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운명 앞에서, 사랑이라는 질문
인류는 마침내 생명 연장의 의학적 성취에 도달한다. 암을 비롯한 불치병에 대비하기 위해 클론을 복제·육성하고, 필요할 때 장기를 이식받는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한다. 그 결과 평균수명은 백 년을 넘어선다. 장기 기증체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공식적으로 관리되는 존재가 된다. 영국의 외딴 기숙학교 ‘헤일셤’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세워진 양성소다.
이곳에서 자란 소년 소녀들은 이미 자신의 끝을 알고 있다. 수년, 혹은 십여 년 뒤 몇 차례의 장기 기증을 마치고 삶을 마감하는 운명. 창의적인 사고를 지닌 캐시(캐리 멀리건), 따뜻하지만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토미(앤드류 가필드), 그리고 사랑과 질투 사이에서 늘 두 사람 곁을 맴도는 루스(키이라 나이틀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들은 ‘원본’ 인간과 다르지 않은 성장기를 통과해 성인의 문턱에 이르지만, 끝내 기증체라는 본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희망은 소문처럼 떠도는 이야기다. 서로 사랑하는 클론 커플이 ‘진실한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최초 기증 시기를 ‘연장’해 준다는 것.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선명하지 않은 나이에, 진실함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잔혹하다. 벽은 높고 단단하다.
시간이 흘러 스무 살 후반이 된 세 사람은 다시 만난다. 마지막 가능성을 붙들기 위해, 헤일셤의 후원자였던 ‘마담’을 찾아 나선다. 과연 이 짧은 생을 조금이라도 더 늘릴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연장이라는 말 자체가 정교한 희망고문에 불과한 것일까.
이 이야기는 분명 허구다. 특히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는 20세기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더욱 선명해진다.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 영화로 옮겨졌다. 앤소니 홉킨스의 절제된 연기로 기억되는 <남아 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1993) 이후 두 번째 영화화다. <네버 렛 미 고> (2010)는 1990년대 영국을 기준으로, 그 이전 수십 년을 오가는 SF소설 『나를 보내지 마』 (2005)를 원작으로 삼는다.
이 작품은 인간이 이미 클론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고 수명을 연장한 사회를 전제로 한다. ‘헤일셤’에서는 학생 시절부터 장기이식이 공공연한 비밀로 존재한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 저항 없이 자신의 운명을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캐시와 토미, 루스의 각별한 삶 또한 그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과 우정, 질투와 연대가 교차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끝내 예정된 결말을 향해 조용히 수렴된다.
기억의 문장, 침묵의 화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 (2005)와 이를 영화화한 <네버 렛 미 고> (2010)는 ‘복제 인간’이라는 SF적 설정을 공유하면서도, 매체의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의 결을 만들어 낸다. 소설이 주인공 캐시의 내밀한 회고를 통해 기억의 불완전성과 인간다움의 본질을 더듬어 간다면, 영화는 정적인 화면과 절제된 영상미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들의 슬픔을 전면에 배치한다.
원작은 서른한 살의 간병인 캐시 H.의 1인칭 회고로 전개된다. 이시구로 특유의 절제된 문장은 그녀의 기억이 언제나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은근히 암시한다. 독자는 화자의 서술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흩어진 기억의 조각을 스스로 이어 붙이게 된다. 반면 영화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헤일셤의 풍경과 인물들을 외부자의 거리에서 응시한다. 시간은 비교적 선형적으로 흐르고, 관객은 인물들의 비극적 종착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인식한다. 소설이 기억의 미로를 천천히 걷는 경험이라면, 영화는 이미 정해진 끝을 향해 이동하는 감정의 풍경화에 가깝다.
그러나 이 전환은 결코 쉽지 않다. 섬세하고 치밀한 문장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일은 본질적으로 난해하다. 캐시, 루스, 토미는 같은 사건 앞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이고, 캐시는 이를 다시 자신만의 미묘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꿈처럼 순수한 헤일셤의 나날, 사랑과 시기, 성장통과 화해의 시간은 시각적 이미지로만 담아내기 어렵다. 더구나 인간의 존엄과, 그 존엄을 절대화한 문명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까지 함께 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복제 인간이며 그들의 삶이 ‘기증’과 ‘완료’로 끝난다는 사실은 극도로 느리고 모호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단편적인 정보들을 통해 독자는 점진적으로 진실에 접근하고, 후반부의 폭로는 깊은 충격으로 돌아온다. 반면 영화는 오프닝 자막과 초반부 루시 선생님의 고백을 통해 이들의 정체를 비교적 분명히 제시한다. 세계관의 미스터리보다는 세 인물 사이의 관계와 그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특히 기증 과정의 시각적 묘사는 이들이 겪는 신체적 소모와 소멸을 더욱 직접적으로 각인시킨다.
루스라는 인물의 결도 다르다. 소설 속 루스는 훨씬 복합적이며, 때로는 이기적이고 교묘하게 캐시와 토미 사이를 흔드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녀의 사과는 후반부에서 큰 정서적 파문을 일으키며, 인간적 결함과 성장의 순간을 동시에 드러낸다. 영화의 루스는 더 연약하고 불안정한 모습이 강조되어, 그녀의 행동이 악의라기보다 사랑과 생존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캐시가 토미를 떠나보낸 뒤 노퍽의 울타리 앞에 서서 홀로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말보다 강한 침묵으로 관객의 마음에 깊은 잔상을 남긴다.
상실의 그늘에서 태어나는 희망
영화와 소설의 기법은 다르지만, 이 서사가 들려주는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단일하다. 상실과 희망은 서로를 부정하는 대립항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이루는 앞과 뒤의 면이라는 인식이다. 복제 인간인 아이들이 품는 희망은 예정된 상실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실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며, 그렇기에 찰나의 희망은 비로소 인간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헤일셤의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며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이 걸리기를 바라는 행위는 겉보기에는 예술적 성취를 향한 기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바람의 심층에는 “우리에게도 영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다. 이는 취미나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려는 절박한 생존의 몸짓이다.
특히 토미와 캐시가 믿었던 ‘사랑을 증명하면 기증을 유예(Deferral)받을 수 있다’는 소문은 희망의 정점에 해당한다. 하지만 마담과 에밀리 선생님 앞에서 확인한 진실은 냉혹하다. 그 희망은 애초에 실재하지 않았다. 이 순간 희망은 위안을 주는 마취제가 아니라, 자신들이 잃을 수밖에 없는 ‘시간’과 ‘미래’를 선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고문의 장치로 전환된다. 희망이 컸던 만큼, 그들이 마주한 상실의 공동은 깊어진다.
캐시가 어린 시절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Never Let Me Go>를 들으며 아기를 안고 춤추는 장면은 이 역설을 응축한 이미지다. 그녀는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무언가를 품에 안지만, 정작 그녀의 현실은 모든 것을 순서대로 ‘보내주어야만(기증해야만)’ 하는 삶이다. 이시구로는 이를 통해 인간의 삶 자체가 붙잡으려는 희망과 흘려보내야 하는 상실의 연속임을 드러낸다. 영화 <네버 렛 미 고>의 마지막, 캐시가 토미를 떠나보낸 뒤 노퍽의 들판을 바라보며 건네는 독백 또한 같은 울림을 남긴다.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인 자리에서만 허락되는, 아주 미세한 희망—기억 속에서는 그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 상실과 희망이 한몸이라는 인식은, 죽음이라는 전제가 있기에 삶이 의미를 얻는다는 인간 조건에 대한 비유다. 클론들은 짧고 정해진 수명을 알면서도 사랑하고, 질투하고, 화해한다. 만약 상실이 없었다면, 유예에 대한 희망도 사랑에 대한 갈구도 그토록 절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망은 상실의 그늘 속에서만 빛나며, 상실은 희망을 품어본 자에게만 비극으로 다가온다. 이 서사는 결국 우리에게 묻는다. 모두가 죽음이라는 ‘완료’를 향해 가는 존재라면, 우리는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야 하는가.
잃어버린 것들이 머무는 자리
이 작품에서 노퍽(Norfolk)은 헤일셤의 아이들에게 ‘잉글랜드의 잃어버린 구석’으로 불린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이 결국 노퍽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일종의 신화를 공유한다. 이 믿음은 상실을 견디게 하는 장치다. 잃어버린 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잠시 보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고통을 유예된 상태로 바꾼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화는, 그들이 잃어버린 것들—장난감과 테이프, 나아가 자신들의 ‘근원(Originals)’—이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소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성인이 된 캐시와 토미가 노퍽에서 과거에 잃어버렸던 <Never Let Me Go> 카세트테이프를 다시 찾아내는 장면은 이 상징의 핵심을 찌른다. 테이프를 되찾는 일은 잃어버린 과거를 회복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캐시가 어린 시절 품에 안고 춤추던 ‘오리지널’이 아닌 대체물일 뿐이다. 노퍽은 희망이 실현되는 공간인 동시에, 되찾은 것마저 원본의 부재를 확인시키는 장소가 된다.
영화 <네버 렛 미 고>의 후반부에서 캐시는 모든 소중한 이들을 잃은 뒤 다시 노퍽을 찾는다. 폐허처럼 펼쳐진 벌판과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녀는 잃어버린 모든 것이 저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건넨다. 이때 노퍽은 물리적 장소를 넘어, 상실을 견디기 위해 인간이 끝내 구축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희망의 영토’로 기능한다. 상실이 있기에 그곳이 존재하고, 그곳을 향한 희망은 상실의 아픔을 연료 삼아 피어난다.
헤일셤의 아이들에게 노퍽은 잃어버린 물건의 집합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뿌리인 ‘근원(Originals)’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의 땅이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루스는 노퍽의 한 사무실에서 자신과 닮은 여성을 보았다는 소문을 믿고 여행을 제안한다. 근원을 찾는 일은 생물학적 호기심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 어떤 가능성을 지닌 존재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에 다가가는 시도다. 근원이 존엄한 삶을 살고 있다면, 복제된 자신들 또한 그 가능성을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노퍽에서 마주한 진실은 가차 없는 상실로 귀결된다. 루스가 자신의 근원이라 믿었던 여성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타인이었고, 아이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밑바닥, 부적격한 존재들로부터 복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직면한다. “우리는 쓰레기통에서 복제된 것”이라는 루스의 절규는, 노퍽이 희망의 땅이 아니라 결코 가질 수 없는 ‘원본의 삶’을 확인시키는 상실의 전시장임을 폭로한다. 희망을 찾아 떠난 여정은, 자신들이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더욱 선명히 각인시킨다.
영화 <네버 렛 미 고>는 이 순간을 더욱 쓸쓸한 영상으로 담아낸다. 아이들은 노퍽의 거리에서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지만, 끝내 편입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남는다. 근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신들이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마지막 몸짓이었고, 그 실패는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미래—‘기증’과 ‘완료’—를 받아들이게 한다. 결국 노퍽은 희망이 얼마나 처절하게 상실을 확인하기 위해 사용되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장치다. 상실과 희망이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임을, 이 공간은 조용히 증언한다.
유예를 믿는 마음, 인간의 얼굴
노퍽에서의 좌절은 토미와 캐시에게 정체성에 대한 마지막 희망을 앗아간다. 그러나 그 상실의 빈자리는 곧 ‘유예’라는 더 간절하고 구체적인 기대감으로 채워진다. 근원을 찾는 일이 과거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면, 유예를 믿는 일은 현재의 사랑으로 미래를 연장하려는 마지막 저항에 가깝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두 사람이 마담의 집을 찾아가 사랑을 증명하려 했던 행위는, 노퍽에서 겪은 상실이 깊었던 만큼 더욱 처절한 희망의 빛을 띤다. 비록 그들이 마주한 진실은 유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상실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드러난 사랑과 열망은 그들을 단순한 복제 인간이 아닌, 존엄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떠올린다.
영화 <네버 렛 미 고>는 이 여정을 통해 상실과 희망이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동일한 본질임을 완성한다. 모든 것을 잃을 것이 예정된 세계에서 끝까지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쓰는—Never let me go—그들의 몸짓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상실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의 보편적 초상과 맞닿아 있다. 희망은 상실을 막아주지 못한다. 다만 상실로 향하는 가혹한 여정에 ‘살아야 할 이유’를 부여한다. 그래서 상실과 희망은 대립하지 않는다. 서로를 지탱하며 생의 무게를 견디게 하는 인간 조건의 양면으로 존재한다. 이 주제는 캐시가 노퍽의 평원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마지막 독백에서 비로소 닫힌다.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우리가 구하는 사람들의 것과 많이 달랐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난다.
우리가 무엇을 살아왔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우리가 충분히 시간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 극 중 마지막 캐시의 내레이션 중 –
이 영화를 보며 반복해 떠오른 작품이 두 편 있다. 장기 복제를 위한 클론의 서사를 다룬 <아일랜드> (2005)와 <죽은 시인의 사회> (1989)다. <아일랜드> 역시 인류 생명 연장을 위해 장기 공여용 클론을 양성한다는 점에서 <네버 렛 미 고>와 닮아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클론들이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뒤 즉각적으로 항거하는 반면, <네버 렛 미 고>의 인물들은 이미 운명을 인지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주체의 먹먹함을 응시한다. 속 시원한 해방을 기대한다면 <아일랜드>의 투쟁이 더 선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답답한 현실을 삶에 포개어 생각한다면, <네버 렛 미 고>의 침묵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와의 접점이 드러난다. 상류 기숙학교의 학생들은 미래를 위해 개성과 다양함을 포기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틀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들이 얻게 될 것은 물질과 존경일지 모르지만, 그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부모의 욕망이며 사회가 요청한 역할에 가깝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사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와 <네버 렛 미 고>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마주 서 있다.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시대와 장르를 건너, 인간이 선택하지 못한 삶 속에서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켜내는지를 조용히 묻는다.
복제된 희망, 유예된 삶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산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삶이 과연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 확신할 수 있는지는 늘 의문으로 남는다. 내가 성실히 걸어온 궤적이 결국 타인의 삶을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삶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남길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쉽게 답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네버 렛 미 고>의 클론들은 더 이상 먼 허구가 아니다. 생명 연장을 위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장기기증체로 길러진 클론들이나, 사회적·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정한 틀 속에서 양성되는 인간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타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고교 졸업자의 80%가 대학으로 향하는 대한민국의 풍경은 이를 선명히 드러낸다. 다수의 청춘은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높은 학벌을 좇고, 대학원과 유학으로 이동한다. 한때 시대의 정신과 담론을 길어 올리던 대학은 취업을 위한 입시 학원이 된 지 오래다. 그 문을 나서면 ‘일자리’가 없다는 공포가 기다린다. 정확히 말하면 ‘그럴듯한 일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스트레스는 적고, 연봉은 높으며, 고용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과거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희망들이 과연 내가 꿈꾸어 온 ‘나만의 삶’인지 묻는 일은 미뤄둘 수 없다. 시간과 열정, 막대한 비용을 바쳐 넘긴 다음 장에서 무엇이 남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많은 이들은 소수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생산 요소이자 도구로 기능한다.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이 시대에 청춘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권력과 자본을 위해 복제된 인간으로 길러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도구마저 기술과 인공지능에게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내어준다.
이 도구화된 삶의 끝에서 청춘들이 마주하는 자리는 『나를 보내지 마』 속 클론들이 서 있던 ‘기증’과 ‘완료’의 경계와 겹쳐진다. 헤일셤의 아이들이 보호막 아래에서 자신의 운명을 어렴풋이 인지하며 자라났듯, 오늘의 청춘들 또한 학벌과 스펙이라는 정교한 시스템 속에서 자신이 소모될 부품임을 감지하면서도 그 너머를 응시하기를 유예한다.
그들이 쌓아 올린 화려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는 마담의 갤러리에 보내진 아이들의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증명인 동시에,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예의 티켓을 구하는 몸짓이다. 그러나 거대한 효율의 논리 앞에서 그것들은 쉽게 대체 가능한 재료로 취급된다. 기술과 인공지능의 급속한 진보는 이 소외를 더욱 가속한다. 복제 인간들이 ‘오리지널’의 신체를 위해 소모되었듯, 현대의 청춘들 또한 생산 요소로 기능하다가 더 효율적인 기술이라는 새로운 ‘오리지널’ 앞에서 ‘완료’의 위협을 맞는다.
영화 <네버 렛 미 고>에서 토미가 들판에서 절규한 뒤 침묵 속으로 수술대에 향할 때, 그 정적은 오늘날 젊은 세대의 실존적 무력감과 겹친다. 자신들이 좇아온 희망이 사실은 기득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주입된 ‘복제된 욕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이 선 자리는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노퍽의 황량한 벌판이 된다.
상실이 예정된 희망 속에서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붙잡으려(Never Let Me Go) 애쓴다. 그러나 손에 남는 것은 타인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소진된 자신의 파편뿐이다. 이 시대 청춘들이 점유한 모호한 자리는, 주체적이라 믿었던 삶이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공여’의 과정이었음을 인식해 가는 비극의 장소다. 그들은 현대판 헤일셤에 고립된 영혼들에 가깝다.
완성된 영화 <네버 렛 미 고>를 본 가즈오 이시구로는 “캐리 멀리건, 앤드루 가필드, 키라 나이틀리의 섬세한 연기가 영화적 풍요로움을 더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영화에 대한 평은 거기까지일지도 모른다. 로맨스의 감정에 머문다면 인간 존재와 존엄에 대한 울림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화를 본 뒤 소설을 읽을 때 비로소 온전히 다가온다.
“사람이 자기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일 것이다. 좌절될지 모를, 확신할 수 없는 희망일지라도 품고 살아가는 태도. 그것은 삶을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으로 만들려는 본능이다. 누군가는 사랑했고, 누군가는 상처를 주었으며, 누군가는 용서를 빌고 또 누군가는 용서했다. 그것이 사는 일이다. 자신의 삶을 몇 점짜리로 채점하며 살 필요는 없다. 남에게 보여줄 이유도 없는 삶이다. 빨간 연필로 점수를 매기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비로소 삶은 복제되지 않은 얼굴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