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은 누구의 몫인가

주간단상-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고르는 일

by 박 스테파노

1.

‘두쫀쿠’라 불리는 두바이 쫀득 쿠키가 빠르게 번진다. 비행기로도 먼 아라비아반도의 도시 두바이와는 거의 무관해 보이는데도, 이 이름은 놀라울 만큼 가볍게 확산된다. 두바이 초콜릿 열풍에서 파생된 이 유행은 단순한 미식 트렌드를 넘어, 오늘의 소비 감각을 드러내는 징후에 가깝다. 대만 카스테라나 탕후루처럼 분명한 기원을 가진 음식과 달리, 이 쿠키는 출처도 정체도 불분명한 채 끝없이 복제된다. 그 모습은 요즘 AI가 쏟아내는 생성물과 닮아 있다.


두바이 쫀득 쿠키는 현대 소비 사회의 단면과 감각의 박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기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삶의 경험이 이미지로 대체된 세계라 규정했다. 이 쿠키 역시 맛보다 단면의 시각적 낯섦과 카다이프가 부서지는 소리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증식되며 가치를 얻는다. 사람들은 미각을 음미하기보다, 그 쿠키를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소비의 대상은 음식이 아니라 이미지다. 쿠키는 ‘먹는 것’이 아니라 ‘유행에 참여했다’는 표식이 된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개념을 빌리면, 우리가 소비하는 것은 실제 두바이의 맛이 아니다. 미디어가 조합한 ‘두바이성(Dubai-ness)’이다. 맛의 일관성이나 품질은 중요하지 않다. 시각과 청각의 자극이 비슷하고, ‘두바이’라는 이름만 붙어 있으면 충분하다. 실제 두바이에는 없거나 변형된 이 쿠키는 원본 없는 복제물로 놓인다. 이국성, 화려함, 희소성이 결합된 시뮬라르크는 현실보다 더 그럴듯한 하이퍼리얼리티를 만든다. 진짜보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가, 오늘의 식탁 위에 놓여 있다.


두바이 쫀득 쿠키 웨이팅. 더 팩트 제공



2.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매끈한 스마트폰 화면 뒤에서 자신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두바이 쿠키의 ‘쫀득함’과 ‘바삭함’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는 이 디지털 피로에 대한 신체적 반사처럼 읽힌다. 즉각적인 도파민을 호출하는 강한 질감은 소외된 육체의 감각을 잠시 깨우고, 공허를 더 센 자극으로 메우려는 현대인의 실존적 몸짓을 드러낸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말한 ‘과시적 소비’는 이제 외제차나 명품 가방을 넘어 디저트라는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스몰 럭셔리’의 변주로서 두바이 쿠키는 문화적 정보력과 구매력을 동시에 드러내는 간편한 표식이 된다. 안타깝게도 이 풍경은 글쓰기의 세계에서도 반복된다. 유행을 답습하면 동어반복 속에서도 인쇄의 기회와 출판사의 호출이 따른다. 이 글쓰기는 책을 ‘사는’ 사람만을 향하고, 책을 ‘읽는’ 이들에 대한 경외는 빠져 있다.


글쓰기의 나쁜 유행은 언제나 ‘이미 알아줄 다수’를 전제한다. “다 알겠지?”라는 암묵적 확신 앞에서 논리를 다듬고 설득할 이유는 빠르게 사라진다. 사고의 긴장이 풀린 자리에는 안일함이 남는다. 이 불편한 지점은 우치다 다츠루가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서 짚은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유행을 읽었다고 믿는 이들에게 이런 환경은 지나치게 안락하다. 약간의 어조 변화만으로도 뜻이 전달되는 ‘후한’ 언어 환경에서 말은 쉽게 소비된다. 그러나 이런 온실에서 창조적인 언어가 태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기술 유행은 더욱 매혹적으로 보인다. 질문으로 포장된 말들이 치열한 독서보다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다만 정성스럽게 싸맨 썩은 생선이 끝내 냄새를 숨기지 못한다는 오래된 진실만은, 여전히 외면된 채 남아 있다.



3.

브런치라는 플랫폼의 장점은 여럿이겠지만,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안전한 곳’이라는 감각이었다. 성기고 미완의 문장을 올려도, 논지를 겨누는 공격보다 공감과 보완이 먼저 도착했다. 다른 온라인 공간이 딴지와 비토로 탁해질 때, 이곳만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장소처럼 보였다. 그 안도의 핵심 장치는 ‘구독’이었다. 보고 싶지 않은 주장과 글을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이 배제의 권리가 역설적으로 안전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균열은 에디터의 손을 거친 대문 노출에서 시작된다. 주목할 글, 뜨는 글, 리스트 선정은 분명한 구별짓기다. 이는 글쓰기 태도에 계층을 세우는 에클리튀르, 곧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떠올리게 한다. 근거가 불분명한 선발은 플랫폼 안에서 특수한 패스를 쥐여 주는 셈이고, 조회수와 구독자를 늘리는 가장 빠른 통로로 작동한다.


이 구별짓기의 문제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공정이라는 감각에서 멀어져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순종을 전제로 한 길들이기다. 노출 기준은 계량적으로 가늠하기 어렵고, 알고리즘은 에디터의 마음속에 있는 듯하다. 기준을 알 수 없는 평가는 결국 한 단어로 귀결된다. 불공정.


물론 짐작 가능한 기준도 있다. ‘응원하기’, 곧 과금을 만들어 내는 작가를 우선한다는 판단이다. 지나치게 단순한 마케팅처럼 느껴지지만, 논리는 이해된다. 다만 그 결과로 자기 자신을 응원해 알고리즘에 진입하려는 욕망까지 생산되는 장면은 씁쓸하다.


요즘 ‘독서 챌린지’의 영향인지 글을 쓰는 이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생업의 시간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에너지는 늘 한정적이다. 종이책 독서를 장려하면서, 정작 ‘커다란 전자책 플랫폼’을 자임한 공간에서 글의 생성이 줄어든다면 그것은 좋은 기획일까. 이 질문은 아직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2015년 브런치 앱 첫 화면. 브런치앱 캡쳐


4.

브런치 플랫폼이 비교적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로 흔히 ‘구독’을 말한다. 물론 그 장치의 역할도 분명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토대는 사용자들의 절제와 협조였다. 서로를 ‘작가’로 존중하며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고, 글에 담긴 진심을 이해하려는 공공의 선의. 이는 플랫폼 기업이 설계한 성과가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된 ‘신뢰’라는 암묵적 자산의 결과다. 브런치를 운영하는 카카오는 이 사회적 레거시에 기대어 양질의 자연어 데이터를 사실상 무상으로 축적하고 있다. 그래서일수록 애플리케이션의 고도화는 더 절실해진다.


브런치를 둘러싼 고민은 ‘탈팡’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안이 분명하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태국에서 코끼리를 길들일 때, 어린 시절 족쇄의 기억만으로 도주를 포기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대안을 상상할 때마다 막연한 두려움이 앞서는 이유다. 그러나 차분히 따져보면 답은 이미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플랫폼 기업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탈팡’ 이후의 일상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택배는 네이버로, 신선식품과 생필품은 SSG로 옮겼다. 오랜만에 이용한 쓱에서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분명한 ‘서비스 향상’이었다. 모바일 앱은 한층 친절해졌고, 배송 알림은 실시간으로 제공된다. 신선식품의 품질 역시 오프라인 마트를 운영해 온 머천다이즈 기준답게 안정적이다.


물론 재벌 기업이라는 점, 총수의 기행이 불러오는 불편함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불매를 선택하기에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SPC 불매에 회의적이었던 이유도 같다. 그 안에는 종사자와 가맹점주, 협력사, 주주라는 다수의 시민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쓱은 쿠팡과 다르게 읽힌다. 대한통운과의 협약, 자체 배송, 물류 인력의 계약직 고용 보장 역시 의미 있게 다가온다.


플랫폼 기업들의 현재 좌표는 어디쯤일까. 네이버는 최근 국가대표 AI 사업에서 탈락했다. 중국 데이터 학습 결과를 그대로 활용한 점이 낮은 평가를 받았다. 비용을 이유로 들었지만, 생성 봇이 써낸 시가 한시의 시작법을 닮아 보였던 인상은 우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카오는 또 어떠한가. 막대한 사용자 데이터를 보유하고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어 자연어 처리’라는 핵심 기술 자산을 품었던 다음 포털을 분리 매각하겠다는 결정은 상징적이다. 결국 카카오는 기술이 아닌 비즈니스 모델 중심의 기업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듯 보인다. 탐욕에 맡겨진 방향키가 남긴 흔적만이 또렷하다.



5.

구룡마을에 또 불이 났다. 이제 겨울철 화재는 이곳에서 사건이라기보다 반복되는 일상이 되었다. 2000년대 ‘재개발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오른 뒤로 화재는 잦아졌고, 그때마다 음모론이 뒤따랐다. 1990년대 이후 불만 서른 차례가 넘고, 인명 피해를 낳은 대형 화재도 여러 번이었다. ‘연례행사’라는 말이 과하지 않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제7구역, 구룡산 부사면에 자리한 구룡마을은 1970년대 후반 형성된 무허가 판자촌이다. 정확한 유입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88 올림픽 전후 개포동 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밀려들며 마을의 윤곽이 잡혔다. 1994년 도곡동 판자촌이 타워팰리스로 바뀌자 철거민 상당수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 한때 ‘강남의 시골’이라 불리던 개포동 일대는 압구정의 그늘 아래 ‘뒷구정’으로 불리던 동네였다.


2000년대 이후 부동산과 재개발 열기가 몰아치며 상황은 급변했다. 환매 가능한 토지를 노린 투기 세력이 유입됐고, 실제 거주 여부와 무관한 ‘딱지’ 거래가 성행했다. 주민으로 위장한 ‘보상꾼’의 알박기도 이어졌다. 혼란의 뿌리는 개발 보상 방식에 있었다. 토지를 돌려주는 ‘환지방식’과 현금 보상인 ‘수용방식’이 엇갈리며 이해관계가 뒤엉켰다.


구룡마을 개발은 오랜 논쟁의 장이었다. 시장과 구청장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정책은 흔들렸고, 일부 환지방식 도입 권고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전입 제한이 풀리자 주민등록은 또 다른 ‘딱지’가 되었고, 공영개발과 전면 수용을 둘러싼 공방은 오히려 투기적 전입자를 이롭게 했다. 임대료는 올랐고, 실제 거주하던 저소득층은 몇 천만 원의 보상금을 쥔 채 떠나야 했다. 지금의 개발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채 시작되었고, 갈등은 구조로 굳어졌다.


이곳 주민 다수는 서울 곳곳의 재개발에 밀려 흘러온 이들이다. 기초생활수급자와 노인, 빈자가 많다. 행정의 줄다리기 사이로 개발 브로커와 부동산업자, 법조 브로커가 스며들었다. 보상 요구는 부풀려졌고, 해결은 멀어졌다. 불길이 되풀이되듯, 구룡마을의 시간도 제자리에서 조용히 타들어 가고 있다.


헤럴드경제 기사 캡쳐


6.

‘부촌 바로 옆의 빈민가’라는 도식으로 구룡마을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내부의 현실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있다. 마을 안에서도 이해관계는 갈라지고, 반목과 대립은 일상이기 때문이다. 주민 대표 조직은 ‘구룡마을 자치회’와 ‘구룡마을 주민 자치회’로 나뉘어 오래도록 다투어 왔다. 공과금 납부 문제와 화재를 계기로 대표 단체는 둘로 쪼개졌고, 그 틈을 파고든 것은 딱지, 곧 거짓 입주권을 앞세운 부동산업자·투기꾼·법조 브로커로 엮인 ‘개발 카르텔’이었다. 법적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무지는 손쉬운 먹잇감이 되었다.


화재는 처음엔 실화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방화’라는 의심이 짙어졌다. 갈등 당사자의 방화, 혹은 투기 세력이 판을 다시 짜기 위해 불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내부에서는 정설처럼 돌았다. 대법원 결정으로 ‘주민등록’이 가능해지고 개발이 시작된 뒤 잠잠해졌던 불길은 몇 해 전부터 다시 거세졌다. 판잣집이라는 구조적 취약성도 크다. 합판과 목재, 스티로폼으로 지어진 집들은 불에 지나치게 취약하다. 한 번 번지면 순식간에 마을을 삼키고, 인명 피해로 이어진다.


구룡마을의 잦은 화재는 음모론의 근거로도 반복 소환된다.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임에도 30여 년간 재개발이 지체되자,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주장이다. 이를 가볍게 넘기기 어려운 이유는, 실제로 대형 화재 이후 재개발 논의가 급물살을 탄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보상 방식을 둘러싼 서울시와 강남구청의 대립 속에서 화재는 12차례 발생했다. 2014년 11월 사망자가 나온 화재 이후, ‘안전을 위해서라도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고, 구룡마을은 다시 개발구역으로 묶였다.


‘강남’이라는 이름에는 여전히 동경이 붙지만, 내부에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자조가 공존한다. 강남은 자연 발생적 도시라기보다 ‘억지’와 ‘의도’로 만들어진 공간에 가깝다. 개포·대치·잠실·삼성이 베드타운으로 취급받던 시절은 그리 멀지 않다. 이곳이 부촌이 된 배경에는 중산층 유입과 상업지 개발뿐 아니라, 특정 투기 세력과 정치 비자금, 지하 경제라는 어두운 토대가 놓여 있었다.


지금의 강남이 살기 좋은 곳이냐는 질문에는 단일한 답이 없다. 강남 3구는 역동적이지만 불안정하다. 재개발과 재건축은 상시 진행되고, 교통 혼잡과 인프라 부족은 일상이다. 학군 신화는 퇴색됐고, 보육과 복지 인프라는 가족 단위 거주 비율에 비해 빈약하다. 대치동 학원가는 희망고문의 상징이 되었고, 진짜 부자의 아이들은 이미 해외로 향한다.


병원과 주거 환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 병원의 편익은 지역 주민에게 제한적이고, 동네 의원은 과잉과 결핍이 공존한다. 주택과 아파트의 ‘가성비’는 처참하다. 1인 가구 비율은 높고, 소득 격차는 가장 크다. 공공 보육시설과 공원, 체육시설 같은 복지는 최하위권이다. 강남은 여전히, 화려한 이름과 달리 쉽게 지치는 도시로 남아 있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전경. 일요신문 제공


7.

구룡마을은 개포중학교에서 300m, 타워팰리스에서 600m, 소망교회와는 2.3㎞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마을에 서면 타워팰리스의 마천루가 손에 닿을 듯 들어온다. 나는 한때 그 높은 건물 안에 집도, 사무실도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주민들 가운데 구룡마을의 존재를 아예 모르거나, 알게 되더라도 아이들 훈육용 공갈처럼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


그래서인지 구룡마을 화재 소식의 뉴스 수명은 길어야 하루다. 삶과 직접 맞닿아 있지 않은 그린란드의 미래나 고준한 담론의 비평은 넘쳐나지만, 이곳의 불은 단신으로 스쳐 지나간다. 곧 떠내려간다. 아마도 ‘나와 무관한 세상의 일’로 분류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살 일도, 살아볼 상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비난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풍경이다.


십 수 년 전 서울시 재개발 정책의 속살을 들여다보며, 쉽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다. 이후 몇 해 동안 빈민 사목을 하던 수녀님들과 함께 명절이면 아이들과 어울려 지냈다. 학원에 갈 수 없어 공부방에 모이던 아이들의 얼굴이, 요즘 같은 밤이면 문득 떠오른다. 반복되는 화재 소식이 연례 행사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을 것이다. 마지막 개발의 동력을 위해, 끝까지 버티는 이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냉혹한 계산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시절의 나에게는 약간의 ‘우쭐거림’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일을 지나, 이제는 세밑에 하루살이를 걱정하는 처지가 된 지금, 그들의 소식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늘 가난한 사람들끼리 나누어야 할까. 그때의 나를 향한 질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반성하며 되돌아본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나부터 잘 버티고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오늘따라 ‘바보 추기경’의 ‘구룡마을 성탄미사’가 떠오른다. 잠 못 이루는 이유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이것이 신비인지, 운명의 장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기도하기로 한다. 나보다 더 가난하고, 더 힘겨운 이웃을 위해.



8.

“우리가 가진 능력보다 진정한 우리를 훨씬 잘 보여 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헤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


운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 근력운동의 효율과 안전을 위해 머신을 이용하곤 했다. 핵심은 언제나 같았다. 자신의 상태와 역량에 맞는 무게와 위치를 고르는 일. 그 선택이 어긋나면 효율도, 안전도 함께 무너진다.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택에는 choice만 있는 것이 아니라 selection도 있다. 양자택일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의 것’을 집어내는 일이다.


믿음이란 각자의 언어로 드리는 하나의 기도라고 생각한다. 모태신앙이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비자발적 냉담의 시간을 지나왔다. 그렇다고 기도를 멈춘 적은 없다. 오히려 갈급함 속의 구복이 늘 회심의 중심에 있었다. 종교는 저마다의 무늬를 지닌다. 특히 섭리의 주관자를 섬기며 그 소명을 좇는 종교들은, 말이 다를 뿐 같은 진심을 향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처지가 이력이 되어 도움을 주고, 교회에 나오라 권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그 도움을 거두겠다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난다. 그럴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내 역시 비슷한 일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결국 모두 내 탓인 듯해 미안함만 남는다.


그래서 그들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기 위해 기도한다. 동시에 우리의 믿음 또한 흔들리지 않게, 성호를 긋고 묵주기도를 올린다.


선택이란. 내 사진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코 복음 2.22 -


욕심은 언제나 슬그머니 되살아난다. 타인이 만들어 놓은 그럴듯한 잣대에 내 삶의 그래프를 겹쳐 보는 순간, 그 망상이 들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지 않기로 한다. 아직도 ‘삶’이라는 과대망상을, 겨우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버티고 있으니까.


뚝. 레드 썬.

나의 새 희망을 헌 욕심에 기워 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뜨끔하며 다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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