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삶과 난폭한 희망 사이

주간단상 - 유예된 시간 위에 놓인 감사의 연습

by 박 스테파노

1.

병원에서 지지난 주 금요일, 유전자 검사 채혈을 마치고 외래진료를 보았다. 지난해 말 시행한 골수검사에서 염색체를 육안으로 관찰한 결과 미성숙 아세포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주치의가 전했다. 그 덕분에 당분간은 추가적인 골수검사를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남은 관건은 유전자 수치였다.


며칠 뒤, 앱을 통해 확인한 숫자는 조심스러운 안도감을 건네주었다. 남들보다 훨씬 더디게 도착한 결과였고, 신약이 없었다면 아예 닿을 수 없었을 희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수치는 단순한 데이터라기보다, 어렵게 구현된 하나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일단, 큰 고비 하나를 넘고 있다는 감각이 몸에 남았다.


그날 받은 처방전은 고이 접어 든 채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경구용 항암제는 보험 적용을 받고 있었고, 암환자 산정특례 역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처방 간격이 넓어졌다는 희소식은 곧바로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호사다마인지, 조삼모사인지 판단이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엊그제 금요일, 국민연금 장애연금이 지급되었다. 그 돈으로 처방약을 구입하기 위해 다시 병원 앞으로 향했다. 날씨는 일주일 내내 강강추위의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길 위의 사람들은 모두 종종걸음이었다. 각자의 사정이 저마다의 속도로 추위를 통과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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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해결했어야 할 여러 금전과 재정의 문제들은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며 기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어려움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돕는 손길들이 정확히 그만큼 찾아왔다. 그래서 감사했고, 또 감사했다.


감사라는 말. 문득 어릴 적 즐겨 불렀던 가스펠 <감사해>의 한 대목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노랫말은 여전히, 지금의 시간에도 닿아 있었다.


‘감사해, 시험이 닥쳐 올 때에...
나의 모든 생활 속에서... 모두 감사해.’



2.

추위가 깊어지자 불청객처럼 기침이 찾아왔다. 누군가 감사히 건네준 쿠폰 덕분에 오랜만에 치킨을 픽업하겠다며 왕복 3km 남짓을 걸은 탓인지, 얇은 간절기 이불로 겨울을 견뎌 보겠다는 객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밤새 기침은 멈추지 않았고, 그 여파로 아내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졌다.


아내는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 두툼한 수면 파자마와 이불을 구해 왔다. 그 안에 몸을 넣고 있는 지금, 뜻밖에도 고요한 행복이 찾아왔다. 행복은 어쩌면 외로운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엊그제 종영한 tvN 드라마 <러브 미>의 마지막 나레이션에 담겨 있던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기침을 숨 쉬듯 내뱉다 보니, 이 ‘기침’이라는 말 자체가 궁금해졌다. 감기(感氣)의 ‘기’에서 비롯된 말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러나 기침은 순우리말이었다. 게다가 나름 깊은 사연을 품은 말이었다. 국어학자들에 따르면 기침은 동족 목적어를 가진 동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울다’, ‘웃다’, ‘꾸다’ 같은 동사들이 그 예다. 울음을 울다. 웃음을 웃다. 꿈을 꾸다. 이때 동사의 명사형이 굳어 명사로 남고, 다시 동족의 목적어가 된다.


설명에 따르면, 한때 ‘깇다’라는 동사도 존재했다. 그러나 현대국어의 맞춤법에서는 ‘기’ 뒤에 ㅊ받침이 올 수 없어, ‘기침’이라는 명사만 남고 동사는 사라졌다. 어쩌면 그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기침이라는 행위가 스스로를 호명할 만큼 자랑스러운 몸의 반응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깇다’라 부르며 주어를 세워 주는 일을 오래전에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울음과 웃음은 감정의 도착지로 기록되었고, 꿈은 의지와 무의지의 경계에서 서사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기침은 늘 중간에 머문다. 의지와 무관하게 튀어나오고, 의미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공기를 흩뜨린다. 말이 되기엔 지나치게 즉각적이고, 서사가 되기엔 너무 짧다.


그래서 우리는 기침을 ‘한다’고 말한다. 사랑을 한다, 일을 한다, 기도를 한다고 말할 때와 같은 동사를 붙이면서도, 그 말 속에는 유난히 책임을 비껴 가는 기색이 묻어난다. 내가 선택한 행동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통과한 생리라는 암묵적인 변명. ‘기침했다’는 말은 언제나 사후 보고에 가깝고, ‘기침을 하다’라는 표현 속에서 행위 주체의 얼굴은 희미해진다. 마치 몸이 나를 대신해 잠깐 말을 했을 뿐이라는 듯이.


기침. 헬스조선 제공


3.

생각해 보면 기침은 언어보다 앞서 몸이 보내는 신호에 가깝다. 숨이 막히거나, 이물질이 스치거나, 내부의 균형이 잠시 어긋나는 순간에 몸은 설명하지 않고 반응한다. 그 반응은 곧바로 소리로 터져 나오고, 그제야 우리는 상황을 이해하려 든다. 기침은 의미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무엇인가 지나치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릴 뿐이다. 그런 점에서 기침은 말 이전의 말, 의미 이전의 발화에 더 가깝다.


‘깇다’라는 동사가 사라지고 명사만 남았다는 사실은 그래서 묘하게 설득력을 얻는다. 자주 하고 싶지 않은 행위, 타인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소리, 스스로의 취약함을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하는 몸의 신호. 그것을 능동태로 붙잡아 두기에는 인간이 너무 부끄러웠던 것은 아닐까. 차라리 동사를 지우고 사물처럼 남겨 두는 편이 덜 아프고, 덜 민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사가 사라졌다고 해서 경험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 밤새 이어진 기침 속에서 나는 분명히 나의 몸과 마주하고 있었다. 숨이 거칠어질 때마다, 이 작은 소리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옆에서 잠들지 못한 아내의 뒤척임, 이불을 더해 주는 손길, 그 모든 것이 기침을 둘러싼 하나의 풍경을 이뤘다. 기침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울렸다.


그래서 이 고요한 행복은 어쩌면 기침 덕분에 더 또렷해졌는지도 모른다. 몸이 먼저 말하고, 말이 뒤늦게 따라붙는 그 틈에서 나는 누군가의 돌봄을 인식했다. 기침을 ‘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행위의 주체를 흐리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행위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은근히 고백한다. 설명할 수 없는 몸의 반응 앞에서 인간은 늘 누군가에게 기대게 마련이니까.


행복이 외롭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이 지점에서 다시 돌아온다. 기침처럼, 행복 역시 의지로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것을 ‘한다’고 말할 수 없고, 다만 ‘겪는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순간은 분명히 몸에 남는다. 두툼한 이불 속에서, 숨이 잠시 고르게 돌아오는 이 짧은 평온처럼.



4.

“감기는 병원에 안 가면 7일 가고, 병원에 다녀오면 일주일 걸린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과학과 의학이 이만큼 발전했음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질병 가운데 하나가 감기라는 생각이 든다. 독감을 포함해 감기를 통칭하는 인플루엔자는 결코 최근의 유행병이 아니다. 인류가 정착하여 농업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한 이후,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 사이를 전염해 왔다. 최초의 기록은 1580년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보고된 사례로, 오늘날의 인플루엔자와 거의 흡사한 양상이었다.


감기로 인해 인류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은 1918년 유럽에서 발생해 전 세계로 확산된 스페인 독감이다. 이 유행병으로 3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차 세계대전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종결된 배경에는 이 스페인 독감이 있었다고 해석하는 전쟁사학자들도 있다. 그 해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무려 12년이나 감소했다. 최근 과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시신에서 독감 바이러스를 추출해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얼음 속에 냉동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한 인디언의 시신에서 그 바이러스를 되살려낸 것이다.


감기를 뜻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라는 단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어의 ‘영향(influence)’과 닮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연이 아니다. 인플루엔자는 중세 라틴어 ‘influentia’에서 유래했다. 본래의 뜻은 ‘흘러들어오다(flow into)’였고, 점성술의 주요 용어로 쓰였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별들에 의한 에테르 유체(ethereal fluid)”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정령으로 여겨졌던 에테르 이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처럼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라는 의미로 변모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다. 그래서 감기의 인플루엔자는 한때 별들의 영향으로 생기는 질병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별의 흐름, 곧 에테르, 다시 말해 기(氣)가 빠져 생기는 병이라는 해석이다.


이 맥락에서 감기(感氣)라는 말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자의 뜻 그대로 풀면 ‘기운(氣)을 느낀다(感)’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현대 의학적 정의를 넘어선다. 동양적 관점이나 정신적 해석에서는, 우리 몸이 외부 환경의 변화나 에너지의 불균형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환절기처럼 기운이 바뀌거나 차가운 외부의 기운이 몸의 면역력, 곧 ‘기’에 변화를 줄 때, 몸은 이를 알아채고 으슬으슬한 증상으로 응답한다.


인지학이나 영적 관점에서도 감기는 단순한 육체의 병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 신체의 에테르체, 곧 생명력이 낡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에너지의 수준으로 재정비되는 과정, 혹은 육체와 영혼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감각이 일시적으로 예민해진 상태로 보기도 한다. 감기는 바이러스라는 외부 인자가 몸 안으로 들어와 신체와 에너지를 흔들 때, 우리 몸이 이를 예민하게 ‘감지(感)’하여 ‘기운(氣)’을 다시 배열하는 하나의 통과 과정으로 읽힐 수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 명대사. Watcha 제공


5.

이 기운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 채, 추운 날에 아내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뿌리치고 굳이 운동 삼아 빠르게 걸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제법 속도를 낸 발걸음 속에서, 오래 묵은 기억들이 함께 떠올랐다.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길을 가거라.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할 땐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 봐라. 틀리고 바보같은 일일지라도 시도를 해봐야 해. 너희들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해. 늦게 시작할수록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


어릴 적부터 눈에 띄는 팔자걸음을 걸어 왔다. 뵌 적 없는 중조부도, 노인정에서 백구두를 신었다는 조부도, 애증이 교차하는 부친 역시 모두 팔자걸음이었다고 들었다. 집안의 내력처럼 전해진 이야기였다. 교련 시간이나 군대에서는 가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그 걸음이 나를 곤란하게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교문을 지나 백양로를 걷는 내 모습을 보고, 길 끝자락 본관 언덕 위의 친구들이 손을 흔들어 맞아 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걸음걸이만으로도 ‘나’임을 알아보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고유한 식별자였다.


한때는 세상을 바꾸는 작은 홀씨 하나쯤 되어 보겠다고 마음먹고, 세상을 걷고 또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주변의 걱정과 우려, 격려와 응원이 갈림길처럼 엇갈릴 때에도 나는 여전히 팔자걸음으로 뚜벅뚜벅 나아갔다. 그 끝에 가파른 언덕만 여러 개 마주했더라도, 뒷축 바깥쪽이 닳아버린 신발만 남았더라도, 걸어온 그 길에는 후회로 남은 한숨이 없다.


그럼에도 이따금, 사람들이 몰려 선 그 줄을 힐끗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곧 다시 걸음을 옮긴다. 나만의 팔자걸음으로, 더디지만 힘이 빠지지 않는 걸음으로. 시간의 상대성이 걸음의 속도마저 바꾸어 놓는 요즘이지만, 늦더라도 정확하게 나만의 발걸음으로 걷고 싶다. 그렇게 다시, 조용히 다짐해 본다.



6.

“인생은 너무도 느리고, 희망은 너무도 난폭해”


이 문장은 프랑스의 작가 프랑스와즈 사강의 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Le Pont Mirabeau)에 닿아 있다. 시 속의 구절, “인생은 이토록 느리고 희망은 이토록 난폭한가”(Comme la vie est lente Et comme l'Espérance est violente)는 사강이 자신의 작품이나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인용하며 그녀 특유의 허무주의적 정조와 결합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마치 사강의 잠언처럼 각인되었다. 니체와 하이데거를 자기계발서처럼 소비하는 최근의 유행 또한 이 오독에 한몫을 보탰다.


<미라보 다리> -기욤 아폴리네르, 1913-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온다는 것을

밤이 오라 종소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지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 오라 종소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물처럼
우리들의 사랑도 흘러간다
인생은 이토록 느리고
희망은 이토록 난폭한가

밤이 오라 종소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나날이 가고 주일이 지나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밤이 오라 종소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이 시는 아폴리네르가 화가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 이후에 쓴 작품이다. 흐르는 강물과 변하지 않는 다리를 대비시키며, 상실의 감각을 천천히 축적해 간다. 여기서 ‘희망이 난폭하다(격렬하다)’는 표현은 결코 긍정적인 기대를 뜻하지 않는다. 이미 떠나간 사랑을 붙잡으려는 충동, 결코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향한 집요한 갈망. 그것은 오히려 잔인할 만큼 생명력 넘치는 힘이다.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무력하게 낡아간다. 인생은 느리게 마모된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 솟구치는 욕망과 기대는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고 화자의 내면을 할퀸다. 결국 시인은 흐르는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면서도,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영원한 현재 속에 ‘남겨진 자’로 머문다. 이는 허무주의를 넘어선 비극적 긍정의 미학에 가깝다.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높이는 173m이며 폭은 20m다. 19세기 말에 지어졌으며 1975년 프랑스의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됐다.월간 조선


철학적으로 ‘인생이 느리다’는 말은 물리적 시간의 속도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주관적으로 체감되는 권태에 가깝다.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1954)이 보여 주듯, 삶은 극적인 사건보다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으로 채워진다. 존재는 이 느린 시간 속에서 점차 윤곽을 잃고 무력해진다. 권태는 늘어짐이 아니라 결여다. 희망과 일념의 결여다.


반면 ‘희망이 난폭하다’는 통찰은 희망을 구원의 이름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희망은 현재의 평온을 가차 없이 흔들어 놓는 충동이다. 결핍을 전제로 삼기에, 지금 여기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미래라는 불확실한 도박판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느릿한 삶의 권태를 견디지 못한 인간에게 희망은 구원의 얼굴을 한 폭력적인 에너지로 다가온다. 이 역설은 인간이 처한 실존적 딜레마를 정확히 관통한다.


인생의 시계는 크로노스의 걸음처럼 무겁다. 반면 희망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깃털처럼 순식간에 스쳐 간다. 그 순식간은 대개 찰나의 고요 속에서 찾아온다. 그래서 행복은 조용하고, 어쩌면 외롭다. 요란한 절망과 떠들썩한 불행에 가려진 그 고요를, 오늘도 더듬어 찾는다. 그 돌봄의 손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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