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달의 몰락, 가짜 달이 비추는 텅 빈 구원
일본 영화 <종이달>(2014)은 겉보기에 서로 무관해 보이는 두 장면을 이야기의 양 끝에 괄호처럼 배치하며 시작과 끝을 맺는다. 이 괄호는 서사를 고정하는 장치이자, 영화 전체를 진동시키는 미세한 음계다.
첫 장면. 가톨릭계 여학교의 교실. 한 소녀가 책상 위에 지폐를 한 장씩 정성스럽게 펼쳐 놓는다. 그 아래에는 뺨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동남아시아 아이의 사진이, 옆에는 그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가 놓여 있다. 그 순간 <대영광송-천사 찬송(Gloria in excelsis Deo)>이 교실을 채운다. 소녀의 뒷모습은 기도에 가까운 숭고함을 띤다. 그러나 관객은 나중에 알게 된다. 그 돈은 소녀의 노동이 아니라, 아버지의 지갑에서 훔친 장물이라는 사실을.
두 번째 장면. 세월이 흐른 뒤, 기혼 여성이 된 리카(미야자와 리에)는 연하의 대학생 코타(이케마츠 소스케)와 충동적인 일탈의 밤을 보낸 후 새벽 첫차를 타기 위해 승강장에 선다.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는 초승달을 향해, 그녀는 손가락으로 쓱쓱 문질러 지워버리는 시늉을 한다. 이 장면을 회상하던 자리에서 내부고발자 스미(고바야시 사토미)가 묻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리카는 혼잣말과 고백의 경계 어딘가에서, 거의 무심하게 대답한다.
“가짜니까요.”
이 두 장면은 단순한 반복이나 대구가 아니다. 동일한 선율이 아니라, 서로를 울리는 화음이며 배음(overtone)이다. 어린 시절, 훔친 돈으로 타인을 구원하며 느꼈던 기이한 충만감은 성인이 되어 횡령한 돈으로 가짜 행복을 축조하는 행위로 확장된다. ‘선행을 위한 악행’이라는 모순된 씨앗은 1994년 일본, 거대한 거품 붕괴 이후의 토양 위에서 기괴한 꽃을 피운다.
행복을 느끼는 주체는 개인이지만, 어느 순간 그 감각은 타인의 채점으로 대체된다. 그 전환의 징표가 바로 경제 버블이다. 거품은 가짜다. 비누와 세제가 만들어내는 가짜는 대개 두 가지다. 하나는 거품이고, 다른 하나는 구정물이다. 거품은 세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신호처럼 보이고, 구정물은 오물이 떨어져 나갔다는 증거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둘 다 세탁이라는 작동에 필수적인 실체는 아니다. 효능을 증명하는 듯 보이는 현출의 장치, 일종의 눈속임에 가깝다. 이런 의미에서 거품은 언제나 실재가 아님을 은유한다.
이 거품은 경제라는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한다고 믿는 것, 곧 행복에 대한 인식에도 동일한 거품이 낀다. 어쩌면 사회가 공통적으로 규정하는 ‘행복’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품일지도 모른다. 반대로, 각자가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일탈—횡령, 외도, 거짓—그 어두운 선택들 속에 오히려 진짜 행복의 감각이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믿어온 행복이 실체 없는 가짜라면, 그 가짜를 지워버리는 리카의 손짓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고백에 가깝다.
<종이달>은 그렇게 묻는다. 우리가 지우려 했던 것은 달이었는지, 아니면 달이라고 믿어온 거품이었는지를.
종이로 만든 달, 빚으로 된 행복
제목 ‘종이달’은 중의적이다. 문자 그대로는 종이로 만든 가짜 달이지만, 영화 속에서 이 이미지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변용된다. 1920~30년대 일본의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 모형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종이달 앞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달은 그렇게 ‘가짜이지만 잠시나마 행복을 체험하게 하는 장치’, 혹은 ‘진실에 닿지 못한 행복’을 상징한다. 동시에 ‘종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신, 곧 지폐를 은유한다. 영화에서 이 종이는 지폐뿐 아니라 유가증권과 전표까지를 아우르며, 리카의 무너지는 일상 속에 구겨진 채 흩어지는 종이 쓰레기들로 반복 배치된다.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은 이 상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영화 속 리카에게 행복은 손에 잡히지 않는 유령에 가깝다. 남편과의 생활은 안정적이지만 숨이 막힐 만큼 건조하다. 남편은 “중국은 활기가 넘치더라”며 외부 세계의 역동성을 말하지만, 정작 아내인 리카의 욕망과 감정에는 무관심하다. 고가의 시계를 선물하면서도, 그 선물은 이해가 아니라 거리의 표시다. 경력단절 이후 계약직으로 지방은행에 취직한 리카는 월급을 모아 비싸지 않은 커플 시계를 남편과 나누었지만, 그 기억은 남편의 명품 시계 앞에서 손쉽게 무효화된다. 남편에게 리카는 잘 관리된 트로피이거나, 기능을 수행하는 가구에 가깝다. 예컨대 아이를 낳는 일 같은.
이 텅 빈 일상 속으로 대학생 코타가 들어온다. 코타는 와카바 은행에서 리카가 담당하는 VIP 고객의 손자다. 가난한 고학생인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조부를 증오한다. 리카는 이 부적절한 관계의 균열을 돈으로 봉합한다. 그러나 그녀가 코타에게 돈을 쓰는 행위는 단순한 ‘물욕’이나 ‘성욕’의 대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처절한 시도다. 리카에게 돈은 교환 가치가 아니라, 누군가를 구원하고 지배하며 사랑받게 하는 전능한 힘, 곧 ‘종이달’ 그 자체다.
시간적 배경인 1994년은 일본 버블 경제가 붕괴한 직후다. 화려한 파티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환각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은행원이 된 리카는 고객들의 돈을 만지며 그 환각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 돈을 손에 쥐며 생겨난 각성은 성적 욕망이 아니다. 자본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다. 남편에게서 얻지 못한 자존의 감각을, 코타 앞에서 자본으로 재현한다. 돈을 통해 위세를 만들고, 위계를 통해 행복을 조성한다.
부유한 노인들의 돈,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돈. 리카에게 그것들은 더 이상 얼굴을 가진 삶의 자산이 아니라, 주인을 잃은 숫자처럼 보인다. “잠깐 맡긴 돈, 빌리는 것일 뿐”이라는 안일한 자기합리화는 곧 거대한 횡령으로 미끄러진다. 흥미로운 것은 리카의 태도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명품을 소비하면서도, 그 동기를 끊임없이 ‘타인을 위한 배려’로 포장한다. 코타의 학비를 대주고 빚을 갚아주는 행위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라기보다, 스스로 구축한 망상에 가깝다.
일본의 비평가들은 이 지점에서 리카를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기형적 모성’으로 해석한다. 그녀는 돈으로 코타를 양육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기부금을 내던 소녀처럼, 횡령한 돈으로 연인을 구원하려 든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은, “범죄로 얻은 돈이라도 타인을 행복하게 한다면 정당하다”는 리카만의 비틀린 교리로 변질된다. 그리고 리카는 이 모든 것을 ‘행복’이라 부른다.
가짜의 쪽문, 성스러운 탈주
영화는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묻는다. 돈을 맡기던 치매 노인이 모조품 목걸이를 걸고 “가짜면 어때요, 예쁘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리카의 가슴에 잠시 걸린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자신만의 합리화와 망상의 세계로 복귀한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리카 자신도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상하이에 동행하지 않겠다는 리카에게 이유를 묻는다. 리카는 은행에서의 업무 책임과 보람을 대답으로 내놓는다. 남편은 다시 묻는다. “정말 그게 행복해?” 이 질문은 리카에게 거의 무의미하다. 남편이 제공하는 ‘진짜’ 생활, 즉 안정된 가정과 평판은 그녀에게 질식할 듯한 감옥이다. 반면 횡령한 돈으로 꾸민 코타와의 호텔 생활, 곧 ‘가짜’ 생활은 해방의 감각을 준다. 행복은 언제나 진실의 자리에서만 반짝이는 것이 아님을, 영화는 집요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코타 역시 자본주의의 속물에 불과하다. 리카가 횡령으로 쌓아 올린 사랑의 성은, 코타가 다른 여자와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코타에게 리카는 돈을 잘 쓰는 ‘물주’였을지 모르지만, 리카에게 코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의 배신은 돈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종이달’이 찢어지는 순간을 의미한다. 가짜였을지라도 행복은 행복이었기에, 그 파괴는 더욱 쓰디쓰다.
영화에서 리카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동료 은행원 스미(고바야시 사토미)다. 스미는 횡령을 눈치채고도 즉시 고발하지 않은 채 리카를 지켜본다. 그녀의 시선에는 경멸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동경이 섞여 있다. 두 사람이 횡단보도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신호등이 깜빡일 때, 규칙을 지키며 멈춰 서는 스미와, 주저 없이 금지된 선을 넘어 질주하는 리카. 스미가 묻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리카는 답한다. “가야 하니까. 갈 곳이 있으니까.”
스미는 자신의 소비 한도 안에서 상상으로만 쇼핑을 즐기는, 체제 순응적인 인물이다. 25년 동안 작은 은행 지점을 지켜 온 그녀의 삶은 안전하지만 비루하다. 그 안전함조차 버블 붕괴 이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곧 드러난다. 반면 리카는 파멸을 감수하면서도 욕망의 끝까지 달린다.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고 파멸하는 리카와, 상상 속에서만 욕망을 소비하며 시스템의 부품으로 늙어가는 스미 중 누가 더 비참한가. 혹은 누가 더 자유로운가. 무엇이 행복인가.
횡령이 발각되는 순간, 리카는 의자를 들어 은행의 유리창을 박살 낸다. 이 행동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다. 남편의 규율, 은행의 시스템, 사회의 도덕이라는 투명한 감옥을 깨뜨리는 행위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도망치는 리카의 뒤편에서 다시 한 번 <천사 찬송>이 울려 퍼진다.
이 음악에서 반복되는 후렴은 ‘글로리아 인 엑셀시스 데오(Gloria in excelsis Deo)’다. 라틴어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가톨릭 미사 기도문, ‘대영광송’의 첫 구절이다. 이어지는 ‘in terra pax homínibus bonæ voluntátis’는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뜻한다. 신의 섭리 속에서 행복과 사랑을 누리는 인간을 찬미하는 이 축복의 음악이, 횡령 도주의 장면을 덮는다.
이 역설적인 배치는 리카의 범죄를 ‘성스러운 탈주’로 승화시킨다. 그녀에게 횡령은 타락이 아니라, 질식할 듯한 현실에 숨구멍을 내는 종교적 제의에 가깝다. “처음부터 가짜였으니까, 망가뜨려도 된다”는 리카의 논리는 이 순간 기묘한 정합성을 얻는다. 어쩌면 은행과 대부라는 금융 시스템 자체가 가짜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돈이라는 가상적 가치를 굴려 부를 창출하고, 그 부로 포만과 행복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의 핵심 장치이기 때문이다.
가쿠다 미쓰요의 원작 소설 『종이달』(紙の月)이 리카의 내면을 잠식하는 심리적 안개를 문장으로 촘촘히 직조했다면,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영화는 그 안개를 걷어내고 선명한 ‘행동의 파열음’을 전시한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결말과 도주 과정에 있다. 소설 속 리카는 횡령 사실이 드러난 뒤, 군중 속으로 스며들 듯 조용히 사라진다. 그것은 일상에서 비일상으로의 은밀한 이행이며, 독자에게 서늘한 여백을 남기는 열린 결말이다.
반면 영화는 리카가 의자로 은행 창문을 깨부수는 물리적 타격을 선택한다. 이 ‘깨짐’의 미장센은 영화가 채택한 가장 강력한 언어다. 영화 속 리카가 부순 것은 강화유리만이 아니다. 타인의 돈을 관리한다는 신성한 규율, 남편의 울타리, 그리고 일본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해 온 ‘청렴하고 순종적인 미덕’이라는 투명한 감옥이다. 소설이 심리적 질식을 응시했다면, 영화는 그 질식을 끝내기 위한 폭발적인 해방을 시각화한다. 유리를 깨고 거리로 뛰쳐나와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리카의 모습은, 정적인 드라마였던 영화를 단숨에 하드보일드한 도주극으로 전환시키며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지워지는 달, 남겨진 몸
영화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결정적 미장센은, 리카가 지하철 승강장에서 새벽 하늘에 걸린 달을 손가락으로 쓱쓱 지워내는 장면이다. 원작에는 없는 이 장면은 사실주의적 서사 한가운데로 비현실의 제스처를 끌어들인다. 그럼에도 이 환상은 이물감 없이 스며들어, 강렬한 기표로 기억에 남는다.
이 짧은 동작은 리카가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압축한다. 그녀는 알고 있다. 저 하늘의 달이, 그리고 자신이 붙들고 있는 행복이 ‘종이달’처럼 얄팍한 허상임을. 그러나 리카는 절망 대신 손가락으로 그것을 지워버리는 시늉을 택한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가짜 세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몸짓이다. “가짜니까 지워진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가짜이기에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주체적 선언처럼 울린다.
이 미장센은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인공 조명’과 ‘자연광’의 대비와 맞닿아 있다. 은행 내부의 차가운 형광등 아래에서 리카는 생기를 잃은 인형처럼 보인다. 반면 코타와 머무는 호텔 스위트룸의 따뜻하고 인위적인 조명 아래에서 그녀는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진짜 빛, 즉 태양과 현실은 차단되고, 가짜 빛—조명과 돈—아래서만 피어나는 존재. 감독은 조명과 앵글을 통해 리카의 행복이 철저히 인공적인 배양토 위에서만 가능함을 시각적으로 설득한다.
영화는 창문, 거울, 쇼윈도 같은 유리를 집요하게 호출한다. 정확히는, 유리에 비친 형상들을 포착한다. 지하철 차창에 비친 리카의 얼굴은 겹쳐지거나 흐릿하게 분열된다. 이는 성실한 은행원으로서의 리카와 횡령범으로서의 리카, 남편의 아내인 리카와 코타의 연인인 리카라는 분열된 자아를 암시한다. 스미와 마주하는 횡단보도 장면이나 쇼핑몰의 유리벽을 사이에 둔 응시에서, 유리는 단절이자 연결의 매개체로 기능한다. 유리에 비친 얼굴은 ‘종이달’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처럼 그럴듯하지만, 끝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소설이 리카의 독백을 통해 이 분열을 서술했다면, 영화는 유리에 비친 허상을 통해 ‘본체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그려낸다. 마지막에 리카가 은행 유리를 깨부수는 행위는, 유리에 투사된 가짜 자아들과의 결별 선언으로 읽힌다.
엔딩의 태국 시퀀스는 원작의 모호함을 구체적인 공간으로 끌어내린다. 눅눅한 열기와 강렬한 햇살은 일본의 건조한 공기와 뚜렷이 대비된다. 이곳에서 리카는 더 이상 명품을 휘두르지 않는다.
시장에서 과일을 사는 리카의 모습은 기묘하다. 훔친 돈으로 도주한 범죄자이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죄책감보다 묘한 평온이 머문다. 여기서 감독은 다시 한 번 ‘화상 입은 소년’을 등장시켜 오프닝과 수미상관을 이룬다. 그러나 이번에는 돈을 쥐여주며 구원자 흉내를 내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이는 리카가 마침내 ‘돈=구원’이라는 가짜 등식에서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그녀는 더 이상 종이달을 올려다보지 않는다. 대신 땅을 딛고, 생존을 위해 과일을 먹는다.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리카를 보며 관객은 조용한 확신에 이른다. 그녀는 결국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는 예감이다. 원작 소설이 리카를 끝내 붙잡히지 않는 신화적 존재로 남겨 두었다면, 영화는 그녀를 지상으로 내려놓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실존적 인물로 완성한다.
결국 영화 <종이달>과 원작 소설은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지만, 악기는 다르다. 소설이 현악기처럼 리카의 신경을 팽팽히 당겨 내밀한 파동을 만든다면, 영화는 타악기처럼 시각적 충격—유리의 파열, 달을 지우는 몸짓—으로 공명한다. 텍스트 간의 화음이 아니라 배음으로도 공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미학의 또 다른 효능이다.
리카가 추구한 것은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이 부여하는 전능감과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감각’이었다. 1994년 버블의 잔해 위에서 그녀는 가짜 돈으로 진짜 사랑을 사려 했고, 가짜 달을 진짜라 믿으려 했다. 영화는 이 처절한 모순을 아름답고 서늘한 미장센으로 박제한다. 깨진 유리 파편마다 리카의 욕망이 비친다. 그것은 날카롭고 위험하며, 슬프도록 반짝인다.
종이달 아래에서 남겨진 질문
영화의 엔딩에서 리카는 태국의 어느 거리 한켠에 서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우연처럼, 그러나 결코 우연이라 부를 수 없는 장면을 마주한다. 어린 시절 사진 속에 남아 있던 그 아이, 뺨에 화상의 흔적을 지닌 소년이 이제는 과일 노점의 주인이 되어 그녀 앞에 서 있다. 리카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자리를 떠난다. 이 장면은 수미상관의 닫힘이면서 동시에 질문의 확장이다.
리카는 일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쳐 왔다. 가짜로 조립된 행복, 남편, 코타, 그리고 범죄의 기록까지. 그렇다면 그녀가 지워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늘에 걸린 달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를 옭아매던 ‘양심’이라는 이름의 족쇄였을까. 영화는 답을 서둘러 제시하지 않는다. 결론은 언제나, 이 장면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화상을 입은 소년을 바라보는 리카의 눈빛에는 분명 연민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훔친 돈을 건네지는 않는다. 그녀가 무리해서 구원하려 했던 소년은, 결국 평범한 과일 장수가 되었다. 그것은 실패라 부를 만큼 비극적이지도, 성공이라 부를 만큼 극적이지도 않다. 리카는 이제 알고 있다. 돈으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혹은 자신이 끝내 붙잡고자 했던 달이, 애초부터 종이로 오려낸 장식에 불과했음을 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화 <종이달>은 묻는다. 우리가 쥐고 있는 행복은 과연 진짜인가. 혹시 우리 역시 사진관의 조명 아래서, 종이로 만든 달을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리카의 범죄는 분명한 악행이다. 그러나 그 질주의 끝에서 그녀가 획득한 ‘가벼움’만큼은 묘하게도 진실에 가깝다. 모든 것이 가짜였음을 인정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시작되는 자유. 그것은 요시다 다이하치가 그려낸 1994년의 초상이 지닌 서늘한 역설이다.
선의 결과를 위해 과정의 악은 간과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오래된 윤리 교과서 속 문답이 아니다. AI가 만능의 해결책처럼 호출되고, 그 이면에서 기술 권력이라는 가면을 쓴 자본의 욕망이 작동하는 시대에 더욱 무겁게 되돌아오는 물음이다. 결과적으로 ‘잘 사는’ 일은 그 자체로 행복의 실재라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진실을 넘어선 효능이 절대 가치처럼 작동하는 탈진실 시대의 징표에 가깝다.
쿠팡이라는 플랫폼이 일상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정의 정의와 공평이 보증하는 신뢰가 아니라, 빠르고 싼 효능이 만들어내는 즉각적 만족의 착시에 있다. 이 만족은 안전이나 존엄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밤샘 노동 끝에 사람이 죽어 가고, 개인정보 유출이 반복되어도 시스템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방편적인 사과나 구조적 개선 없이도 ‘나만 아니면 된다’는 계산법은 매끄럽게 작동한다. 여기서 행복은 윤리의 결과가 아니라 효율의 부산물로 오인된다. 효능과 속도가 행복의 이름을 차지하는 순간, 행복이라는 개념은 이미 다른 정의로 덧씌워진 상태다. 이 플랫폼적 삶의 감각은 우리가 무엇을 감수하고 무엇을 외면하는지조차 묻지 않게 만든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가 더 이상 ‘현실’을 참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미지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초현실(hyper-real)’을 만들어내고, 우리는 복제된 진실 속에서 살아간다. 탈진실은 이 초현실이 극단으로 밀려난 형태다. 진실보다 진실처럼 느껴지는 것이 권위를 차지하는 시대. 영화 <종이달>의 이야기가 비현실적 일탈처럼 보이지만, 일본 사회의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서사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는 진실의 붕괴라기보다, 진실이 머물던 감각적 지형의 이동으로 읽을 수 있다. 진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진실이 도착하는 경로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지금 철학과 문학의 과제는 이 이동의 궤적을 추적하는 일에 있다. ‘탈진실(post-truth)’은 정치적 수사나 정보 윤리의 문제가 되기 이전에, 예술이 가장 먼저 감지해온 균열의 이름이었다. 진실은 더 이상 하나의 중심에서 발화되지 않고, 이미지와 기억, 정동과 서사 속으로 흩어진다. 이 흩어짐의 풍경을 가장 예민하게 기록해온 것이 예술이며, 영화 <종이달>은 그 미세한 균열을 서늘한 미장센으로 증언한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전과 다른 얼굴로 우리 앞에 도착할 뿐이다.
탈진실의 문제는 더 이상 정보나 도덕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정동과 공동체적 욕망의 문제로 이동한다. 거짓이 윤리를 붕괴시키기보다, 오히려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감정의 장치로 작동하는 역설. 바로 그 지점이 탈진실이 던지는 가장 깊은 미학적·철학적 질문이다. 영화와 소설은 그 질문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붙들어 왔다. 진실에 대한 탐구는 언제나 그렇게, 예술의 언어에서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