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자백의 대가>가 펼치는 자백의 탈진실
※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기고한 문화평론 '컬처코드'의 칼럼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주간을 보내고 주말에 브런치에 담습니다.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59
어제가 오늘과 다르지 않고, 내일 또한 오늘의 연장처럼 흘러가는 삶이 있다. 크지 않은 기쁨으로 결핍을 가리고, 고만고만한 평온에 몸을 기대며 살아간다. 그러던 일상에 돌연 균열이 생긴다. 배우자가 살해된다. 이어 그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내가 지목된다. 증거와 증언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고, 수사기관은 자백을 요구한다. 잠시 흔들린 끝에,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으로 자백을 택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은 더 또렷해진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법의 저울은 결백의 주장보다 자백과 증거, 증언 쪽으로 기울어 보인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제안을 건넨다. 대신 자백해 주겠으니,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는 요구. 그 ‘무언가’가 또 다른 살인이라면,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넷플릭스 <자백의 대가>는 표면만 보면 자경적 정의 구현의 복수극처럼 읽힌다. 그러나 사유의 초점을 ‘대가’가 아니라 ‘자백’에 두는 순간, 이 서사는 훨씬 깊고 다층적인 울림을 획득한다. 외향과 달리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미술교사 윤수(전도연)와, 마녀라 불리며 사이코패스적 살인을 저지르는 모은(김고은). 두 인물의 자백은 겉모습부터 본질까지 극명하게 다르다. 윤수에게 자백은 삶을 서서히 옥죄는 족쇄로 작동하지만, 모은에게 자백은 유일한 목적을 완수하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하나는 생존을 압박하는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를 품은 전략이다.
사건과 사고를 가늠하는 최종의 판단에서 현대 사회는 사법 체계에 기대어 선다. 수사와 심리는 사실의 재구성, 더 정확히 말하면 기억과 증거의 재구성에서 출발해, 판결과 처벌이라는 사회적 합의로 귀결된다. 이 증거주의의 사법 체계에서 자백은 흔히 ‘증거의 여왕’으로 불린다. 다른 증거들이 상반된 방향을 가리키더라도, 자백을 탄핵할 명징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 한, 자백은 모든 증언과 증거를 굴복시킨다.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자백은 과연 완전무결한 증거인가.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자백은 언제나 사실에 부합하는가. 사실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 합은 진실을 보증하는가. 인간의 기억은 과연 흠결 없이 재생 가능한가. 이 질문들의 끝에서 우리는 자백을 ‘증거의 여왕’으로 떠받드는 편의적 심리, 그리고 그 안락함이 남기는 후과를 어렴풋이 예감하게 된다. 자백은 진실의 문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실을 가리는 가장 그럴듯한 그물일지도 모른다.
자백의 왕좌, 기억의 균열
자백이 ‘증거의 여왕(Regina Probationum)’이라는 지위를 획득한 순간은 서구 사법사의 인식론적 전환과 맞닿아 있다. 고대와 중세 초기, 진실은 인간의 이성보다 신의 판단에 맡겨졌다. 시련 재판(試鍊 裁判/Trial by Ordeal)은 무고함과 유죄를 가르는 최종의 장치였고, 인간은 그 결과를 해석하는 존재에 머물렀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 신의 섭리에 기대는 방식이 금지되자, 사법은 인간 주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백’을 가장 확실한 진실의 형식으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로마법의 전통을 계승한 대륙법 체계에서 자백은 피고인의 양심이 스스로를 고발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고, 이는 유죄 판결을 향한 가장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근거로 기능했다.
자백이 중시된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복잡한 정황 증거나 흔들리는 목격 진술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무엇보다 확정적인 진실의 형식을 띠었다. 피고인이 스스로 범죄를 인정하는 장면은 사법 권력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도덕적 승리로 읽혔고, 법 공동체는 그 순간 범죄로 훼손된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안도에 잠길 수 있었다. 자백은 진실의 증거이자, 질서 회복의 의례였다.
그러나 자백이 여왕으로 군림하던 시대는 동시에 고문의 시대이기도 했다. 객관적 물증이 빈약한 상황에서 자백만을 진실의 지표로 삼다 보니, 수사 권력은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물리적·심리적 강제를 동원하는 유혹에 쉽게 노출되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역, 2003)에서 고문을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신체로부터 진실을 ‘생산’해내는 정교한 사법적 의식으로 분석했다. 이 맥락에서 자백은 더 이상 자발적 도덕 행위가 아니라, 권력이 피고인의 신체와 언어를 장악해 획득한 전리품으로 변질된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베카리아가 『범죄와 형벌』 (한인섭 역, 2006)을 통해 고문의 비합리성을 고발하며 자백의 절대성을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자백이 지닌 치명적 결함, 곧 ‘고통을 피하기 위해 거짓 진실을 말할 가능성’을 정확히 간파했다. 이 통찰은 훗날 현대 사법 체계에서 ‘자백보강법칙’—자백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으며, 반드시 보강 증거가 필요하다는 원칙—이 확립되는 역사적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자백의 불안정성은 물리적 강압을 넘어 심리적·언어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탈진실(post-truth)의 시대에 자백은 주체의 내면 기록을 투명하게 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수사 기관의 유도와 사회적 압박, 왜곡된 기억이 결합해 만들어낸 ‘서사적 타협’에 가깝다. 넷플릭스 논픽션 시리즈 <살인자 만들기> (로라 리치아르디, 2015)가 보여주듯, 허위 자백은 지능적 한계와 정서적 취약성, 그리고 수사관의 확증 편향이 교차할 때 발생하는 구조적 재난이다.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 한병철, 『서사의 위기』 중에서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정보의 과잉이 이야기를 실종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을 거꾸로 읽으면, 기억만큼 불안정하고 불투명한 것도 없다. 체험의 완전한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의 영역에 속한다. 사법 과정에서 프로토콜의 근간이 증거 수집에 놓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하거나 기억을 더듬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잊고, 생략하고, 재구성한다. 이는 인간이 세계를 ‘이야기로 지어내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기억과 분리된 정보만이 비로소 일정한 투명성을 획득한다.
기억은 불변의 데이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서사다. 특히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간은 권력이 제시하는 ‘그럴듯한 시나리오’에 자신의 기억을 맞추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때 자백은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확신과 상황적 개연성에 의존하는 탈진실적 성격을 띤다.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주체를 고립된 진실의 화자로 상정하는 근대적 환상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발화는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며, 자백 역시 수사라는 비대칭적 권력 관계 안에서 수행되는 언어 행위다.
그러므로 현대 사법 미학은 자백을 진실의 종착지가 아니라, 해체되고 검증되어야 할 하나의 텍스트로 다루어야 한다. 자백의 여왕은 더 이상 왕좌에 머물 수 없다. 다른 증거들과 나란히 서서 그 신빙성을 심판받아야 한다. 그 출발점은 인간 이성의 불완전함과 기억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철학적 성찰에 있다.
자백의 프리즘, 진실의 벽
자백은 오랫동안 진실을 담보하는 가장 강력한 기표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현대의 예술과 철학은 그 확고해 보이던 지위에 반복적으로 균열을 가한다. <라쇼몽> (구로사와 아키라, 1950)은 그 인식론적 균열을 가장 선명한 미학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네 인물의 진술은 서로를 부정하며 병치되고, 그 말들은 사실의 재현이라기보다 각자의 욕망과 자존이 빚어낸 ‘서사적 진실’로 드러난다. 이 영화의 핵심에는 관점주의(Perspectivism)가 놓여 있다.
여기서 주체는 객관적 사실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사실을 굴절시키는 프리즘에 가깝다. 이러한 구도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2021)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 동일한 사건을 세 인물의 시점으로 반복 제시하는 이 영화는, 진실이 사회적 지위와 젠더 권력에 의해 얼마나 다르게 전유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특히 자백과 증언이 객관적 기록의 인출이 아니라, 발화하는 주체가 자신을 어떤 존재로 규정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는 수행적 구성물임을 강조한다.
문학 역시 이 불안정한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최세희 역, 2012)는 기억의 가변성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과거를 얼마나 편의적으로 편집하는지를 추적한다. 이러한 예술적 형상화는 탈진실의 조건과 맞닿아 있다. 탈진실은 거짓이 늘어난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누구의 서사가 더 설득력과 정서적 위안을 제공하는가’가 우선되는 국면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셸 푸코가 말한 ‘진리의 생산’이라는 개념을 호출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의지』 (이규현 역, 2010)에서 자백을, 주체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게 함으로써 권력이 그를 포획하는 ‘진리의 기술’로 해석했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하면, 자백하는 주체는 권력의 요구에 호응하는 서사를 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변호하려는 ‘자기 기술’의 유혹에 빠진다. 자백은 발견되는 진실이 아니라, 권력 관계 속에서 발명되는 이야기다.
현대 사법 절차에서 자백이 지니는 치명적 결함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사법 체계는 자백을 양심의 가책이 낳은 진실의 분출로 신비화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심리적 압박과 상황적 맥락이 빚어낸 ‘서사적 타협’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볼 때> (에바 두버네이, 2019)가 실화를 통해 보여주듯, 강요되거나 왜곡된 자백은 피조사자가 수사 권력이 미리 작성해 둔 서사에 자신을 맞춰 끼워 넣음으로써 고통을 끝내려는 실용적 선택의 결과다.
이때 탈진실의 징후는 더욱 선명해진다. 수사 기관은 객관적 증거라는 사실보다, 법정과 대중이 납득할 만한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자백을 유도한다. 사법적 정의가 진실이 아니라 서사의 완성도에 기대게 되는 위험한 순간이다. 예술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다성적(polyphonic) 진술의 불일치는, 인간의 기억이 결코 순수한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음을 말해 준다.
기억은 현재의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미학적 작업이며, 자백은 그 기억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는 정치적 행위다. 그렇다면 자백에 부여된 ‘증거의 왕’이라는 위상은 재고되어야 한다. 탈진실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백이라는 단일 서사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서사가 어떤 배경과 권력의 역학 속에서 구성되었는지를 읽어내는 비판적 문해력이다.
자백은 주체의 내면을 투명하게 비추는 창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사회, 권력과 공포가 충돌하며 세워진 불투명한 벽에 가깝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 벽 너머의 진실이 아니라, 그 벽이 어떤 방식으로 축조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탈진실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철학적 태도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자백은 진리의 종착역이 아니라, 주체가 세계와 맺는 복잡한 관계망이 투사된 불완전한 텍스트일 뿐이다.
자백의 수확기, 결백의 잔향
자백은 오랫동안 사법기관이 가장 손쉽게 성과를 거두는 장치로 작동해 왔다. 몇 해 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결백의 기록〉(로저 로스 윌리엄스, 2020)은 그 불편한 진실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장기 복역 끝에 무죄를 인정받은 이들의 삶을 따라간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개인의 투쟁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지점에, 늘 보이지 않는 조력자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84년 10월,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15세 소녀가 실종된 뒤 변사체로 발견된다. 강간과 흉기에 의한 살해. 수사는 난항을 거듭하다가 1년 뒤, 18세 청년 크리스토퍼 애버나티가 용의자로 지목된다. 근거는 친구 데니스의 증언 하나였다. 정황은 모자랐고, 수사에 필요한 것은 자백이었다. 경찰은 40시간에 이르는 심문 끝에 그 자백을 얻어낸다.
결정적인 문제는 크리스토퍼가 경계성 지능을 지닌 장애인이었다는 점이다. “자백하면 집에 보내주겠다”는 말에 따른 억지 동의였다. 부모와 변호인이 철회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87년 배심원 재판에서 그는 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유죄의 근거는 친구의 전언과 이미 철회된 자백뿐이었다.
전환은 15년이 훌쩍 지난 뒤 찾아온다. 한 대학생 기자의 집요한 취재로, 증인 데니스의 진술이 경찰의 회유에 따른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 사실은 변호사 캐세버그에게 전달되고, 그는 일리노이주 ‘결백 프로젝트’와 함께 재심을 추진한다. 2014년, 법원은 DNA 분석을 결정한다. 피해자의 의류와 신체 관련 8개 증거물 어디에서도 크리스토퍼의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남성의 DNA 흔적이 발견된다. 진범은 특정되지 않았지만, 법원은 무죄를 인정했다. 2015년 2월, 그는 거의 30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이 사례는 법과학이 만들어낸 감동적인 구원의 서사이자, 동시에 지울 수 없는 분노의 기록이다.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기소가 개인의 삶을 얼마나 치명적으로 파괴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DNA 분석과 포렌식은 범인을 특정하는 도구로만 소비되기 쉽다. 그러나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에서 그것들은 억울한 이를 구제하는 수단으로 동등하게 작동해야 한다. 이것이 법과학의 윤리다.
이 문제의식 속에서 등장한 것이 ‘Innocence Project’다. 1992년 미국 예시바대 로스쿨 교수에 의해 제안된 이 민간 프로젝트는 DNA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억울한 수감자를 구제해 왔다. 현재는 사법제도 개혁을 이끄는 공공정책 재단으로 자리 잡았고, 운영 재원은 주로 민간 기부에 의존한다.
미국에서는 매년 약 3천 건의 구제 요청이 접수된다. 전체 수형자의 2~5%가 무고할 수 있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결백 프로젝트 소속 변호사들은 사건을 엄격히 선별해 재조사를 진행하며, 실제 조사 단계로 넘어가는 사건은 약 300건 내외다. 재심에 이르기까지는 당시 판사와 검사의 동의, DNA 검사 승인이라는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자신의 판단을 부정해야 하는 절차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는 사법 오류의 윤곽을 드러낸다. 무죄 판결의 다수는 잘못된 목격자 증언이나 밀고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기억과 인지는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확증편향은 그 왜곡을 증폭시킨다. 과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때 유력했던 ‘물린 자국 감정’처럼, 주관성이 개입된 법과학 기법은 숱한 오판을 낳았다. DNA와 지문 같은 고신뢰 기술에서도 오류는 발생한다. 과학은 중립적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해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도구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개인적인 기억 또한 되살아났다. 검사의 협박, 수사관의 조롱, 자존을 해체하는 심문실의 공기. 자백의 순수성은 언제나 의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때 굳어졌다. 아는 사람만 아는 불행의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절실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DNA 증거 보존에 대한 법적 체계는 취약하고, 재심은 진범이 나타나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법제도의 경직성, 그리고 자백과 포렌식을 진실 그 자체로 믿는 사회적 정서 역시 높은 장벽으로 남아 있다.
과학적 조사는 사람이 설계하고 사람이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죄의 증거일 뿐 아니라, 무죄의 증거로도 사용되어야 한다. 결백을 입증하지 못하면 죄가 성립되는 구조는 정의라 부르기 어렵다. 수십 년 전의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한 번쯤 귀 기울이는 태도, 그것이 국가와 사회가 보여야 할 최소한의 성의일지도 모른다.
거짓의 표정, 진실의 무표정
다시 넷플릭스 <자백의 대가>로 돌아가 바라보면, 화면 곳곳에 진짜와 가짜의 대립항이 교차한다. 윤수와 모은의 외양은 처음부터 극명하게 갈린다. 긴 웨이브 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의 윤수, 사내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복수심 외에는 모두 비워낸 듯한 모은. 이 대비는 곧바로 진실을 판독하려는 사회적 코드로 번역된다. 선입견, 그리고 확증 편향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진실은 대체로 재미없다. 흥미를 주지 못하는 순간, 거짓은 힘을 얻는다.
윤수의 버릇과 외향은 수사관들의 표적이 된다. 미술 ‘교사’라는 통념에서 벗어난 화려한 착장, 짙은 화장, 조사 과정에서 쉽게 흘러나오는 웃음. 겸연쩍음에서 비롯된 일종의 라포였던 드라마 <CSI> 언급은 오히려 그들의 사고를 경직시킨다. 더욱이 그녀의 표정과 말투, 행동은 지나치게 투명하다. 그 투명함 자체가 유죄추정의 빌미가 된다. 본성과 본태가 혐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윤수는 검사 동훈(박해수)에게 묻는다.
“왜 무조건 확신해요?
나라고. 그냥 믿고 싶어서요?”
모은은 정반대에 서 있다.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는 개연성을 찾기 어렵다. 특히 치과의사 부부 살인의 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침묵하며, 스스로를 동기 없는 사이코패스, 마녀로 낙인찍는다. 그 낙인은 복수 계획의 일부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거짓이다. 이름과 신분마저 거짓이었음이 드러날 때, 이 서사는 진짜와 가짜의 경계 위에 놓인 수많은 이유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각자의 몫이다. 자백에는 성립 조건이 있는가. 혹은 자백을 할 자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검사 동훈이 스토킹하듯 윤수를 뒤따르다 한 음식점에 들어서는 장면. 윤수는 농담처럼 말한다. 여기 육개장이 맛있다고. 그 말을 믿은 동훈이 육개장을 주문하자, 윤수는 잔치국수를 시킨다. 그녀의 등 뒤로 ‘국수 전문점’이라는 간판이 스친다. 이 장면의 농담을 우리는 곧바로 ‘거짓말’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자백은 오랫동안 진실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경로, 이른바 ‘증거의 여왕’으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객관적 진실과 일치하는가라는 질문은 현대 철학의 핵심적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탈진실’의 시대에 들어서며 자백은 사실의 인출이 아니라 서사의 구성으로 기울어진다. 탈진실이란 거짓이 범람하는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보다 신념과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힘을 갖는 인식론적 위기를 가리킨다. 이는 진리의 부재가 아니라, 진리값 자체가 감정적 만족과 진영 논리에 의해 대체되는 국면이다.
자백 역시 이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다. 미셸 푸코가 『지식의 의지』에서 말했듯, 서구 사회에서 자백은 권력이 개인으로부터 진실을 추출하는 기술이었다. 동시에 자백하는 주체는 스스로를 진실의 생산자로 규정하며 권력의 그물망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자백은 내면의 객관적 기록을 출력하는 행위가 아니라, 고백하는 주체가 당대의 권력 구조와 감정적 맥락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수행적 언어 행위다.
각자의 자백은 각자의 진실일 뿐이다. 이는 탈진실의 속성과 정확히 겹친다. 현대 사회에서 자백은 대중의 정서적 기대에 부합하는 ‘진정성’의 프레임 속에서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객관적 증거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유주얼 서스펙트>(브라이언 싱어, 1995)의 엔딩에서 ‘카이저 소제’의 발걸음이 남긴 반전의 여운은 무엇이었는가. 미즈 미캘슨 주연의 <더 헌트>(토마스 빈터베르, 2012)에서 어린아이의 증언이 결정적 근거로 채택되는 장면은 또 어떠한가. ‘대부분’의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끝내 외면된 채로.
<자백의 대가>가 집요하게 묻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믿고 싶은 이야기를 완성하고 있는가. 자백은 진실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이야기에 설득되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가장 취약한 증거일지도 모른다.
자백의 눈물, 이야기의 마침표
우리가 극장이나 TV 뉴스에서 범죄자의 ‘자백’을 마주할 때 느끼는 감정은 진실에 대한 지적 탐구라기보다, 서사가 마침내 닫히는 순간의 정서적 안도에 가깝다. 대중 매체에서 자백은 언제나 사건의 모든 실타래를 푸는 마지막 퍼즐로 배치되고, 우리는 그 고백이 터지는 찰나 비로소 숨을 고른다. 바로 이 지점에서 탈진실의 함정이 열린다.
리 매킨타이어는 『포스트트루스』 (김선희 역, 2019)에서 탈진실을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적 믿음’이 우선되는 상태로 설명한다. 자백은 이 조건에서 관객의 감정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장치다. 물증과의 합치 여부를 따지기보다, 우리는 자백하는 얼굴의 떨림과 눈물—곧 ‘진정성’이라는 모호한 프레임—에 먼저 설득된다.
이 경향은 문화 수용자의 태도에서도 선명해진다. 진술이 엇갈릴수록 관객은 혼란을 견디기보다 ‘믿고 싶은 인물’의 서사를 선택한다. 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취향과 입장, 곧 진영에 따라 소비되는 기호가 된다. 미셸 푸코가 말한 ‘고백하는 주체’는 더 이상 권력 앞의 죄수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미디어라는 거대한 극장 속에서 대중의 정서적 기대를 충족해야 하는 연기자로 소환된다.
유튜브와 SNS를 가득 채운 자백성 폭로와 사과문에서도 사정은 같다. 사실관계의 정밀한 검증보다, 내 입맛에 맞게 반성하고 있는지의 평가가 앞선다. 이 문화적 풍토는 사법 절차에까지 파문을 일으킨다. 이른바 ‘CSI 효과’처럼, 대중은 재판에서도 영화 같은 명쾌한 자백을 요구하고, 수사 기관은 그 여론을 견디지 못해 자백을 향한 서사를 과도하게 설계한다.
여러 다큐멘터리가 고발했듯, ‘나쁜 놈의 자백’이라는 각본에 맞춰 무고한 이들이 허위 자백으로 내몰리는 비극은 수용자의 서사적 편향에서 출발한다. 결국 자백은 진실의 증거라기보다, 우리가 갈구하는 권선징악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가장 편리한 장치다. 우리는 자백을 통해 진실을 보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보고 싶었던 이야기의 마침표를 확인했을 뿐이다.
탈진실의 시대에 문화 수용자에게 필요한 것은 자백의 눈물에 동화되는 감수성이 아니라, 그 눈물이 어떤 각본 위에서 흐르는지를 묻는 비판적 거리다. 자백은 주체의 진심을 비추는 창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을 투사하는 스크린일 수 있다.
자백이 진실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인간 이성이 스스로를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근대적 환상에 가깝다. 탈진실의 시대는 그 자리에 감정적 확신이 들어섰음을 경고한다. 결국 자백은 진리의 종착지가 아니라,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욕망이 결탁해 빚어낸 또 하나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백의 내용보다 먼저 물어야 한다. 왜 지금, 저 자백이 진실로 수용되는가—그 정치적·철학적 배경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