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어쩔수가없다>와 부조리의 오해: 박찬욱 작품을 둘러싼 감각의 변위
박찬욱의 최근 영화를 둘러싼 담론에는 유난히 ‘부조리’라는 단어가 넘친다. “박찬욱은 원래 인간세계의 모든 부조리를 인물의 몸에 가득 담아 우리에게 ‘부조리의 총량’을 임계치까지 들이밀던 감독”이라는 평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평 뒤에 최근 작품 <어쩔수가없다>가 그 계보에서 벗어난 변주라 말하며, 만수(이병헌)의 살인이 더 이상 운명이나 관계의 불합리가 잉태한 폭발이 아니라 계획된 행위라 주장한다. 그래서 이전과 달리 ‘부조리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의미의 오염은 시작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말하는 부조리는 단지 ‘불합리’를 대체하는 개념에 머무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비평들 설명대로 영화 속 만수의 행동은 우발적 살인이 아니다. 그의 범죄는 제법 정교한 설계에 기반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준비’이며, 모든 순간은 그 준비의 연장선에 있다. 구조조정 항의 발언에서, 면접장에서, 심지어 살인을 실행하는 순간까지 만수는 미리 구성한 문장을 손바닥에 붉은 펜으로 적어둔다. 그리고 그 문장을 충실히, 때로는 어색함과 함께 읽어 내려간다. 상대가 듣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그의 행위는 충동의 폭발이 아니라 한 번 써 놓은 문장을 이행하는 것에 가깝다. 만수에게 우발은 없다. 어둠은 예고되고, 살인은 계획되고, 말은 기억되며, 문장은 읽힌다. 그러나, 박찬욱 영화의 살인은 한번도 우발인 적이 없이 모두 계획적이었다. <올드보이>의 이우진(유지태)가 행한 자살까지도.
그렇다면 이 행동에서 ‘부조리의 부재’를 읽어낼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어떤 이들은 그 답을 ‘상황 인식의 결여’에서 찾는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수에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불쑥 찾아온 구조조정과 예고 없는 인원 감축 앞에서 그는 이유를 묻지 않는다. 질문은 언제나 뒤에 놓이고, 생존의 논리가 그 빈곳을 점유한다. 베트남 참전 용사였으며 한때 번성하던 돼지 농장을 운영했던 부친의 집, 즉 유일한 유산 같은 공간을 지켜야 하고, 아내 미리(손예진)와 전혼의 아들, 그리고 천재라 불리지만 한 번도 연주를 들려주지 않은 딸의 첼로 레슨비를 감당해야 한다. 일자리는 삶의 조건이며, 그 조건은 곧 존재의 마지막 버팀목처럼 작동한다.
여기서 결여되는 것은 단지 질문만이 아니다. 그는 방법을 모른다. 경쟁의 논리는 이해하지만, 경쟁을 견디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경쟁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는 과정은 논리적이라기보다 필사적이고, 그 필사적 상황이 어느 순간 ‘믿음’으로 굳어진다. 그렇게 손바닥 위에는 to do list가 아닌, 실행해야 할 삶의 방식이 적힌다. 만수는 단지 살인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자신을 연결하는 방법을 적는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박찬욱 영화에서 오랫동안 뿌리내렸던 ‘부조리 인간’의 계보에서 벗어난 사건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논리는, 정작 ‘부조리’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대중이나 평단의 일부가 이번 작품을 두고 “모호함이 힘을 잃는다”고, “진부하고 답답하다”고 말할 때, 그 불편은 작품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사용하는 단어가 이미 미묘하게 어긋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부조리는 억울함이나 불합리, 혹은 설명되지 않는 악의 충동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보다도, 세계의 질서를 어떻게든 모방하고 따라가려 하는 자의 어색한 몸짓에 더 가까울 때가 있다. 만수가 좌절과 모멸감을 견디며 손바닥에 빽빽이 적어 내려가는 문장은, 사실 ‘삶의 설명서’, 혹은 ‘존재의 매뉴얼’을 갈망하는 자의 절규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의 어색한 말하기, 삐걱거림, 부정확한 리듬, 지나친 계획은 오히려 그가 속한 세계가 얼마나 매끄럽고 냉정한가를 역설처럼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어색함은 부조리의 삭제가 아니라 다른 층위의 출현에 가깝다. 이전 작품들이 존재의 거대한 균열을 직접적으로 밀어붙였다면, 이번 작품은 그 균열의 주변에서 고작, 아주 조심스럽게 비틀린다. 그래서 더 이상 피가 튀지 않는데도, 장면은 불편하고, 더 이상 고통이 과장되지 않았음에도 죽음은 서늘하다.
만수는 부조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모방한다. 그는 세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표면을 따라 걷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박찬욱의 영화는 낯선 방향으로 열리고, 평단의 일부가 이를 ‘힘 빠진 부조리’로 읽는다면, 그 오독은 단지 작품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부조리’를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손바닥에 적힌 글자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을 이해하는 일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고. 그리고 바로 그 간극에서, 부조리는 다시 태어난다고.
부조리를 오해한 세계, 부조리를 살아내는 인간
‘부조리’라는 말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스미는 이름은 알베르 카뮈다. 그의 이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표현은 “부조리 인간”이며, 많은 독자는 『이방인』 속 뫼르소를 그 전형으로 상상한다. 특히 법정에서 그가 살인의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햇빛 탓인지, 혹은 아랍인의 반짝이는 흉기로 인해 순간 판단이 흔들렸기 때문인지 설명 불가능한 동기 앞에서 독자는 당혹감을 경험한다. 그래서 흔히 뫼르소는 납득의 경계를 넘어선 비합리의 인간, 즉 “부조리한 인간”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는 카뮈 사유에 대한 오랜 오해에서 기인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카뮈가 이야기하는 “l’homme absurde”는 결함이나 타락의 표상이 아니라, 세계의 침묵과 인간의 열망이 충돌한 자리에서 도피하지 않는 존재다. 한국어 번역에서 ‘부조리’는 부정적 감각을 먼저 호출하며, 단어의 그림자에 ‘잘못됨’과 ‘기형성’의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원문의 absurde는 어색한 균열과 표현 불가능한 긴장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이 의미를 갈망함에도 세계가 응답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단단한 공백, 혹은 질문과 침묵이 함께 머무르는 자리다. 그 자리를 기만 없이 살아내는 인간, 카뮈가 그린 인간형은 패배가 아니라 용기의 윤리를 품는다.
번역사는 그 뉘앙스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김화영의 “부조리한 인간”은 직역에 가까우나 부정적 어조를 벗기 어렵고, 이가림의 “부조리의 인간”은 의미를 안정시키는 대신 감각의 촉도를 무디게 만든다. 이환의 “부조리인”은 새로운 표현적 결을 시도했으나 아직 생활어의 어색함을 지우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번역의 강을 건너 원문의 숨결을 다시 느껴야 한다. 부조리 인간은 무기력한 인간이 아니라, 침묵을 견디며 살아남는 존재다. 그는 자살하지 않고, 신에게 도피하지 않으며, 무의미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살아 있음을 포기하지 않는 자다.
이제 다시 영화 속 만수로 돌아가 보자. 그가 처한 상황은 부조리인가. 아니면 그저 일상의 불운인가. 기술 권력이 노동을 재편하고, 인간의 판단을 알고리즘이 대신하는 시대에 노동자는 도구화되고,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설명해야 하는 책임은 여전히 개인에게 남는다. 여기서 만수에게 결여된 것은 동기가 아니라, 세계와 대화할 수 있는 ‘방법’, 곧 know-how의 언어다. 경쟁을 견디기 위한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계획으로 귀결된다. 그 계획은 충동이 아니라 생존의 구조화된 언어처럼 보인다.
만수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규칙의 표면을 따라 걷는다. 그래서 손바닥에 적힌 붉은 문장은 단순한 살인의 스케줄이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 연결하기 위한 절박한 문법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그를 우발적 악인의 자리에서 제외하며 박찬욱 영화의 부조리가 약화되었다고 진단할 때, 그 말 속에는 “부조리 인간”을 오해한 흔적이 남아 있다. 부조리는 광기나 돌발의 폭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조리는 세계의 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의미를 요구받는 인간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바로 그 모순을 끝까지 살아내는 존재야말로 카뮈가 남겨준 인간적 명칭이다.
그러므로 만수는 부조리로부터 멀어진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중심에서 헤매는 인물에 가깝다. 그의 세계를 둘러싼 기술 자본의 무표정한 태도, 비용과 효율만을 계산하는 미래의 공장 시스템—AI 소등 공장, 자동화된 벌목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침묵의 세계 앞에서, 만수는 반복해서 자신만의 문장을 수행한다. 그것은 실패한 계산이 아니라, 세계의 냉정함에 균열을 내려는 존재의 몸짓이자 최후의 저항이다.
한 걸음 뒤돌아 보면, 박찬욱 작품 속의 인물들은 항상 계획적이었다. 이 계획성은 단순한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가까웠다. 복수는 우발적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예비된 의식이었고, 살인은 예외적 탈선이 아니라 규칙을 따라 진행되는 장례의식 같은 절차였다. 그의 영화에서 폭력은 감정의 언어가 아니라 이성의 문법을 따른다. 철저히 계산된 간격, 반복되는 동작, 예상 가능한 결과. 그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신념과 세계관을 증명하듯 서사 위에 놓인다.
박찬욱의 인물들은 악을 저지르기 전에 이미 그 악의 무게를 스스로 측량한 자들이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계획은 실패하고 목적은 뒤틀리지만, 그럼에도 사건들이 마치 거대한 수식처럼 흘러가는 이유는 모든 이들이 규칙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한 만큼 돌려준다’는 단순함이 아니라,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을 빼앗긴 세계에서 남은 마지막 체계로서의 규칙. 그래서 그의 복수는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의 완성은 그들을 잠식하고, 윤리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올드보이>의 미장센은 특히 그 점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오대수가 훈련하듯 주먹을 휘두를 때, 그것은 구원이나 분노가 아니라 예정된 수순이며,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자의 침묵에 가깝다. 박찬욱 세계에서 살인은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그림자’다. 인간은 감정을 품지만, 행위는 언제나 체계와 규칙 속에서 이뤄진다.
그렇기에 박찬욱 영화 속 복수와 살인은 어떤 의미에서 기도이자 문장으로 남는다. 감정의 파동을 지우고 난 뒤 드러나는 구조와 리듬. 그 공백에 관객은 묻는다. 죄와 벌, 선과 악, 정의와 파멸은 과연 분리될 수 있는가. 동시에 조용히 깨닫는다. 준비된 복수란 결국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끝날 수 없는 불가역적 운명의 형식이라는 것을.
박찬욱의 영화는 늘 명확한 결론 대신 찜찜한 해피엔딩을 남겼다. 그 엔딩은 도덕적 가르침이 아니라 모호한 감각의 여운이다. 세계는 여전히 침묵하고, 인간은 여전히 의미를 요구한다. 그 모순의 진동이 남아 있는 한, 박찬욱의 영화 속 인물들은 여전히 ‘부조리 인간’의 계보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계보의 한 자리에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도 조용히, 그러나 확고히 자신을 두고 있다.
해피엔딩의 그림자, 부조리의 미학
박찬욱의 영화는 유독 개봉 직후 논쟁을 동반한다. 홍상수나 김기덕의 신작이 그랬듯, 어딘지 모르게 의심과 궁시렁거림이 분위기로 먼저 도착한다. 흥미로운 점은 늘 같은 장면에서 찬반의 목소리가 갈린다는 사실이다. 평단의 평가가 감탄에 가까울 때, 대중의 반응은 어딘가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정서에 머문다. 특히 ‘복수 3부작’ 이후 더욱 명확해진 온도 차는, 그의 이야기가 예측 가능한 구조 속에서도 결말에서 급격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관객이 기대한 정리와 단호함은 오지 않고, 대신 설명된 듯 설명되지 않은 모호함만 남는다. 그 모호함은 불친절하다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일관된 미적 태도로 남아 있다.
박찬욱의 결말은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정서적 차원에서 닫혀 있다. 관객은 그 끝의 의미를 완전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도달하는 감각적 결론이 있다. 그래서 평론가에게는 가능성의 해석을 열어두는 풍요가 되지만, 대중에게는 해결되지 않은 찜찜함으로 남는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흑과 백의 도덕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흐려지고, 선의 자리는 비어 있다. 나아가 차악과 차선의 윤리마저 뒤섞이며, 궁극적으로 아무도 ‘올바른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결말은 해결이 아니라, 서늘한 잔향처럼 남는다.
이를테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응징에 박수를 보내기엔 마음 어딘가가 멈칫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달수가 뒤늦게 뱉어내는 죄책감은 구원이 아니라 더 늦은 참회처럼 읽힌다. <박쥐>에서 뱀파이어 신부가 택한 해탈의 방식은 환희라기보다 체념에 가깝다. <친절한 금자씨>의 마지막에서 피해자들이 단체로 분노를 실행할 때조차 관객은 속 시원함이 아니라 묵직한 무력감을 느낀다. <헤어질 결심>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닷물 아래 가라앉은 인물이 가져온 결말은 연인의 연민도 거절당한 채 남겨진 공허로 이어진다. 그나마 <아가씨>의 결말만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해방을 허락하지만, 그 기쁨조차 비로소 장벽을 통과한 자의 숨에 가깝다.
이들의 결말은 표면적으로 해피엔딩의 구조를 띠지만, 행복이라 말하기엔 감각이 따라오지 않는다. 모든 과업이 마무리된 듯 보이나, 그 해결의 방식은 통쾌함보다 씁쓸한 잔향을 남긴다. 이 비현실적 무거움은 카뮈가 말한 부조리의 조건과 닮아 있다. 시지프가 바위를 밀어 올리다 다시 굴러 떨어지는 그 순간, 카뮈는 오히려 그에게서 행복을 발견했다. 형벌이 영혼의 파괴가 아니라 반복되는 육체의 노동이라면, 그 노동은 존재의 조건을 확인시키는 반복적 의식이며 인간됨의 증거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그 찰나를 응시한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을 해피엔딩이라 부른다.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도 그 계열에 있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스스로 정의한 ‘어쩔 수 없음’을 완수한다. 경쟁자를 제거했고, 다시 제자리로 복귀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관계는 안정되고, 무너졌던 균열은 봉합된다. 문제들은 사라진 듯 보이고, 삶은 다시 자신의 궤도로 돌아온다.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이 결말은 만수의 승리인가, 아니면 세계가 허락한 잠정적 연기인가.
새롭게 복직한 공장은 AI 소등 시스템이 작동하는 자동화된 제지 공장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로보틱스 장비가 벌목하는 장면은 설명 없이 제시된다. 그 침묵은 선언보다 냉정하다. 만수의 노동은 미래로부터 해고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보류된 것’이다. 존재의 시간은 연장되었으나 의미는 확보되지 않았다.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그는 잠시 멈추어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해피엔딩은 완성된 결말이 아니라, 부조리한 세계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어쩌면 박찬욱의 엔딩이 반복적으로 남기는 이 감각, 곧 미완의 안도, 불완전한 정리, 설명되지 않은 진공은 단순한 취향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실존에 대한 시네마적 진술이다. 세계는 설명되지 않으며, 인간은 그 침묵 앞에서 스스로 의미를 수행하는 존재다. 그래서 박찬욱의 끝은 언제나 어딘가에서 다시 시작되는 문장처럼 남는다.
종이의 무게, 인간의 잉크
박찬욱의 영화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장편 『액스』를 원작 삼는다. 원작이 자리한 미국의 맥락은 한국보다 깊고 질감이 다르다. 목재를 다루는 기술은 오래되었고 종이 문화는 아직도 완강히 남아 있다. 버크(영화의 유만수)는 그 세계의 전문가였다. 종이라는 소재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기계·화학·산업·기록·환경이 맞물린 복합적 물질문명 그 자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종이는 그저 소모품일 뿐이다. 종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펄프맨들에게만 그것은 여전히 끝없는 질문과 가능성의 대상이었다. 한국에서 ‘펄프맨’은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개척과 산업화의 역사와 함께 기억되는 노동의 정체성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제지 산업은 지역 경제의 심장이었다. 숲과 강을 따라 공장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은 세대를 건너 안정된 삶을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세계화와 자동화, 환경 규제 강화, 해외 저임금 공장의 부상은 이 풍경을 빠르게 지워냈다. 『액스』의 주인공처럼 중년 노동자들은 기술 혁신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한 채 실업과 고립으로 밀려났다. 주변화된 삶, 산업이 져버린 인간, 기술에 밀린 경험과 손끝의 기억. 이야기의 갈등은 사건 이전에 이미 그들의 세계에서 시작되어 있었다.
소설 속에서 실업자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제거하는 극단적 경쟁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현실의 제지 산업 역시 다르지 않았다. 기업은 비용 효율을 기준으로 인력을 감축하고, 소규모 공장들은 인수 혹은 폐쇄의 운명을 맞는다. 이 변화는 단순한 시장 구조의 조정이 아니라, 공동체 윤리와 노동의 존엄이 실질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이었다. 숲의 남벌, 수질 오염, 폐쇄된 공장 뒤에 버려진 마을들은 “산업 이후의 미국”이라는 낯선 풍경을 남겼다. 『액스』가 개인의 파국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냉혹함을 드러냈다면, 오늘의 제지 산업은 공동체 단위의 붕괴를 통해 그 비극의 확장을 반복한다.
흥미로운 점은 제지 산업이 다루는 대상이 다름 아닌 종이라는 사실이다. 종이는 기록을 가능케 한 매체이며 지식과 문화, 문명의 그릇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종이를 만들던 산업이 디지털 시대의 흐름 속에서 쇠락하고 있다. 생산자들은 자신이 만든 매체의 소멸을 목격한다. 『액스』의 주인공이 속한 질서를 내면화한 끝에 자기 소멸로 나아갔듯, 제지 산업 역시 비용의 논리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잠식해온 셈이다.
이렇듯 『액스』는 단순한 범죄소설이라 이름 붙이기 어렵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말기적 윤리를 예감한 기록이며, 오늘의 미국 제지 산업이 남긴 폐허의 초상을 은유적으로 비춘 거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미국 문화권에서 갖는 상징성과, 한국으로 번안되는 과정에서 희미해지는 의미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한국에서 제지 산업은 소수 전문 영역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과감한 결여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지만, 동시에 해석의 공백을 남겼다. 곧 만수의 살인은 인간적 파국이 아니라 하나의 시스템, 하나의 규칙처럼 읽힌다. 그래서 일부 평단은 그 행위를 “비극”이 아니라 “정교한 작동”으로 보았다.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대신, 부조리를 작동 방식처럼 받아들이는 방식. 어쩌면 그 판단은 설명 부재가 만든 오해인지도 모른다. 세계는 설명되지 않은 채 등장했고, 관객은 그 공백을 시스템의 무감각으로 해석했다.
우리는 종이를 소비한다. 더 나아가 먹기도 한다. 특수 용지 판지가 아이스크림의 결합제로 쓰인다는 사실은 대다수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해고된 노동자의 세계, 산업의 붕괴, 삶의 균열을 떠올리며 종이를 삼키지 않는다.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의 수요는 줄었고, 재활용이 당연한 감각으로 자리하면서 제지 산업의 축소는 하나의 자연화된 결과처럼 받아들여졌다. 모든 것은 비용의 문제로 환원된다.
"찰스 디킨스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 이렇게 말했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19파운드 6펜스면 행복한 사람이다. 1년 소득이 20파운드, 1년 지출이 20파운드 6펜스면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1년 소득이 제로까지 떨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하긴 그런 걸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있겠나?"
― 『액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노동자들 역시 비용 절감을 일상의 습관으로 받아들였지만, 해고의 정당성을 비용의 언어로 받아들이기란 여전히 어렵다. 그것은 인간이 비용으로 환산되는 현대 산업 시스템에 대한 가장 본능적 거부이기 때문이다. 해고는 언제나 구조조정의 결과처럼 설명되지만, 실은 한 개인의 시간, 기술, 정체성이 시장에서 삭제되는 명령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 이후 심리 훈련 프로그램, 재취업 지원, 퇴직금 협상 등 실천적 생존에 몰두하며 자리를 떠난다. 그것은 저항의 전략이라기보다, 세계의 침묵 앞에서 비극을 일상으로 환원시키려는 태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만수의 결행은 다르게 읽힌다. 그것은 단순한 살의가 아니라, 비용의 언어가 인간의 존엄을 몰수한 세계에서, 파생된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몸부림처럼 다가온다. 그는 세계의 알고리즘에 순응하지 않고, 그 알고리즘의 잔혹함을 행위로 드러낸다. 그것이 옳은가 아닌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다만 그 행위에는 인간이 비용으로 취급되는 현실에 대한 몸의 항의가 있다. 어쩌면 그가 말한 “어쩔 수 없음”은 무력의 변명이 아니라, 세계가 남긴 질문에 그가 선택한 가장 인간적인 응답일지도 모른다.
‘바디나주’의 균열과 침묵의 악보
<어쩔수가없다>에는 의도했으나 과장되지 않은 장치들이 차분히 배치되어 있다. 박찬욱의 사방무늬 벽지는 이 영화에서도 변주된 형태로 작동하며, 인물의 내면에 흐르는 불안과 구조화된 세계의 압력을 시각적 은유로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인물의 운명이 이미 패턴화된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암시하는 조용한 문장처럼 작용한다.
눈길을 잡아끄는 빨간 손바닥 메모와 만수와 미리의 댄스 취미는 현대인의 일상을 닮았다. 표면적으로는 소소한 행복의 파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정해진 동작과 규정된 리듬 안에서만 허락되는 몸의 자유가 있다. 분재 역시 그러하다. 철사로 나무의 생장을 좌지우지하며 미적 형식을 강요하는 행위는, 인간이 산업과 시스템 앞에서 점차 ‘사용 가능한 형태’로 조정되는 과정을 은밀히 비춘다.
만수를 괴롭히는 치통도 사소한 디테일이 아니다. 그 통증은 돌발적이며 지속적이고, 제어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술권력과 비용 논리 앞에서 무력해진 노동자의 내면을 닮았다. 누구나 문제의 원인이 깊숙이 숨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가장 늦게서야 치아를 드러내고 그 상처를 인정한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냐”는 말은 치통처럼 깊은 곳을 찌른다. 그 고통 앞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단순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방식 그대로, 버티는 일.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만수가 거대한 종이 롤을 두드리며 소리를 듣는 순간이다. 그 장면은 기술 효율과 자동화의 시대에도 완전히 대체되지 않는 감각의 존엄을 보여준다. 기계는 수치를 말하지만, 인간의 귀는 미세한 배음을 구별하고, 종이가 품고 있는 구조적 불균형을 감지한다. 그 ‘감’은 여전히 인간만의 영역이다.
이 감각적 서사는 구범모의 오디오 청음실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고추 잠자리>와 연결된다. 그는 자신을 “아날로그의 인간”이라 소개하며, 진공관과 바이닐을 통해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 감각의 질감은 리원의 첼로 음색과 연결된다. 기술이 모방하지 못하는 불규칙성, 예측 불가능한 떨림, 연주자의 호흡이 만든 흔들림 말이다.
영화의 엔딩을 장식한 음악은 프랑스 작고가 마랭 마레의 <르 바디나주(Le Badinage)>다. 비올라 다 감바가 지닌 바로크적 울림의 계보를 이어받은 이 곡은, 프랑스 첼리스트 장기엔 케라스의 연주로 영화 속에서 재현된다. 정확한 음정을 전제하는 비올라 다 감바와 달리 첼로에는 프렛이 없다. 따라서 미묘한 흔들림, 배음의 여운, 연주의 편차는 모두 ‘사람’의 몫이 된다. 그 점에서 이 음악은 영화의 언어가 된다.
리원은 그동안 가족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처음으로 첼로를 울린다. 그 음색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침묵 끝에 도달한 언어처럼 느껴진다. 불어 단어 ‘바디나주’는 두 가지 의미를 품는다. ‘가벼운 농담’, 그리고 ‘섬세하고 절묘한 손길’. 영화의 결말이 보여주는 감정적 무게는 바로 이 단어의 미묘한 간극 안에 머문다.
인공지능은 계산된 정확성과 효율로 세계를 재편해가지만, 바디나주의 결은 여전히 인간의 몫에 남아 있다. 기술이 모방하지 못하는 영역, 규범과 패턴에서 흘러 넘치는 여백, 연습된 동작 너머의 떨림. 영화는 바로 그 순간, 인간이 여전히 세계와 연결되는 방식을 들려준다.
만수의 해피엔딩 같은 마지막 풍경은 결코 단순한 승리나 안도감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은, 언젠가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잠시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 시지프의 숨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찰나야말로 인간 존엄의 마지막 증거이자, 바디나주의 의미가 살아나는 순간이 아닐까. 그 섬세한 떨림 속에서, 영화는 묻는다. 우리의 삶은 패턴인가, 혹은 아직 연주되지 않은 음표인가.
모호함의 시대, 박찬욱의 숨은 문장
모호한 영화의 반대편에 표식을 찍듯, 박찬욱의 제목들은 대체로 군더더기 없이 떨어지는 명사형에 가깝다. 수식어나 용언이 명사로 굳어진 경우는 있어도, 제목 자체가 하나의 문장 형태를 띠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쩔수가없다>는 그의 첫 문장형 제목이고, 동시에 가장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이미 갖추어진 형태라기보다 생략과 축약으로 의미의 중심을 흐리고, 그 모호함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행위의 주체도, 그 행위가 향하는 대상도 사라지고, 오로지 ‘어쩔 수’라는 말의 습관과 체계, 일종의 know-how만이 홀로 문장의 주어 자리를 차지한다. 어쩌면 이것은 이제 막 끝나가거나 이미 초과된 know-how 시대의 종말을 선언하는 언어적 장치일지도 모른다. 과잉된 해석일 수 있지만, 예술 작품이란 결국 관객과 독자를 만나며 그 의미의 주인이 바뀌는 법이니까.
박찬욱의 제목들은 그 나열만으로도 하나의 모호함 지형도를 그린다. <박쥐>, <아가씨>, <올드보이>, <공동경비구역 JSA>, <스토커>, <동조자> 같은 제목들은 이미 그 명명만으로 방향을 지시한다. 골프를 쳐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경험 많은 캐디가 멀리 있는 홀 잔디의 결과 바람을 읽고, 그저 ‘저쪽이다’라고 손가락을 들어 보여주는 순간, 시야는 비록 흐릿하나 목표는 기이하게 또렷해진다. 반면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헤어질 결심> 같은 제목들은 수식어를 덧붙였음에도 여전히 안개 속을 걷는 감각을 준다. 마치 방향등 하나에 의지해 안개 낀 날 페어웨이로 공을 보내는 기분에 가깝다.
가장 오래된 모호함은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에서 이미 예고되었다. 그 제목 하나만으로도 무엇 하나 예측할 수 없는 세계. 마치 별빛 없는 식월의 밤, 라이트 하나 없는 산속 골프장에서 장님 골프를 치는 느낌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호함의 최상 등급이 33년 만에 다시 등장했다. <어쩔수가없다>. 무엇이 무엇에게, 무엇을 향해, 왜 그러한지를 묻기도 전에 문장은 이미 미끄러진다. 그래서일까.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곳곳에 퍼진다. 원작처럼 ‘도끼’나 ‘모가지’로 더 단단한 제목을 붙였으면 좋았겠다고 훈수 두는 이들도 있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대다. 명확성과 단정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에 모호함의 미학을 전면에 세운다는 일은, 아마도 감독에게도 적잖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작 이 작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덜 모호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런 까닭에 일부 평자들은 이를 일종의 타협, 혹은 후퇴로 규정한다.
어느 영화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쩔수가없다>에서 분명 자기검열의 기운, 혹은 의도적으로 삭제한 감각 과잉의 흔적을 감지했다. 감독 자신이 오랫동안 다뤄온 세계의 부조리, 인간적 결함, 잔혹함의 미학을 일부러 한 걸음 뒤로 물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자기검열은 단순한 결핍이나 미적 실수의 표지가 아니라, 어떤 작가가 다음 세계로 넘어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잠정적 공백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번 작품은 도약 이전의 숨고르기가 아니라, 이미 만수가 저지른 살인처럼 경쟁자를 지우고 독보적인 존재로 남으려는 기성세대의 퇴보, 혹은 그 민낯의 표면을 증언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어쩔수가없다>를 지지하기 힘든 이유」. 지승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일견 의미 있는 비평이다. 그의 분석은 이 작품이 단순한 서사적 판단을 넘어 감독의 작가론적 궤적에 질문을 던진다는 측면에서 설득력 있다.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다른 방향의 작은 변론을 붙여본다면 박찬욱의 이번 선택은 후퇴나 타협이라기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한 탐색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정한 부조리 인간은 우스꽝스러운 실수의 연속 속에서 허둥대는 존재가 아니다. 이 심각한 오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순간, 서사는 더 낮고 단단한 결을 갖는다. 이야기꾼에게 이 지점은 언제나 딜레마다. 부조리는 단순한 부정이나 혼란이 아니라, 인간의 갈망과 세계의 침묵이 맞부딪히며 생겨나는 긴장이다. 그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그 한복판에서 삶을 붙잡는 인간—이것이 카뮈가 세운 존재의 축이었다. 부조리 인간은 도피하지 않고, 자살하지 않고, 신의 초월에 매달리지 않는다. 대신 삶의 무의미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충만하게 살아내려 한다. 그 모습은 처연함이 아니라 이상할 만큼 선명한 격조를 품는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일은 언제나 생존의 방식—‘어쩔 수’를 찾는 일에 가깝다. 그 방식이 반드시 숭고하고, 공정하며, 성스러울 필요는 없다. 어쩌면 감독은 바로 그 지점에 냉소에 가까운 투명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권력과 자본을 가장 확실한 가치로 삼아버린 세계, 그 윤리의 잔해 위에서 굴러가는 삶을 그는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인생이란 거룩한 휘광 속을 걷는 일이 아니라, 흙탕물과 냄새나는 어둠 속에서 간신히 진주 하나 건져 올리는 행위에 더 가깝다고. 이전의 명사형 제목들이 품었던 최소한의 기대와 방향성이 있었다면, 이제 환갑을 넘어 선 감독은 그 기대가 실은 허상에 가까웠음을 담담히 털어놓는 듯하다. 그리하여 서사는 납작해지고, 미학은 뭉툭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표면이 달라졌기 때문이지, 작가가 퇴보했기 때문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쩔수가없다>라는 이 문장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삶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또 다른 방식의 응시일지 모른다. 어쩌면 박찬욱은 지금, 가장 조용한 반격의 순간을 준비하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