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차를 기다리며, 노래는 계속된다
노래에 계보를 세우는 일은 익숙하다. 장르라는 이름으로 형식과 계통을 나누고, 빠르기와 악기 구성, 영향의 흐름에 따라 노래를 구분한다. 때로는 음악 바깥으로 확장된 사회적 파장에 따라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운동가, 활동가’라는 호칭은 늘 중의적이다. 삶으로 변화를 밀어붙이는 사람인지, 노래 자체로 변화를 울리는 사람인지에 따라 그 성격은 달라진다. 이 두 의미를 동시에 품은 가수를 떠올릴 때, 한국에서 정태춘만큼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이름이 또 있을까 싶어진다.
정태춘이라는 포크 뮤지션을 처음 인식한 계기는 그의 동반자 박은옥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싱거운 해프닝 하나가 모든 시작이었다. 철없던 중학생 시절, 우연히 플레이리스트에 얹힌 이름 하나. 그 무렵 1980년대는 여러 변화가 겹쳐 있던 시기였고, 대중문화로 보자면 ‘가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던 때였다. 영미 음악이 중심이던 ‘팝송의 시대’를 지나, 국내 가수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저작권 개념이 정교하게 자리 잡기 전, 레코드 회사들은 값싸지만 빛나는 음악들을 빠르게 유통시켰고, 동네 레코드숍은 그 중심에 있었다. 문제는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학생들이었다. 모든 신보를 직접 사서 듣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라디오가 번성했고, 신청곡을 틀어주는 방송을 녹음해 듣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또 하나의 방편은 레코드숍이었다. 손님이 고른 곡을 공테이프에 선별해 녹음해 주는 방식. 지금의 온 디멘드(On demand)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한 장의 테이프에 여러 음반의 대표곡을 담을 수 있었던, 모두에게 이득인 관행이었다.
이런 이유로 더블데크 기능을 갖춘 포터블 오디오가 유행했고, 레코드숍은 음악을 매개로 마음을 전하는 사서함 같은 공간이 되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시절, 아파트 상가 한켠의 작은 레코드숍은 자연스레 아지트가 되었다. 어느 날, 음악 시험을 앞두고 서양 고전음악 예상 목록을 녹음하러 들렀다. 여러 작곡가의 대표곡을 고르다 문득 물었다.
“바그너는 뭐가 있어요?”
주인 아주머니의 대답은 지금도 또렷하다.
“박은옥은 없고 채은옥은 있어.”
그 순간 알게 된 박은옥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 그 청아함 사이로 낮고 굵게 스며드는 또 하나의 음성, 그것이 정태춘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노래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를 ‘한국적 포크를 노래한 음유시인’이라 불렀지만, 그 이름은 그의 삶과 노래가 지닌 거칠고 치열한 결을 지나치게 부드럽게 만든다. 오히려 ‘여전한 노래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으로, 그의 노래와 삶을 다시 더듬어 보게 된다.
박탈의 땅에서 울려온 노래
정태춘은 여전히 신보를 발표하는 현역 가수이자 사회 운동가이며,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이다. 한국 포크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가요계를 말할 때 비켜 설 수 없는 인물이다. 조용필과 같은 ‘옛날 가수’의 반열에 놓이면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주도해 성과를 이끌어낸 문화운동가로 기억된다. 그의 노래는 형식부터 달랐다. 한국적인 정서가 깊이 배어 있는 선율과 서정적인 가사는,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직접 건드리며 ‘공감’이라는 오래된 음악의 힘을 다시 불러낸다.
그는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농사꾼의 5남 3녀 중 하나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도두리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에 놓인 마을로, 삶의 왕래는 충청남도 아산시(당시 아산군) 둔포 오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장기 전체를 이곳에서 보낸 그는 경기도 출신이면서도 말투에 충청 방언의 결을 자연스럽게 품고 있다. 정태춘의 정서는 이 경계의 땅에서 길러졌다.
그는 이북 출신이 아니지만 실향민이다. 살던 마을이 미군기지인 캠프 험프리스(Camp Humphreys) 건설로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그의 노래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박탈과 상실, 그리고 저항의 감정이 그의 음악을 떠받치는 바탕이 된다. 또한 그는 불자이며, 그의 노래에는 도솔천, 억겁, 중생, 해탈 같은 불교적 언어가 스며 있다. 그 정점은 <탁발승의 새벽 노래>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시골의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음악과의 접점은 있었다. 미군부대 인근이라는 환경, 그리고 평택 지역에 자가농이 많았던 사회적 조건이 작용했을 것이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만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미군부대를 드나들던 큰매형이 가져온 기타 한 대. 무료한 농촌의 시간 속에서 그는 셋째 형과 기타를 붙잡고 놀았고, 한 번 들은 멜로디를 곧장 연주할 만큼 귀와 손을 단련했다. 교습서도, 스승도 없었지만 시간이 넘쳐났다. 당시 악기의 가장 충실한 스승은 늘 시간이었으니까.
기타는 그를 음악으로 이끌었고, 평택중학교 시절에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택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음대 진학이라는 꿈을 품는다. 그러나 고등학교 2학년, 학교의 현악반이 밴드부로 통합되면서 그 꿈은 갑작스럽게 꺾인다. 밴드부에서 현악기는 설 자리가 없었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소년이 느꼈을 절망은 컸다. 이후 그는 소위 ‘불량학생’의 길로 기울었다. 진로가 사라진 자리에서 남은 것은 일탈뿐이었다. 무리지어 다니고, 담배를 피우고, 외박을 일삼는 생활. 그 와중에도 그는 버스 창에 맺힌 성에를 보며 시를 짓는 감수성을 잃지 않았다.
대학 진학은 실패로 돌아갔다. 집안은 당시로서는 큰돈인 30만 원가량의 바이올린을 마련해 그를 서울로 보냈고, 을지로 3가의 서울음대에서 레슨을 받으며 재수를 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상태를 ‘피폐했다’고 회상한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외모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그 반작용처럼 헤르만 헤세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죽음과 염세에 빠져들었다.
직접 만든 독약을 품에 지니고 다닐 만큼, 뒤늦은 질풍노도에 갇혀 있던 시기였다. 1972년 10월, 입시를 앞둔 그해 10월 유신이 발표되자 그는 재수를 그만두고 귀향한다. 이는 단단한 정치적 결단이라기보다, 자신과 세계를 향한 염세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 맞닥뜨린 시대적 사건이 촉발한 선택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시대에 목소리를 내는 이들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과잉에 가까운 자기 탐문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그의 삶은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검열과 침묵 사이에서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유학까지 보냈던 자식이 아무 말 없이 짐을 싸 들고 돌아왔을 때, 집안이 그를 반길 리 없었다. 그는 몇 차례 집을 나와 전국을 떠돌았고, 목욕탕 화부로 일하며 목적 없는 시간을 견뎠다. 당시에는 소득 없는 방황처럼 보였지만, 이 시기는 그의 내면을 천천히 숙성시키는 시간이었다. 이때 쌓인 감수성과 사유의 결은 훗날 그의 음악 세계를 떠받치는 깊은 토양이 된다.
결국 그는 입대했고, 군생활 속에서 초기 작품들을 써 내려갔다. 외적 방황이 제한된 군대라는 공간은 오히려 내면을 정리하고 음악으로 옮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1978년 6월 제대 후, 음악평론가 최경식의 소개로 서라벌 레코드와 인연을 맺으며 군 시절 정리한 곡들을 음반으로 발표한다.
당시 대중문화를 포크가 주도하던 시기, 그의 첫 음반은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숨을 고를 여유도 생겼다. 당시 포크송 다수는 미국 음악의 모방에 머물러 있었고, '트윈폴리오'와 세시봉 가수들이 그 흐름을 대표했다. 그러나 정태춘의 음악은 같은 포크의 계보 안에 있으면서도 달랐다. 한국적인 정서가 깊이 배어 있었고, 가사의 미학 역시 대중의 공감을 끌어냈다. 같은 서라벌 레코드 소속이던 박은옥과의 만남과 결혼은 이 시기를 그의 삶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으로 만든다. 1979년 MBC 신인가수상과 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상 수상은 그가 ‘연예인’으로도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이후를 결정짓는 두 가지 사건이 찾아온다. 첫째는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의 음반사전심의제도와의 충돌이었다. 첫 음반의 대표곡 <시인의 마을>을 포함한 몇몇 곡은 가사 변경을 권고받았고, 이는 사실상 명령이었다. <시인의 마을>은 1978년 심의 과정에서 원작 시의 저작권 확인으로 시작되었으나, 끝내 ‘불건전 요소’라는 이유로 부적절 판정을 받는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라는 구절은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강제로 바뀌었다.
신인 가수였던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 경험은 깊은 분노와 질문을 남겼다. 자신의 내면에서 길어 올린 언어가 타인의 자의적 판단으로 훼손되는 일은 그에게 또 다른 고민을 안겼다. 동시에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방송 환경도 그를 옥죄었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명랑운동회’에 나가 뛰고 구르고, 과자를 따먹고 밀가루 속에 얼굴을 묻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견딜 수 없이 낯설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런 태도는 결국 방송가에서 그를 ‘다루기 어려운 인물’로 낙인찍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준비한 두 번째 음반에서 그는 선곡과 프로듀싱의 권한을 얻는다. 그러나 음악적 완성도와 별개로 대중적 성과는 실패에 가까웠다. <사망부가>, <탁발승의 새벽노래> 등은 그의 정서와 철학을 더욱 선명히 드러냈지만, 대중의 선택을 받기엔 너무 깊고 무거웠다. 방송가의 냉대 속에서 성공은 요원했다.
이어진 3집은 더 실험적이었다. 국악 반주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그의 정서는 더욱 또렷해졌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연이은 실패는 그를 경제적 궁지로 몰아넣었다. 저작권 수입과 인세 체계가 허술했던 당시, 음반사에서 주는 계약금과 월급 같은 생활비가 전부였는데, 그마저 끊겼다. 경영난이라는 설명이 뒤따랐지만, 실상은 흥행 실패의 대가였다. 이 시기, 그는 음악과 삶 모두에서 가장 깊은 벼랑 앞에 서 있었다.
동지의 노래, 각성의 무대
박은옥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남편이자 가수인 정태춘과 듀엣으로 많은 노래를 불렀고, 1979년 <회상>, <윙 윙 윙>으로 데뷔했다. 김민기, 양희은과 나란히 거론되는 음유시인으로, 서정적인 분위기와 토속적인 노랫말을 통해 한국 포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대중가요의 관성에서 벗어나 삶과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시선, 진보적인 역사 인식을 담아낸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80년 신인가수 시절, 같은 처지의 가수 정태춘을 만나 결혼하며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으나, 오락 프로그램 중심의 방송 환경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음반의 연이은 실패로 살림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아이(정새난슬)까지 태어나자 야간업소 출연까지 고민했지만 포크가수가 설 자리는 없었다. 이후 그는 철저히 정태춘의 동지로 남아 음악과 살림을 함께 짊어진다. 정태춘이 노래를 쓰지 않던 시기, 그는 비자발적인 활동 중단을 겪었다.
“그런 마음도 들긴 했지만 음악 작업을 중단한 이유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원망을 할 수는 없었어요. 정태춘씨는 다른 작곡가의 곡을 알아보자고도 했지만 열심히 알아보게 되지 않더군요.”
-박은옥, 김규항 문화평론가와 한계레 신문 인터뷰 중-
1980년대 초반은 정태춘에게 가장 방황이 깊던 시기였다. 연이은 실패로 인한 경제적 곤궁, 결혼과 육아 속에서의 생계 압박, ‘연예인’이 아닌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겹쳐왔다. 그때 손을 내민 곳이 지구레코드였다. 4년 전속, 800만 원의 계약으로 1984년 《떠나가는 배》가 발표되고, 이때부터 음반은 ‘정태춘, 박은옥’의 이름으로 나온다.
《떠나가는 배》는 방송 활동 없이도 대중적 반응을 얻어 최소한의 숨통을 틔웠고, 1985년 《북한강에서》 역시 성과를 이어갔다. 그러나 회생은 경제적 차원에 머물렀다. 그의 의문과 갈증은 남아 있었고, 그는 이를 풀기 위해 전국 공연에 나선다.
이 공연들은 오늘날의 ‘콘서트’와 달랐다. 1985년 1월 부산 가톨릭회관을 시작으로, 소극장과 대학 강당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선택이라기보다 형편의 결과였지만, 이 소규모 무대는 포크 생태계에 전환을 가져왔다. 개인적·사회적 질문을 안고 시작한 이 공연에서, 그는 관객과의 밀착 속에서 점차 각성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987년 발췌곡집을 거쳐 1988년 《무진 새노래》를 발표한다.
《무진 새노래》에는 공연을 통해 다듬어진 노래들이 실렸다. 전통적 기법과 처연한 정서에 머물던 이전과 달리, 더 구체적이고 진지한 메시지가 전면에 섰다. 공연윤리위원회(공윤)와의 갈등은 불가피했고, 그는 이 과정에서 결심에 이른다. 당시 기준으로는 발매조차 어려웠을 음반이, 민주화 열망이 고조된 시대 분위기 속에서 가사 수정 명령에 그쳤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1988년 겨울, 청계피복노조 집회에서의 노래를 시작으로 그는 집회와 대학가의 초대 손님이 된다. 같은 해 12월, 노래극 형식의 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송아지>를 시작한다. 단편이 아닌 일관된 서사를 가진 이 공연은 제도권 대중음악이 시도하지 못한 형식이었다.
이 흐름은 당대의 사회 정서와 맞물렸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의 감정, 민족적 정체성의 재발견, 서구—특히 미국—중심 대중문화에 대한 반발과 그의 음악적 특성은 자연스럽게 공명했다. 대학가에 퍼져 있던 탈춤·풍물·전통문화 동아리의 흐름, PD에서 NL로 이동하던 학생운동의 축 역시 이 공명을 키웠다.
전국을 도는 공연장은 입소문을 타고 몰려든 대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정태춘에게 이 시간은 ‘호응’보다 ‘배움’의 시기였다. 방송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대중을 만나던 그가, 공연장 안팎에서 청년들의 이야기—불의로 희생된 이들의 이름, 매캐한 최루탄 냄새의 이유—를 비로소 듣게 된 것이다. 1989년 4월까지 이어진 이 여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음악적 지향의 기초를 완성했고, 마침내 진정한 노래를 위해 공윤과의 힘겨운 싸움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환멸의 시대를 건너, 다시 첫 차 앞에서
1998년 2월의 《건너간다》와 2002년 11월의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는 《92 장마, 종로에서》의 정서를 잇고 있으나, 그 결은 분명히 달라져 있다. 여기서의 ‘회한과 공존하는 희망’은 민주화의 좌절이나 진보 세력의 패배에 대한 상실감에 머물지 않는다. 급격히 변모한 시대 자체가 낳은 회한과, 그럼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희망의 감정에 가깝다.
1990년대 중후반의 한국 사회는 격변의 연속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형선고, 김일성의 사망, 연세대 사태 이후 대학 운동권의 해체는 한 시대의 종언을 알렸다. 대학생들은 취업을 통해 기존 질서로 편입되기를 희망했고, ‘X세대’라는 이름 아래 소비와 개인 만족이 미덕이 되었다. 극단적 양극화는 지존파 사건 같은 범죄를 낳았고,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사회의 균열을 가시화했다. 이 모든 흐름은 결국 IMF 사태로 수렴되며 사회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 시기의 정태춘의 노래에 깃든 회한은 더욱 깊다. 《92 장마, 종로에서》의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가 어둠을 지나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려는 의지였다면, <건너간다>에서는 ‘다음 정거장’도, ‘이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표정하고 지친 사람들을 태우고 ‘환멸의 90년대’를 통과한다. 그럼에도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정동진에 떠오르는 ‘쌍무지개’를 노래하고, ‘어둠 걷혀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 차’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 앨범을 끝으로 그는 다시 긴 침묵에 들어간다.
“너무 힘들어하니까 보는 나도 많이 힘들었어요. 이 사람이 반복해서 말했어요. 군부독재가 물러났지만 이젠 더 공고하고 사악한 자본의 독재가 들어서고 있다, 그런데 군부독재와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변화에 대해선 외면하고 그 질서 속에 들어가 명랑한 얼굴로 개혁을 말하고 민주화를 말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고….”
-박은옥, 김규항 문화평론가와 한계레 신문 인터뷰 중-
2001년 12월, 그는 ‘노문모(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의 창립 멤버로 참여한다. 지지를 선언했으나, 선거를 앞두고 탈퇴했고 이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를 지지했다. 노문모가 특정 인물에 대한 지지를 넘어 세대적 힘을 조직하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그의 문제의식은 충분한 공감을 얻지 못했고, 그는 결국 그 자리를 떠났다.
그에게 더 시급했던 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변화에 맞설 거대 담론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진보운동은 시민의 일상과 지역 문제라는 미시적 영역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권력이 국가에서 시민으로 이동했다’는 말과 달리, 그는 ‘권력이 국가에서 자본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민주화가 자본화로 귀결되는 현실에 대한 이 인식은 고립으로 이어졌고, 2002년 이후 그는 음악과 사회 활동을 모두 중단한다.
이후 그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투쟁, 이른바 대추리 사태의 한복판에 선다. 대추리와 도두리는 그의 고향이자 정신적·음악적 뿌리였다.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으나, 국회와 정부는 일사천리로 비준과 강제수용을 밀어붙였다. 2006년 봄, 파종한 논밭은 포크레인으로 갈아엎어졌고, 5월 4일 새벽 경찰 1만3천여 명이 투입된 대추분교 철거는 수백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정태춘 역시 저항 끝에 연행된다.
“남에게 공격적이진 않았지만 서운함이나 고립감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왔다고? 그 세상이 왔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거라고?’ 지금도 그 이야기만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박은옥, 김규항 문화평론가와 한계레 신문 인터뷰 중-
노무현의 사망 이후 그는 추모 집회와 마지막 문화제 <잘 가오, 그대>의 총연출을 맡으며 사자와의 화해를 시도한다. 2009년 30주년 공연을 치렀으나, 새 앨범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침묵을 깬 이는 박은옥이었다. 수차례의 설득과 다툼 끝에 2012년 1월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발표된다. 세상을 향한 거창한 외침이 아니라, 담담히 노래해도 된다는 그의 설득이 결정적이었다.
10년의 공백 이후에도 음악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사운드는 더 차가워졌고, 전통적 정서는 제3세계 음악까지 품었다. <서울역 이씨>에는 낮은 인간 군상에 대한 연민이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날자 오리배>에서는 암울한 현실을 박차는 비상이 그려진다. 부부가 다시 부르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늦은 나이에 이른 희망가처럼 울린다.
2016년 민중총궐기, 2019년 40주년 프로젝트 <날자 오리배>, 그리고 2025년 정규 12집 《집중호우 사이》까지. 그는 여전히 노래한다. 환멸의 시대를 건너, 다시 첫 차 앞에 서듯.
진짜 노래꾼, 시대와 대화하는 목소리
포크는 단순히 통기타 반주로 연주되는 어쿠스틱 음악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당대의 사회와 말을 섞어온 장르다. 그런 의미에서 정태춘은 김민기와 한대수로 시작되고, 이미 고인이 된 김광석으로 이어진 한국 포크의 중심축이라 할 만하다. 안치환, 류금신, 권진원처럼 민중가요의 영역에서 출발해 기존 가요계로 진입한 사례는 있었지만, 촉망받던 기성 가요계의 신인이 노래하는 투사의 길로 방향을 틀어 끝까지 걸어간 경우는 정태춘이 유일하다.
그는 한글의 결을 가장 아름답게 살려온 싱어송라이터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에서는 가사를 자주 틀린다. 한 곡의 가사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길고, 반복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종 가사대를 앞에 두고 노래한다. 시적 산문에 가까운, 길지만 어색하지 않은 가사들. 한국어의 맛을 자연스럽게 살린 그 언어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풍경이다. <한 여름 밤> 같은 서정적인 곡만 보아도 불필요하거나 어색한 단어 하나 없이, 멜로디와 어우러져 정서를 깊게 밀어 넣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음악사적 맥락을 떠나서도 그는 한국 최고 수준의 가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다. 폭발적인 성량은 아니지만, 시적인 가사를 읊조리듯, 푸념하듯, 때로는 담담하게 풀어내는 그의 가창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가사의 철학과 감수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목소리라는 점에서 그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의 등장이 트로트 일색이던 가요판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음악 밖의 자리에서도 그는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1990년대 초 가요 사전심의 폐지운동을 주도해, 1996년 헌법재판소의 ‘가요 사전심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낸 일은 한국 문화계가 여전히 그에게 지고 있는 빚에 가깝다.
“변혁을 말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너뜨리려 했던 주류 질서 속으로 빠져들어가면서 ‘권력이 국가에서 시민으로 넘어갔다’고 말했어요. 그러나 권력은 시민이 아니라 자본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지요.”
-정태춘, 김규항 문화평론가와 한계레 신문 인터뷰 중-
정태춘은 한국 대중음악사이자 사회운동사의 중요한 지점에 놓인 예술가다. 그를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전히 서구 음악 중심인 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 고유의 정서를 음악적 정체성으로 지켜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악이나 사물놀이를 차용한 사례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음악에 축적된 전통적 정서와 감각은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가 아니라, 출생과 성장, 삶의 경로와 그가 몸으로 통과한 사회적 현장 속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크로스오버와는 결을 달리한다.
대중음악이란 결국 동시대 사람들의 감정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얼굴을 담아내는 예술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음악은 당대의 사람들과, 그리고 사회와 깊은 소통 속에서 만들어지고 향유되었다. 더구나 그가 끌어안아 온 정서는 언제나 주류가 아닌 이들, 소수자와 약자, 혹은 공공선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이들의 몫이었다. 이와 같은 궤적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바로 그 희소성, 그것이 정태춘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현재형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시인의 마을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 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테요
자기만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곁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홀로 선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손수건 한 장 던져 주어 작은 가슴 위에 얹어 줄 이도, 다가와 말을 건네고 손을 잡아 줄 이도 보이지 않는다. 내 탈춤에 장단을 쳐 줄 사람은 없고, 운명의 길동무가 되어 줄 이 역시 없다. 남는 것은 고독과 방황뿐이다. 그 둘은 친구처럼 곁에 붙어 끊임없는 상념을 만들어 내고, 그 상념을 시어로 토해낼 수 있다면 차라리 시인이라 불러도 좋겠다는 고백에 이른다.
시인의 마을이란 바로 그런 곳일지 모른다. 고독과 방황이 나란히 머무는,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해 저무는 고갯길을 터벅터벅 오르는 탁발 수도승의 두 어깨 위에는 하늘에 비껴 펼쳐진 노을만이 얹혀 있다. 그럼에도 괜찮다. 고독과 방황의 상념으로 글을 쓸 수 있다면. 마흔 해가 넘어서야 비로소 이 시인의 마을이 어디인지 알게 되는, 그래서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다.
정태춘의 데뷔작이자 그에게 대중적 인지도를 안겨 준 노래다. 동시에 그가 처음으로 검열의 가위질을 경험한 노래이기도 하다. ‘우뚝 걸린 깃발 펄럭이며’는 ‘푸른 하늘 구름 흘러가며’로, ‘텅 빈 가슴’은 ‘부푼 가슴’으로, ‘벗들의 말발굽 소리’는 ‘자연의 생명의 소리’로 바뀌었다. ‘고독’과 ‘방황’은 ‘자연’, ‘생명’ 같은 말로 대체되며 노래는 여러 차례 난도질당했다. 그러나 지워진 말들 사이에서도, 그 노래는 끝내 자기 자리를 잃지 않았다.
https://youtu.be/L364vSFgjS4?si=mGDdg611qs4d67M6
떠나가는 배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 너머로 어둠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정태춘의 1984년작 <떠나가는 배>는 단순한 사랑 노래를 넘어선다. 1980년대의 암울한 시대를 배경으로, 억압과 속박을 벗어나 평화와 자유를 갈망하던 고독한 인간의 내면과 민중의 염원을 함께 담아낸 노래로 평가받는다. 군사 독재의 그늘 아래서 많은 이들이 자유를 꿈꾸던 시절, 이 노래는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그 갈구를 노래했다. 비판적 시선에서 볼 때 ‘떠나가는 배’는 현실의 억압을 벗어나 평화로운 땅, 곧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화자의 상징이다.
이 노래의 부제는 이어도다. 예전의 이어도는 제주도민에게 환상의 섬이었다. 천 리 바닷길 너머에 낙원 같은 섬이 있다는 전언만 전해질 뿐, 그곳을 다녀온 이는 이승에 없다고 여겨졌다. 이어도로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실제로 이어도는 존재한다. 마라도 남서쪽 149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수중섬이다. ‘이어도’는 제주도 설화 속에서 이상향을 뜻하며, 현실에 발 딛지 못한 채 거친 바다로 나설 수밖에 없는 고독한 영혼을 은유한다.
<떠나가는 배>는 4집 《떠나가는 배》의 수록곡이자 타이틀 곡이다. 이 노래는 한동안 침체에 빠져 있던 정태춘을 인지도와 생계 양면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작품으로 기억된다. 어쿠스틱 기타를 바탕으로 한 단조(Minor) 선율은 슬픔과 함께 시대의 고뇌를 담아내며, 대중적인 사랑 속에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정태춘의 독특한 창법과 서정적인 가사는 그를 단순한 대중가수를 넘어, <시인의 마을>에서 시작해 이어져 온 한국적 포크의 전설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https://youtu.be/B-__zZlRkIY?si=nAskHP7rPtGlhutn
북한강에서
저 어두운 밤하늘에 가득 덮인 먹구름이
밤새 당신 머리를 짓누르고 간 아침
나는 여기 멀리 해가 뜨는 새벽 강에 홀로 나와
그 찬물에 얼굴을 씻고
서울이라는 아주 낯선 이름과
또 당신 이름과 그 텅 빈 거리를 생각하오
강가에는 안개가, 안개가 가득 피어나오.
1985년 발표된 정태춘의 이 노래는 서정적인 노랫말과 읊조리듯 흐르는 포크 선율로 고독과 그리움,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조용한 관조를 담아낸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곡은 예비군 동원훈련장으로 향하던 트럭 위에서 태어났다. 정태춘은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송파구 가락아파트에 살았죠. 새벽 댓바람부터 인근 여고 운동장에 모여서 트럭을 타고 북한강가에 있던 예비군훈련장으로 갔어요. 그 넓은 강을 보면서 가사와 악상이 떠올랐죠.”
이 노래는 시적인 가사로 문학성을 높이 평가받아 왔다. 정태춘의 노랫말에는 상징과 비유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고, 개인의 사정과 내밀한 정서가 함께 공존한다. 도시의 환멸 속에서 자연과 순수함을 갈망하는 감각을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실제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 3위에 꼽힐 만큼 가사의 힘이 두드러지며, 북한강의 새벽 풍경을 눈앞에 불러오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가 이 곡의 큰 장점으로 꼽힌다.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에서 서정적 포크의 한 정점을 보여준 작품으로, 현대인의 고독과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본능을 담담하게 풀어냈다는 비평을 받는다.
삭막한 예비군 동원훈련장으로 향하는 트럭이라는 역설적인 공간에서 탄생했기에, 이 노래의 서정성은 더욱 또렷하다. 스무 살 청년의 감성과 일흔 노인의 관조가 동시에 느껴지며, 세대를 넘어 메마른 마음을 적셔 주는 곡으로 남았다. ‘북한’이라는 단어 때문에 군사 정권 시절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정태춘 특유의 서정적이면서도 은근히 전투적인 서사가 숨 쉬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https://youtu.be/nwrKvjpj6vg?si=saoiULsbW8ydvHNI
92년 장마, 종로에서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 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훠이, 훠이... 훠이, 훠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90년대는 흔히 환멸의 시대로 불린다. 세상은 물질로 덮였고, 담론은 잘게 부서져 개인의 만족이 앞자리에 놓였다. 80년대 광장에서 군중을 이루며 기자를 기다리던 얼굴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른바 민주화 학번들이 X세대를 오렌지족이라 부르며 낙인찍던 그 시선, 그 환멸의 한 단면이 이 노래에 스며 있다. 절망의 정서다. 그러나 무너진 가슴 위로, 광장의 비둘기들이 후여 날개를 욱여치며 박수를 보내듯 다시 날아오른다. 다시라는 말이 남는다.
정태춘은 현실 정치에서 당선 가능성이나 제도적 실현 가능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의 상상력의 최대치가 제도정당의 한계에 머문다면, 그것은 지금의 세상을 넘어설 의지를 포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상상력의 빈곤이 답답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뜨거운 열기, 그에 대비되는 허망한 현실과 패배의 감각, 그리고 그럼에도 다시 희망을 더듬는 정서가 이 곡에 응축되어 있다.
행진곡과 발라드의 변주에 머물렀던 80년대 민중가요의 음악 언어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 편곡과 국악기 구성 역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앨범은 제작 당시 공륜의 사전심의를 거치지 않은 채 배포되었고, 그 선택은 대중가요 사전심의제 폐지라는 기념비적 사건을 촉발했다. 그렇게 이 작품은 하나의 노래를 넘어, 저항의 아이콘으로 남았다.
https://youtu.be/AJfvq8fVRX4?si=JG_0Xh5NXLi86PPe
탁발승의 새벽 노래
이 발길 따라오던 속세물결도 억겁속으로 사라지고
멀고 먼 뒤를 보면 부르지도 못 할
이름없는 수많은 중생들
추녀끝에 떨어지는 풍경소리만 극랑왕생하고
어머니 생전에 출가한 이몸
돌계단에 발길도 무거운데
한수야 부르는 쉰 목소리에 멈춰서서 돌아보니
따라온 승냥이 울음소리만 되돌아서 멀어지네
한국적인 포크 선율 위에 새벽 산사의 청아한 기운과 탁발 수행자의 구도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담아낸 명곡이다. 번뇌와 속세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이웃의 고통을 살피는 수행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삶의 본질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가운 별빛과 숲길, 시냇가 물소리와 목탁 소리 같은 감각적인 시어들은 새벽 산사의 풍경을 또렷이 그려낸다. 그 풍경 속에서 수행자의 내면적 고요와 남아 있는 번뇌가 대비되어 드러난다. 속세에 대한 그리움과 이별을 안고 수행의 길을 걷지만, 마침내 ‘억겁 속으로 사라지는’ 세속의 물결을 바라보며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수행이 깊어질수록 자기 절제를 넘어 타인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는 ‘자비’의 정신이 강조되고, 낮은 곳에서 하찮은 손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가 조용히 드러난다.
한국적 포크의 독보적인 감성 속에 정한을 담아낸 정태춘의 가사와 구수한 멜로디는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남긴다. <시인의 마을> 등과 함께 그의 예술성을 증명하는 곡으로 꼽히며,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그가 보여준 서정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인문학적 감수성이 응축된 작품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종교 음악을 넘어, 보편적인 인간애를 전한다.
https://youtu.be/E0JT9D1LNqY?si=BPtdC48axRcIth6M
우리들의 죽음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아, 대한민국...》의 수록곡으로, 1990년 3월 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연립주택 지하방에서 발생한 화재, 이른바 혜영·용철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다. 영세한 맞벌이 부부는 어린 남매가 밖으로 나가 위험에 처할까 염려해 밥상을 차려 둔 채 문을 잠그고 출근했고, 방 안에 남겨진 아이들이 불장난을 하다 화재가 발생해 끝내 빠져나오지 못했다. 두 아이의 죽음은 당시 도시 노동자 가정의 열악한 주거 현실을 드러내며 전국적인 충격을 안겼다.
이 노래는 그 참혹한 상황을 어린 남매의 시선으로 그려 더 큰 반향을 불러왔다. 정태춘이 직접 들려주는 인트로 나레이션은 당시 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 신문 기사를 낭독한 것이다. 훗날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라이브 무대에서는 이 사건을 언급한 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를 이어 부르는 장면도 남아 있다. ‘그들의 죽음’이 아닌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제목은, 이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 시대와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며 구조적 희생임을 강조한다.
노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급격한 산업화의 그늘 속에서 소외된 도시 빈민과 영세 맞벌이 가정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다. 아동 안전망의 부재와 열악한 주거 환경을 고발하며, 아이들을 방치한 부모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그들을 일터로 내몰고 보호 장치 하나 마련하지 못한 사회 시스템을 비판한다. 정태춘은 1990년 사전 심의를 거부한 채 이 앨범을 발표했고, ‘우리들의 죽음’은 그가 현실 참여 가수로 분명히 방향을 튼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남았다.
https://youtu.be/B1ZAVFLS3eU?si=dnoQ__fBgtzaqcf7
비둘기의 꿈
봄 햇살드는 창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모란이 피는 이 계절에도 우린 흐느껴
저 교회지붕위에 졸고 있는 비둘기어서 날아가라 계속 날아가라 총질을 해대고그 총에 맞아 혹은 지쳐 떨어지는 비둘기들음~~~ 그래 우린 지쳤어추운 밤에도 우린 무서운 고독과 싸워
기나긴 어둠 홀로 고통의 눈물만 삼켰네
《92 장마, 종로에서》의 3번 트랙으로, 입시의 압박 끝에 스스로 삶을 놓아버린 학생들의 현실을 다룬 노래다. 가사에는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학생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노래가 극단적 선택을 한 학생이 남긴 유서를 바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자녀를 잃은 한 어머니가 그 유서를 정태춘·박은옥 부부에게 보내왔고, 두 사람은 그 글을 토대로 이 노래를 완성했다. 정태춘은 전교조가 설립된 이후 꾸준히 그 활동에 함께했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그의 음악적 실천은 상당 부분 전교조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노래는 1990년대 초반의 삭막한 사회 분위기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같은 현실을 비둘기라는 상징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정태춘이 작사·작곡하고 박은옥이 노래해, 애절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음색으로 비통한 현실과 희미한 희망을 동시에 전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경직된 사회 구조를 비판한 앨범의 흐름 위에서, 이 곡은 감성에 기대면서도 날카로운 시대 인식을 놓치지 않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https://youtu.be/NVe7UT4gkxc?si=Die_U9W-YofVWsm2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마
첫차는 마음보다 일찍 오니
어둠 그쳐 깨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내가 다시 그 정류장으로 나가마
투명한 유리창
햇살 가득한 첫차를 타고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로 가마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트랙이자 타이틀곡으로, <92년 장마, 종로>와 맞닿은 문제의식을 지닌 노래다.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다시 새벽길을 걸어 첫 차를 기다리겠다는 다짐, 그 소박하면서도 단단한 희망을 전한다. 사회적 각성이 시작된 이후 정태춘의 노랫말에는 열차와 버스 같은 대중교통 수단, 그리고 그와 이어진 장소들이 반복해 등장한다.
《92 장마, 종로에서》에 수록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는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어루만지는 민중들이 어두운 터널을 뚫고 차량기지를 지나 햇빛 가득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지하철이 노래된다. 《정동진/건너간다》의 <건너간다>에서는 다음 정거장이 어디인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검은 한강을 건너 무너지는 교각들을 지나며 환멸의 90년대를 통과하는 버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서는 어둠이 걷히는 새벽길 모퉁이를 돌아, 투명한 유리창과 햇살 가득한 첫 차를 타고 초록의 봄날 언덕으로 향한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예술에서 대중교통은 종종 민중의 공동체로 그려진다. 목적지도 방향도 서로 다르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물 수밖에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서민적 연대의 감각이 깃들기도 하고, 동시에 군중 속의 고독이나 파편화된 현대인의 초상도 비친다.
이 곡은 90년대의 날 선 사회적 발언(<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내면을 성찰하는 성숙한 어조를 보여준다. 막차가 떠난 뒤 새벽을 기다리는 행위를 통해 절망 속에서도 다시 희망을 꿈꾸는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아코디언 등의 악기가 더해져 처연하면서도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부부는 함께하지만 서로 다른 목소리로 삶의 결을 담아낸다. 40년 넘게 한국 사회를 통과해 온 정태춘의 목소리는 그렇게 다시 시대와 조용히 호흡한다. 이 앨범은 그의 음악 인생에서 저항의 예술이 어떻게 내면적 성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로 남는다.
https://youtu.be/XshU0tHHdoo?si=irBQO5qRqefcOBF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