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라는 깊은 의미의 우물 - 영화 <얼굴>

혐오와 추구, 그 사이의 탈진실 미학

by 박 스테파노

인물사진이나 초상화를 처음 마주할 때면, 시선은 거의 반사처럼 얼굴로 향한다.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늘 얼굴일 듯하다. 얼굴은 인간이 세계와 맺는 최초의 장면이며, 존재가 자기 자신을 외부로 번역해 내는 가장 투명한 표면으로 살아 움직인다.


그러나 이 표면은 단단한 기표처럼 보이면서도, 실은 감정과 기억, 권력과 윤리가 스며들고 빠져나가는 다층적 통로에 가깝다. 헤겔이 말하듯, 얼굴은 정신의 외화가 일어나는 지점이다. 내면이 외면과 조우하는 순간,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얼굴은 주체가 세계 속에서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매개가 되며, 내면의 떨림을 외부로 밀어 올리는 하나의 기호로 기능한다.


연상호 감독의 영화 <얼굴>은 이 기묘한 표면에 얹혀 있는 진실과 거짓의 얇은 경계선을 따라가며, 빠르게 미끄러지는 탈진실의 시간을 경고한다. 서사는 단순하게 흐르지만 그 단순함이 오히려 얼굴이라는 소재가 지닌 미세한 균열과 다층적 사유를 확장한다. 얼굴이 주체를 타인에게 드러내는 핵심적인 매개라면, 그 얼굴을 온전히 인식할 수 없는 상황은 무엇을 뜻하는가. 영화는 그 물음 앞에서, 타인을 향한 이해가 어떻게 쉽게 왜곡되고, 어떻게 진실이 얼굴이라는 표면에서 지워지거나 다시 쓰이는지를 섬세하게 드러낸다.


영화 <얼굴>의 포스터. 와우포인트 제공



얼굴의 그림자 아래에서


‘청풍전각’을 운영하는 전각 장인 영규(권해효/박정민)는 시각장애를 지녔다. 서사 속에 그의 과거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진 않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어진 듯한 시력 상실은 전맹에 가까운 상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예쁜 글씨체’로 도장을 새기는 장인으로 불리며, 사람들은 그를 ‘살아있는 기적’이라 부른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된 영규는 인터뷰 앞에 앉는다. 곁에는 촬영을 돕는 아들 동환(박정민)이 있다.


촬영을 이어가던 어느 날,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동환의 모, 영희(신혜빈)가 백골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40년 전 가족을 떠난 것으로 기억되던 모친의 죽음을 더듬으며, 동환은 부모의 그 어두운 옛날을 마주하게 된다. 그에게 진짜 불편을 안기는 것은 갑자기 몰려와 유산 포기를 요구하는 이모와 사촌들도 아니고, 겉과 속이 다른 다큐멘터리 PD의 욕망도 아니다. 사람들 입에서 반복되는 영희의 기억, 그 무심한 말 한 줄이 동환의 마음을 덜컹 무너뜨린다.


“못생겼어. 엄청 못생겼어.”


얼마나 못생겼기에 그 외모 하나가 낙인이 되고, 유일한 기억의 빌미가 되었을까. 그 의문은 자연스레 40년 전의 시간으로 스며든다. 나라가 일어서던 격렬한 시기, 노동은 헐값으로 소진되었고 피복공장의 시다로 일하던 영희는 구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삶을 버텨냈다. 그러다 앞을 보지 못하는 전각 장인 영규와 결혼하게 된다. 영희가 결혼에 이를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영규는 영희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희의 실종과 죽음의 이유는 선뜻 드러나지 않는다. 그때 ‘청풍피복’에서 재단사로 일했던 진숙(차미경)의 고백이 전해지며, 모두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이야기들이 조용히 떠오른다. 청풍피복 사장 백주상(임성재/김재록)의 이중성이 부각되고, 그의 취미였던 사진이 단서가 되어 영희의 죽음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결국 영희를 죽인 이는 남편이자 동환의 아버지인 영규로 밝혀지고, 반전 없이 이야기는 수면 아래 가라앉는다. 다만 영규가 영희를 살해한 이유는 어질게도 ‘못생김’ 때문이라는 잔혹한 사실만이 남는다.


“손이 예뻐요.”


첫 촬영 인터뷰에서 다큐멘터리 PD 수진(한지현)은 영규의 손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손을 많이 써야 하는 노동에도 불구하고 유달리 고운 손을 지닌 영규는 쑥스럽게 “손이 중요하니까요”라고 답한다. 영규는 예쁘다는 칭찬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청풍피복 백주상이 다방 종업원을 불러 영규에게 도장을 파달라며 너스레를 떨던 장면에서도, 종업원은 완성된 도장을 보며 “글씨가 참 예뻐요.”라고 감탄한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와우포인트 제공


눈앞의 세계가 지워진 그는 아름다움에 대한 구상과 구현을 타인의 말에 의존해 익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움은 그에게 일종의 보상처럼 다가왔고, 그 보상의 힘으로 전각에 몰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좇은 아름다움의 기준은 내면의 감각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반응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희를 두고 “예쁘다”고 놀려먹는 타인의 말을 은밀히 믿어버렸고, 그 믿음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


옛 친구와의 밥상에서 친구가 “마음만 착하면 되었다”고 말할 때, 그는 영희의 아름다움이 거짓된 정보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영희는 괴물처럼 못생겼고, 그 외모 때문에 오해와 조롱, 불이익을 감당해 온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영규는 그 진면목을 받아들이기보다 배반으로 느낀다. 이는 어릴 적부터 장애 때문에 겪어온 놀림과 무시가 남긴 강박적 피해의식의 그림자로 보인다. 그 피해의식은 망상처럼 부풀어 아름다움을 과잉 추앙하게 하고, 추함을 극단적으로 멸시하게 만든다. 결국 영희의 ‘못생김’은 모두가 멸시하는 진실로 굳어지고, 사건은 이 왜곡된 진실의 창에서 시작된다. 탈진실의 뼈아픈 표징이다.


“내 팔자에 들어 온 그 모멸감을 내 힘으로 밀어낸 거야. 아무도 모르게.”


영규는 마침내 아들 동환에게 고백인지 주장인지 모를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이해하라고 윽박지른다. 이해하지 못하면 맹인인 자신에게 기생해 사는 기생충이라 말한다. 그의 범죄는 멸시에서 시작되었고, 그 멸시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왜곡된 추구가 얽혀 있다. 영희의 죽음은 결국 영규의 모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그 모멸의 잔상은 타인들이 규정한 ‘얼굴’이라는 표면에 의해 남았다. 우리는 이 비극에서 타자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는, 지금 여기의 탈진실의 시대를 마주한다.



얼굴이 건네는 첫 빛


얼굴은 시대가 구성한 아름다움의 규범이 가장 선명하게 투사되는 자리다. 비례와 균형, 조화 같은 형식적 기준은 그 시대의 미적 이상을 구현하며, 그 기준을 받아들이거나 밀어내려는 주체의 움직임과 마찰을 일으킨다. 이 긴장 속에서 얼굴은 사회가 만든 규범적 형식과 그 형식에 균열을 내는 개별적 욕망이 부딪히는 장이 된다.


표정은 근육의 미세한 진동만으로 내면의 감정을 시각적 사건으로 조직한다. 기쁨이나 슬픔 같은 단순한 감정뿐 아니라, 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구조까지 이 표면에서 흔들린다. 예술가는 이 짧은 떨림을 형태로 옮겨 인물의 내면을 재구성해 왔다. 초상화란 결국 얼굴이라는 표면을 매개로 외양 너머의 정신적 지층으로 스며드는 시도였고, 여기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겉모습은 어디까지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가.’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깊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차원을 넘어, 새벽빛이 어둠을 가르는 순간처럼 나의 세계를 미세하게 흔드는 사건처럼 다가온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얼굴을 단지 표정이나 심리적 신호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얼굴을 윤리가 시작되는 자리로 보며 묻는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나라는 세계는 얼마나 흔들리는가?”


그에게 타인의 얼굴은 쉽게 해석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무한의 의미 영역을 품는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에 넣고 설명하려 하지만, 얼굴은 그 모든 시도를 비껴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아무리 분석해도 닿지 않는 틈이 남고, 그 틈에서 얼굴의 초월성이 드러난다. 한 사람의 얼굴이 주는 깊이는 결국 완전히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와우포인트 제공


이 초월성은 역설적으로 취약함을 통과해 다가온다. 피부와 눈, 입처럼 생의 표면이 고스란히 노출된 자리, 상처받기 쉬운 기관들이 모여 있는 그 연약함이 얼굴을 이루고 있다. 얼굴은 그 약함을 숨기지 않으며 조용히 명령한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Tu ne tueras point).”


이것은 단순한 금지가 아니라 존재를 돌려 세우는 윤리적 명령이다. 이 요구 앞에서 나의 자유는 잠시 멈추고, 나는 더 이상 나만을 중심으로 설 수 없다. 타인의 생존과 안전 앞에 책임을 지게 되는 이 순간, 주체는 비로소 윤리적 존재로 태어난다. 레비나스가 말하듯, 우리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이미 볼모처럼 놓여 있고, 나보다 먼저 다가오는 타인의 요청이 나라는 존재를 다시 묻도록 만든다.


그는 또 말한다. 언어는 얼굴에서 시작된다고. 누군가의 말이나 글보다 먼저, 이미 얼굴이 나에게 말을 건다. 얼굴과 마주할 때 생겨나는 대화는 정보를 주고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고, 타인의 신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윤리적 긴장에서 비롯된다. 타인을 나의 틀 안에 가두지 않으려는 그 배려에서 비로소 진짜 대화가 열린다.


결국 레비나스의 얼굴 철학은 한 가지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인간은 홀로 자립해 존재하는 섬이 아니라는 것. 나의 자아는 언제나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목소리, 타인의 고통과 요청에 의해 흔들리고 형성된다. 타인의 얼굴은 나의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무한의 빛처럼 다가와, 나를 책임의 자리로 이끈다. 이 초대에 응하려는 마음, 그 윤리적 움직임이야말로 폭력이 일상처럼 스며드는 시대 속에서 우리가 인간답게 남아 있으려는 마지막 빛일지 모른다.



얼굴을 덮는 감정의 그림자


문학과 영화에서 얼굴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이 아니라, 한 인물의 삶 전체를 압축한 도해처럼 기능한다. 주름과 흉터 같은 흔적은 지나온 시간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독자와 관객은 그 표면에서 그가 통과한 고통과 인내의 밀도를 읽어 낸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의 얼굴이 그의 지난 생을 묵묵히 증언하는 장면이 그 대표적 사례다.


서사는 흔히 가면을 통해 정체성의 이중성을 드러내고, 변신을 통해 심리의 균열과 운명의 움직임을 탐색한다. 얼굴을 숨기거나 바꾸는 일은 곧 자아의 경계를 새로 긋는 사건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응시’의 순간은 두 인물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첫 장면이며, 사랑과 증오, 연대와 권력의 불안정한 구조는 대부분 이 짧은 마주침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서사의 진폭은 지금의 시대에 이르러 균질성을 잃고, 들쭉이는 현실의 파동 앞에서 크게 흔들린다. 바로 탈진실(post-truth)의 조건 때문이다. 탈진실은 공적 담론에서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신념, 그리고 집단적 내러티브가 진실 판정의 중심이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조건 속에서 ‘미’와 ‘추’ 역시 생물학적·역사적·통계적 근거보다 “내가 느끼는 혐오/호감”과 집단 정체성이 선호하는 이야기의 힘에 의해 규정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니체는 진리를 고정된 실체로 보지 않았다. 진리는 권력 의지와 관점이 빚어내는 가치 판단에 가깝고, 미와 추 역시 그 관점의 산물로 읽힐 수 있다. 탈진실적 조건 속에서 특정한 얼굴과 몸에 대한 혐오와 추구는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관점 간의 힘겨루기”이며, 어떤 관점이 더 강하게 유포되느냐가 미 판단의 현실을 좌우한다. 영화에서 영희의 ‘추함’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다수가 공유한 느낌이 권력화한 낙인이었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와우포인트 제공


정서 또한 미 판단에서 단순한 부가 요소가 아니다. 감정은 무엇이 아름답거나 추한지 판단하는 과정에 직접 개입하며, 정보이자 동기이자 필터로 작동한다. 심리학은 정서를 지금 마주한 대상의 “가치 신호”로 설명한다. 기쁨과 안정 같은 긍정 정서는 대상을 안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지각하게 해 아름답게 평가하는 경향을 강화하고, 불안이나 혐오 같은 부정 정서는 위험·회피 신호가 되어 같은 대상도 더 추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긍정적 기분 상태에서는 대체로 “괜찮다”는 감각이 우세해 세부를 덜 살피고, 직관적이고 전형 기반의 판단을 더 많이 따른다. 반대로 슬픔·불안 같은 부정적 기분은 상황을 더 세밀히 점검하도록 만들며, 미 판단 또한 형식과 구성, 맥락을 더 면밀히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특히 분노는 판단의 ‘확신감’을 비정상적으로 끌어올려 정보 처리를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 실험에서는 분노를 유발한 집단이 슬픔 집단보다 자신의 판단에 훨씬 확신을 느끼지만 실제 정확도는 더 낮았다. 이는 싫음·역겨움 같은 감정이 작동하면 세부 검토 없이 즉각적으로 ‘추함’의 범주로 분류해 버리는 미 판단의 속성과 닿아 있다.


감정은 대상 평가를 넘어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라는 자기상과도 연결된다. 이상적 자아와 어긋나는 인물에 혐오나 경멸을 이입하면, 그 인물과 닮은 얼굴·몸·스타일을 자동적으로 “추하다/비호감”으로 평가해 자기 정체성을 방어하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이 왜곡된 감정의 필터가 사실을 넘어서고, 그 비틀림이 곧 탈진실의 토양을 이룬다.


감정의 그림자가 얼굴을 덮을 때, 얼굴은 더 이상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시대의 가치와 욕망, 두려움과 신념이 교차하는 거울이 된다. 그 왜곡을 들여다보는 일이야말로 지금의 시간을 이해하는 가장 섬세한 시선에 가까워질지 모른다.



탈진실의 얼굴, 흔들리는 미의 자리


탈진실이 미학적 판단에 스며드는 경로는 간단한 도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사실의 약화 → 감정·정체성 기반 인지 → 이미지·서사의 정치화 → 미 판단의 정치·윤리적 재구성”이라는 흐름이 그것이다. 공적 영역에서 사실과 증거의 힘이 약해질 때, 사람들은 감정과 신념, 그리고 집단 정체성에 부합하는 서사에 더 쉽게 귀를 기울인다. ‘참/거짓’의 논리가 희미해지고,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잘 맞는가’가 판단의 준거가 되면서 미의 판단 또한 형식이나 사실보다 집단 감정과 정체성 정치의 압력에 기울어진다.


탈진실을 둘러싼 논의는 인지부조화, 확증편향, 동기화된 추론 같은 사회심리학의 토대 위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자존감과 소속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거나 동일시하는 대상의 아름다움을 더 크게 평가하고, 위협적이거나 타자화된 대상을 더 추하고 혐오스럽게 지각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미·추의 판단이 어느새 정서적 방어기제와 정체성 관리의 장치가 되는 셈이다.


디지털·플랫폼 환경에서 이미지는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라기보다 감정을 동원하고 브랜드를 구성하는 도구로 작동하며, 탈진실 담론은 바로 이 과정에서 “현실감이 조작된 상태”라는 비판을 제기한다. 오늘의 미는 진실을 드러내는 형식이라기보다 특정 서사를 매혹적으로 포장하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 = 믿을 만한 것/좋은 것”이라는 직관이 이전보다 더욱 견고히 작동한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와우포인트 제공


한나 아렌트가 말한 것처럼, 조직된 거짓과 선전 속에서 사실이 사라질 때 정치와 윤리는 붕괴한다. 지금의 미·추 판단은 통계·의학·사회과학적 근거보다 이미지 조작, 플랫폼 알고리즘, 상업적 내러티브에 더 크게 흔들리고 있으며, “사실로서의 몸”이 아니라 “허구로 설계된 이상 미”가 현실을 대체하는 풍경이 나타난다.


이러한 조건에서 탈진실을 미학에 적용하면, 미 판단을 더 이상 “형식과 내용의 조화에 대한 자율적 성찰”로만 읽기 어렵다. 감정과 정체성, 그리고 플랫폼 권력이 얽혀 빚어내는 정치적·심리적 산물로 이해하는 이론적 경로가 자연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얼굴>의 서사는 이 개념을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징한다. 두 눈을 잃은 영규의 진실 굴절은 현대인이 플랫폼의 왜곡된 정보에 눈을 가린 채 살아가는 현실을 비추는 은유처럼 다가오며, 우리가 믿는 얼굴과 우리가 보는 진실이 얼마나 쉽게 기울어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 낸다.



얼굴을 잃은 자리에서 태어나는 물음


맹인의 개안과 비루함의 서사는 오래된 이야기의 틀이다. 시력을 잃은 인물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이가 그가 눈을 뜬 뒤 자신의 외모와 비루함을 의식해 도망치거나, 혹은 눈을 뜬 인물이 사랑하던 사람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하는 이야기는 문학과 영화의 오래된 모티프다. 이 구조는 시각과 인식의 관계, 그리고 사랑의 본질을 향한 질문을 날카롭게 던진다.


흑백 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 (찰리 채플린, 1931)은 그 전형을 절묘하게 간직한다. 시력을 잃은 꽃 파는 여인을 돕기 위해 떠돌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마침내 그녀는 수술을 통해 눈을 뜬다. 여인은 자신을 도운 이가 부유한 신사일 것이라 믿지만, 시력을 되찾은 뒤 마주한 이는 몸짓마저 서툴고 초라한 떠돌이였다. 비루함을 의식하는 주체는 서로를 향해 거울처럼 반사된다. 떠돌이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여인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워하고, 여인은 상상 속 존재와 현실의 괴리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마음의 시야가 육체의 시력을 넘어서는 순간을 그려낸다.


연상호의 <얼굴>은 이 익숙한 서사를 정면으로 비튼다. 초기 단편 애니메이션에서 다루어 온 세계를 확장해, 여성주의적 관점을 보강하고 대자보·폭로 장면을 변형하며 얼굴 없는 피해자라는 문제를 전면화한다. 선천적 조건으로 인해 죽음에 이른 존재의 비극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작업이다.


그의 초기 그래픽 노블, 애니메이션 작품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에서 드러났던 성과주의 한국 사회의 폭력성과 밑바닥 인물들의 절박한 삶은 <얼굴>에서도 유의미한 연속성을 가진다. 영화는 “성장 신화의 영웅 아버지 vs 지워진 얼굴의 어머니”라는 대비를 통해, 구조적 폭력이 더욱 미세하게 개인을 공격하는 시대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한 인간의 내면을 휘감는 어두운 심상은 결국 타자의 얼굴을 통해 뒤틀린 진실을 투사하고, 두 눈을 감아 버리는 비루한 삶의 형식으로 되돌아온다.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표면이 아니라 감정과 관계의 미세한 파문이 스며드는 장이다. 기쁨이나 슬픔을 넘어서는 복합적 감정의 떨림은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지고, 그 표면은 관계의 윤리적 구조를 드러내는 투명한 지형처럼 작동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은 이 지점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얼굴은 나를 향해 먼저 말을 건네는 타자성의 자리이며, 그 앞에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책임의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이 윤리적 호출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내면적 움직임과 닮아 있다.


그러나 <얼굴> 속 세계는 이 호출이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어둠의 공간이다. 아름다움의 규범이 타자의 얼굴을 재단하고, 그 규범을 절대화한 영규는 영희를 온전한 존재로 보지 못한 채 ‘추함’이라는 단일한 기표로 환원해 버린다. 얼굴이 건네야 할 빛은 차단되고, 남아야 할 자리는 어둠으로 채워진다. 이는 단순한 무지나 감정의 오해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욕망을 토대로 타인을 규정해 버리는 탈진실적 시선의 어둠에 가깝다.


영화 <얼굴>의 한 장면. 와우포인트 제공


탈진실의 시대는 진실이 결핍된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과잉의 진실이 사방에서 충돌하며, 각자의 진실이 각자의 얼굴 위에 새겨지는 시대다. 영규가 영희에게 투사한 시선은 진실의 과잉이 만들어 낸 파국의 한 형태였다. 타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시도 대신, 기억과 감정, 혹은 왜곡된 서사를 진실로 고정해 버리는 태도 말이다. 이때 얼굴의 윤리는 붕괴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창은 흐려진다.


영희의 삶은 그 흐려진 창 속에서 지워졌다. 사람들은 그녀의 존재를 얼굴 하나로 축약했고, “못생겼다”는 조롱 속에서 그녀의 노동과 고통, 존엄은 형태를 잃었다. 얼굴은 원래 타인의 윤리를 열어젖히는 문이지만, 그 문이 닫히는 순간 타자는 기억의 잔상으로만 남는다. 영화는 이 잔혹한 축약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비추며, 우리를 다시 타인의 얼굴 앞에 세운다. 그 응시는 불편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이 윤리적 시선을 되찾는 출발점이 된다.


끝내 <얼굴>은 질문을 되돌려 놓는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의 얼굴을, 어떤 기준으로 지워 버리고 있는가.


이 질문은 시대의 윤리를 가늠하게 하는 깊은 우물 같다. 그 우물에 비친 얼굴은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다. 그 비침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지 않는, 미적 규범이 아니라 윤리적 감응에 기초한 시선을 되찾을 가능성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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