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티 플레져, 그리고 보통의 시간

주간단상 - 이유없이 미움을 받을 때, 나는 쓴다

by 박 스테파노

1.

최근 화제의 소설집 『혼모노』를 읽었다. 읽기를 미루고 또 미룬 이유는 단순했다. 다름 아닌 ‘책값’. 월 만 원 남짓의 독서 구독조차 몇 번이나 쉬었다 다시 이어 가는 형편에서, 두 식구가 이삼일을 먹고 지낼 식비를 한 권의 책에 쓰는 일은 쉽게 결단할 수 없었다. 월정액 독서 플랫폼에 텍스트가 올라오길 은근히 기다렸지만, 목록에 먼저 등장한 것은 오디오북뿐이었다. 스마트폰 운영체계가 한참 뒤처진, 십 년도 더 된 구형 공기계로는 그마저도 재생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올해부터 기고하게 된 비평지의 다음 달 지면에 이 책을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원고에 고료가 책정된다는 사실이, 책 한 권을 미리 소비한다는 데 따르던 마음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마저도 가격이 저렴한 전자책으로 구매한 것은 고민없는 당연지사였다. 성해나 소설집의 첫 단편 제목 연원처럼, 그야말로 “길티 플러져”라는 말이 어울리는 선택이었다.


소설집 『혼모노』. 교보문고 제공


책장을 넘기며 여러 생각이 겹쳐 들었다. 요즘 주목받는 소설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 소설집 역시 소재의 선택만큼은 탁월하다는 인상이 먼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술술 읽힌다는 감각 앞에서 알 수 없는 반감이 고개를 든다. 잘 읽히는 것이 문제라니, 그저 딴지를 거는 심사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술술 읽힌다는 말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머물러 사유하게 만드는 문장이 거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소설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특징은 주제의 사유가 개인의 경험과 감각에 머물러 버린다는 점이다. 성해나의 작품이 세상과 시대를 향해 확장된다는 호의적인 평가들도 들려오지만, 그중 일부는 일정한 립서비스처럼 느껴진다. 솔직함을 말하는 일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무게까지 감당하는 자리에서, 이 소설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2.

새해를 맞으며 연중 문학 공모 일정을 하나씩 훑어본다. 2월과 3월에 집중된 공모 목록 앞에서 욕심과 도전의 경계를 가늠해 본다. 지금 가장 주목받는 작품들, 오래도록 독자들의 선택을 견뎌 온 고전들을 번갈아 떠올리며, 내가 끝내 붙잡을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자문한다. 소설을 쓴다는 일은 본디 진실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아무리 사실과 기억에 기대어 출발한 이야기라 해도, ‘소설’이라는 서사의 외투를 입는 순간 그것은 진짜의 얼굴을 한 가짜로 남는다.


성해나의 『혼모노』를 읽으며 이 ‘궁극적인 거짓’과 수행의 관계를 여러 차례 되짚게 된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팬덤과 붐이 소설 바깥의 작용으로까지 확장되리라 예견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작가 자신의 선택과 태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앞으로 이 작품이 외부의 열기에서 벗어나, 보다 순수한 문학적 평가의 장에 놓이게 될 순간을 유심히 지켜보고 싶어진다.


특히 사실 기반의 소재를 다룰 때 요구되는 엄밀한 취재와 사료에 대한 치밀함은 기본에 속한다. 이 소설집은 역사적 사실과 실제 인명, 지명, 고유명사를 과감하게 차용하지만, 그 과정에서 빈틈이 드러나는 지점도 있다. 이를테면 「잉태기」에서 사립초등학교 배정을 추첨으로 설정한 대목은 취재의 밀도가 충분히 미치지 못한 사례처럼 읽힌다. 당시 초등학교는 해당 학교에 지원한 학생을 선발·추첨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배우 박정민의 추천사로 화제가 된 성해나의 소설집. 무당 업계의 세대 갈등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표제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사진출처. 문학동네·창비 유튜브 캡쳐


고담준론은 종종 권력의 언어로 퇴색되기도 하지만, 담론을 형성하는 일 자체는 여전히 시대와 세상에 말을 거는 유효한 방식이다. 개인의 서사에 머무르는 최근 소설들의 전형을 떠올릴수록, 성해나의 단편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제법 훈련된 호흡으로 단편이 열어낼 수 있는 다층적인 의미의 공간을 마련한다. 그 안에서 진실과 가짜의 경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생겨난다.


그 경계에서 성해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끝내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드러나 있는 것들의 불완전함을 조용히 고발한다. 그 태도만으로도, 이 작가가 분명 주목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3.

살다 보면 이유 없이,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미움을 받는 순간이 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숱한 오해 속에서 시기와 질투를 넘어선 음해를 감내했던 시간들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선생이나 선배, 성직자들이 아낀다는 반응 앞에서, 그 호의의 이면에는 부도덕한 꼼수가 있을 것이라는 오해가 유난히 따라붙곤 했다. 그래서 그런 시선을 지우고자, 가능한 한 모든 영역에서 군소리가 나오지 않을 결과를 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느슨해 보이는 이 글쓰기 플랫폼에서도 그 묘한 미움의 기운은 여전히 감돈다. 나는 그 기척을 비교적 빨리 눈치채는 편이다. 능력의 한계에 자주 부딪히고, 세상의 풍파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피해의식이 내면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를 때가 있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그것은 거의 병증처럼 작동하며, 없던 일조차 실제의 흔적으로 둔갑해 망상과 사실의 경계를 흐려 놓는다. 그러나, 그 경계의 시각을 넘어선 도발들이 신경을 곤두세운다.


“등 뒤에서 나를 욕하는 이는 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면전에서 나를 칭찬하는 이는 나를 미워하는 것이다”

-똘스또이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중에서


흔히 글을 어설프게 쓸 때, 일종의 피해의식의 감정이 스친다. 때로는 자신의 글이 지닌 어떤 형식적 패턴을, 마치 처음 발견한 땅처럼 유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조금 더 다듬어진, 닮은 포맷을 마주하는 순간, 뜻밖의 당혹감 앞에서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 멈칫거림 속에서, 글을 쓴다는 일과 스스로를 의심한다는 일이 얼마나 가까이 맞닿아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뒷담화. 조선일보 칼럼 삽화


4.

비평이나 리뷰에서 흔히 마주치는 ‘줄거리 요약–핵심 코드 해석–최종 결론’이라는 삼단 구조를, 어느 순간 자신의 고유한 방식처럼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온 비평의 정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텍스트 기반 글쓰기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작동해 온 기본 골격에 가깝다. 구조주의 신비평이 학계와 대중 리뷰를 관통하던 시기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고전적 구조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표절을 운운한다면, 그 장면은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기울 수밖에 없다. 작품도 다르고 사유의 결도 다른데, 단지 포맷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비난의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는 태도는 논점을 비켜간다. 그런 시선을 뒤늦게 감지했을 때 밀려오는 허탈함은, 결국 자신의 문해력 빈틈이 빚어낸 오해였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삼단 구조는 오래전부터 내 글투 안에 자리해 왔다. 무엇보다 그 글들은 여러 차례의 개정과 보완을 거치며 조금씩 확장되었고,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미 탓에 그 흔적들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로그들은 내가 글쓰기라는 수행을 어떤 경로로 통과해 왔는지를 보여 주는 자국처럼 느껴진다.


2016년의 첫 글

https://brunch.co.kr/@parkchulwoo/22


2020년의 보정, 보완

https://cwoosr.tistory.com/m/37


2025년의 최종

https://brunch.co.kr/@parkchulwoo/1364


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직장생활 한창이던 2011년 무렵에 시작했다. 날마다의 성취는 급여와 보너스, 승진으로 가시화되었지만, 정작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많지 않았다. 다시 문학적 감각을 끌어올리기에는 그 일상이 지나치게 통속적이라는 자각이 들었고, 그렇게 ‘프레시안’이라는 인터넷 매체에서 연 영화 글쓰기 클래스에 참여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시의 첫 과제 글(2011년 봄)과 블로그 기록이 다행히 남아 있다. 그 글은 배운 대로 전통적인 3단 구조를 충실히 따랐다. 감상의 소재를 줄거리로 던지고, 키워드로 주제를 가늠한 뒤, 다시 감상으로 매듭짓는 방식이었다.


https://m.blog.naver.com/jjangste/140127054784


병들고 가난해졌다고 해서 자존심까지 잃은 것은 아니다. 글쓰기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몇 해 전, 독립 매체의 심층 기사를 인용하며 출처를 밝혔음에도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문장을 다시 다듬게 되었고, 그로 인해 예상치 못한 후과를 겪은 적이 있다. 그 경험 이후 나는 이전보다 훨씬 신중해졌고, 무엇보다 표절 문제에 누구보다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의 글쓰기는 생계의 도구이기 이전에, 삶을 이어 가는 방식처럼 느껴진다. 살아 있는 시간을 하루하루 견디고 건너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니 억울함이나 피해의식에 갇혀 망상 속에서 허우적이는 일이 아니라면, 누구든 문제를 제기할 때는 증거와 명확한 논거를 함께 제시하길 바란다. 뉘앙스로 에둘러 말해 타인을 추론하게 만드는 방식은 비겁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오해였다면 정중히 사과하면 되고, 의심이 남는다면 검증의 절차를 밟으면 된다. 다만 그 판단의 결과가 드러난 뒤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기꺼이 짊어질 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결국 도덕의 문제다.



5.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의 마지막 장면은 기이한 감각으로 오래 남는다. 주인공은 치앙마이 타이거 킹덤에서 이빨과 발톱이 제거된 호랑이를 쓰다듬으며, 설명하기 어려운 송골한 감촉을 느낀다. 그리고 그 순간, 다소 돌연한 방식으로 ‘모럴’을 호출한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 성해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중에서 -


여기서 말해지는 모럴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직역해 온 ‘도덕’과는 결이 다르다. 그것은 보편 규범이라기보다 철저히 개인화된 기준, 태도에 가깝다. 이 지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주엘라 침공과 미애나폴리스에서 이민단속국 요원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추궁 앞에서, 자신의 판단이 ‘Morality’에 근거한다고 답한 장면과도 기묘하게 조응한다. 서구권에서 말하는 ‘Morality’와 우리가 사용하는 ‘도덕(道德)’은 오늘날 번역어로는 겹쳐 쓰이지만, 그 철학적 뿌리와 함의를 따라가면 결코 같은 자리에 서 있지 않다.


서구의 Morality는 라틴어 ‘모랄리스(moralis)’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다시 풍습과 관습을 뜻하는 ‘모스(mos)’에 닿아 있다. 사회 공동체가 합의한 규범을 개인이 어떻게 따르고 실천할 것인가, 다시 말해 ‘행위의 규칙’에 초점이 맞춰진 개념이다. 이 맥락에서 도덕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적 기준이자 의무의 언어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기준을 설정하는 힘은 대개 권력의 손에 쥐어져 있다. 무엇을 재고, 어디까지 허용할지를 정하는 척도가 권력자에게 귀속되는 구조다.


트럼프의 모럴. YeniSafak 제공


반면 동양의 도덕(道德)은 ‘도(道)’와 ‘덕(德)’의 결합이다. ‘도’는 우주의 근본 원리이자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리키고, ‘덕’은 그 길을 자신의 삶과 인격 속에 체화하며 얻게 되는 힘을 뜻한다. 여기서 도덕은 외부 규칙의 준수에 머물지 않는다. 우주의 질서와 스스로를 맞추려는 자기 수양의 과정, 인격을 완성해 가는 긴 호흡을 포함한다. 요약하자면 서구의 Morality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행위의 문제를 묻는 데 가까운 반면, 동양의 도덕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존재의 질문을 던진다.


도덕과 윤리의 구분 또한 이와 맞닿아 있다. 두 용어는 일상에서는 자주 혼용되지만, 철학적으로 들여다보면 결이 다르다. 윤리(Ethics)는 그리스어 ‘에토스(ethos)’에서 유래했으며, 본래는 한 공동체의 풍토나 성품을 의미했다. 현대 철학에서 윤리는 도덕 그 자체가 아니라, 도덕에 대한 성찰과 분석의 학문을 가리킨다. Morality가 “거짓말하지 마라”와 같은 삶의 규칙이라면, Ethics는 그러한 규칙이 왜 정당한지를 묻는 이론적 체계다. 우리가 ‘직업 윤리’나 ‘생명 윤리’라고 말할 때, 그 표현이 특정 영역에서 합의된 이론적 가이드라인을 가리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말로 포장하더라도, 양심과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 행위는 도덕적일 수 없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근거 희박한 음해나 힐난 앞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해나가 소설의 마지막에 남긴 ‘어떤 모럴’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 불온하고 불편한 질문으로 남는다. 그것은 도덕의 이름을 빌린 개인적 쾌감이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지를, 독자에게 끝내 넘겨주는 질문처럼 읽힌다.



6.

성탄과 연말 연시의 축제가 지나갔다. 가톨릭 전례력은 다시 ‘연중(Tempus per annum)’으로 들어선다. 영어로는 Ordinary Time, 흔히 ‘보통의 시간’이라 번역된다. 그러나 이 ‘보통’은 결코 평범하거나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보통은 생각보다 유지하기 어려운, 하나의 이상에 가깝다. 라틴어 ordo, 곧 ‘질서’에서 비롯된 말로, 영어 order의 뿌리이기도 하다. 숫자가 매겨진 시간들, 다시 말해 순서 있게 살아가는 신앙의 시간을 뜻한다. Ordinary Time은 단순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하느님을 따르는 삶의 리듬을 가리킨다.


연중 시기의 전례색은 녹색이다. 성탄의 흰빛, 사순의 자색, 부활의 황금에 비하면 한층 수수하다. 눈길을 끌지도 않는다. 그러나 녹색은 생명과 성장을 상징한다. 화려한 축제의 장막이 걷힌 뒤,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그 일상이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자리임을 연중 시기는 조용히 일깨운다.


‘Tempus per annum’, 곧 ‘해를 따라 흐르는 시간’. 이 말에는 인간의 시간이 하느님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스며 있다. 믿음은 극적인 사건에서만 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무심히 반복되는 매일의 노동과 기도, 관계 속에서 뿌리를 내린다. 연중 시기는 그런 ‘보통의 날들을 거룩하게 사는 훈련의 계절’이다. Ordinary Time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별하지 않기에 중요하다. 눈부시지는 않지만, 성숙을 향해 은밀히 자라나는 계절. 하느님의 마음은 바로 그 침묵과 반복 속에서 깊어진다.


A Life in God is extraordinary. FiercelyCatholic 제공


“시거든 떫지나 말고, 얽거든 검지나 말지.”


이 문장을 떠올리며,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대해 생각한다. 아직 익지 않은 마음,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을 문장으로 내보일 때, 그것이 누군가의 입안에 떫은맛으로 남는다면 어쩌지. 그런 염려가 종종 나를 멈춰 세운다. 쓰고 싶다는 마음은 때때로 앞서 달리고, 나의 언어는 그 속도를 따라가기엔 아직 설익은 열매처럼 느껴진다. 덜 익은 문장을 세상에 내놓고 싶은 욕심은, 어쩌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지보다 스스로를 확인받고 싶은 조급함일지도 모른다.


무엇을 쓰든, 끝내 인간에 대해 쓰게 된다. 얽힌 관계들, 뒤엉킨 기억들, 그 복잡한 결을 단순한 말로 정리하고 싶은 충동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검지나 말지’라는 말 앞에 붙든다. 얽힌 것을 쉽게 단정하려는 태도는, 어쩌면 글쓰기의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쓰고 싶은 욕망은 멈출 수 없지만, 떫지 않게, 검지 않게 쓰고 싶다. 만약 글이 누군가에게 닿는다면, 그것이 설득이 아니라 한 줌의 위로나 작은 여백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한 문장을 더 지운다.

덜 쓰는 법을 배운다.

욕심이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말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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