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년의 얼굴은 기억의 책임을 진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되거나 아무도 아닌 것이 훨씬 쉽다.”
(It's a hell of a responsibility to be yourself. It's much easier to be somebody else or nobody at all.)
노아 바움백 감독의 2025년 영화 <제이 켈리>는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시인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의 일기에서 인용된 것으로 알려진 이 서문은, 평생 타인의 얼굴을 연기해 온 배우 제이 켈리(조지 클루니 분)가 마침내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될 여정을 조용히 예고한다. 우리는 흔히 기억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대개 재구성된 서사에 가깝다. 그 기억의 틈에 스며든 감정은, 그 시간을 실제 살아 본 사람만이 안다.
영화 <제이 켈리>는 ‘왕년(往年)’을 이야기한다. 往은 가다라는 뜻을 품으면서도 ‘이미 지나간’ 시간을 가리키고, 年은 단순한 365일의 단위가 아니다. 年의 옛 글자 秊은 가을걷이한 볏단을 짊어진 사람의 형상으로, 본래 의미는 ‘수확’이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수확의 시간은 곧 한 해가 되었고,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왕년은 단순한 지난 해가 아니라, 오래전의 시간, 이미 거두어진 삶의 한 국면을 뜻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기억 속에서 영화를 찍으며 산다. 배우이자 관객이고, 연출자이자 조명 기사이기도 하다.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존재의 틈을 들여다보고, 그 사이에 남은 감정과 상처를 조심스레 꺼내 붙드는 일에 가깝다. 영화는 말없이 그 일을 시작한다. 오래 엉킨 카세트테이프를 풀듯, 조용히 지난 시간을 풀어보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우리는 결국 모두 ‘왕년’이 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혹은 자기 자신의 기억 속에서. 중요한 것은 그 왕년이 자랑의 장식으로 남느냐, 아니면 타인의 삶에 흔적으로 남느냐다. <제이 켈리>는 이 질문을 어렵지 않게 건넨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를 얻는 일이며, 그 기억은 때로 죽음보다 오래, 더 단단하게 남는다.
마지막 스타의 그림자
노아 바움백의 최근작 〈제이 켈리〉는 조지 클루니에게 ‘구식 영화 스타의 마지막 얼굴’을 맡긴다. 이 영화를 가장 잘 이해할 관객은,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존재 이유처럼 보이는 배우, 조지 클루니 자신일지도 모른다. 배역의 이름부터 닮아 있다. 제이 켈리, 그리고 조지 클루니. 우연이라 보기엔 지나치게 노골적이다. 실제와 가상이라는 근본적 차이를 뒤로 한다면 더욱. 두 사람 모두 클라크 게이블의 후계자라 불렸고, 폴 뉴먼을 흠모했으며, 마음 흔드는 미소로 고전적 의미의 무비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삶의 국면에서 둘은 갈라진다.
조지 클루니는 충실한 남자, 많은 친구를 둔 인간, 뛰어난 아내와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 행동하는 휴머니스트로 알려져 있다. 반면 제이 켈리는 텅 빈 영혼에 가깝다. 그의 정체성은 단 하나,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사랑했던 ‘그 남자’라는 사실뿐이다. 스타가 되기 위한 단선적인 집념은 성공을 안겨주었지만, 연인과의 관계, 딸들과의 유대, 대부분의 우정을 대가로 치렀다. 이제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매니저 론(아담 샌들러)이다. 론은 진심으로 제이를 사랑한다. 자신의 아내(그레타 거윅)와 아이들 다음으로. 그러나 동시에 제이의 수입 15퍼센트를 가져가는 사람이다.
〈제이 켈리〉는 묘한 결을 지닌 영화다. 여러 감정이 겹겹이 작동하며, 서로 다른 층위에서 동시에 움직인다. 이 영화가 유독 개인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조지 클루니 때문만은 아니다. 에밀리 모티머와 함께 각본을 쓴 바움백 자신에게도 이 영화는 사적인 고백에 가깝다. 짧은 카메오로 등장하는 바움백은 가벼운 웃음을 남기며 존재를 스친다. 영화는 유명함에 대한 이야기이자, 쇼 비즈니스라는 삶이 한 인간에게서 무엇을 앗아가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끝없는 이동과 기다림, 비위를 맞추는 노동, 기묘한 가짜성. 그 와중에도, 자신이 만든 무언가가 뜻밖의 방식으로 타인의 삶에 의미가 된다는 깨달음이 스민다. 사람들은 영화를 곁에 두고 살아간다. 한 편의 좋은 영화, 혹은 그저 즐거운 영화 하나는 상영 시간이 끝난 뒤에도 더 긴 생을 얻는다.
이 영화는 허구의 스타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사라져가는 영화의 시대를 향한 조용한 애도다. 한 명의 스타 이름만으로 극장을 채우던 시절. 그 징후는 첫 장면부터 드러난다. 촬영 종료를 앞둔 사운드스테이지를 하나의 긴 롱테이크로 훑으며, 바움백은 분주한 현장을 포착한다. 그 순간, 이 영화가 어떤 영화들에 대한 헌사임을 직감하게 된다.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가 어렴풋이 겹친다.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 (1992)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신랄하게 풍자한 오프닝으로 유명하다. 약 8분간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스튜디오 안팎의 소동극을 압축하며,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 (1958)에 대한 명시적 오마주이기도 했다. <제이 켈리>는 이 <플레이어>의 형식을 서사의 공명점으로 삼는다.
<제이 켈리>의 시작부 역시 화려한 카메라 워킹으로 세트장의 분주한 공기를 끊김 없이 따라간다. 이는 기술적 과시를 넘어, 관객을 영화 제작이라는 ‘현장’의 허구적 실재 안으로 즉각 불러들이는 장치다. <플레이어>가 스튜디오 경영진의 시선에서 산업의 생리를 조망했다면, <제이 켈리>는 스타 배우의 시선으로 같은 메커니즘을 다시 읽는다.
두 작품은 모두 영화가 영화 자신을 말하는 ‘메타 시네마’ (Meta-cinema)의 형식을 취한다. <플레이어>의 그리핀 밀이 창의성보다 비즈니스 논리가 지배하는 산업의 냉혹함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면, <제이 켈리>는 그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는 인간으로서의 스타를 응시한다. 영화 제작 과정을 노출함으로써,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 역시 하나의 거대한 연극임을 끊임없이 환기한다.
<플레이어>의 그리핀 밀과 <제이 켈리>의 제이는 각기 다른 권력을 행사하지만, 결국 시스템에 종속된 존재들이다. <플레이어>가 해피엔딩을 강요하는 관습을 조롱하며 도덕적 파산을 고발했다면, <제이 켈리>는 관계의 회복과 선택의 응시를 통해 미약한 구원의 가능성을 더듬는다. 그러나 제이의 고독 역시 미디어가 만든 이미지와 실제 자아 사이의 간극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알트먼이 그린 할리우드의 허구적 생태계는 바움백의 세계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결국 <제이 켈리>는 냉소의 무대 위에 수다스럽고 사적인 서사를 덧입혀, 화려한 무대 뒤편에 남은 개인의 고독과 늦은 성장을 담담히 비춘다.
기억이라는 영화, 친구라는 인간
영화에서 제이를 만난 뒤, 우리는 그의 삶에서 유난히 낯선 며칠을 따라 걷는다. 멘토 피터 슈나이더(짐 브로드벤트)의 죽음을 알게 되고, 장례식장을 나서다 연기 학교 동기이자 옛 친구(빌리 크루덥)를 만난다. 이 짧은 재회는 그의 삶의 방향을 비틀어 놓는다. 이어 대학 입학을 앞둔 막내딸(그레이스 에드워즈)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유럽행을 결정하면서부터, 이 며칠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된다.
물론 제이는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헤어드레서(모티머), 홍보 담당(로라 던), 그리고 늘 곁에 있는 매니저 론까지, 하나의 수행단이 그를 둘러싼다. 론은 제이가 처음엔 거절했던 이탈리아 영화제 평생 공로 헌정을 급히 성사시키느라 분주하다. 제이의 시간은 늘 타인의 손을 거쳐 관리된다.
이 여정 속에서 제이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기억들과 마주한다. 젊은 시절의 자신(찰리 로우), 지나간 사랑, 더 잘해주지 못했던 큰딸(라일리 키오)과의 대화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혹은 누구였어야 했는지를 더듬는다. 정체성이란 결국 기억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로 향하는 동안, 론 역시 함께 이동한다. 제이를 위해 자신의 삶과 행복을 상당 부분 내어준 사람.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어떤 계시를 향해 다가간다.
영화 중반부, 유럽을 가로지르는 기차 시퀀스는 처음엔 다소 어긋나 보인다. 그러나 이를 특정 영화적 전통에 대한 헌사로 읽는 순간, 장면은 정확한 자리를 찾는다. 프랑스 기차 객차를 채운 인물들이 각기 유럽 영화사의 얼굴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제이는 자신의 삶을 선택의 연속이자, 영화 장면들의 연쇄로 기억한다. 플래시백 속에서 그가 피터에게 말한다. “내 모든 기억은 영화.”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 각각의 기억은 서로 다른 장르의 감각을 지니고, 현재의 경험들조차 장르의 관습을 따른다. 제이 켈리는 너무 오래 ‘제이 켈리’로 살아온 나머지, 배우가 아닌 상태로 세계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삶은 실재가 아니라, 이미 편집된 장면들의 집합이 된다.
그 결과 서사와 톤은 완벽히 맞물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묘하게 고전적인 매력을 지닌다. 이 역할은 클루니 외에는 떠올리기 어렵지만, 아담 샌들러 역시 놀라울 만큼 깊다. 그는 론이라는 인물에 진한 연민을 부여한다. 지혜롭기보다 지나치게 사랑해버린 사람. 론은 제이가 만든 영화들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준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 믿음 속에서 그는 예술가다. 할리우드 매니저가 대개 탐욕의 얼굴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이 영화 속 론은 다르다. 그는 좋은 사람이고, 가족을 사랑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창작에 기여하는 존재다. 아이러니하게도, 완전한 인간은 제이가 아니라 론이다.
영화는 왕년의 스타 이야기답게 진부한 비유를 끌어온다. ‘인생은 영화다’라는 말. 그러나 <제이 켈리>는 이 진부함을 미학적 실존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제이가 피터에게 건네는 “내 모든 기억은 영화”라는 고백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문장이다. 바움백은 과거를 단순한 플래시백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 기억에 누아르, 멜로, 코미디 등 서로 다른 영화적 질감과 장르를 부여한다. 주인공이 삶을 순수한 실재가 아니라, 시네마틱 이미지의 연쇄로만 인지하고 있음을 시각화하는 방식이다.
특히 유럽을 가로지르는 기차 시퀀스는 이 영화의 미학적 정점이다. 객차를 가득 채운 얼굴들은 제이가 통과해온 영화적 유산을 상징하고, 이동하는 기차는 선형적 시간이 아닌 ‘기억의 편집’이라는 영화적 시간성을 드러낸다. 그 순간 관객은 제이의 정체성이 결국 수천 개의 필름 조각으로 기워진 콜라주임을 깨닫게 된다.
헤어드레서, 홍보 담당, 매니저 론으로 구성된 수행단은 할리우드 시스템이 한 개인을 어떻게 ‘기표’로 유지하는지를 보여준다. 제이는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스타라는 허상이다. 그 곁에서 론은 독특한 윤리적 무게를 획득한다. 착취자가 아니라, 돌봄의 예술가로서. 그의 헌신은 제이의 공허한 자아를 대신해 인간성을 채워 넣는다. 이 영화가 끝내 도달하는 곳은 스타 시스템에 대한 냉소를 넘어, 관계와 희생이라는 오래된 질문이다. 화려한 얼굴 뒤에서, 누가 진짜 삶을 살아냈는가를 묻는 질문.
기억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제이 켈리〉는 서사의 톤이 매끈하게 봉합되지 않은 파편적 구조를 취하면서도, 끝내 묘한 고전적 기품을 잃지 않는다. 이는 조지 클루니가 지닌 구식 영화 스타의 아우라와, 아담 샌들러가 불어넣는 지극히 현대적이고 서민적인 연민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불협 덕분이다. 영화는 제이의 삶을 하나의 장르로 규정하기를 거부한 채, 슬픔과 유머, 성찰과 냉소를 의도적으로 뒤섞는다. 이 어긋남은 오히려 삶의 불연속성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닮아낸다.
이탈리아 평생 공로상을 향한 여정은 자신을 향한 조종(弔鐘)이자, 동시에 새로운 탄생의 서사다. 바움백은 이를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인간의 기억을 어떻게 구원하거나 소멸시키는지를 섬세하게 탐색한다. 결국 이 영화는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공장 안에서 길을 잃은 한 영혼이, 자신의 기억을 ‘영화’라는 이름의 집으로 되돌려보내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귀환기다.
〈제이 켈리〉는 인생이란 타인들과 맺은 점들의 집합이라는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성찰의 로드무비다. 수많은 수행단에 둘러싸여 단 한 번도 혼자인 적 없었지만, 언제나 외로웠던 제이는 평생 자기 자신만 연기하며 살아온 배우의 근원적 소외를 체현한다. 영화 중반, 열차의 거울 앞에서 배역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는 장면은 “자기 자신이 되기(Be yourself)가 가장 어려운 일”임을 드러내는 연기론적 절정이다. “한 번은 배역을 위해, 한 번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숙명이 그 장면에 겹쳐진다.
멘토 피터의 죽음과 유품인 손수건, 그리고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다”는 감각은 제이를 관성적인 할리우드의 삶에서 밀어내어 유럽이라는 낯선 시공간으로 이끈다. 그는 그곳에서 묻는다. 자신은 무언가를 향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2등석 기차칸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 모든 기억은 영화”라고 읊조리는 순간, 영화는 비로소 ‘어른들을 위한 시네마 파라다이소’로 변모하며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낸다.
이 여정의 끝에서 제이의 유일한 상수는 매니저 론이다. 15퍼센트의 수수료로 얽힌 관계를 넘어, 론은 원격으로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가족적인 인물이자, 제이가 상실한 인간답게 살 권리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다. 제이가 자신의 폭행 영상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실제 앞에서 “Who am I?”라고 묻는 순간에도, 론은 곁을 지키며 “로니”라는 이름으로 남는 유일한 타자다.
투스카니의 풍경 속에서 조지 클루니가 건네는 “Let me say goodbye”는 단순한 작별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허상과 결별하고, 실재하는 관계를 긍정하는 의식에 가깝다. 인생이란 결국 배역과 나 사이의 빈틈, 그리고 그 점들을 이어 만든 추억이라는 선과 기억이라는 면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의 끝에서 제이는 마침내 고백한다.
“영화가 어떻게 끝나는지 안단다.
(바로) 사랑 이야기야.”
피클이 쉽게 상하지 않듯, 누군가와 함께 만든 시간의 조각들은 퇴색되지 않은 채 제이의 삶을 ‘인간’의 영역으로 되돌려놓는다. 〈제이 켈리〉의 결말은 가슴을 부풀게 하면서도 어딘가 어둡다. 고전 할리우드적 여운과 불협의 저음을 동시에 남기는 선택은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 바움백과 모티머, 클루니, 그리고 이 영화에 참여한 모두는 쇼 비즈니스의 삶이 치러야 할 대가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는 분명 고유한 무게가 있다. 영화의 에피그래프는 실비아 플라스의 문장이지만, 어느새 제이 켈리의 목소리로 들린다.
“자기 자신이 되는 건 지독한 책임이다.
다른 누군가가 되거나, 아무도 되지 않는 편이 훨씬 쉽다.”
〈제이 켈리〉 속 제이의 모든 기억은 영화다. 그리고 그 영화들은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그렇다면 기억이 곧 정체성이라면,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방인의 얼굴, 배우의 삶
조지 클루니의 필모그래피는 넓고 깊어 단정적인 정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한때 ‘젠틀하고 잘생긴 중년’의 이미지에 가려 그의 연기는 종종 외모에 방해받았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클루니 연기의 핵심은 ‘외로움’이다. 깊은 두 눈에 세상의 고독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얼굴. 그 정점은 2010년 영화 〈아메리칸〉에 있다.
〈아메리칸〉에서 그는 매너리즘에 잠긴 암살요원이자 무기 제작자 잭을 연기한다. 스웨덴에서의 사건 이후, 그는 한적한 이탈리아 마을로 몸을 숨긴다. 그곳에서 사람들과 인연을 맺지만, 미스터리한 의뢰인 마틸다에게 주문 제작 무기를 맡으며 다시 위험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임무를 끝으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바람은 감시와 죽음의 예감 속에서 점점 흔들린다. 위험에 맞서 일상을 지키는 일은 끝내 그의 몫으로 남는다.
영화의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고요하다. 웃는 얼굴을 찾기 힘든 인물들 속에서, 잭은 철저한 이방인으로 존재한다. 이탈리아 땅에 숨어 지내는 미국인이라는 설정보다, 일상에서 격리된 사람들 사이에서의 외로움이 더 짙다. 이는 프렌치 느와르의 전형적인 정서이며, 외로운 남성의 고뇌가 서사를 밀고 간다. 장 피에르 멜빌의 장 가방이나 알랭 들롱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제이 켈리〉 역시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다만 그 외로움은 양상과 깊이가 다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외로움은, 아마도 스스로 만들어낸 외로움일 것이다. 이방인은 선택으로 타지에 정착하지만, 그가 외로운 이유는 스스로 벽을 쌓고 틈을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라는 직업은 어쩌면 언제나 세상의 이방인으로 머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개인의 비밀이든 성격의 문제든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만든 외로움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결국 구석에서 나와 일상에 합류하는 일이다. 영화의 결말은 배우이자 배역인 조지 클루니가 그 벽을 허물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적어도 그 마지막만큼은, 결코 외롭지 않았으리라 믿게 된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모두 영화같았다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은 삶을 미화하려는 회피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가장 솔직한 인식에 가깝다. 우리는 매 순간을 온전히 이해한 채 살아오지 못했고, 다만 장면처럼 지나간 시간들을 나중에서야 편집하며 의미를 부여해 왔다.
〈제이 켈리〉가 끝내 도달하는 곳도 바로 그 지점이다. 삶은 처음부터 하나의 서사가 아니었고, 기억은 언제나 뒤늦게 도착한 해석이었다는 사실. 배역과 이름 사이를 오가며 살아온 제이의 얼굴에서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본다. 스포트라이트 아래서든, 그 밖의 어둠 속에서든, 모두는 저마다의 장면을 살아냈다. 그리고 그 장면들이 완전히 이해되기 시작하는 순간은 언제나 한참 뒤, 돌아본 이후다.
영화처럼 끝났기 때문에 비로소 삶이 되는 날들. 〈제이 켈리〉는 그 늦은 이해의 시간을 조용히 건네며, 기억 속에서만 가능한 화해와 작별의 형식을 우리에게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