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이야기 이후, 다시 반전을 묻다
전쟁을 다룬 문학과 영화는 대체로 ‘반전(反戰)’이라는 윤리적 지향을 품어 왔다. 특히 20세기 초, 1차 세계 대전과 크림전쟁, 스페인 내전,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전장을 직접 통과한 참전자이거나, 그 비극을 눈앞에서 목격한 이들의 언어로 쓰였다. 그들에게 반전은 선택된 사유가 아니라, 몸으로 겪은 체험이 남긴 필연에 가까웠다. 전쟁 서사는 그렇게 반전의 깃발을 들고 쏟아졌고, 영화 역시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랐다.
그러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이후, 많은 전쟁 서사는 점차 빛을 잃었다. 이 작품이 남긴 정서적 깊이와 윤리적 밀도 앞에서, 뒤따른 이야기들은 어딘가 상투적으로 보였다. 영화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플래툰>이 강렬한 반전의 선언을 남긴 뒤, 전쟁 영화는 비슷한 얼굴을 반복했다. 상업 영화는 오락성을 앞세워 파편화되었고, 전쟁은 서사의 중심에서 배경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반전 주제의 전쟁 영화’는 서서히 힘을 잃은 소재가 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2023년, 제80회 골든글로브 비영어영화상 후보작 가운데 한 편의 전쟁 영화가 눈길을 끌었다. 독일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드워드 버거, 2022)였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인도 발리우드 대작 <RRR>과 함께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고, 수상은 <Argentina 1985>에 돌아갔지만, 이 작품이 남긴 울림은 작지 않았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1929년 출간된 원작부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 온 작품이다. 히틀러가 ‘약해 빠진 정신’이라며 혹평하고 상영을 금지시킨 1930년 미국 제작 영화는, 오늘 다시 보아도 놀라운 완성도와 고증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79년 제작된 TV영화 역시 원작에 충실한 재현과 탄탄한 연기로 주목받았고, 국내에서는 KBS 등을 통해 안방극장에서 익숙한 작품으로 자리했다.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져 왔다. 팬데믹 이전의 <덩케르크>와 <핵소고지>, 팬데믹 한가운데 개봉한 <1917>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참상과 허무를 새롭게 포착했다. 그 뒤를 이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이들과 다른 자리에 선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시선에서 전쟁을 응시하며, 사실주의적 묘사를 통해 희미해졌던 반전의 질문을 다시 전면으로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전쟁을 새롭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이미 안다고 믿어 온 전쟁의 얼굴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전쟁 이후의 시대에도, 반전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는가.
레퀴엠으로 남은 전선
“이 영화는 고발이나 고백이 아니며, 모험은 더더욱 아니다. 죽음에 직면한 이들에게 죽음은 모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포털 영화 소개말처럼,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전쟁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을 위한 조용한 레퀴엠에 가깝다.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죽음들을 위한 낮은 진혼곡처럼 영화는 시작되고 끝난다.
1917년, 독일의 한 상급학교 교실. 스무 명의 학생이 담임교사의 선동에 이끌려 자진 입대를 택한다. 파울과 알베르트, 프란츠, 뮐러, 벰도 그 무리에 섞여 있다. 혹독한 신병 훈련 끝에 도착한 전선에서, 그들이 꿈꾸던 전쟁은 어디에도 없다. 고개를 조금만 내밀어도 총탄이 두개골을 꿰뚫고, 방독면이 늦으면 독가스가 폐를 채운다. 포탄이 쏟아지는 참호에서 병사들이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요행뿐이다.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벰은 전사해 첫 사상자가 된다. 다리를 잃은 프란츠는 불구의 삶을 견디지 못한 채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장난기 많던 뮐러는 전쟁 말기 조명탄에 쓰러지고, 프란츠가 아끼던 군화는 파울에게로 넘어온다.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던 예비역 상등병 카친스키마저 농가에서 거위를 훔치다 어린 소년의 총에 맞아 허무하게 죽는다.
카친스키의 죽음 이후, 파울은 전쟁의 실체를 더욱 또렷이 인식한다. 부상으로 잠시 돌아온 고향은 여전히 ‘전쟁의 환상’에 잠겨 있다. 전쟁을 낭만적인 언어로 소비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는 깊은 피로를 느낀다. 입대를 부추기던 담임교사가 후배들을 격려해 달라 부탁하자, 파울은 “전쟁에서의 죽음은 그저 총알받이의 개죽음”이라 말한 뒤 다시 전선으로 돌아간다.
그 이후 파울의 삶에서 고민과 갈등은 의미를 잃는다. 그는 아무런 극적 장면도 없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은 평온해 보인다. 친구와 전우를 거의 모두 잃었고, 삶의 목적 또한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맑은 10월의 가을 하늘 아래서 파울이 숨을 거두던 날, 최고사령부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고 공표한다. 전쟁은 끝났고, 전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대규모 장기전의 말미는 늘 국지적 소모전의 반복이다. 한 뼘 나아가면 한 뼘 물러서는 전선은 총량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는 상태, 그것이 곧 “이상 없음”이다. 얼마나 많은 이가 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보고되는 것은 오직 전선의 상태뿐이다. 이 거대한 비극 속에서 누구도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소설과 영화는 담담하게 전한다.
여기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떠올리게 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데미안』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동일한 비극의 자장에서 태어난 작품들이다. 두 작품은 전쟁을 통해 ‘청춘의 소멸’과 ‘기존 세계의 붕괴’를 함께 응시한다.
두 서사를 관통하는 것은 기성세대가 구축한 도덕과 가치에 대한 불신이다. 『데미안』에서 에밀 싱클레어가 감지한 ‘밝은 세계’의 허구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파울이 교실에서 듣던 칸토레크 선생의 애국주의와 겹쳐진다. 기성세대가 말하는 ‘조국’과 ‘명예’ 뒤편에서, 전쟁의 어두운 실체는 끝내 말해지지 않는다.
참호 속에서 파울과 친구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싱클레어가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감지한 ‘금지된 구역’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장면처럼 보인다. 기성세대가 만든 ‘알’은 보호막이 아니라, 청년들의 생명을 담보로 유지되는 거대한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두 작품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낸다.
깨진 알 이후의 세계
『데미안』의 핵심 상징인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라는 문장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역설적인 미학으로 변주된다. 싱클레어에게 알을 깨는 일은 아브락사스를 향한 정신적 성숙의 과정이지만, 파울에게 전선은 육체와 영혼이 함께 무너지는 죽음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두 작품은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한 번 알을 깨고 나온 자는 결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휴가를 나온 파울이 고향의 서재에서 더 이상 책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문장은 낯설고, 사유는 손에서 빠져나간다. 이는 이미 알을 깨고 나온 자, ‘표식’을 지닌 존재가 감당해야 할 고립을 응축해 보여준다. 파울의 참호는 싱클레어의 내면적 투쟁이 물리적 폭력으로 전이된 장소다. 이곳에서 청년들은 자아를 실현하기보다, 자아를 박탈당한 채 세계의 붕괴를 목격한다.
두 작품의 만남은 빌둥스로망(Bildungsroman, 성장소설)의 해체를 뜻한다. 전통적인 성장소설이 시련을 거쳐 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을 그린다면, 이 작품들은 사회 자체가 괴물이 된 시대를 배경으로 ‘반(反) 성장’, 혹은 죽음을 향한 이행을 기록한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전쟁터의 부상 속에서 데미안을 만나며 정신적 통합에 이른다. 반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파울의 죽음을 “서부 전선은 이상 없다”라는 보고 한 줄로 처리한다. 개인의 존엄이 말소된 시대를 이보다 냉정하게 드러내는 문장은 드물다. 이 영화는 『데미안』이 제시한 내면적 구원의 가능성조차 전쟁 앞에서는 얼마나 취약한지를 비춘다.
참호는 두 작품 모두에서 ‘구세계의 잔해’이자 보호와 구속이 겹쳐진 태내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파울 보이머가 참호를 벗어나 노맨즈랜드의 진흙과 화염 속으로 내달리는 장면은,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아브락사스를 향해 알을 깨고 나가는 산고의 물리적 재현처럼 보인다. 참호 안이 기성세대의 명령과 전략이 지배하는 ‘알’의 내부라면, 그 밖은 모든 질서가 붕괴된 혼돈의 세계다.
영화는 좁고 어두운 참호에서 광활하고 황폐한 노맨즈랜드로 시야를 확장하며 파울이 마주한 참상을 드러낸다. 이는 싱클레어가 전쟁터에서 “피와 불로 가득한 세계”를 목도하며, 자신의 내면이 외부 세계의 파괴와 맞닿아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과 공명한다. 파울에게 이곳은 성장의 환희가 아니라 인간성 소멸의 현장이지만, 더 이상 ‘순수한 학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데미안』의 ‘표식을 지닌 자’들이 겪는 단절과 닿아 있다.
파울과 싱클레어의 길은 그들을 이끄는 조력자의 성격에서 분명히 갈라진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카친스키, 카트는 진흙 속에서 거위 한 마리를 찾아내는 ‘대지의 스승’으로, 이념이 아니라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반면 『데미안』의 맥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내면 깊숙한 자아를 깨우는 형이상학적 안내자다.
카트의 죽음이 파울을 완전한 고독 속에 남기며 “서부 전선은 이상 없다”라는 냉소적 허무로 귀결된다면, 데미안의 퇴장은 싱클레어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운명을 발견하는 성숙을 남긴다. 두 인물은 전쟁이라는 압도적 폭력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갈래, 곧 생존을 위한 연대와 자아를 향한 침잠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이상 없다는 보고서의 잔혹함
원작의 독일어 제목은 ‘Im Westen nichts Neues’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서부(전선) 새 소식 없음”에 가깝다. 영어 제목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역시 “서부 전선은 고요하다”는 뜻을 품는다. 이 작품이 한국에서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번역된 것은 일본어판 중역의 영향으로 보인다. 20세기 중반까지 외국문학 번역이 일본어판이나 영어판을 경유하던 관행을 떠올리면, 일본어 제목 ‘西部戦線異状なし’가 그대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 과정에서 제목이 품은 미묘한 정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기울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보고는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안정과 평온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이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적 일상이 어제와 다르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하루가 오늘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무심한 기록. 숨 돌릴 틈 없는 전쟁의 시간이 매일 같은 얼굴로 갱신되고 있다는 보고다.
전선은 아군과 적군이 맞서는 경계다. 이 경계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후방의 사령부에서는 그 모든 변화를 “큰 차이 없음”으로 요약한다. 특히 장기전의 말미에는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일진일퇴가 반복된다. 어제는 적의 고지였고, 오늘은 아군의 고지인 풍경이 데자뷔처럼 이어진다. 지도층이 안전한 곳에서 “종전 협상”이라는 말을 다듬는 동안, 젊은 병사들은 이유 없는 땅따먹기를 계속한다.
1차 세계대전 말기의 서부 전선도 그러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철광석과 석탄의 요충지였기에, 협상국과 동맹국은 전세와 무관하게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려 했다. 군국주의의 논리 속에서 “전투의 승리”는 “전쟁의 종결”보다 앞서는 가치가 된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 <고지전>(정훈, 2011)이 떠오른다.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으로 인한 휴전이 되기 전 7개월을 다룬 이야기다. 1951년 6월 이후 한국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밀물 썰물이 드나들 듯 일 년 남짓한 남하와 북진의 일진 일퇴를 끝으로 전쟁은 한반도 허리에서 팽팽한 교전상황으로 2년 2개월을 보내게 된다. 영화는 이 교착상태의 전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시작하여 한국전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한국전쟁 소재의 영화와는 차별 점이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차별 점은 여기까지다. 미시적 고지전 전투 관점으로 거시적인 전황,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폭력의 무의미성을 이야기한다는 소재적 참신함만이 이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미덕이다.”
-박 스테파노, <고지전> 리뷰 본문 중-
정전협정이 논의되던 국면에서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투는 멈추지 않았다. 지도 위 1mm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애록고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었다. 그곳에 있었던 것은 영웅담만이 아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제로섬의 반복은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끝내 묻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고지전>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보이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작품처럼 읽힌다.
애록고지의 병사들, 그리고 서부 전선의 병사들이 감당해야 했던 긴장은 끝내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부상을 입고도 다시 전선으로 돌아온 파울은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그 위로 오가는 말은 단 하나,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뿐이다. 전쟁은 그렇게 끝난다. 전선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누군가의 아집 속에서 젊은 생들은 소모되었다. 전장에서 확인되는 전쟁의 종착지는 결국 하나, 죽음이었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몸을 앞으로 엎드린 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땅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을 뒤집어 보니 그가 죽어 가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된 것을 마치 흡족하게 여기는 것처럼 무척이나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저, 홍성광 역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열린 책들(2009), 마지막 쪽-
돌아갈 수 없음의 두 얼굴
참호라는 폐쇄된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난 스승들의 존재는 두 주인공을 전혀 다른 결말로 이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와 『데미안』의 마지막을 나란히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결말은 전쟁이라는 동일한 조건 속에서 인간 실존이 어디까지 갈라질 수 있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참호는 파울 보이머의 삶을 잠식하는 거대한 구덩이다. 영화의 끝에서 그는 정전 협정 발효를 앞두고,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는 돌격 명령에 따라 전사한다. 이 죽음은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겪는 ‘알을 깨는 고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싱클레어에게 참호는 낡은 유럽 질서를 넘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한 산실이지만, 파울에게 참호는 이름 없이 소모되는 병사들을 삼키는 공동묘지일 뿐이다.
파울의 시신 위로 전달되는 “서부 전선은 이상 없다”라는 보고는 개인의 성장이 국가라는 거대한 서사 앞에서 얼마나 손쉽게 지워지는지를 상여처럼 실어 나른다. 이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내면의 목소리’를 완성하며 자기 구원에 이르는 『데미안』의 결말을 향한 가장 잔혹한 반어다. 전쟁의 결말은 언제나 죽은 이들의 눈동자 속에만 남는다.
결말의 온도 차는 스승들의 운명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카친스키, 카트는 파울에게 생존의 기술을 가르치는 ‘대지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전투도 아닌 우발적 죽음은 파울이 붙들고 있던 마지막 인간적 유대를 끊어낸다. 카트의 부재는 파울을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고, 그의 죽음을 슬픔이 아닌 안식처럼 느끼게 한다.
반면 『데미안』에서 데미안은 임종의 순간 싱클레어에게 “네 안으로 귀를 기울이면 내가 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퇴장은 상실이 아니라 통합이다. 싱클레어는 스승을 잃음으로써 스스로 데미안이 되는 자아의 완성을 경험하지만, 파울은 카트를 잃으며 세계 전체가 무너지는 종말을 맞는다. 같은 지옥을 통과한 두 서사는 하나는 ‘완성된 주체’로, 다른 하나는 ‘소멸된 객체’로 귀결된다.
이 전쟁의 서사는 결국 ‘돌아갈 수 없는 자들’의 비극으로 수렴된다. 두 주인공의 복귀 불가능성은 물리적 단절을 넘어, 전쟁이 남긴 문명사적 균열을 상징한다. 상실된 고향은 내면의 유폐를, 침묵한 서재는 부서진 유년의 우상을 가리킨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파울이 휴가 중 고향의 서재에 서 있는 장면은 이 복귀 불가능성을 가장 처절하게 드러낸다. 책과 딱정벌레 표본은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참호를 통과한 파울에게 고향은 ‘아직 알 속에 머문 자들’의 박물관일 뿐이다. 이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밝은 세계’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이질감과 닿아 있다. 그러나 싱클레어가 그 이질감을 성장의 징표로 받아들인다면, 파울은 그 앞에서 영혼의 실종을 경험한다. 파울에게 복귀 불가능성은 고립이고, 싱클레어에게는 자립이다.
『데미안』에서 전쟁은 낡은 자아를 파괴하고 새로운 자아를 출현시키는 용광로로 작동한다. 반면 <서부 전선 이상 없다>의 파울은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도 전에 국가라는 기계의 부품으로 소모된다. 그가 죽는 순간 울리는 “이상 없다”라는 정적은, 한 인간의 우주가 사라졌음에도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냉혹한 진실을 폭로한다. 싱클레어의 복귀 불가능성이 탄생의 신화라면, 파울의 그것은 ‘상실된 세대(Lost Generation)’를 위한 진혼곡이다.
결국 두 작품의 상호텍스트적 공명은 “전쟁 이후 인간은 무엇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두 갈래의 응답이다. 헤세는 폐허 위에서 내면의 구원과 정신적 진화를 보았고, 레마르크와 에드워드 버거는 그 어떤 승리로도 보상될 수 없는 육체와 영혼의 말소를 기록했다. 이 교차점에서 파울의 죽음은 싱클레어가 마주한 ‘아브락사스’의 어두운 얼굴, 파괴와 창조가 공존하는 신의 잔혹한 이면을 드러낸다. 전쟁은 끝내 교훈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침묵 속에서 고발할 뿐이다.
전쟁을 말하는 입들, 침묵당한 얼굴들
전쟁이라는 말이 다시 사람들의 입에 가볍게 오른다. 지금의 주축 세대는 전쟁과 거리를 둔 시간 속에서 살아왔다. 체감의 결핍 때문일까, 총성이 늘 국경 너머에서 울리기 때문일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승리와 전적을 말하고, 응원과 치하의 언어를 던진다. 그 무감각이 정치의 언어로 옮겨간 탓인지, 전쟁이 나도 최전선에 설 이유가 없는 이 나라 최고 군통수권자의 발언은 종종 ‘전쟁 주의자’의 어조를 닮아 있다.
전쟁이 무엇인지 감각이 잘 서지 않는다면, 그 참상을 치열하게 기록한 이야기들을 읽고 보길 권한다. 수많은 젊은 영혼을 지옥으로 떠미는 일이 분명한데도 “나라가 먼저”라는 구호로 등을 미는 태도는, 과거 군국주의자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은 결코 전선에 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설익은 용기의 연료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90여 년 전 독일의 에리히 M. 레마르크는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함께 귀환하지 못했다. 마치 유체이탈자처럼, 그 영혼은 종전 15분 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파울에게 남았다. 참전 전, 전쟁터에 나가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열일곱 살의 소년. 전쟁을 겪지 않았거나 겪을 필요가 없는 이들에게 참호 속의 비참함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는 풍경일지도 모른다.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원작보다 반전의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부모의 동의서까지 위조해 전선으로 향한 청춘들이 ‘진짜 전쟁’을 마주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토막 난 시체들, 포탄에 찢긴 주검들, 강철비처럼 쏟아지는 총격, 진흙 구덩이 속 쥐들과의 동침. 파울의 시선은 그 두려움과 불안을 숨김없이 관객에게 건넨다.
전쟁의 비인간적 무의미성은 참호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울은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 곁에서 죄책감에 무너져 오열한다. 전쟁에서의 박멸은 과연 살인과 무엇이 다른가. 전투 뒤 뒤져 본 병사의 주머니에는 아내와 딸의 사진,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다. 살육의 도구가 되어버린 자신을 자각하는 순간, 존재의 허망함은 극점에 이른다.
“군인이 되고 허송세월했어. 반세기나 전쟁이 없었다니. 군인이 전쟁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중 고위 장성의 독백-
참호에서 썩어가는 장병들과 달리, 장성은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만찬을 즐기며 이 말을 던진다. 파울 같은 젊은이들이 왜 영혼까지 무력화되는지, 이보다 더 잔혹한 설명은 드물다. 그들의 무지함만을 탓하기에는 세상의 아이러니가 이미 너무 일상적이다.
영화는 음침한 참호전의 화면 뒤에 파란 하늘과 숲, 계곡과 하천을 비춘다. 파울과 전우들이 거위를 훔쳐 달아나던 들판마저 아름답다. 그래서 세상은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런 풍경 속에서 맞이하는 그의 허무한 죽음이 마음을 깊이 가라앉힌다.
전쟁을 체감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 시대다. 우리는 늘 남의 말을 빌려 전쟁을 말한다. 오십여 년을 살아오며 전쟁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낀 기억은 1994년 여름이 거의 전부다.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철원 문혜리 포사격장에서 훈련 중이던 전포부대 사수 일등병이었다. 유서를 써내고, 줄지어 집에 전화 한 통씩 걸던 그 시간. 미련이라 부를 것도 없던 청춘이었지만, 소소한 일상과 갑작스레 이별해야 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영화든 소설이든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권한다. 그리고 『데미안』을 다시, 제대로 읽어 보길 권하고 싶다. 특히 국제 정세 앞에서 ‘강대강’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더욱 그렇다. 이 기록은 고백도, 고발도, 탐사도 아니다. 모험이나 성취의 기억은 더더욱 아니다. 한 인간이 통과한 두려움의 날것에 가깝다.
책은 필요 없고 작가는 흔하다는 말이 있지만, 기록은 여전히 위대하다. 작가의 고된 수고는 시간이 흐른 뒤 묵직한 울림으로 돌아온다. 전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이 처절한 기록. 한국 관객에게 외면받았던 이 영화에, 마음속으로 트로피 하나를 건네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