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긍정의 무도: 종결과 리듬의 실존
고등학교에서 역사, 체육, 심리학, 음악을 가르치는 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 토미(토마스 보 라센),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 페테르(라스 란데). 이들은 어느새 ‘삶의 권태기’ 한가운데 서 있다. 의욕을 잃은 학생들 앞에서 수업은 생기를 잃고, 가정에서의 존재감 또한 무뎌진다. 하루하루는 성실하지만,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자리에서 한 노르웨이 심리학자의 가설이 화제에 오른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혈중 알코올 농도 0.05%가 결핍된 상태로 살아가며, 이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마르틴이다. 그는 실험을 시작한다. 실험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방법은 간단하다. 일과 중 살짝 취해 있는 것. 그러나 그 간단함의 효능은 즉각이다. 무기력하다는 항의를 받던 수업에는 웃음이 돌아오고, 가족과의 관계에도 오래 잊고 지냈던 온기가 스민다.
마르틴의 변화는 곧 친구들을 끌어들인다. 네 사람은 두 가지 규칙을 정한다. “언제나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를 유지할 것!”, “밤 8시 이후에는 술에 손대지 않을 것!” 실험은 예상보다 빠르게 효과를 드러내지만, 만족은 오래가지 않는다. 최소치를 넘어서며 알코올 농도는 점점 올라간다. 질문은 자연스레 남는다. 이 실험의 끝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오래전 신선한 자극을 안겨주었던 덴마크 영화 <더 헌트(2013)>의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최근작을 다시 꺼내 들었다. 덴마크 국민 배우라 불리는 매즈 미켈슨과의 재회라는 점에서 개인적 관심도 컸다. 일종의 ‘소동극’ 형식으로 전개되는 <어나더 라운드>(토마스 빈터베르크, 2020)는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한결 가벼워 보인다. 죽음이 스며든 이야기임에도, 관람 후 마음에 남는 것은 묵직함보다는 묘한 경쾌함에 가깝다. 그 이유는 영화의 내용과 원제인 덴마크어 ‘DRUK’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영어로 옮기면 ‘drunken’ 혹은 ‘hang over’. 곧 ‘취기’다. 살짝 취기가 오르면 이유 없이 마음이 느슨해지고, 생기가 도는 감각이 찾아온다. 노래방에서의 맥주 한 잔처럼, 체내 알코올 0.05%는 일상의 엄중함에서 한 발 비켜서게 하는 자기 암시의 주문이 된다. 각박하고 빡빡한 삶 속에서, 적당한 취기는 버틸 힘을 준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과대망상 자체가, 비참하고 고루한 일상을 견디게 하는 술 한 잔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주량을 과시하며 술을 들이붓던 시절이 있었다. 두주불사에서 고주망태까지. 몸과 마음이 망가져 가는 줄 알면서도 놓지 못했던 날들, 알코올 의존증의 경계에까지 다가섰던 시간이다. 혼자 남은 집에서, 때로는 보증금을 맡기고 실내 주점에서 혼술을 하며 밤을 넘겼다. 그 시절이 지금의 가난과 건강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알코올 한 방울도 분해하지 못하는 아내를 만나고, 가난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며 절주는 자연스레 금주로 옮겨갔다. 지난 10년간 마신 술이라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맥주 한두 잔, 와인 한두 잔이 전부다. 코로나 이후로는 그마저도 기억 너머로 밀려났다. 영화 속 음주 장면에 공감하기 어려운, 먼 과거의 풍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내게 <어나더 라운드>는 하나의 영화이면서, 어떤 계기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경계처럼 다가온다. 취기가 삶을 가볍게 들어 올리던 시절과, 맨몸으로 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지금 사이의 거리. 그 반걸음의 간극에서,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바라본다.
꿈의 농도, 다시 흔들리는 몸
영화 <어나더 라운드>에 투영된 실존적 열망과 회복의 서사는 도입부부터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덴마크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문장을 인용하며 문을 연다. 화면에 제시되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청춘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꿈의 내용이다.”
이 구절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수록된 「아포테그마타(Apophthegmata)」 중 일부로, 영화는 이를 통해 중년의 위기에 놓인 주인공들이 무엇을 상실했는지를 또렷하게 규정한다.
토마스 빈터베르그 감독이 말하는 청춘은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다시 말해 ‘꿈을 꿀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마르틴과 그의 친구들은 학교 교사라는 역할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이 ‘꿈의 내용’, 곧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린 인물들로 그려진다. 영화의 서두를 장식하는 이 철학적 문장은 이후 이들이 감행할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유지 실험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의 회복, 즉 삶의 생동을 되찾으려는 절박한 시도임을 암시한다.
자막이 끝나자마자 화면은 덴마크 고등학생들이 호숫가를 돌며 팀별로 맥주 한 상자를 비우는 음주 경주 장면으로 전환된다. 학생들은 달리며 술을 들이켜고, 구토하면 감점을 받는 규칙 속에서 무질서하지만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경주가 끝난 뒤에도 이들은 지하철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란을 피우며 젊음과 음주 문화의 과잉된 활력을 몸으로 증명한다. 이 장면 위로 영화의 마지막에도 다시 울려 퍼질 메인 테마곡, 스칼렛 플레저(Scarlet Pleasure)의 ‘What a Life’가 아카펠라 버전으로 흐르며 분위기를 붙든다.
곧이어 화면은 생기 넘치던 학생들의 모습에서 권태와 무기력에 잠긴 교사들의 회의 장면으로 급격히 이동한다. 주인공 마르틴은 교과서를 읽어 내려가는 데 그치는 수업을 이어가고,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수업 방식에 대한 항의를 받는 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이 대비는 ‘젊음의 폭발적인 에너지(술)’와 ‘중년의 건조한 일상’을 선명하게 병치하며, 이후 펼쳐질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유지 실험’의 정서적 토대를 마련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불안’이 인간을 자유로 이끄는 동력이듯, 영화 속 인물들은 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일상에 균열을 내고, 그 불안 속에서 다시금 청춘의 기척을 마주한다. 이 도입부의 인용은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마르틴의 춤으로 되돌아온다. 청춘의 꿈이 끝내 지속되지 않더라도, 그 찰나의 ‘내용’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일.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이 인간 실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닿아 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몸으로 건너는 불안의 순간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3단계(심미, 윤리, 종교) 가운데 첫 번째는 ‘심미적 단계’다. 이는 삶의 권태를 견디기 위해 순간의 쾌락과 감각적 자극에 자신을 내맡기는 상태를 가리킨다. <어나더 라운드>의 주인공 마르틴은 무미건조한 교사 생활과 소원해진 가족 관계 속에서, 오직 책임과 의무만을 수행하는 ‘윤리적 단계’의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감행한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 실험은 겉으로 보기에 단순한 일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권태라는 실존적 위기에서 벗어나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청춘의 꿈’을 다시 불러내려는 심미적 시도에 가깝다.
그러나 영화는 심미적 삶의 끝에 필연처럼 따라붙는 ‘절망’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다. 친구 토미의 죽음은 쾌락이 삶의 근본적 고통을 치유하지 못하며, 오히려 더 깊은 허무로 이끌 수 있음을 냉정하게 드러낸다.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르틴의 춤은 바로 이 절망과 환희가 맞닿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실존적 태도의 표식이다. 그는 졸업을 앞둔 제자들의 생동하는 청춘이라는 심미적 순간과, 친구를 잃은 상실의 윤리적 고뇌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결국 공중으로 몸을 던진다. 그 역동적인 춤은 선택이라기보다 응답에 가깝다.
이 장면에서 마르틴은 단지 술의 힘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삶의 부조리와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심미적 실존의 정점에 이른다. 키에르케고르가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말했듯, 심미적 태도란 삶을 멀찍이 관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 순간의 ‘내용’을 자신의 삶 속에 채워 넣는 행위다. 마르틴의 춤은 죽음과 삶, 상실과 회복이 공존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 이는 잃어버렸던 ‘사랑’이라는 꿈의 내용을 다시 신체의 리듬으로 불러오는 실존적 도약에 가깝다.
<어나더 라운드>의 결말에서 펼쳐지는 이 춤은 단순한 해방의 몸짓을 넘는다. 춤은 생의 비극적 이면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끌어안으려는 결단이다. 영화 초반, 마르틴이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없이 흘린다. 이 눈물은 사회적으로는 기능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고립된 존재라는 자각, 다시 말해 ‘살아 있지 못함’에 대한 비애였다.
그는 역사 교사로서의 열정을 잃었다. 아내 아니카와의 관계에서도 정서적 사막화를 겪으며 윤리적 의무라는 껍질만 남은 상태였다. 알코올 농도 유지 실험은 이 무감각한 일상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토미의 죽음은 심미적 유희가 감당해야 할 파괴적 대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장례식 직후, 마르틴은 친구를 잃은 비극과 제자들의 졸업이 품은 생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항구에 선다. 이때 아내로부터 도착한 “나도 당신이 그리워”라는 메시지는 그를 다시 삶 쪽으로 끌어당기는 실존적 근거가 된다. 그는 무용수였던 과거의 감각을 깨워, 억눌러 두었던 신체의 리듬을 폭발시킨다.
이 춤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비극적 지혜의 실천이자, 키에르케고르가 강조한 ‘불안을 통한 자유’의 획득이다. 마르틴은 바다를 향해 몸을 던지는 마지막 도약을 통해 삶의 불확실성과 죽음의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것을 자신의 리듬으로 받아들인다. 정적인 무기력이 동적인 생명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꿈이 사라진 자리의 비극적 현실마저 ‘사랑(내용)’으로 채우겠다는 의지가 조용히 드러난다.
꿈의 형식, 비극의 리듬
키에르케고르가 <어나더 라운드>의 서두에서 호출한 “청춘은 하나의 꿈”이라는 명제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미학적으로는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을 가리킨다. 여기서 청춘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순수한 생의 역동이다. 다시 말해 고정된 윤리적 형식에 포획되기 이전의 카오스적 잠재태에 가깝다.
마르틴을 비롯한 인물들이 맞닥뜨린 중년의 위기는 미학적으로 보자면 ‘권태’라는 정체 상태다. 권태는 새로움이 제거된 반복의 시간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전조처럼 자아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지 못하는 징후다. 이들이 선택한 혈중 알코올 농도 0.05% 유지 실험은 감각적 지각의 지평을 의도적으로 비튼다. 이는 세계를 다시 ‘흥미로운 것’으로 재구성하려는 심미적 기획에 가깝다. 술은 일상의 견고한 인과율을 느슨하게 풀어낸다. 메마른 사실의 세계를 다시 꿈의 질감을 지닌 공간으로 변모시키는 미학적 매개로 기능한다.
그러나 영화의 미학적 정점인 결말의 무도는 단순한 취흥의 환희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비극적 숭고의 체현에 가깝다. 토미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은 심미적 유희가 마주한 ‘무(Nothingness)’의 심연을 노출시킨다. 마르틴의 춤은 이 심연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절벽 앞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끝에서 자신의 육체를 던짐으로써 춤을 완성한다. 이 순간 그의 몸은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다.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이 동시에 울리는 ‘현상학적 육체’로 전환된다.
마르틴은 춤을 통해 비극적 현실이라는 고통스러운 ‘내용’을 청춘이라는 ‘꿈의 형식’ 속으로 끌어안는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반복’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창조적 재개다. 이렇듯 그의 마지막 도약은 윤리적 무게라는 중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무게를 추진력 삼아 날아오르는 심미적 자유의 형상이다. 이는 고통스러운 실존을 하나의 예술적 형식으로 감당하려는 ‘비극적 긍정’의 성취에 가깝다.
<어나더 라운드>에서 알코올은 미학적으로 ‘파르마콘(Pharmakon)’, 곧 치유제이자 독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물들의 음주는 개별화된 자아의 경계를 허물고 생의 원초적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디오니소스적 도취의 과정이다. 마르틴이 교실에서 경직된 권위를 내려놓고 학생들과 교감하며 수업을 하나의 퍼포먼스로 변모시킨다. 이 장면은, 알코올이 창의적 영감을 촉발하는 미학적 촉매로 작동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일상은 다시 ‘흥미로운 것’으로 전회되고, 마모되었던 생명력은 잠시 회복된다.
그러나 술은 동시에 자아를 해체해 통제 불가능한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파괴성을 내포한다. 니체가 경고했듯, 디오니소스적 심연에 지나치게 침잠할 경우 인간은 윤리적 지반을 잃고 자멸에 이른다. 토미의 죽음은 그 파괴적 측면이 극대화된 결과다. 심미적 탐닉이 윤리적 책임과 분리될 때 도달하는 비극적 종말을 상징한다. 알코올은 마르틴에게는 삶의 리듬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지만, 토미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독으로 작용하며 인간 실존의 아포리아를 선명히 드러낸다.
영화는 이 이중성을 끝내 화해시키지 않는다. 대신 파멸의 가능성을 인지한 채, 그 위험한 도취를 통해서라도 다시 생의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려는 인간의 위태로운 미학적 실존을 조용히 긍정한다.
취함과 깨어 있음 사이의 리듬
현대 사회에서 ‘중독’은 더 이상 생물학적 의존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성과 중심의 구조 속에서 마모된 자아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택하는 역설적인 생존 전략에 가깝다. <어나더 라운드>는 이러한 현대적 중독의 양가성을 ‘알코올’이라는 미학적 촉매를 통해 섬세하게 해부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시도하는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 실험은 표면적으로는 기능과 효율을 끌어올리려는 ‘성과 중심적 도취’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 곧 절망과 권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실존적 갈망이 놓여 있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진단했듯, 현대인은 스스로를 착취하는 ‘성과 주체’로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내면의 공동(空洞)을 메우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부 자극—SNS, 소비, 물질—에 자신을 맡긴다. 마르틴이 교실에서 무기력하게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던 모습은 이러한 반복의 시간에 갇힌 현대인의 초상이다. 그가 술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 과정은 도취가 지닌 해방적 가능성을 시각화한다. 이때의 도취는 경직된 사회적 자아를 느슨하게 풀어내고, 타자와의 감각적 연결을 회복하게 하는 미학적 ‘숨구멍’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영화는 도취가 중독이라는 파괴적 형식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심미적 단계에 머물고자 하는 욕망이 삶의 구체적 책임과 충돌할 때, 도취는 더 이상 삶을 고양시키는 ‘파르마콘’이 아니라 실존을 잠식하는 독으로 변한다. 토미의 자멸은 심미적 유희가 윤리적 지반을 잃었을 때 도달하는 현대적 중독의 비극적 종착지다. 결국 중독은 개인이 감당하기 벅찬 ‘삶의 무게’와, 그 무게를 잠시 잊게 해주는 ‘망각의 쾌락’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을 마르틴의 춤으로 예술적 형식 안에 담아낸다.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마르틴의 마지막 무도는 ‘중독된 신체’가 ‘예술적 육체’로 전회하는 순간이다. 중독이 대상에 매몰되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라면, 도취는 대상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아를 확장하는 능동적 상태에 가깝다. 현대인은 흔히 중독을 통해 도취에 이르려 하지만, 대개는 그 짧은 쾌락 뒤에 더 깊은 권태로 가라앉는다.
<어나더 라운드>는 이 순환을 끊는 방식으로 ‘비극적 긍정’을 제시한다. 그것은 금욕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중독이 가리키는 자아의 결핍을 인정하고 그 결핍 속에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다. 항구에서 제자들과 뒤섞여 춤추는 마르틴은 술의 힘을 빌리되 술에 잠식되지 않는다. 그는 친구의 죽음이라는 슬픔과 아내의 메시지가 건네는 기쁨을 하나의 율동으로 통합한다.
이 장면은 중독이라는 사회적 병리를 실존적 도약의 계기로 전환할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을 암시한다. 커피로 야근을 견디고 약물로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적 중독’이 인간을 부품으로 전락시킨다. 마르틴의 도취는 인간을 다시 ‘꿈꾸는 존재’로 되돌려 놓는다. 이 영화가 현대의 중독 담론을 의학적 처방의 영역에서 실존적 결단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순한 절제가 아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청춘의 내용(사랑)’을 회복하려는 능동적인 심미적 실천에 있다. 그의 마지막 공중 도약은 조용히 이를 증언한다.
“애는 쓰는데 자연스럽고,
열정적인데 무리가 없어.
...
취해 있지 않거든요...”
-윤태호 <미생 >, 82수 中-
맑은 정신은 숙취 뒤 해장 국물에서 번뜩이는 반짝임이 아니었다.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잠시 욕심 속에 담가 두었던 심장을 꺼내, 찬바람에 그대로 내놓는 일에 더 가깝다.
문득 돌아본다. 나는 무엇에 취해 있었을까. 성공, 돈, 사람, 인기, 술, 그리고 자기합리화. 어쩌면 취한다는 말은 욕심을 품고 미쳐 있는 상태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한 잔 더, 삶의 차수를 넘기며
영화는 이름조차 선뜻 기억나지 않는 북유럽 심리학자의 가설 수행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분명 변화도 있고 성취도 있지만, 관객은 쉽게 해피엔딩을 예감하지 못한다. 감독의 영화적 토대인 ‘도그마 95 선언’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전개는 소동극처럼 보일 만큼 일상적이고 소박하다. 한계치를 넘은 과욕이 불러온 토미의 죽음이 잠시 충격을 줄 뿐, 그 외의 사건들은 예상 가능한 선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인생과 세상살이가 원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는 듯하다. 엄청나게 요란하거나 극적인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관찰자의 시선에서 그렇다. 당사자에게는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변화와 도전도, 타인의 눈에는 밋밋한 선 하나가 잠시 출렁이는 일탈로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취기에서 나온 객기이든, 지나친 모험이든,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어 한다. 영화의 영어 제목 <Another round>가 바로 그 마음을 설명한다.
이 표현의 뜻을 ‘술꾼’들은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위스키 바에서 바텐더에게 “같은 것으로 한 잔 더”를 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 한 잔 더, 한 번 더 취해 보겠다는 것은 어쩌면 나를 넘어설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고백이다.
‘어나더 라운드’는 또 다른 의미로 “차수 변경”을 뜻한다. 차수를 바꾼다는 것은 회기나 국면의 전환, 이를테면 1차에서 2차로, 다시 3차로 넘어가는 일이다. 행정적 절차의 요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앞선 국면을 일단락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흔히 말하는 ‘터닝 포인트’나 ‘인생 2막’처럼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보다 소소하고 현실적인 마음의 다짐과 실행에 가깝다.
영화에서 권태와 매너리즘에 빠진 중년들에게 잠시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알코올이었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각자의 ‘변화 의지’였다. 누군가는 지루함 때문에, 누군가는 견디기 힘든 고통과 다급함 속에서, 또 누군가는 또 다른 기회를 위해 크고 작은 차수 변경을 꿈꾼다. 고민이 저마다 다르듯, 그 방식 또한 제각각이다. 머리를 자르고 세신을 하기도 하고, 잠시 휴가나 휴업을 택하기도 하며, 은퇴나 귀촌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 전환을 위해 잠시 필요한 용기, 그것이 바로 기분 좋은 취기의 한 잔 더, 어나더 라운드가 아닐까. 삶은 종종 그렇게, 아주 작은 차수 변경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 해의 끝과 또 다른 해의 시작은 달력 위에서만 분명할 뿐, 삶의 실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해 이 경계 앞에 서서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을 마련한다. <어나더 라운드>가 말하는 ‘한 잔 더’는 그래서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의례에 가깝다. 끝났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대로 머물 수도 없는 자리. 이 자리에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다음 국면으로 넘어갈 준비를 한다. 실질적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겠다는 태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먹던 술을 다시 주문해 같은 취기를 연장하는 일과, 환경과 마음가짐을 바꾸어 차수를 전환하는 일은 모두 ‘어나더 라운드’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두 태도는 분명 다르다. 전자는 망각을 연장하는 반복이고, 후자는 리듬을 바꾸려는 선택이다.
나는 예년처럼 한 해를 정리하고 소회를 적지 않았다. 무언가를 마무리한다는 감각 자체가, 중증의 시간을 통과하는 몸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신 새해를 맞이하며 조심스레 바란다. 취기를 덧대는 또 한 번이 아니라, 국면과 차수를 바꾸는 진정한 어나더 라운드를. 살아 있음의 리듬을 조금 다르게 이어갈 수 있기를, 그 소망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인 시작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