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라는 나태의 지옥

주간단상 - 파르마콘의 속도, 익숙함의 윤리

by 박 스테파노

1.

그리스 신화 속 지혜의 신 테우트(Theuth)가 문자를 발명했을 때, 그것은 기억을 돕는 ‘약(remedy)’이자 동시에 스스로 기억하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독(poison)’이었다. 이 모순적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 ‘파르마콘(pharmakon)’이다. 이 단어는 공동체의 재앙을 짊어지고 추방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희생양’을 뜻하는 ‘파르마코스(pharmakos)’와도 어원을 공유한다. 파르마콘은 치유와 파괴, 구제와 배제를 동시에 품은 개념이다.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제거되어야 할 독, 그 모순의 상징이다.


파르마콘의 핵심은 ‘용법’과 ‘측정’에 있다. 경계를 설정하지 못한 기술은 치료의 도구에서 곧 폭력으로 전도된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파르마콘을 자본의 연료로 태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중 하나, 쿠팡에 대한 이야기다.


어제 아내와 상의 끝에 쿠팡을 탈퇴했다. 처음의 망설임은 일상의 불편과 경제적 손실에 대한 우려였다. 그러나 그것은 ‘편리’라는 말로 포장된 ‘나태’에 가까웠다. 네이버 멤버십으로 넷플릭스를 이용하고 있었고, 네이버와 마켓컬리 협업 플랫폼을 통해 대부분의 대체재를 무리 없이 구할 수 있었다. 배송은 오히려 더 촘촘했고, 늘 깨져 도착하던 계란도 온전했다. “아이 엄마라서 어쩔 수 없다”는 방송 속 인터뷰와 리포트의 변명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쿠팡. 연합뉴스 제공


쿠팡이 제공한 최대의 장점은 분명 ‘가성비’였다. 빠듯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실질적인 구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흐르며 다른 플랫폼들 역시 충분한 가격 경쟁력을 갖추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익숙함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익숙함이야말로 쿠팡이 설계한 가장 정교한 전략이었다.


쿠팡은 단순한 유통 기업이 아니다. 거대한 알고리즘이며, 데이터를 통해 시공간을 재배치하는 통치 기술에 가깝다. 쿠팡의 성장은 한국 사회의 결핍을 치료하는 ‘약’처럼 등장했다. 코로나 팬데믹, 고단한 퇴근길, 마트에 들를 여유조차 없는 일상에서 로켓배송은 구원의 언어였다. 물류의 효율화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약효가 강해질수록, 독 또한 농축된다. 우리는 로켓배송의 광휘에 눈이 멀어, 그 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류센터의 노동자들은 AI가 산출한 ‘UPH(시간당 생산량)’라는 숫자에 포섭된다. 이곳에서 AI는 조력자가 아니라 감시자다.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무시한 채 최적 속도를 강요한다. 노동자의 동선은 초 단위로 기록되고, 휴식마저 비용으로 환산된다. 이는 이전 연재 『휴먼테스트』에서 언급한 ‘기계의 꿈, 인간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기술이 인간의 편리를 위해 꿈을 꾸는 동안, 왜 인간은 기계의 명령에 응답하는 존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서 있다.


쿠팡 플랫폼에서 노동을 제공하고 급여를 받는 이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과거 SPC 불매운동 당시, 나는 자영업자와 노동자, 개미주주가 얽힌 구조를 이유로 회의적이었고 때로는 반대의 입장에 섰다. 그러나 쿠팡의 노동 구조는 다르다. 이곳의 노동은 ‘편리 중독’에 가깝다. 취업과 중단이 지나치게 쉬운 구조 속에서, 노동은 선택이 아니라 소모가 된다.


한때 동네 중국집은 배달원을 직접 고용하며 배달 문화의 기원이 되었다. 취업의 문턱에 막힌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사회 진입의 발판이 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구조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배달 플랫폼의 독점도 원인이지만, 숙식을 감내하며 노동할 의지 자체가 사라진 탓도 크다. 그 자리는 이주 노동자나 불법 체류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이 연쇄는 오늘날 청년들이 절규하는 ‘일자리 문제’와 맞물려 있다. 불편하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이다.



2.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파르마콘은 ‘쿠팡’이라는 거대 플랫폼과 ‘AI 만능론’이라는 새로운 신화의 얼굴로 되살아났다.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다음 날 새벽 물건을 손에 쥐는 치유의 편리함을 누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인간을 기계의 부품으로 환원시키는 독소가 조용히 흐른다. 약과 독의 경계에서, 플랫폼은 다시 파르마콘의 형상을 드러낸다.


더 심각한 문제는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 사회 전체를 포섭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질서 안에서 기술적 효율성은 최고의 덕목이 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권의 침식과 노동의 훼손은 ‘혁신의 비용’이라는 말로 봉인된다. 질문은 사라지고, 속도만 남는다.


우리는 편리함이라는 이름 아래 알고리즘 권력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추천 목록과 최저가에 익숙해질수록 선택 능력은 위축된다. 문자가 기억을 외주화했듯, AI는 판단을 대신 수행한다. 이 포섭은 눈에 띄지 않기에 더욱 위태롭다. 알고리즘의 블랙박스 뒤에 숨은 권력은 책임을 지지 않고, 실패는 언제나 ‘적응하지 못한 개인’의 결함으로 전가된다.


쿠팡이 보여주는 기술의 양면성은 영화 <아이 로봇>(2004)이나 <엑스 마키나>(2015)가 그린 불편한 골짜기를 이미 지나쳤다. 기술은 더 이상 인간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삶 전체를 기계적 논리 안으로 끌어들인다. AI 만능론에 포섭된 사회에서 인간은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산출한 데이터를 정제하는 하부 구조로 밀려난다.


파르마콘은 복용량에 따라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지금의 쿠팡과 AI 기술은 과다복용 상태에 가깝다. 효율성이라는 강한 약효에 취한 사이, 공동체의 윤리와 노동의 가치는 감각을 잃는다. 기술의 역사에서 보아왔듯, 제어되지 않은 자동기계는 언제나 창조주를 위협하는 공포로 되돌아왔다.


헤롤드 로저스 쿠팡 임시 한국 대표. 중앙일보 제공


우리는 AI 만능론이라는 흐름을 완전히 거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묻는 권리까지 포기해서는 안 된다. 쿠팡의 편리함이 누군가의 과로사와 비인격적 통제를 전제로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치유제가 아니다. 사회적 맹독에 가깝다.


기술은 인간의 한계를 보완할 때에만 약으로 기능한다. 인간을 알고리즘의 노예로 삼는 기술 권력에 맞서기 위해서는, 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성을 기술 설계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파르마콘의 독성을 중화하는 해독제는 기술에 대한 맹신이 아니다. 기술이 감추고 있는 그늘을 직시하는 비판적 시선이다. 이 성찰만이 중독된 현재를 되돌릴 가능성으로 남는다.


한편, 150조 국부 펀드를 과도기의 AI 인프라에 분산 투자하기보다, 기업가치 약 130조에 이르는 쿠팡을 인수해 국민 기업으로 전환하는 상상은 어떨까. 약 40조의 직접 투입으로 최대주주가 되고, 유통을 전기와 통신처럼 공공 인프라로 재편하는 구상이다. 그 위에 축적된 데이터와 사용자 경험을 공공 자산으로 개방해 도메인 AI를 개발하는 일.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추상적 구호가 아닌, 보다 현실적인 AI 혁명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른다.



3.

브런치에서 출판진흥과 지역서점 활성화를 내건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모양이다. 문제의식과 실천 의지 자체에는 박수를 보낸다. 다만 결과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다. 애초에 문제를 진단하는 방식부터 어긋났을 가능성이 커 보이기 때문이다. 출판의 위기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로 환원하는 인식은 지나치게 안일하다. 동네서점을 살리면 독서 습관이 회복될 것이라는 발상 역시, 20세기식 독후감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읽을 책’이 아니라, ‘사서 곁에 둘 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출판 위기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낯설었다. 이는 출판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접한 문화 영역 전반에서 반복되는 구조다. 위기의 책임은 늘 독자에게로 전가된다.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 ‘학교 교육의 실패’, ‘스마트폰의 침투’ 같은 설명들. 이 말들에는 독자를 값싼 오락에 길들여진 존재로 축소하는 편견이 깔려 있다. 독자를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소비 단위로만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출판의 위기는 지갑이 닫히고, 안목이 둔해지고, 경쟁 상품이 늘어난 탓으로 정리된다. 출판을 설명하는 언어는 어느새 상거래의 어휘로 수렴해 왔다. 경기 불황, 디지털 기술, 자기계발 시장 같은 외부 요인이 줄줄이 호출된다. 책임은 늘 출판 바깥으로 미뤄지고, 출판은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잃는다.


책을 쓰려는 사람은 넘쳐나는데,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고들 말한다. 판매량이 이를 증명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해결책을 시장에서 찾으면서 정작 시장을 읽지 않는 태도는 아이러니하다. B2C 시장의 기본은 시장의 크기다. 구매력과 인구 구성을 고려하면, 지금 가장 두터운 독자층은 50대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들을 겨냥한 기획이나 캠페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브런치라는 플랫폼만 보아도 그렇다. 주 이용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든, 그 ‘사정’이 곧 해법이 되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이 매년 하락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 보고서


출판산업의 후진성 역시 이 국면에 깊이 작용하고 있다.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책을 내고자 하는 이들이 과도하게 늘어난 결과, ‘출간’ 그 자체가 산업의 펀더멘털처럼 기능하게 된 것은 아닐까. 사유의 축적이나 내용의 필연성과 무관하게 원고는 편집자의 손에 쥐어지고, 인쇄소의 윤전기는 멈추지 않는다. 산업은 성찰할 틈 없이 관성에 몸을 맡긴 채 굴러가며, 그것이 자기 자신을 갉아먹는 일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소위 ‘팔리는 책’을 말하면서도, 시장 분석은 동네 점포의 진열 전략만도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시장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출판이 주목해야 할 독자는 ‘미래의 잠재 독자’로 호명되는 젊은 세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읽고 사고 곁에 두는 50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출판계는 이미 오래전 이 세대를 시야에서 지워버린 듯 보인다. 이 지점이 일본이나 유럽의 출판 환경과 갈라지는 중요한 차이가 아닐까. ‘미래의 시장’이라는 말이 대개 상상 속에서만 번성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결국 ‘읽고 싶고, 곁에 두고 싶은 책’을 만들어낸다는 일은 큰 용기와 긴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차이조차 분별되지 않은 채, 즉각적인 자극과 소구력만을 좇는 흐름이 출판 전반을 잠식하고 있다. 이는 개별 출판사의 판단 착오라기보다, 산업 전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 빈곤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업무보고 자리에서 출판진흥책으로 제시된 방안이, 지역서점을 살리기 위해 정부 구매 계약을 지역서점으로 돌리자는 제안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문제의 근원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출판을 내용과 독서 문화의 문제로 사유하지 못한 채, 유통의 문제로만 환원하는 사고. 그 철학의 부재가 정책적 해법처럼 제시되는 현실 앞에서, 이것이 단순한 침체가 아니라 총체적 난국에 가깝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독서에 ‘챌린지’가 필요하다는 발상까지 더해지니, 안타까움은 더 깊어진다.



4.

주말에 넷플릭스 영화 <대홍수>(2025)를 보았다. 영화 속 연구원이자 복제체인 자인은 인간의 마음, 곧 ‘이모션’을 학습한다. 물안경을 쓴 채 밀려오는 수마를 응시하는 시선, 엘리베이터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마주하는 권총의 차가운 금속성은 감각을 예리하게 자극한다. 여기서 아노말리(Anomaly), 즉 변칙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는 균열로 기능한다. 모든 것이 예측되고 통제된 데이터의 세계에서, 자인이 감지하는 감정의 파편들은 프로그래밍된 결과임에도 역설적으로 가장 ‘진짜’에 가까운 순간을 만들어낸다.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우리는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신념이 여론을 형성하는 풍경에 익숙해졌다. 기술은 인간의 형상을 복제하고 시간의 선형성을 비틀며,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유예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에서 빌 케이지가 수만 번의 죽음을 반복하며 단 하나의 승리 경로를 설계할 때, 관객은 실재와 시뮬레이션의 경계를 잊는다. 이 지점에서 서사는 더 이상 하나의 진실을 향하지 않는다. 대신 소비자의 기호에 맞춰 조정되고 반복되는 ‘스토리셀링(Story-selling)’의 전략만이 남는다.


나사(NASA)가 우주선의 태양광 패널을 효율적으로 수납하기 위해 동양의 종이접기 기술을 차용했다는 일화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거대한 우주적 진실을 인간이 이해 가능한 단위로 접어 넣는 과정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본질은 종종 생략되거나 왜곡된다. <오블리비언>(2013)의 잭 하퍼는 자신을 지구의 마지막 수호자라 믿지만, 결국 거대 권력이 생산한 수많은 복제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가 붙들고 있던 기억은 가짜이며, 그의 삶은 시스템이 주입한 정교한 서사다.


이러한 복제의 변주는 <미키 17>(2025)에서도 반복된다. 소모품처럼 죽고 다시 인쇄되는 존재에게 ‘나’라는 고유성은 가능한가. 탈진실의 시대에 서사는 손쉽게 복제되고 대체된다. 대중은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광하지만, 그것이 시스템이 설계한 스토리셀링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는 둔감하다. <사랑의 블랙홀>(1993)에서 필이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에 갇히듯, 우리는 매일 같은 정보의 파편 속에서 새로움 없는 변주만을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대홍수>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스토리셀링의 관점에서 감정은 가장 위험한 도구다. 탈진실 사회에서 서사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특정 감정을 증폭시켜 설득과 선동에 집중한다. 지수가 타는 엘리베이터가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공포를 극대화하듯, 현대의 서사는 수용자의 심리를 정밀하게 타격하는 구조를 취한다. 그 순간 질문은 사라진다. “무엇이 사실인가?”라는 물음은 “어떤 이야기가 더 몰입을 주는가?”로 대체된다.


우리는 우주선을 접어 올리는 기술적 정교함으로 가짜 서사를 직조한다. <트랜샌더스>(2014)가 보여주었듯, 지능의 확장은 인간성을 상실한 유토피아로 귀결될 수 있다. 무분별한 스토리셀링은 결국 서사의 빈곤을 낳는다. 루프물의 주인공들이 마침내 루프를 깨는 열쇠가 타인에 대한 이해였음을 깨닫듯, 탈진실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 역시 매끄럽게 포장된 이야기 이면의 아노말리를 직시하는 데 있다.


복제된 잭 하퍼들이 서로를 마주할 때 발생하는 기시감, 그리고 안드로이드가 데이터 너머로 흘리는 눈물. 바로 그 불편한 지점에서 비로소 진짜 서사가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판매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붙들어야 할 진실의 조각들을 다시 펼쳐야 한다. 접힌 종이를 조심스레 펴듯, 기술과 인문학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길을 잃지 않을 좌표를 찾아야 한다.



5.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은 진심과 선의에 대해 거짓과 가식으로 응답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대개 ‘자랑’을 앞세운다. 자랑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 안에는 세상이 쉽사리 용납하지 못할 거짓이 구겨지고, 불완전한 당위가 애써 가려진다. 그렇게 자신은 남다르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대체로 그런 삶은 요란하다. 한쪽에서는 감추고 싶은 진실을 끌어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남다름이라는 포장지로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돈 몇 푼 더 벌어들인 도적질을 성취처럼 떠벌린다. 그들의 공통점은 무지와 무능이다. ‘없음’의 열등감을 가리기 위해 주머니 속 몇 푼이 가장 손쉬운 자랑거리가 된다. 드러난 소도적보다, 일상에 숨어 있는 주제 모르는 바늘도둑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우리는 대개 얼떨결에 세상에 던져진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남들이 말하는 나’인가, 아니면 또 다른 나가 있는가. 만약 ‘남들이 말하는 나’가 곧 나 자신이라면, 그 인간상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 투영한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사이비다.


종교학자 배철현 교수의 묵상에 따르면,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진짜 나라고 착각하는 순간 인간은 사이비 似而非가 된다. 사이비란 평생 수행해야 할 자기 자신의 과업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나르키소스. 카라바조. 로마국립고대예술미술관 소장


나는 나이고, 너는 너다. 내가 너인 척하거나, 살아본 적 없는 삶을 흉내 내는 순간 그 인생은 길을 잃는다. 그것은 삶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남의 역할을 대신 연기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사이비들은 자신을 응시하지 않는다. 아니, 응시하지 못한다. 본질의 자신을 혐오하고 존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남들이 좋아할 법한 허상을 빌려 위장하고, 그것을 믿음이라 부른다.


이 때문에 인생의 문제는 언제나 나를 비추는 거울에서 시작된다. 거울이 대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그 앞에 선 사람은 왜곡된 자기 이미지를 끌어안게 된다. 굴곡지고 흐린 거울에 비친 나와 세상에 대한 인식은 결국 무식(無識)에 가깝다.


많이 안다는 감각은 종종 아무것도 모른다는 상태로 기울어진다. 다식이 무식이 되는 순간이다. 무식이란 정보를 접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왜곡된 판단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마음의 형국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사이비는, 어쩌면 ‘무식한 가짜들’일지도 모른다.


이는 그들에게 던지는 비난이기보다, 나 자신에게 보내는 연말의 일침이다. 거울 앞에서 들리는 이 소음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6.

예전에 수영을 배울 때 자유형 호흡법, 이른바 “음~파-”가 유독 어려웠다. 문제는 비강이었다. 코가 작아서가 아니라 비중격과 비강이 뒤틀려 한쪽은 늘 막혀 있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은 한쪽마저 남들보다 한참 못 미친다. 코로 숨을 뱉는 일은 곤욕을 넘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25미터 풀을 무호흡으로 완주하는, 패기라기엔 무모한 꼼수만 가능했다. 요즘의 기분이 꼭 그랬다.


플랫폼에 글을 쓰다 보니 작성한 글이 어느새 1,000개를 넘겼다. 카카오채널이나 오마이뉴스, 포털 상위 노출이 되었던 글들은 중복을 피하려고 지우기도 했다. 필명을 걷어내고 실명을 밝히고 부끄러운 초기 작도 공개했다. 그리고 지금의 ‘ 아무 것도 아닌 상태’를 고백했다. 그러면서 플랫폼의 순항을 기원했다.지나고 보니 순진한 모범생 같은 기다림이었다. 그럼에도 1,000이라는 숫자는 잠시 마음을 흔들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글쓰기가 ‘어쩔 수 없는 일’이 되는 순간, 괴로움은 시작된다. 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사랑하던 것들이 어느새 감당해야 할 의무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눈을 머금은 겨울 공기처럼, 요즘의 기분도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아마도 고마운 응원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마움이 오래 묵혀 둔 설움을 건드렸다.


돌아보면 지난 시간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은 늘 팽팽한 고무줄처럼 나를 다시 제자리로 끌어당겼다. 글을 쓰라 했더니, 나는 글 대신 똥을 싸고 있었다. 물론 글다운 글도 더러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보상을 향한 처연한 구애에 가까웠다. 문장과 사유의 결은 뒷전이었고, 눈에 띌 만한 문장과 이미지로 공간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내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과연 이렇게까지 글을 썼을까. 그 질문을 오늘의 나는 피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지금의 고행이 없었다면, 당신의 고뇌와 사유도 없지 않았겠느냐고. 갑작스러운 곤궁이 오히려 생각할 시간을 선물한 것 아니냐고. 똥밭이 언젠가는 결실을 품은 땅이 되거나, 요즘 말로 하면 재개발되어 그럴듯한 동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다정하게 어르고, 단호하게 혼냈다. 그 말에 설움이 잦아들었고, 문득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싶어졌다.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의 한 장면. 두산 아트센터


“그는 울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이 더욱 그를 서럽게 만들었다. 그가 우는 것은 후회 때문도 아니었고 자책감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지도록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느낌, 아무도 이해 못할,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자신만의 슬픔이 그를 울게 만들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똥구덩이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일어날 생각도 않고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가슴속에 있는 모든 슬픔의 덩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 그의 몸 안에 뭉쳐져 있던 슬픔, 어찌할 수 없는 허망함에 완전히 자신을 내맡기고 울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서 동생 민우가 잡혀간 뒤, 똥밭에 주저앉아 우는 형 준식의 모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울음은 신세 한탄이 아니라 질문에 가깝다. 시국사범 민우의 존재로, 중계동 똥밭 위 아파트에서 유지되던 준식의 삶은 포장을 잃는다. 고담준론의 도식이 찢어지고, 처참한 삶의 실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 내게 글쓰기는 그런 일이었으면 한다. 삶의 무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더라도 피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써 내려가는 일. 오늘의 나는 내가 싸놓은 똥밭에 주저앉아 준식처럼 울었다. 가슴속에 쌓인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를 바라면서.


언젠가는 이 1,000개의 똥들이 거름이 되어 밭이 되고, 그 밭에서 듬직한 호박 넝쿨이 얽혀 오르기를 바란다. 설움의 끝에서, 나는 그렇게 희망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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