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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우리'들의 연대, 그 가능성을 품고서

켄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I, Daniel Blake)

by 박 스테파노

한 인간의 이름으로 불리는 존엄의 서사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는 평생을 목수로 일해온 사람이다. 손끝으로 세상의 결을 읽고, 나무의 숨결을 느끼며 살아온 장인이다. 그에게 삶이란 거창한 꿈이 아니라,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평을 맞추는 일이었다. 함께 늙어가던 아내는 몇 해 전 머리에 커다란 바다가 생기더니, 그 안에서 폭풍을 맞고 이내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그는 아이도, 혈육도 없이 홀로 남았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일이라곤 남은 자투리 나무를 다듬어 소품이나 작은 가구를 만드는 일이었다. 손끝에서 새겨지는 온기가 곧 그의 호흡이자 기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터에서 갑작스러운 통증이 그를 덮쳤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의사는 단호히 말했다. “당분간,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은 다니엘에게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삶의 문을 잠그는 판결처럼 들렸다. 그에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국가에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담당 부서는 무정했다. 점수가 모자라다는 이유로 그의 신청은 기각되었다. 다니엘은 전화기 앞에서 몇 시간을 모차르트의 선율과 함께 보내야 했다. 기계음은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모욕처럼 들렸다. 어렵게 통화한 상담원은 말했다. “심사관의 전화가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는 기다림이 아니라 절망 속에 놓여 있었다. 행정은 그를 돕는 손이 아니라, 닿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결국 그는 직접 관공서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돌아온 답은 냉정했다. “질병수당이 기각되었으니, 구직활동을 하셔야 합니다. 구직수당 신청을 하세요.” 일을 할 수 없다는 의사의 소견서와, 일해야만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제도의 논리가 충돌하는 자리에서, 인간은 부재했다. 국가의 복지는 보호망이 아니라, 미로처럼 얽힌 시험장이었다. 다니엘은 어느새 ‘인간’이 아니라, 서류 하나의 오류로 삭제될 수 있는 데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한 젊은 여성을 만난다. 케이티(헤일리 스콰이어),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젊은 엄마였다. 낯선 도시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관공서로 온 그녀는, 단지 아이들이 추위에 떨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규정은 냉정했고, 그녀의 사정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다니엘은 그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자신 또한 가난하고, 하루를 버티기 급한 처지였지만, 누군가의 절망 앞에서 외면하지 못했다. 그가 케이티의 가구를 고쳐주고, 아이들을 위해 작은 나무 장난감을 만들 때,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연대였다. “없는 내가, 더 없는 사람을 돕는 건 이상한 일인가?” 다니엘의 물음은 세상에 던진 윤리의 질문이자, 인간됨의 마지막 고백처럼 들린다.


그의 선의는 체제 안에서 번번이 막혔지만, 바로 그 막힘 속에서 영화의 미학은 피어난다. 다니엘의 행동은 영웅적이지 않다. 그는 단지 ‘옳은 일’을 하려 한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위가 오늘의 세계에서는 기적처럼 보인다. 켄 로치의 카메라는 이 작고 느린 선의를 담담히 비춘다. 그가 푸드뱅크를 찾아 케이티와 함께 줄을 서는 장면, 혹은 아이들을 위해 낡은 벽에 못을 박는 순간마다, 노동의 품격이 다시금 되살아난다. 일하지 않아도 일하고 싶은 사람, 주고 싶지만 줄 수 없는 사람, 그들이야말로 공동체의 마지막 도덕을 지탱하는 존재들이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세계에는 영웅도, 구원자도 없다. 오직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는 사람들만이 있다. 그 연약한 손들이 서로를 붙잡을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 회복된다. 가난은 단지 돈의 부족이 아니라, 관계의 부재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끈질기게 보여준다. 다니엘이 벽에 써 내려가는 마지막 문장, “나는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요구한다”는 선언은, 정치적 구호이기 전에 인간의 이름으로 쓰인 기도문이다.


그의 이야기는 결국 존엄에 대한 증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티는 일만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신을 열어두는 일이라는 것.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단순한 진실을 몸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이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인간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표지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가난한 인간의 이름으로


브리티시 시네마의 거장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시쳇말로 불순하고, 불손한 영화다. 불순하다는 것은 체제의 질서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불손하다는 것은 그 질서의 위계 앞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언제나 제도의 틈에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왔다. 이번 영화는 그가 남긴 어떤 작품보다도 직설적이면서 동시에 복합적인 여운을 남긴다.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혼란스러워진다. 이 영화는 비관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체제의 냉혹함을 고발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21세기 자본주의 영국 사회의 칙칙한 바닥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일자리는 줄어들고, 그만큼 복지 혜택을 요청하는 이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은 한정되어 있고, 당국은 그 부족을 조건이라는 이름으로 메워나간다. 심사표의 점수, 온라인 양식의 문항, 적격성의 여부가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복지 체계는 더 이상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행정의 절차로 전락한다. 그 결과 복지를 신청하는 사람도, 그 복지를 전달하는 공무원도 서로에게 닫힌다. 인간은 사라지고 시스템만 남는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수차례 전화기를 붙들고 기다리며 듣는 모차르트의 음악은, 제도의 무심함이 만들어낸 가장 완벽한 아이러니로 들린다.


그러나 이 음울한 초상은 결코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사회 역시 다르지 않다. 복지의 언어는 확장되었으나, 복지의 마음은 점점 닫혀간다. 가난은 여전히 수치로 계산되고,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증명해야만 존재할 수 있다. 공공의 손길은 냉정하고, 구호의 언어는 피로하다. 가장 가난한 이를 구하는 손길은 부유한 자들의 시혜가 아니다. 그보다 약간 덜 가난한 사람의 연대에서 비롯된다. 다니엘이 케이티를 돕는 것은 동정이 아니라 공감이다. 그는 말한다. “없는 내가, 더 없는 이를 돕는 것이 이상한가?” — 그 물음은 복지제도의 무능을 넘어선 인간적 윤리의 질문이다.


켄 로치는 이 평범한 남자의 분노를 영웅적 드라마로 포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작은 인간’의 분투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다니엘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무능한 자처럼 보이지만, 그가 지키려는 것은 사실상 인간의 존엄 그 자체다. 복지의 절차가 인간을 대상화할 때, 그는 주체로서 선언한다. “나는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요구한다.” 이 문장은 영화의 핵심이며, 동시에 오늘의 시대를 향한 선언문이다. 그는 권력을 향해 싸우는 혁명가가 아니다. 일상의 언어로 존엄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포스터. 영화사 진진 제공


이 영화가 불손한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켄 로치는 체제의 논리에 순응하지 않으며, 그 냉혹한 합리성을 미학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언제나 ‘존엄의 얼굴’을 탐색한다. 푸드뱅크에서 케이티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통조림을 뜯는 장면, 그 앞에서 다니엘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감싸 안는 장면은 그 어떤 대사보다 강렬하다. 인간의 존엄은 그 연약함 속에서 피어난다. 그것은 비극의 장면이자, 동시에 인간다움의 복원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제도적 비판을 넘어선다. 인간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다시 윤리의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난은 사회적 낙인이지만, 켄 로치는 그 낙인을 연대의 표지로 변환시킨다.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는 순간, 가난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됨의 조건이 된다. 이 연대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함께 줄을 서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아이들을 위해 작은 목재를 다듬는 일처럼 조용하고 느리다. 하지만 그 느린 손길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진짜 힘이다.


결국 켄 로치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아직 인간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영화 속 다니엘을 넘어, 지금 이 땅의 우리에게도 닿는다. 가난이 더 이상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면, 연대는 도덕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어야 한다. 다니엘의 외침은 그저 복지국가를 향한 요구가 아니라, 인간의 이름으로 세계를 다시 불러내는 행위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체제의 균열 속에서 발견한 한 인간의 초상이다. 그 초상은 비관과 희망 사이를 오가며, 결국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켄 로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다니엘의 손끝에 남은 나무의 온기,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마지막 호흡을 우리에게 남긴다. 그 온기가 식지 않는 한, 이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공동선의 잊힌 자리, 가난의 윤리학


영화를 보며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공동선(共同善)’. 그 말은 오랫동안 교리서의 문장 속에서만 머물러 있던, 이제는 낯선 윤리의 언어였다. 대학 시절, 나는 성당에서 중·고등부 교리교사를 맡은 적이 있다. 겨우 몇 살 더 많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이야기하려 들던 시기였다. 그때의 나는 세상의 복잡한 부조리를 잘 알지 못했고, 다만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고3 수험생들과 함께 시골 수도원으로 피정을 갔다. 눈이 소복이 내리던 밤,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최대로’라는 이름의 단순한 팀플레이 게임을 진행했다.


규칙은 이랬다. 여러 팀이 O와 X 중 하나를 택하면, 소수의 선택을 한 팀이 점수를 얻는다. 라운드 중간에는 모두가 O를 내면 모두에게 점수가 주어지는 ‘합의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합의는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었다. 학생들은 놀라우리만치 진지하게 임했다. 서로 속이고, 계산하고, 이기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결과는 예측대로였다. 단 한 팀도 끝까지 ‘모두의 이익’을 선택하지 않았다. 게임이 끝난 뒤 나는 규칙의 비밀을 밝혔다. 어떠한 전략으로도 ‘모두가 O를 내었을 때’만큼의 총이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의 이익’이라는 문장에서 가장 간과되는 단어는 ‘이익’이 아니라 ‘우리’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아이들은 ‘우리 조’만을 생각했다. ‘우리 모두’를 상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전체로 확장할 수 있었다면, 게임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공동선의 문제였다. 나의 선과 우리의 선이 충돌할 때, 인간은 얼마나 쉽게 후자를 포기하는가.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던지는 질문도 이와 닮아 있다. 다니엘은 결코 이상적인 영웅이 아니다. 그는 평생 일한 목수이며, 병으로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된 평범한 시민이다. 그러나 국가의 복지제도는 그를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격심사와 신청 절차라는 이름의 벽을 세워 그를 배제한다. 인간의 고통은 숫자와 데이터로 환원되고, 연민의 언어는 관료의 매뉴얼로 대체된다. 이 체제에서 공동선은 더 이상 윤리적 명제가 아니라 비효율적 감상으로 취급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의 선은 흔히 전체주의나 사회주의적 발상으로 오독된다. “모두가 잘살자”는 말은 “모두가 똑같이 가난하자”는 말로 왜곡된다. 그래서 가진 자들은 공동선을 불순한 정치 이념으로 취급하고, 가난을 개인의 실패로 돌린다. 그들의 논리는 간명하다. “나는 열심히 살았고, 그러니 너희의 가난은 너희 책임이다.” 하지만 이 논리에는 구조의 폭력과 운의 불평등이 지워져 있다. 노력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명패가 되었을까.


공동선이란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다. 그것은 단순히 나누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다. 영화 속 다니엘이 보여준 것은 바로 그 관계의 복원이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한 케이티를 돕는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연대의 몸짓이다.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 존재의 무게를 함께 감당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그 순간, 다니엘은 단지 복지 수혜자가 아니라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윤리적 주체가 된다.


공동선의 의미는 바로 여기 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내미는 손, 그 손이 닿는 찰나의 온기가 사회를 다시 묶는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효율과 경쟁의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우리 모두’라는 말의 윤리적 울림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공동선은 이념이 아니라 감각이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할 수 있는 감각, 그 감각이 남아 있는 한 사회는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 잊힌 감각을 되살린다. 제도의 실패와 인간의 연대를 병치시키며,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사회에서 ‘우리’란 누구인가.” 다니엘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선언이다. 그의 목소리는 제도의 언어로는 읽히지 않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분명히 들린다. “나는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요구한다.” 그것은 복지의 요구가 아니라, 공동선의 회복을 향한 외침이다.


결국, 함께 잘 살아보자는 말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오독된다면, 이미 그것은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가 무너진 증거일 것이다. 공동선은 이념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우리의 이름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지상 재화와 공동선의 손길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현대 교회가 현세와 인간의 삶 속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혁신적인 지침을 선언한 문헌으로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한 사목헌장을 꼽는다. 이 문헌은 교회와 사회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구성원에게 부과되는 책임과 의무를 분명히 한다. 공동의 선, 불변의 정의, 그리고 인간 존재의 존엄을 논하는 이 선언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현세에서의 실천적 삶의 지침이 된다.


사목헌장은 경제생활과 재화에 대해서도 단호한 언어로 말한다. 69항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지상 재화의 목적(69항) :
경제생활과 관련해서 명심해야 하는 또 한 가지는 지상 재화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창조된 재화는 사랑을 동반하는 정의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풍부히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소유권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근본적으로 지상 재화는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이 원칙은 늘 새겨야 한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을 제시한다.

하나는 자신의 재물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재화의 충분한 몫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 사람들은 쓰고 남은 것만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말고 참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할 의무가 있고
△ 극도의 궁핍 속에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게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득할 권리가 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교회의 사목헌장」, 69항, 1962.


이 선언을 읽으면, 극도의 궁핍에 처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재산에서 자신의 생존과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순간적으로 이것을 급진적 사회주의 선언처럼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라는 개념으로 그 의미를 되돌려 보면, 이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타당한 주장이다. 세상의 재화는 결코 일부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적 정의로 접근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부자라 부르는 이들의 소유는 결국 모든 이의 경제활동과 노동에 기초한다. 누군가의 노력과 시간, 누군가의 존재가 만들어낸 가치에 대한 결과물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될 뿐이다. 이 공동의 선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배분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은 단순한 불평등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근본적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미지 출처 = Pxhere)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두 일상에서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재화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존재로 가능했음에도, 필요할 때 그것을 나누지 못하거나 외면하곤 한다. 그 순간, 우리는 공동체의 윤리적 규범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사목헌장은 이러한 현실을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지적한다.


사목헌장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나눔이 아니다. ‘쓰고 남은 것’을 건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필요한 이를 향해 손을 내미는 의무다. 그리고 극도의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 선언은 단순히 재화의 분배를 넘어, 공동체를 향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일깨운다. 경제적 구조 속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의 존엄을 지켜야 하는 이유,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서로의 삶을 지탱할 의무를 명료하게 밝힌다.


결국 사목헌장은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는 재화와 부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단순한 소유의 축적인가, 아니면 모두를 향한 정의와 사랑인가. 지상 재화의 목적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그리고 ‘우리 모두’라는 감각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만, 비로소 인간적 정의와 공동선이 현실로 펼쳐질 수 있다. 스스로의 존재와 타인의 필요를 동시에 고려하는 삶, 그 윤리적 선언이 바로 1962년 사목헌장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약한 고리의 힘과 가난한 연대의 미학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는 사회의 중심이 아닌 가장 약한 고리에서 시작된다. 서사는 화려한 극적 사건이 아니라, 한 노인의 숨결과 거친 호흡에서 출발한다. 목수로 평생을 살아온 그는 심장병으로 일을 그만두고, 국가 복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곧 비인간적 행정 절차와 시스템의 언어에 가로막히며, 존엄이 서서히 침식되는 과정으로 내던져진다. 영화가 보여주는 가난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인간이 가난해지는 구조를 폭로한다.


이 세계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비합리적 폭력이 행사되는 체제의 초상이다. 복지 제도는 본래 인간 존엄을 지키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인간을 기계적 절차로 분류하고, 신청서와 증빙자료로 존재를 증명하게 만든다. 다니엘이 행정직원과의 통화 중 “나는 숫자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칠 때, 그 외침은 분노가 아니라 인간성 자체를 되찾으려는 미학적 저항의 언어로 울린다. 로치는 정치적 메시지를 넘어선다. 현실의 추함 속에서도 인간 존엄의 마지막 불빛을 꺼뜨리지 않는 미학적 윤리를 구축한다.


다니엘과 싱글맘 케이티의 관계는 영화의 심장이다. 혈연도, 제도적 관계도 아닌, 오직 인간으로서의 공감으로 연결된다. 두 사람의 연대는 체제의 언어가 아닌 감정의 언어, 권리가 아닌 서로를 돌보는 행위로 성립한다. 밥 한 그릇을 나누고, 아이를 돌보고, 눈물을 닦아주는 일상의 행위 속에서 체제가 부정한 인간성의 잔여가 되살아난다. 이 연대는 거창한 정치적 구호나 조직적 운동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약한 자들의 연대’로 형상화된다.


영화의 사회미학적 힘은 약함을 중심 가치로 전도한다는 데 있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 강함과 효율, 경쟁은 윤리와 미학의 척도였으나, 다니엘은 ‘무능한 자’, ‘비효율적 자’로 분류된다. 디지털 기술에 익숙하지 않고 온라인 서류 작성조차 힘든 그의 모습은 사회적 약점처럼 보이지만, 그 결핍이 바로 인간적 온기를 발생시키는 틈이 된다. 강자의 세계가 효율로 고립을 생산한다면, 약자의 세계는 결핍을 통해 관계를 생성한다.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타자와 만나는 문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약한 고리의 힘’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의 인식에서 비롯된다. 다니엘은 사회적 약자지만, 그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가장 인간다운 존엄을 드러낸다. 그의 흔적은 “나는 시민으로서 내 권리를 요구한다”라는 선언으로 남는다.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예술적 언어, 존재를 증명하는 마지막 언어로 울린다. 로치가 택한 미학의 출발점이 여기에 있다.


사회미학적 관점에서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가난을 낭만화하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자들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아름다움을 포착한다. 결핍이 아니라, 타자를 향한 감각의 예민함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이다. 케이티가 푸드뱅크에서 통조림을 뜯는 장면은 굶주림의 절규이자 존엄이 짓밟히는 순간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절망 속에서 그녀를 품는다. 그 장면은 약한 자를 감싸는 연대의 미학을 상징한다.


영화는 또한 노동의 존엄을 선언한다. 다니엘의 손은 노동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어왔다. 그 관계가 끊기는 순간,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된다. 노동이 인간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연결하는 통로라면, 노동의 상실은 곧 존재의 상실이다. 그러나 로치는 그 절망의 자리에 공동체적 연대를 놓는다. 케이티와 주변 이웃들이 보여주는 소소한 돌봄은, 노동이 사라진 시대에도 인간이 서로를 ‘일구어낼 수 있다’는 희망의 징후다.


결국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인간이 서로의 세계를 붙잡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약한 고리들은 무력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체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사회는 언제나 약한 고리의 상태로 정의된다. 그들의 삶이 존중받는 사회만이 진정한 문명이다. 켄 로치의 카메라는 연약한 인간들의 얼굴을 응시하며 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인간으로 대하고 있는가.” 침묵, 눈빛, 손의 떨림, 부서진 벽지의 질감까지 — 모든 디테일이 ‘가난의 미학’을 넘어 ‘존엄의 미학’으로 승화된다. 다니엘 블레이크의 초상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강함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견디는 힘이다. 그 약한 고리가 세상을 다시 연결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가난과 연대, 그리고 정의의 미학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는 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도드라진 울림을 남겼다. 같은 해 개봉한 〈곡성〉을 볼 때만 해도 결말에서 내 머리를 이처럼 치는 영화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었다. 그러나 몇 달 지나지 않아 그 이야기를 번복하게 되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결말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내게 가장 큰 충격 중 하나가 되었다.


희망의 화살과 현실의 철퇴 사이, 다니엘의 몸이 남긴 침묵은 관객의 숨을 조이면서, 연대와 신뢰가 얼마나 연약하게 맺어지는지, 그리고 한순간의 부재로 얼마나 깊은 균열을 드러내는지 증명한다. 영화는 결국, 인간의 기대와 현실의 무게가 겹치는 지점을, 관객에게 느리지만 잔혹하게 체감시킨다.


갑갑한 일상의 옥죄임 속에서 서로의 연대로 버티던 다니엘은, 마침내 좋은 변호사를 만나 행정 소송의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다. 모든 것이 희망을 가리키는 화살표처럼 보이던 순간, 영화는 현실이라는 무거운 철퇴로 그 근거 없는 램프를 산산조각 낸다. 법원 기일, 화장실 구석에서 쓰러진 그의 몸을 카메라는 감정 없이 담는다. 등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들 사이로, 연대는 보이지 않는 틈으로 흘러 사라지고, 상실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함께 버티던 세계의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당시 영화관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다. 극장 조명이 환하게 들어오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거대 서사가 없고, 엄청난 사건이 진행되지 않는 소위 ‘좌파 노장 감독’의 느릿느릿하면서도 또박또박한 일기 같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처음에는 충격과 부끄러움 때문에 리뷰를 쉽게 쓸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경영자총연합회 회장의 영화 리뷰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글은 나를 분노하게 했고, 동시에 깨닫게 했다. 지금 이 시대, 나와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이 얼마나 굴절되어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보니, 이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돕는 손은 부유한 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조금 덜 가난한 사람이 그 역할을 맡는다. 가진 자들이 문제인 것은,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만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알량한 봉사활동과 나눔으로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는 태도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정의는 이미 훼손된 세상의 가치 틀 안에서 정의를 위장하는 불의에 불과하다. 불의를 인지하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혁명은 여전히 필요하며 광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날이 많이 추워졌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깊어진다. 가난한 사람이 늘어간다는 것은 곧 이 세상이 가난해진다는 방증이다. 그것은 ‘우리 이익의 총합’과 직결된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는 선택이 아닌 권리이며 필수다. 이 연대를 불편해하거나, 불법적 일탈로 매도하는 일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결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나 가난에 빠질 위기를 맞을 수 있고, 특히 변동이 예측을 능가하는 극도의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그 가능성은 더욱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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