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짐에 대하여

주간단상 - 월요일이 좋다

by 박 스테파노

1.

스스로를 ‘문장 노동자’라 부르는 시인이자 철학 작가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을 읽고 있다. 『마흔의 서재』 이후 수년 만에 다시 손에 든, 더 오래된 그의 책이다. 장석주의 책은 사전이나 성경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여 읽을 필요가 없다. 한두 꼭지를 펼쳐 읽고, 문장을 접어 마음속에 넣어 두는 기쁨이 있다. 완독한 뒤에는 서평을 남겨 보고자 마음을 먹는다.


이 책은 일상의 사물과 그 개념, 물성을 하나의 철학자와 그의 사유에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세탁기>라는 챕터가 유독 마음을 붙잡았다.


“산다는 것은 덜도 아니고 더도 아니고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게 본질이다. 모든 빨래는 사람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적 시간의 포획물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옷이라는 사물과 세탁이라는 행위가 이처럼 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옷에 달라붙은 먼지와 찌꺼기, 오염물질은 오류와 낭패의 흔적이라 말한다. 살아내고 흘려보낸 시간과 장소들이 남긴 잔여물이다. 뻔뻔한 거짓과 욕망 앞에 무릎 꿇었던 죄의 자국이 바로 그것이라는 통찰도 덧붙여진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세탁이다. 모든 세탁은 불가역적인 오염의 포획 상태에서 다시 처음을 꿈꾸게 하는 하나의 의례다.


만약 마음을 세탁하는 세탁기가 있다면 어떨까. 이불킥으로 남은 시간들을 지우고, 실수와 낭패, 오류의 얼룩을 씻어낼 수 있다면. 헹굼과 탈수를 거쳐 볕 좋고 바람 선한 곳에 널어 두면, 우리는 다시 한 번 깨끗하고 단단하게 시작할 수 있을 텐데. 세제의 힘으로 오염은 이탈하고, 섬유 유연제로 본연의 유연함을 되찾으며, 회전력으로 무거운 물기까지 털어내는 일. 그것이 바로 글을 쓰며 도달하는 회심의 성찰이 아닐까. 글쓰기는 어쩌면 세탁기라는 장치와 가장 가까운 사유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세탁이란. AI Sora



2.

“왜 모든 것은 사라지는가? 사물은 어느 순간 그 효용을 다하고 소실점 너머로 사라진다. 사라짐은 고갈이고 소멸이다. 비누는 한없이 닳아지는 것, 닳아지다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대표한다.”

— 『철학자의 사물들』, 장석주


책의 또 다른 꼭지를 덧붙이고 싶다. <비누>는 사물의 유한성을 사유하는 장이다. 모든 사물은 사라진다. 우리는 영원이 성립할 수 없는 우주에 살고 있다. 사물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그 사물을 사용하고 소유하던 존재 역시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든 사물은 죽는다. 장석주는 사물의 끝, 사물의 죽음을 멜랑콜리하다고 말한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어딘가 애틋한 이유는 그 사라짐이 현재의 영혼을 어느새 과거의 영혼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사물의 소멸은 시간의 방향을 거꾸로 비춘다.


끝과 사라짐은 실재가 지닌 에너지의 영점零點, 가치의 영점에 도달한 상태다. 제도와 가치, 개인이 사라진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허다. 장석주는 이 공허가 위대하다고 말한다. 모든 공허는 존재와 실재가 한때 거기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는 해부학적 사강(死腔, Dead Space)을 설명하며 문학의 숨결로 풀어낸 브런치 작가 요인영의 사유와도 맞닿는다. 쓸모없어 보이는 모든 여백은, 채택된 실체의 쓸모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https://brunch.co.kr/@yoinyoung/81


비누가 사라지듯, 비누를 쓰던 사람 또한 언젠가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짐은 인생의 종말이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 삶의 총체적 완성은 사멸, 곧 죽음이다. 장석주의 말에 기대자면, 삶은 죽음에 닿아야 비로소 둥글어진다. 그 둥글어짐을 가끔은 감각한다. 아직 ‘가끔’이라는 빈도로만 종착점을 떠올리며, 거기까지는 여유가 남아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이처럼 인생의 종말은, 희망이라는 말을 애써 외면할 때 불현듯 현실이 된다. 날기를 멈춘 알바트로스처럼.


“그러나 사라짐은 달리 생각될 수 있다. 즉, 독특한 사건으로, 그리고 특수한 욕구의 대상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 욕구란 더 이상 거기에 있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결코 부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사라짐은 우리 없는 세상이 어떠한지를 알고 싶어 하는 욕구일 수 있다.”

— 『사라짐에 대하여』, 장 보드리야르



3.

아침이면 지난날의 KBS FM 「세상의 모든 음악」을 다시 듣는다. 시간은 이미 흘렀지만, 음악은 늘 제자리에 남아 있다. 지난주에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를 여러 변주로 들었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Το Τρένο Φεύγει Στις Οκτώ)는 미키스 테오도라키의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인 선율과 마노스 엘레프테리우의 시적 가사가 결합된 작품으로, 그리스 대중음악의 한 정수를 이룬다. 이 곡에는 그리스 민중이 겪어온 고통과 역경이 예술적 상징으로 응축되어 있으며, 물리적 이별을 넘어 집단적 상실과 저항의 의지까지를 품는다. 그래서 이 노래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인 공명을 얻는다.


겉으로 보자면 이 노래는 연인이나 가족 사이의 사적인 이별을 노래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20세기 그리스가 통과해야 했던 군사 독재의 기억, 특히 1967년 군부 쿠데타 이후의 정치적 망명과 만성적인 경제적 곤궁 속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이주민, 디아스포라의 집단적 슬픔이 겹겹이 깔려 있다. 개인의 서정은 그렇게 역사적 비극의 바닥과 맞닿는다.


가사 속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강제된 단절이고, 덧없이 흘러가는 인생의 시간 그 자체를 상징하는 문학적 원형이다. 특히 ‘8시’라는 구체적인 시각은 이별의 순간을 영원히 고정하는 핀처럼 작동한다. 막연한 슬픔이 아니라, 정확한 시간 속에 박제된 단절의 고통을 청자의 기억에 각인시킨다. 이 서사적 시간 설정은 반복되는 상실의 리듬을 암시하며, 노래를 하나의 집단적 만가(輓歌)로 끌어올린다. 시적 언어는 직접적인 고발을 피하고, 기차역의 정적과 소음,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 같은 절제된 이미지로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음악이 유난히 깊은 겨울, 좀처럼 환해지기 어려운 성탄 시기와 겹쳐 더 크게 공명하는 이유는, 나의 개인적인 처지 때문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 시간과 공간을 같은 무게로 통과하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침묵이 겹쳐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그렇게,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같은 플랫폼에 서 있는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운다.


기차는 떠나네. AI Sora


4.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미학적 핵심은 ‘비극적 숭고미’에 있다. 테오도라키는 그리스 전통 민속 음악인 라이카의 소박한 정서를 토대로 삼으면서, 이를 풍부한 오케스트라 편성과 복합적인 화성으로 확장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슬픔은 사적인 감정을 넘어 민족의 역사적 서사로 끌어올려진다. 절제된 멜로디는 청자에게 과잉된 감정 이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고독과 고통을 조용히 건드린다.


이 작품에서 슬픔은 나약함이 아니라 ‘저항적 미덕’으로 전환된다. 마리아 파란투리의 목소리는 무너져 내리는 통곡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하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정신의 자세를 들려준다. 이별과 상실을 통과하면서도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인간의 필연, 그리고 그 필연 앞에서 침묵 대신 노래를 선택하는 의지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강력한 미학적 메시지다.


<기차는 8시에 떠나네>는 과거를 되감는 노스탤지어에 머물지 않는다. 이 곡은 ‘떠나보냈으나 결코 잊지 않겠다’는 기억의 의지를 예술로 형상화한다. 기차가 8시에 떠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열차에 실린 이들의 이야기와 메시지는 남겨진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그렇게 이 노래는 인류의 보편적 고전으로 자리를 얻는다. 모든 상실의 순간에 공명하며,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길어 올릴 수 있는 예술의 힘을 증언한다.


이처럼 문학적 서사와 미학적 해석이 응축된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집단적 비애와 굳건한 기억의 의지는 성탄이 품은 윤리적 의미와 맞닿아 있다. 노래 속 ‘8시에 떠나는 기차’가 상징하는 강제된 단절과 디아스포라의 슬픔은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반복된다. 경제적 격차와 사회적 고립 속에 놓인 노동 이주민과 난민, 도시의 외곽에서 홀로 남겨진 이들의 쓸쓸함과 이 음악은 깊게 공명한다.


https://youtu.be/5J3HZxp7utQ?si=bY_4CNVakItCiHiq

마리아 파란투리의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화려한 축제나 개인의 안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고독한 이별과 상실의 순간을 살아내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환대’의 윤리에서 시작된다. 그리스 민중이 슬픔 속에서 길어 올린 저항적 숭고미처럼, 성탄의 빛 또한 사회의 변방에 서 있는 모든 현대의 ‘떠난 이’와 ‘남겨진 이’들에게 닿아야 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기억하고, 연대하며, 언젠가의 재회를 약속하는 실천으로서.



5.

연일 연예가 뉴스가 달아오른다. 그 속사정은 당사자들의 이해와 관계자들의 정리에 맡기면 될 일이다. 그들에게서 고도의 윤리적 감수성이나 철학적 성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어쩌면 냉정한 진실에 가깝다. 자본의 욕망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인간의 실체는 거창한 순간이 아니라, 사소한 언어와 태도에서 먼저 드러난다. 결국 그저 그런 일이다.


그럼에도 ‘주사 이모’라는 말은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링거 이모라는 표현도 있다 한다.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마지막 희망일 수 있는 주사와 링거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욕망을 가속하는 도구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그리고 ‘이모’라는 호칭. 이모는 고모와는 다른 결을 지닌 말이다. 보다 더 엄마의 품에서 파생된, 무엇이든 받아 줄 대리자이자 대체자의 이름에 가깝다. 그런 호칭이 어느 순간부터, 상대하기 쉬운 연장자 여성을 통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더 문제적인 것은 이 표현을 정론이라 자임하는 신문과 방송이 아무런 여과 없이 반복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언론인들의 감각이 더 불안하다.


이들은 각종 현안 앞에서 전문가인 양 서둘러 의견을 내놓는다. 그 허술한 판단은 ‘오피니언’이라는 외국어의 외투를 입으며 힘을 얻는다. 연예와 스포츠를 다루는 기자들의 언어는 이미 재앙의 지경에 이르렀고, 이제 정치·사회·경제를 담당하는 언론 종사자들마저 인식과 통찰, 지적 깊이에서 안타까운 수준을 드러내고 있다. 언어가 무너질 때, 공론 역시 조용히 침식된다.



6.

대통령 업무보고를 두고 호들갑이 요란하다. 누군가는 공무의 실체를 보게 되어 속이 시원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과도한 지적과 갈굼이라 평한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반복되는 평가는 이것이다. 매년 초에 받던 대통령 업무보고를 한 해 전에 받는 것이 이례적이며, 대단한 ‘일머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은 절반도 맞지 않는다. 사전 연말보고의 시작은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던 MB 정부 시기였다. 윤석열 정부의 경우 4월에야 마감했다고 하니, 단지 이를 두고 이례라 부를 만한지는 의문이다.


이 일정에 놀라는 이들이 있다면, 공무원과 정치인, 자영업자와 소시민들, 그리고 기자들일 가능성이 크다. 규모 있는 기업이나 민간 조직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을 계획, 이른바 Fall Plan을 세운다. 빠르면 10월, 늦어도 11월이면 다음 해의 사업계획이 확정되고, 전사적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그에 따라 예산이 배분되고, 인사이동까지 준비된다. 한 해의 ‘계획’을 그 해의 시작에 세운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모순적인지, 일정 규모 이상의 조직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일이다.


12월은 그래서 마무리이자 시작이 겹쳐지는 과도기다. 교회력에서 대림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신앙적 의미를 넘어, 준비의 시간이라는 고대 종교적 감각과 맞닿아 있다. 농경의 절기에서 비롯된 기다림과 채비의 시간, 그 오래된 리듬이 여전히 살아 있다.


글쓰기와 출판의 세계 역시 이 과도의 의미를 공유한다. 한 해를 정리하며 ‘올해의 책’ 같은 목록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신춘문예’는 새로운 문필의 시작을 알리는 공모를 마감하고 당선작을 내정한다. 이곳 브런치 플랫폼 또한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의 수상작 발표를 하루 이틀로 앞두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는 이들도 있겠지만, 후보작들은 이미 20여 일 전에 개별 통보를 받고 설문과 출판사 미팅을 거쳐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 소식이 없다면, 내년이나 그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솔직하다. 나 역시 이번에도 역시다. 세 번째 도전이었고, 그나마 가장 완성도 있게 준비한 첫 시도였지만, 결과 이전에 결과물 자체로 충분히 만족한다.


글을 쓴다는 것. AI Sora


최근 이곳에서도 스캠피싱 계정이 늘고, 광고와 홍보성 글도 잦아졌다. 세태의 반영이겠거니 하며, 관계자들의 적절한 조치를 기대할 뿐이다. 이런저런 장면들을 지나며 결국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된다. 글을 쓰는 이유는 개인적인 아카이빙의 욕망도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기여에 대한 작은 소망 때문이다. 나의 공부와 인지, 사유를 글로 엮어 세상에 건네는 일. 아주 작은 증여로서의 글쓰기다. 증여의 본질이 그러하듯, 그것은 보상과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되는 행위다. 그래서 출간이나 인정이라는 이름의 보상에 대한 마음을 거두려 애써 본다. 그 다짐을 위해 우치다 다쓰루의 문장을 다시 펼친다.


“책을 쓰는 일이란 그 본질이 ‘증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독자에 대한 선물’이라고 말이죠. 그리고 모든 선물이 그렇듯 그것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그것에 얼마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 『도서관에는 사람이 없는 편이 좋다』, 우치다 다쓰루


이 문장을 읽으며, 다시 한 해의 끝과 시작 사이에 선다. 글을 쓴다는 일의 자리 역시, 언제나 그 경계 위에 놓여 있음을 알면서.



7.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파서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월요일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늘 피하고 싶던 요일에 묘한 이해와, 설명하기 어려운 기대가 스며든다.


월요일마다 새벽을 열던 시절이 있었다. 일상은 언제나 생계와 맞닿아 있었지만, 새벽이 늘 고단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말로 옮기기 힘든 우쭐함이 찾아오곤 했다.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가슴속에서 조용히 몽글거렸다.


그 무렵,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기로 마음먹었다. 거창한 계기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좌절과 우울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기어이 떠올라 이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우쭐해지는 일.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감사할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새벽길. 내 사진


우쭐대던 새벽 출근길을 이제는 새벽 병원길이 대신한다. 만만치 않은 상황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날들도 계속된다. 예전 같았으면 요령을 부리거나 슬쩍 피해 돌아갔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뚜벅뚜벅 정직하게 걸어가려 한다. 날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소중한 숨결들 앞에서, 대답하듯 살아내고 싶은 새벽을 그려 본다. 날마다 기도해 주는 아내에게 고맙다.


새벽길은 스산하지만, 그 안에는 묘한 토닥임이 있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라는, 말 없는 인사 같은 것. 그 토닥임에 기대어 길 위에 나서는 모든 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기도한다. 누구처럼 선뜻 기부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어서, 지금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이 기도뿐이다.


그럼에도 이 새벽이, 다시 월요일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조용히 확인시키는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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