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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공식

주간 단상 - 주어진 자리

by 박 스테파노

1.

어느 날 문득 KBS 스페셜 〈행복의 비밀코드〉를 보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오래 굴려 보았다. 사람들은 대개 바람으로부터 기대를 마련하고, 그 기대에 의지해 마음의 무게를 달아보곤 한다. 뜻밖의 횡재가 찾아오거나, 외형적 능력이 상승하거나, 어떤 상황이 내 편으로 기울기만 하면 삶이 환히 열릴 것이라 상상한다. 그 순간의 반짝임이 곧 행복일 거라 믿는 셈이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속되지 않는 만족은 결국 행복의 이름을 오래 붙잡지 못한다고. 찰나의 기쁨을 과대평가하는 우리의 인지가 만들어낸 착각, 이른바 “천국의 오류”, 행복의 초점이 빗나갈 때 나타나는 내적 굴절을 해석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착각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순간의 만족을 행복으로 오인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그 만족을 더 이상 ‘행복’이라 부르지 않는 자기 모순 속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 오류에 머물면 결국 내가 진정 원하는 지속적이고 온전한 행복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행복이란 결국 일정한 결을 유지하는 숨결이어야 하고, 사라지지 않는 방향성을 지닌 체온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닿았다.


한동안 마음속에서 간단한 공식처럼 떠돌던 ‘행복 = 가진 것 / 원하는 것’을 다시 꺼내어 계산해 보니 결과는 낙제에 가까웠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 듯하면서도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아, 공식의 바닥을 다시 더듬었다. 어쩌면 ‘가진 것’은 수량이 아니라 관계의 질일 수도 있었고, ‘원하는 것’은 결핍의 목록이 아니라 세계를 향해 손 내미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연산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지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식을 고쳐 쓰다 보니,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커지는 숫자가 아니라, 내가 이미 품고 있는 것들의 숨은 무게를 다시 재는 과정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바람이 일으킨 기대가 아니라, 시간이 길러낸 감각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발견되는 결. 그 결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은 멀리서 오지 않고 조용히 축적되는 것임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행복이란? Shortform.com 제공



2.

‘나의 행복 = 내가 가진 것 / 내가 원하는 것.’


그 단순한 연산을 다시 눌러 보려 했으나, 이번에는 아예 계산식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다. 우선 ‘내가 원하는 것들의 집합’을 떠올리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갈망하는지 하나하나 적어 내려가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나 싶었다. 오래전부터 내 욕망의 목록은 희미해지고, 대신 누군가를 위해 바라는 것들로 치환되어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소유하고 모은 것들 또한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 되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난 지금 남아 있는 값은 거의 ‘0’에 가까웠다. 불현듯 ‘나는 불행자인가’라는 자조가 스치듯 지나갔지만, 마음속 어둠은 그 문장을 아직 완결시키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천천히 들여다보니, 행복의 첫걸음은 가진 것을 세거나 잃어버린 것을 추적하는 데 있지 않았다. 출발점은 훨씬 더 내면 깊은 곳, 곧 내가 원하는 것의 윤곽을 다시 그려내는 일에 가까웠다. 무엇을 갖고 싶은지, 어떤 삶을 열망하는지, 그 갈망의 결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는 것. 결국 행복은 ‘갖고 있음’이 아니라 ‘원함’의 진실한 목록에서 태어난다. 원하는 것을 명료하게 부르는 순간, 삶은 다시 방향을 얻고, 길은 조금씩 빛을 띠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두 개의 물음을 마음속에 심어 두려고 한다. 지금의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인가? 그리고 그 원하는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나는 계획하고, 움직이고, 구하고 있는가? 이 두 문장은 단순한 평가 기준을 넘어 앞으로의 시간을 비추는 등불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1막이 ‘각성’의 시기였다면, 2막의 주제는 아마 ‘행복’이 될 것 같다. 가진 것이 거의 없다고 느껴지는 지금 오히려, 갖고 싶은 것들을 새롭게 정립할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렇게 목록을 다시 작성한다면, 행복의 공식 또한 서서히 1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행복을 불러오는 역치의 순간처럼—삶은 때때로 셈법을 뒤집어 새로운 해답을 허락한다.



3.

쿠팡의 고객정보 유출 사태를 둘러싼 해명은 낡은 방패처럼 느껴졌다. 계좌번호나 주민등록번호가 빠져나가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는 식의 변명은 오늘의 기술 환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태도에 가까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통신 데이터 패킷만으로도 한 사람의 윤곽을 정교하게 재구성하는 일은 놀라움의 영역이 아니었다. 구매 패턴과 주문 주기, 결제 시간대, 배송 장소가 겹으로 누적되면 특정 개인을 가늠하는 데 여러 단계가 생략된다. 사용자 경험을 미세하게 분석하는 분석 툴들 역시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상업적 목적과 공공적 감시의 기능이 경계 없이 섞여 작동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선의에 기댄 예방은 불가능하고, 기업의 악덕을 문제 삼는다 한들 거대한 자본의 관성은 쉽게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세계 최대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워너브러더스를 100조원대에 인수하기로 했다. 연합뉴스 제공


비슷한 흐름은 문화 산업에서도 목격된다. 30년도 채 되지 않은 넷플릭스가 100년을 넘긴 워너브라더스를 인수했다는 소식은 영화계의 지각변동이라 떠들썩했지만, 실은 예견된 귀결에 가깝다. ‘플랫폼의 습격’이라는 말은 유행처럼 번졌지만, 정작 영화계 내부는 자본에 의존하는 구조에 이미 길들여져 있었다. 제작자와 스태프는 거대 플랫폼 자본을 일종의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다’처럼 느꼈을지 모른다. 심지어 일부는 이 플랫폼 자본의 하청기지 역할을 한국 영화 산업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산업의 미래를 좁히는 인식이며, 예술적 자율성을 스스로 축소하는 선택에 가깝다.


출판과 영화는 사실상 한 줄기에서 흐르는 두 강처럼, 본질적으로 공공재의 성질을 지닌다. 책과 영화는 제작의 노동과 비용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접근성을 제공하며, 대중에게 사유의 기회를 열어주고 미학적 성취의 흔적을 건넨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건너는 마술 같은 통로를 만들어, 우리를 아직 모르는 세계로 데려다주는 매개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두 매체가 공공재에 가깝다는 인식은 사회적 합의의 차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정작 이 산업이 위기라 호소할 때, 종사자들의 시선은 독자와 관객을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소비자로만 호명하는 방향으로 기울곤 한다. ‘팔기 위한 대상’으로만 그들을 묶는 순간, 공공재로서의 기능은 약화하고 위기는 상시적 구조가 되어버린다.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너와 나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 한, 문화 산업의 미래는 계속 불안정한 파문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4.

지난주 조선일보의 한 칼럼에서 ‘공헌 수명’이라는 개념을 펼쳐 보였다. 노년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개인이 결국 사회 비용을 줄이고, 그로써 애국자가 된다는 논지였다. 이 정교하게 포장된 어휘 뒤에 감춰진 시대의 숨결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아침마다 받아 보는 뉴스레터에서 그 칼럼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반론을 작성해 보냈다. 이른바 ‘건강한 애국자’론이 드리우는 건강 파시즘의 그림자, 병약함을 죄로 만드는 사회적 압력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글이었다. 편집인은 감사하게도 그 반론 전문을 그대로 실어 주었다.


그 글을 다시 붙여 보며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늙고, 누구나 아프며, 누구나 흔들리는 몸의 시간을 살아간다. 생물학적 필멸성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순간, 질병과 장애는 도덕적 결함으로 오인되고, 약함은 비애국의 표식처럼 낙인찍힌다. 건강을 의무로 규정하고, 건강하지 못한 이들을 사회의 짐으로 부르는 담론은 은근하지만 폭력적이다. 애국이라는 단어를 개인의 몸에 덧씌우는 방식이야말로 공동체의 윤리를 잠식하는 위험한 수사인지 모른다.


https://www.chosun.com/economy/stock-finance/2025/12/02/66QQEYAVXVGRNADJMGBRTNRWZI/?outputType=amp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 서러움 위에 ‘비애국자’라는 굴레까지 얹어지는 현실을 떠올리면 마음이 저릿하다. 병과 상처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손님이며, 인간의 조건 그 자체이다. 그 조건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서로를 비난의 언어가 아니라 연대의 언어로 마주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 글을 빌려 아픔 속에서 위축된 모든 이에게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당신의 존재는 이미 충분하고, 건강의 유무가 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몸이 흔들릴 때조차 존엄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몸은 ‘비애국’인가요>


오늘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을 읽으며 깊은 상실감과 유감을 느낍니다. 저는 중증 암으로 살아가지만, 그것이 제 의지의 부족도 아니고 애국심의 결핍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단정적 서술은 병든 몸을 은근히 ‘부적격한 시민’으로 분류하는 뉘앙스를 띠고 있어 마음 한편에 쓰린 응어리가 남습니다. 그 담론이 슬로우 뉴스에서조차 적확한 비판 없이 다뤄졌다는 사실 또한 안타깝습니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갈 테니,
나에게 사회 공헌 훈장을 다오.”


최근 회자되는 ‘공헌 수명’ 리포트는 이 문장으로 응축됩니다. 기대수명보다 더 오래, 그리고 더 건강하게 활동해 국가의 의료비와 돌봄 비용을 절감하는 노년을 ‘진정한 애국자’라 칭송하고 인센티브까지 제공하자는 주장입니다. 초고령 사회에서 재정 위기를 돌파하려는 합리적 프레임처럼 보이지만, 그 유려함을 조금만 들추면 인간 존재를 국가 재정의 ‘비용 항목’으로 환원하는 서늘한 기조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 기조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경고해온 ‘건강 파시즘(health fascism)’—건강을 윤리적 우월성과 시민적 자격의 기준으로 삼는 현대적 우생학의 형태—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이 담론의 결함은 인간의 존엄을 효용의 저울에 올려놓는 데 있습니다. 만약 홀로 자립하여 건강하게 사는 노년이 ‘애국’이라면, 병을 얻어 타인의 손을 필요로 하는 노년은 필연적으로 ‘비애국’ 혹은 사회의 ‘짐’이라는 낙인이 따라붙습니다. 이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할 것을 촉구한 칸트의 윤리학을 뿌리째 거스르며, ‘가치 있는 생명’과 ‘가치 없는 생명’을 암묵적으로 구분하려 했던 20세기 파시즘적 생명정치의 어두운 잔향을 되살립니다. 노년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국가 재정을 절약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이 그 자체로 한 인간의 궤적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문제는 건강을 개인의 성취로만 환원하는 인과의 왜곡입니다. ‘건강한 노년에게 훈장을 주자’는 주장은 건강을 의지의 산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건강은 개인적 선택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직업적 위험, 계급 격차, 주거 환경, 교육의 양과 질, 사회적 자원의 접근성, 산업 구조 등이 평생에 걸쳐 몸에 흔적을 남깁니다. 역학은 이미 이 구조적 편차가 건강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말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이 리포트는 그 격차를 지운 채, 건강을 국가에 기여하는 능력의 잣대로 활용합니다. 이는 능력주의의 가장 차갑고 무감한 얼굴이며, 전형적인 건강 파시즘의 논리이기도 합니다.


평생 유해 가스를 마시며 산업 현장을 지켜온 노동자의 폐와, 사회적 혜택을 꾸준히 누리며 건강 관리를 이어온 자산가의 심장을 같은 자리에 놓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노동자는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떠받친 결과로 병을 얻었고, 자산가는 태생적 조건에 힘입어 건강을 유지해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에 따르면 전자는 ‘부담’이 되고 후자는 ‘애국자’가 됩니다. 불평등이 만들어낸 상처를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되돌리는 이 프레임은 제2의 폭력입니다. 건강 파시즘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 문제로 위장합니다.


‘자립’을 절대적 가치로 추켜세우는 태도 역시 위험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상호의존적 존재이며, 돌봄은 문명사회의 가장 오래된 윤리입니다. 타인의 돌봄을 받지 않는 것을 사회공헌으로 규정할 때, 돌봄은 쓸모없는 지출로 전락하고 연대는 계산의 언어로 희미해집니다.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삶의 표어로 삼아야 하는 사회는 서로가 서로에게 언젠가 짐이 될까 두려워 몸을 줄이는 각자도생의 숲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러한 흐름은 극단적 우파의 돌봄 무용론과 맞닿아 있으며, 결국 건강 파시즘의 문화적 토양을 비옥하게 만듭니다.


이 담론이 우생학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치 독일이 장애인과 병약한 이들을 ‘살 가치 없는 생명’으로 규정했고, 그 논리를 ‘사회적 비용 절감’이라는 기술적 언어로 포장했습니다. 오늘날의 담론이 그와 같은 폭력을 직접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건강하지 못한 당신은 기여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메시지를 반복해 주입하며 병든 이들에게 죄책을 학습시키는 기제는 유사하게 작동합니다. 이는 삶의 기회를 박탈하는 직접적 폭력이 아니라, 존재의 명예를 서서히 침식시키는 ‘사회적 죽음’의 형태입니다.


결국 우리는 묻게 됩니다.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효율적 재정 운영을 위해 국민을 우량한 부품과 불량한 부품으로 분류하는가, 아니면 아프고 약해진 국민이라도 존재의 품위를 지키도록 돕는 안전망인가. 이 질문을 외면하는 사회는 결국 건강한 몸만을 이상화하며, 병든 몸을 숨겨야 하는 수치로 만들어버리는 건강 파시즘의 길 위에 서게 됩니다.


건강하게 늙는 것은 축복일 수 있지만, 그것이 훈장이 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국가가 요구할 의무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진정한 애국은 건강을 과시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고 늙더라도 공동체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품고 살아가는 것, 그 신뢰 속에서 사회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기능적 효율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이며, 살아 있음 그 자체가 존엄입니다. 휠체어에 앉아 있든, 침상에 누워 있든, 인간의 존엄은 어떤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 <슬로우 뉴스> 피드백 중



5.

브런치에 올라오는 글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찾는 이들의 발걸음도 한층 뜸해졌다. 그러던 참에, 근래 어느 피해망상적 논조의 글을 마주하고 마음 깊은 곳이 소란스러워졌다. 이제는 피하는 것이 더 큰 지혜라는 사실을 알지만, 여전히 어떤 언어의 파편은 흉처럼 남는다. 맞서 싸울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기력을 소모적인 대립이 아니라 나를 응원해 준 이들에게 돌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본다. 그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도록, 감사의 방향으로 흐르도록.


그럼에도 마음 한켠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오래된 사진들을 넘기다가 문득, 존경하던 그분과 함께 찍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이 어떻게 평가했든, 그 목소리가 어떤 풍랑 속에 놓였든, 나는 더 오래 믿고 지지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죄스러움이 스쳤다. 비겁하게도 세상의 소란을 핑계로 뒤로 물러섰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 왔다. 그분 덕분에 공공선이라는 말의 씨앗이 내 삶에 뿌리내릴 수 있었고, 공동체를 향한 감각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정작 나는 그 빛을 오래 붙잡아 주지 못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아픈 것을 아신다면, 누구보다 안타까워했을 분임을 안다. 그 마음을 떠올리자 미안함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래서 다시, 기도처럼 나의 첫 책 제목을 되뇌었다. “원순씨를 부탁해”. 그 문장은 지금도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동시에 다시 일어서게 하는 조용한 힘으로 남는다.


오래된 사진 속에
그는 살아 있었고
나는 살쪄 있었네

모든 지나간 순간이
주어진 자리였다는 것을
늘 다 지나간 후에 알게 된다

2011년 보궐선거 직후.내 사진


6.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서 한 부부가 몸을 숨기듯 피신해 있었고, 결국 마구간에서 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아기가 훗날 서른 해 남짓의 생을 살며 세상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리라는 계산을 그들은 하지 않았다. 다만 신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이었다. 더욱이 젊은 여인은 동정으로 아이를 잉태했고, 남편은 그 신비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라 불리기 이전의 예수를 품고 태어나게 한 나사렛의 시골 목수 부부, 요셉과 마리아. 그들이 없었다면 복음의 길도 신약의 지평도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신의 섭리라는 말이 있다면 아마 이런 자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구유에 누인 가장 연약한 아기를 가장 먼저 찾아와 경배한 이들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낮은 자리의 목동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이 동방의 이방인들과 함께 성탄의 첫 장을 열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귀함이 이 이야기의 중심이 아니다. 먼 길을 건너 별 하나만을 의지해 찾아온 이들의 믿음, 그 믿음이 역사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탄은 본래 그렇게 가장 작고 가장 힘겨운 이들에게 스며드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말씀의 기원이자 세계의 조용한 초기화 같은 순간이다. 우리는 이 초심을 잃은 채 화려한 풍경만 남긴 것은 아닌지 문득 되돌아보게 된다.


부활이 희망의 결실이라면, 성탄은 회개의 첫 구간에 가깝다. 회개는 흔히 후회나 반성으로만 이해되지만, 실은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깊은 귀환이다. 성탄이라는 축일은 환희의 명절로 빛나기 전에, 내면을 고요히 벼리는 기다림의 시간에서 출발한다. 서로에게 기쁜 축복을 건네되, 오늘도 가장 어두운 자리에 놓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밤이 되기를 바란다.


목동들의 경배를 받는 아기 예수(1650-1655). 발토로메오 에스테반 뮤릴로.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지난 주일은 가톨릭 교회가 지내는 ‘인권주일/사회교리 주간’이었다.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예수 복음의 요구이자 명령이며, 교회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책무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거나 짓밟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며,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 존엄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교회의 마음을 새롭게 각인해 왔다. 더불어 2011년부터는 그 주간 전체를 ‘사회 교리 주간’으로 삼고 있다. 오늘날의 여러 도전에 응답하며, 새 복음화를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 가야 한다는 교회의 다짐이 바로 이 사회 교리 속에 담겨 있다.


성탄은 십자가 죽음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전주이자, 부활의 서곡으로서 인류 역사의 새로운 기점을 이룬다.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를 묻는다면,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온전히 존중받는 세상을 이루라는 요청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사회를 바라보는 바른 눈을 기르고,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며,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로 다시 서는 것—대림은 그 거듭남의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주일 독서 말씀은 그 소명을 이렇듯 단호하게 일깨운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가 되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 이사야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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