‘신뢰’라는 유산이다. 자리를 비워도 소지품이 사라지지 않고 집 앞 택배가 무사할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합의 위에서 ‘새벽 배송’은 가능해졌다. 이 모델이 타국으로 쉽게 이식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쿠팡의 배송은 고도화된 신뢰라는 사회적 레거시에 기생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러스트』 (구승회 역, 1996)에서 경제 효율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지목했다. ‘문 앞 물건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도덕적 합의와 아파트 관리 시스템은 쿠팡이 보안 비용 없이 사업을 지속하게 한 결정적 ‘비가시적 인프라’다.


윤 대통령의 위험한 궤변, 눈 떠보니 어느덧 후진국. 한겨레TV


경제학적으로 쿠팡은 높은 사회적 신뢰라는 외부 경제를 내부 수익으로 전환한다. 택배 도난이 일상인 지역이었다면 보관함 설치나 고액 보험료를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쿠팡은 공동체의 신뢰 자산에 무임승차하며 거래 비용을 낮췄다.


나아가 새벽 배송은 복도와 엘리베이터 등 공용 공간을 배타적으로 사용하며 유지 비용을 입주민에게 전가한다. 노동력 또한 인프라 일부로 소모된다. 새벽 시간대 공동체의 안전을 해치지 않으며 물건을 놓아야 하는 압박은 배송 기사에게 전가되며, 이는 공동체의 희생을 자본으로 환산하는 방식이다.


쿠팡은 이를 AI를 활용한 ‘물류 혁신’이라 부르지만, 정교한 알고리즘도 ‘라스트 마일’에서 한국적 신뢰가 무너지면 작동하기 어렵다. 쿠팡의 기술 혁신은 사회적 신뢰라는 토양 위에 세워진 수확 도구에 가깝다. 토양이 황폐해지거나 공용 공간 사용료 등 정당한 대가 지불이 본격화된다면 지금의 수익 구조는 유지되기 어려워 보인다.



6.

AI 기업들은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공유지(Digital Commons)’를 무상 채굴 가능한 원자재 창고처럼 다룬다. 이는 공동의 땅을 사유화했던 ‘인클로저 운동’을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온 장면에 가깝다. 창작자와 사용자가 축적해 온 유산을 거대 언어 모델(LLM)이 대량 크롤링해 유료 서비스로 전환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데이터 식민주의’다.


2025년 구글이 자사 데이터를 수집·재판매한 스타트업을 ‘기생충’이라 비판하며 소송을 제기한 사건은, 거대 기업 역시 공적 데이터를 토대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독점 논란을 부각했다. 전통적 비즈니스가 가치를 창출한다면, 일부 AI 모델은 타인의 가치를 추출하는 ‘지대 추구’에 집중한다. 뉴스 요약 서비스가 원문 언론사 방문을 막아 공적 인프라를 잠식하는 구조가 지속될 경우, 데이터 공급원이 고갈되는 ‘디지털 공유지의 비극’은 현실이 된다.


AI 기업들은 창작자 권리 침해와 저임금 노동 등 사회적 비용을 외면한 채 수익만을 내부화한다. 이 비용을 보상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지적 인프라는 소모되고 창작 생태계의 동력은 잠식된다. 공동체의 레거시에 기생해 사익을 취하는 행태는 고든 털럭이 지적했듯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훼손한다. 쿠팡이 ‘라스트 마일’의 비용을 최소화한 것 또한 기업의 순수한 성취라기보다 공공 자산에 기대 선 결과였다.


AI Sora


‘라스트 마일(Last Mile)’은 배송 비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난이도가 높다. 해외 플랫폼들이 자율주행과 드론에 투자하는 이유다. 반면 한국의 라스트 마일이 높은 효율을 보이는 까닭은 기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공동 주택 보안 시스템과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는다”는 강력한 규범이 위험을 낮춰 왔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의 혁신은 이러한 유무형의 공공 자산을 비즈니스 모델로 내부화한 결과다.


플랫폼 운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 지표 관리가 아니라 사회적 유산을 지키는 ‘수호자’로서의 자각이다. 플랫폼의 이윤은 알고리즘의 우월함뿐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창작자들이 일군 공유지에 기대어 형성되었다. 텍스트의 아우라를 트래픽으로 치환하고 인프라를 지대 추구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태는 토양을 황폐화할 뿐이다. 플랫폼의 성장이 인문학적 가치와 공적 책임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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