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떠나, 삶에 도착하다 - <브루클린>(2015

떠남과 귀환 사이, 브루클린의 시간

by 박 스테파노

전후(前後)의 유럽이 그러했듯, 1950년대 아일랜드의 경제 상황은 혹독했다. 섬이라는 고립된 지리, 반복된 기근의 역사 속에서 가난은 개인의 처지가 아니라 집단의 운명처럼 이어져 왔다. 19세기 중반 ‘감자마름병’으로 촉발된 대기근은 그 상징적 기억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가난은 국적처럼 몸에 붙은 살(殺)이었고, 그로부터의 탈출은 늘 희망과 고문이 뒤섞인 상상이었다. 그 희망의 맞은편에는 미국이 있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뉴욕이라는 도시가 놓여 있었다.


뉴욕은 국가의 역사에 비해 도시로서의 시간이 짧지만, 그 밀도는 유난하다. ‘이민자의 도시’라는 정체성이 그 중심에 있다. 뉴욕은 다섯 개의 자치구로 이루어진다. 맨해튼, 스태튼아일랜드, 브롱크스, 브루클린, 퀸즈. 맨해튼은 성공과 자본의 상징으로 중상류 계층이 모여 사는 공간이고, 퀸즈는 한인타운으로 익숙하다. 브롱크스는 흑인과 저소득층의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하며, 브루클린은 유럽 이민자들이 모여 형성한, 작은 유럽 같은 곳이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영화 <브루클린(2015, 존 크로울리 감독)>은 이 다섯 개의 자치구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1950년대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한 젊은 여인의 삶을 조용히 따라간다. ‘잔잔하다’는 말이 어울리지만, 살아 있는 인생에 과연 잔잔한 날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격랑처럼 느꼈던 순간들조차 담담한 기억으로 가라앉듯, 이 영화의 서사는 그렇게 조용히 다가온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살던 막내 에일리스(시얼샤 로넌)는 아일랜드를 떠나 브루클린으로 향한다. 괴팍한 켈리 여사의 소매점에서 일하는 답답함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언니의 수입만으로는 가족의 삶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바닷길에서 멀미와 싸우며 도착한 브루클린에서, 에일리스는 어린 나이에도 하숙 생활과 백화점 점원 일을 묵묵히 시작한다.


겉으로는 의연해 보였지만, 향수는 점점 그녀를 잠식한다. 고향에 남겨둔 어머니와 언니에 대한 그리움은 일상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던 중 후견인 신부의 권유로 야간대학에 다니며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그 시기에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에모리 코헨)가 그녀 앞에 나타난다. 화려하지 않지만 성실하고 다정한 그의 태도에 에일리스는 마음을 연다. 둘은 조용히 사랑에 빠지고, 아무도 모르게 혼인신고를 한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전해진다.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에일리스는, 떠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향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다. 그곳에서 귀족 가문의 아들 짐 패럴(도널 글리슨)을 만나 미묘한 감정에 흔들린다. 순박하면서도 듬직한 그의 존재는 안정된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에일리스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 눈앞의 안락함을 선택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내일을 향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녀는 떠남과 귀환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조용한 선택의 무게


요즘 영화계의 흐름은 ‘강함’에 있다. 자극적인 설정으로 뒷말을 낳는 영화, 파격적인 노출과 위험한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이 주목을 끈다. 그 틈 사이로 아포칼립스와 세계 신화를 넘나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작고 단정한 영화와 만날 기회는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영화 <브루클린>은 그런 흐름 한가운데서 유독 어정쩡해 보인다.


세지도, 크지도 않다. 유려한 미장센이나 파격적인 서사로 시선을 붙잡는 작품도 아니다. 1950년대 미국으로 이주한 한 아일랜드 여성의 삶을, 큰 사건 없이 따라갈 뿐이다. 반전도 없고 서스펜스도 없다. 일어날 법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것들은 시간 속에서 스며들 듯 지나간다. 결말마저 담담하게, 해피엔딩에 가깝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겉으로 보면 밋밋한 영화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이전의 미국 이민사 영화에서 흔히 보던 극단적인 역경도, 사건이 사건을 밀어붙이는 서사도 없다. 아마도 여인의 시선으로 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성 중심의 이민 서사가 ‘버티고 개척하는 역사’를 그려왔다면, 이 영화는 ‘삶을 견디는 시간’에 머문다.


“이분들이 돌아 갈 곳은 없지요. 가면 누가 좋겠어요. 그래도 이분들이 도로를 놓고 터널을 뚫고 이나라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크리스마스 날, 성당에서 아이리시 독거 노인들에게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신부는 에일리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도로를 놓고 터널을 뚫는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브루클린>은 분명 심심하다. 그러나 미국 이민사의 주역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선택 앞에 선 개인의 이야기로 바라보면 이 영화는 가볍지 않다. 오히려 묵직하고, 어렵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 살아가며 맞닥뜨리게 되는 선택들이다. 그 선택은 지금 이 시간에도 결코 가볍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낸다는 것은 늘 무게를 동반한다. 반백을 넘긴 중년의 눈에도 그렇거니와, 에일리스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는 더 버거운 질문일지도 모른다.


<브루클린>은 감동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이야기는 195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의 결은 ‘여성 영화’가 대중영화의 중심이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과잉된 볼거리와 감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존 크롤리 감독의 이 영화가 건네는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감상 방식부터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2003년작 < 인터미션 > 이후 크롤리 감독의 최고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1930~40년대 영화의 황금기를 사랑하는 관객에게 < 브루클린 >은 오히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콜름 토이빈의 2009년 소설 『브루클린』 역시 기적처럼 담백한 작품이다. 꾸밈없는 문장 속에 얼마나 큰 힘이 깃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은 1950년대 노동자 계층 가정에서 자란 젊은 여성 에일리스 레이시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일랜드 웩스퍼드 주 엔니스코시 출신의 에일리스는 어느새 “미국”으로 향하고, 동해안의 낯선 도시에 발을 디딘다. 대서양을 건너며 한 여행객은 말한다. “가끔은 이모를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죠.” 빨간 구두와 노란 드레스, 자주색과 파란색 자동차로 가득한 세계는 고향의 엄격한 옷차림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영화의 중요한 미덕은 색감이다. 우울할 수 있는 시대를 경쾌한 색으로 채운다. 지나온 삶이란, 돌아보면 모두 그렇게 빛을 띠는지도 모른다. 몬트리올 로케이션은 뉴욕을 설득력 있게 재현하고, 촬영감독 이브 벨랑제는 에일리스의 세계가 넓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비 내리는 아일랜드 거리와 차가운 교회에서 시작한 화면은 점차 따뜻한 미국의 색조로 바뀌고, 다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여정은 에일리스의 맑고 푸른 눈을 통해 전달된다.


언니 로즈(피오나 글래스콧)와의 이별로 슬픔에 잠겨 있던 에일리스는, 에모리 코헨이 연기한 “착하고 친절한” 토니 피오렐로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삶을 배운다. 춤, 음식, 그리고 가족이라는 세계. 그러나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다시 아일랜드에 돌아오면서, 그녀의 마음은 익숙한 리듬으로 흔들린다. 도널 글리슨이 연기한 짐 패럴은, 떠나기 전에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안락한 미래를 제안한다. 영화는 그 선택의 문 앞에서, 조용히 멈춰 선다.



그리움이 선택이 될 때


베티 데이비스와 조앤 크로퍼드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브루클린>은 신선한 공기처럼 다가온다. 이민자 영화의 풍부한 계보 위에 놓인 이 작품은짐 셰리던의 2002년작 < 인 아메리카 >와도 결을 나눈다. 또한 시간과 장소, 정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아일랜드에서 에일리스는 과거의 상처를 품은 딸이고, 미국에서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여성이다. 두 공간 모두에서 그녀는 떠도는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음악은 이 여정의 중요한 언어가 된다. 새로운 가사와 오래된 후렴이 교차하는 댄스홀 장면에서, 삶은 반복과 변주의 리듬으로 흘러간다.


아이리시 펑크 록 밴드 포그스의 노래 <뉴욕의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에서, 에일리스는 “터널과 다리를 건설한” 억압받는 이들에게 공동의 크리스마스 만찬을 마련한다. 그중 한 사람(이알라 오 리오나르드오 레오나르드)은 일어나 아일랜드 전통 사랑 노래 <카사드 안 수간 >을 부른다. 크롤리는 마이클 브룩의 오케스트라가 시작되기 전, 오 레오나르드의 목소리가 반주 없이 울려 퍼지게 둔다. 과잉 없는 서정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얼굴들—떠나온 집과 잃어버린 사랑의 잔상이 몽타주처럼 스친다.


“향수병이란 다른 병과 다를 게 없어요. 비참한 기분이 들게 한 다음에 다른 사람한테 옮겨 가는 것이죠. 그럼금방 괜찮아 질 겁니다.”


향수에 무너질 때,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고향의 편지는 처음엔 오래 걸리고, 나중엔 금세 도착할 것이라고. 이는 우편의 진보가 아니라 마음의 준거에 관한 이야기다. 두고 온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지금의 시간은 빠르다. 마음의 상대성 원리—기다림의 길이는 사랑이 향한 방향에 달려 있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은 에일리스의 마음속 선택이다.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일랜드에 남을 것인가. 표면의 질문 아래에는 대칭적인 선택들이 겹겹이 놓인다. 고향의 짐 패럴인가, 이탈리아 이민자 토니인가. 상속을 앞둔 대지주의 아들인가, 배관공으로 일하는 이민자인가. 북적이는 뉴욕인가, 어제가 오늘 같은 고향 마을인가. 코니 아일랜드의 붐비는 해변과 사람 하나 없는 아일랜드의 해변이 조용히 맞선다. 유행과 관심이 끊임없이 바뀌는 도시와, 큰 파동 없이 이어지던 고향의 시간도 대비된다.


“옛날에도 이랬으면 좋겠어요”


에일리스는 짐 패럴과 해변을 걷다 말한다. 그때도 일자리와 인연이 있었다면,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중간의 과정이 생략된 채, 과거가 지금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 힘든 시간을 건너온 뒤에야 떠올리는 생각—푸념은 실현되지 않은 바람의 방언이다. 토니가 여덟 살 막내의 교정을 받아 보낸 편지를, 에일리스는 곧장 열지 않는다. 사랑의 단어를 마주하는 순간, 이곳의 평온이 무너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마담 켈리의 도발 앞에서 그녀는 미국에서의 결혼을 인정하고, 결심한다.


“잊었어요. 이 마을이어떤 곳인지.”


사람은 때로 자신의 궤적을 바꾼다. 낯선 곳의 삶은 불편하고 고되다. 그러다 의지할 사람이 나타난다. 함께할 내일을 그리며 약속을 받아든다. 우연히 돌아간 고향은 더 따뜻해 보인다. 이전보다 나를 귀히 여기는 듯하다.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그러나 간과한 것이 있다. 타지에서의 경험과 돌봄이 나를 바꾸었고, 그 변화가 시선을 바꾸었다는 사실. 왜 떠났는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그것을 잠시 잊었을 뿐이다.



태양이 떠오르는 자리


이 모든 중심에는 2007년 영화 <어톤먼트>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이후 한 번의 흔들림도 없었던 시얼샤 로넌이 있다. 그녀는 눈동자의 미세한 떨림만으로 감정의 팽창과 수축을 보여준다. 그레이스 켈리를 떠올리게 하는, 세월을 거스른 동안의 얼굴, 절제된 몸짓, 정확한 음정까지—로넌은 과장이 아니라 축적의 힘으로 증명되는 배우다. 그녀 세대에서 가장 지적이고 매혹적인 존재 가운데 한 명이라는 말은 결코 빈사가 아니다.


줄리 월터스는 집주인 키호 부인의 ‘어지러움’에 대한 유쾌한 경멸을 능숙하게 표현하고, 짐 브로드벤트는 플러드 신부를 과잉 없이 자연스럽게 그려낸다. 도널 글리슨의 짐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진심을 꾸밈없이 전한다. 그래서 우리는 에일리스가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남자의 끈질긴 열정을 불러냈을 뿐 아니라, 두 사람 모두가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믿게 된다.


토이빈의 소설이 시대에 깊이 뿌리내린 텍스트라면, 영화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말한 ‘기억극’에 가깝다. 코니 아일랜드는 다층적인 얼굴을 지녔지만 서정적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렵다. 브루클린 사람들은 그곳을 “동물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연출은 영화의 의도를 또렷이 한다.


영화가 건네는 핵심은 단순하다. 축복의 바닥에는 언제나 슬픔이 놓여 있다는 사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삶은 그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영화는 에일리스가 그 수용의 단계에 이르고,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굳히는 순간에서 끝난다. 누군가는 <브루클린>이 지나치게 절제되고 고풍스럽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결코 맥이 빠지지 않는다. 따뜻하고 로맨틱하며, 조용히 아름답다.


영화 <브루클린>의 한 장면. 20세기 폭스 코리아 제공


세상에 아주 늦은 선택은 없다. 해내고 나면 ‘늦었다’는 말은 사라진다. 선택의 순간에 남는 후회는 대개 ‘조금만 더 생각할걸’이라는 망설임이다. 돌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가고 싶은 곳,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면 늦음은 없다. 돌아가면 된다. 그곳에서 일상을 다시 이어가면 된다. 늦은 선택은 없고, 바른 선택과 그렇지 않은 선택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태양이 뜰 거에요.바로 알아 차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희미하게 다가와요. 그 때 오로지 당신만의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럼 깨닫게 되겠지요. 거기가 장신의 인생이 있는 곳이라는 것을.”


대서양을 건너는 배 위에서 에일리스가 이민 초보자에게 건네는 이 말은, 결국 자신에게 들려주는 확언이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방인에게 보내는 위로이기도 하다. 고향은 태어난 좌표가 아니라, 선택을 감당하며 쌓아 올린 일상의 무게가 머무는 곳이다. 아일랜드의 해변이 과거의 나를 품는 안식이라면, 브루클린의 소란은 미래의 나를 증명해야 할 현장이다. 에일리스는 더 이상 향수라는 병의 환자가 아니다. 슬픔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단단한 주체로 서 있다.


결국 <브루클린>이 남기는 질문은 “어디에 머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억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다. 짐 패럴의 안정과 토니 피오렐로의 개척 사이에서 그녀가 택한 것은, 타인이 아니라 ‘변화된 자신’이다. 익숙함의 안일함보다 낯선 공기 속 자유를 선택한 뒷모습은, 우리 역시 언젠가 마주할 선택의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태양은 희미하게 떠오르겠지만, 그 빛이 닿는 곳이 곧 나의 인생임을 믿고 걸음을 옮기는 것—그것이 ‘살아낸다’는 일의 미학이다.


시점과 관점은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내가 너가 되고, 네가 내가 될 때, 문제는 뜻밖에 풀리기도 한다. 이민자의 눈으로 타향의 삶을 바라보며, 먼 곳에서 살아가는 소중한 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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