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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잃은 인간들 - 공포 콘텐츠의 문화사회학

넷플릭스 시리즈 <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로 보는 악의 상품화

by 박 스테파노

인간의 원초적 감정 중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두려움이다. 흔히 ‘공포(恐怖)’라 부르는 이 감정은 개인의 내면에서 벗어나 사회적 언어로 굳어진다. 여기서 ‘포(怖)’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 않지만, ‘포복(怖伏)’이라는 말로 그 잔향을 남긴다. ‘무서워 땅에 엎드린다’는 뜻의 이 단어는, 나를 위협하는 외부의 두려움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자세를 드러낸다.


“공포가 없으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해할 필요도, 맞서 싸울 필요도 없다. 공포는 지금의 인간 문명을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기도 하다.”
― 김봉석, 『호러의 모든 것』


이 말처럼, ‘공포’를 중심축으로 삼은 호러 장르는 인간의 본능적 감정을 자극하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다. 다만 ‘인간 문명을 만들어 낸 중요한 기점’이라는 평론가의 정의는 절반의 사유에 그친다. 문명을 견인한 두려움은 감각의 호출이 아니라, 실재하는 위협에 대한 반사적 대응이었으며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서의 공포였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너무나 익숙한 누군가의 뒷얼굴에서 발견되는 낯섦이다. 그 무너짐의 감각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공포에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빚는 이들에게 공포는 단순한 감정의 재현이 아니라,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게 하는 서사적 도구가 된다.


영화 각본가 크리스틴 콘래드는 『넷플릭스처럼 쓴다: SF·판타지·공포·서스펜스』에서 ‘공포심을 만드는 열한 가지 법칙’을 제시한다. 고통, 죽음, 흉측한 외모, 복수, 악의 세력, 상실, 유기 혹은 고립, 미지의 존재, 지옥, 인간으로서의 한계, 인간 내면의 사악함. 그의 분류는 그럴듯하지만 진부하다. 공포는 이와 같은 소재만으로 생성되지 않는다. 그 감정이 발현되는 뒤편에는 구조와 시스템이 작동한다. 공포를 증폭시키는 것은 개인의 심리만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낸 어둠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공포란 무엇인가? AI Sora


그렇다면 공포란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의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대답은 다양할 수 있으나, 그 근본적 양태는 하나로 수렴된다. ‘해결 불가능의 인지’. 아무리 애써도 도달할 수 없는 벽, 그 무력한 인식이 현실적 공포의 원천이다. 사회와 국가, 대중과 타인은 이 공포의 내면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기폭 장치로 작용한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호러가 하나의 문화로 정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진과 홍수, 화산 폭발 같은 불가항력의 자연재해를 일상적으로 경험한 민족은,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세계의 감각을 내면화했다. 해결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미 무너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잔해 속의 진실을 응시하는 것이다. 다카하시 도시오가 말했듯, “붕괴한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호러 장르의 근원적 태도다.



악인들의 열전, 넷플릭스 범죄 실화 시리즈


넷플릭스가 영상 서사 콘텐츠의 주도권을 쥔 이유를 단순히 자본력의 결과로만 해석하는 것은 피상적이다. 그들의 진정한 힘은 낡은 사고의 체계를 뒤집고, 그것을 콘텐츠와 플랫폼의 구조 속으로 전이시키는 능력에 있다. 넷플릭스는 한 번의 발상 전환으로 멈추지 않는다. 그 전환된 사고를 생태계 전체로 확산시켜, ‘오리지널’이라는 이름 아래 고유한 문화적 문법을 구축한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것은 ‘범죄 실화의 악인들’을 일종의 셀럽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넷플릭스는 실재했던 강력 사건의 범죄자들을 세 가지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첫째는 수사기록과 미디어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회고 다큐멘터리, 둘째는 범인의 육성 인터뷰나 오디오 조서를 중심으로 한 ‘테이프 시리즈’, 셋째는 실제 사건을 극화한 재연극 형태의 ‘괴물 시리즈’다. 테드 번디, 제프리 다머, 찰리 맨슨, 존 웨인 게이시, 메넨데즈 형제, 에드 게인 등 미국 범죄사의 대표적인 악인들은 이 콘텐츠의 중심 인물들로 소환된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소스로 여러 형식의 콘텐츠로 확장되며, 플랫폼의 클릭률과 구독 연장을 유도한다.


이 현상을 단순히 자극적 콘텐츠의 인기로 치부할 수는 없다. 넷플릭스식 범죄 콘텐츠의 성행은 현대인의 불안 구조, 윤리 감각의 전도, 그리고 현실 감각의 퇴행이 맞물린 결과다. 불안의 서사화는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더 이상 일시적 정서가 아니라, 경제적 생존과 관계의 불확실성, 기술 가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상시적 기후가 되었다. 범죄 다큐멘터리는 이 불안을 외부의 악으로 가시화한다. 관객은 범죄자의 일탈을 보며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다.”라는 구분을 세우고, 그 경계 위에서 일시적 안도감을 얻는다. 그러나 바로 그 안도감이 불안을 다시 재생산한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형식은 이 불안을 정교한 형식미로 포장한다. ‘사건의 재현’은 현실을 복원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불안을 서사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관객은 통제 불가능한 현실을 ‘이야기 가능한 현실’로 바꾸는 의식을 수행하며 일시적 안정감을 얻는다. 그러나 그 통제의 욕망 자체가 불안의 새로운 서사를 낳는다.


그 결과, 감정은 외주화된다. 타인의 고통을 매개로 자신을 감각하는 구조가 자리 잡는다. 실화 범죄 콘텐츠는 타인의 참상을 관객의 정서적 자극으로 변환시킨다. 이때의 공감은 실제의 감응이 아니라 감각의 소비다. 슬픔과 분노, 혐오조차 미디어가 설계한 감정의 시퀀스를 따라 경험된다. 인간의 비극은 콘텐츠 포맷 안에서 반복 재연되며, 우리는 그 안에서 감정의 사용법을 학습한다.


테드 번디에 대한 두가지 콘텐츠. <살인을 말하다: 테드 번드 테이프>, <나는 악마를 사랑했다>. 넷플릭스 제공


이러한 감각의 소비 속에서 윤리적 감응은 점점 희미해진다.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사건의 거리 안에서만 인식하고, 그 거리 두기를 전제한 공감의 의례를 수행한다. 범죄의 현실은 그렇게 감정의 외주화 속에서 소비된다. 넷플릭스의 재연물들은 실제 사건을 다루지만, 구성은 극영화와 다르지 않다. 다큐와 픽션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관객은 ‘사실’을 보기보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를 본다. 현실은 점차 극화된 이미지의 형태로만 감각된다.


이것은 영상기법의 진화가 아니라, 현실 감각의 구조적 변형이다. 인간은 이제 현실을 직접 경험하기보다 매개된 이미지로 ‘무엇이 실제인가’를 판단한다. 범죄 서사는 그 경계를 실험하며, 불안을 감각의 언어로 번역하는 문화적 장치가 된다. 공포는 통제 가능한 이야기로 가공되고, 현실은 그 가공된 이미지 안에서만 존재한다.


결국, 범죄 재연물의 성행은 인간이 불안을 잊기 위해 불안을 소비하는 사회의 자화상이다. 이 소비는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다.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요구하며, 콘텐츠 산업은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공포의 형식을 만들어낸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공포를 소비하는 인간의 아이러니가, 오늘의 넷플릭스 화면 위에서 가장 선명히 빛난다.



호러 장르의 바이블, 에드 게인 이야기


최근 스트리밍을 시작한 재연극 시리즈 <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실화 기반 호러의 경계를 시험한다. 주인공 에드워드 게인(Edward Gein)은 미국 범죄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가운데 하나다. 도굴꾼이자 연쇄살인범으로 불린 그는, 무엇보다 인간의 신체를 일상용품으로 만들었던 엽기적 행각으로 대중문화의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를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 이야기를 기이한 타자의 서사로 밀어내고 만다.


1906년 미국 위스콘신 주 플레인필드의 외딴 마을에서 태어난 게인은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와 광신적 신앙을 가진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그에게 “여자는 악의 근원이며, 성적 욕망은 죄악”이라 가르쳤다. 신앙의 이름 아래 시행된 이 교육은 사실상 통제와 금욕의 이데올로기였다. 그는 학교에서도 위축된 아이로 남았고, 유일한 대화 상대는 어머니뿐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마저 죽자, 그는 세계와의 모든 연결을 상실했다. 이후 그의 세계는 점점 무덤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밤마다 공동묘지를 찾아 무덤을 파헤쳤다. 시체를 꺼내 해부하고, 여성의 피부와 뼈를 이용해 의자와 전등갓, 그릇을 만들었다. 그의 행위는 죽은 어머니의 신체를 복원하려는 강박과 여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동일시 욕망이 얽힌 병적 의식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여성의 피부로 만든 외피를 뒤집어쓰고 달빛 아래서 북을 두드리며 춤을 췄다. 그 장면은 단지 광기의 표정이 아니라, 억압과 금욕이 뒤틀려 폭발한 왜곡된 욕망의 의례였다.


1954년 그는 술집 여주인 메리 호건을, 1957년에는 철물점 주인 버니스 워든을 살해했다. 두 번째 사건이 발각된 후 경찰이 그의 집을 수색하며 지옥의 공간을 목격했다. 인체 일부와 절단된 머리, 인간 가죽으로 만든 가구, 냉장고 속 장기, 여성의 신체 부위를 모은 상자. 그러나 수사 결과 실제 살인 피해자는 두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그가 도굴한 시신들이었다.


체포된 그는 정신이상 판정을 받았고, 종신 수감 대신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서 그는 순종적이고 조용한 환자로 지냈으며, 1984년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세상은 그를 ‘살인마’로 규정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곧 대중의 호기심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팬들이 편지를 보내고 면회를 요청했으며, 그의 무덤은 수차례 훼손당했다. 결국 묘비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영화 <괴물: 에드 게인 이야기>. 넷플릭스 제공


에드 게인의 이야기는 이후 수많은 영화의 원형적 공포로 변주되었다. 히치콕의 <싸이코>(1960), 토브 후퍼의 <텍사스 전기톱 학살>(1974), 조너선 드미의 <양들의 침묵>(1991) 등이 그 궤를 잇는다. 이 영화들의 살인자는 모두 ‘게인의 그림자’ 위에서 태어났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순하다. 괴물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에드는 인간적 유대가 완전히 끊긴 상태에서 자신이 금지당한 육체와 감정을 해부하며, 타인의 신체를 통해 자아를 복원하려 했다. 그것은 광기의 형식으로 드러난, 인간적 결핍의 극단이었다.


그가 남긴 잔혹함은 엽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종교적 도덕주의와 가부장적 억압이 욕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가를 보여주는 실험적 장면이다. 에드 게인은 범죄자이기 이전에, 문명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억압된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의 집은 살인의 현장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이 맞닿은 경계의 상징이었다.


이후 등장한 콘텐츠들이 가지는 묘한 매력은, 윤리적 금기와 감각적 쾌락이 공존한다는 데 있다. 살인과 일탈, 변태적 욕망이 전시되지만, 실화라는 명분 아래 그것은 정당화된다. 관객은 “나는 단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라고 말하며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면제된다. 그러나 이 앎의 명분은 사실 감각적 쾌락을 합리화하는 장치다. 공포의 시청은 윤리의 시뮬라크르로 작동한다.


현대의 대중은 범죄를 비판하는 동시에 그 서사에서 강렬한 생동을 얻는다. 그것은 죄의식이 제거된 윤리, 혹은 도덕적 방관 속에서의 감각적 향유다. 에드 게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그 경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괴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야말로, 그 괴물을 끝내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연출일지 모른다.



악의 산업화, 탈윤리의 시대에서의 미학


에드 게인의 사례는 단순한 범죄사가 아니라, 근대 이후 ‘악의 스펙터클화(spectacularization of evil)’가 어떻게 대중문화의 코드로 전환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 현상을 사유의 틀 안에서 읽어내면, 푸코의 규율권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지젝의 향유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벤야민의 아우라 붕괴 이후의 미학적 소비 구조가 서로 교차한다.


푸코의 관점에서 에드 게인은 사회가 정상성을 재규정하기 위해 시각화한 타자다. 그의 존재는 ‘괴물’이라는 명명 아래 봉인되지만, 그 봉인은 곧 사회 규율의 경계를 새로이 확인하게 만드는 의식의 장치다. 대중은 그를 ‘이해 불가능한 존재’로 소비하며, 동시에 자신이 ‘정상인’임을 무의식적으로 확인한다. 괴물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가 필요로 한 상징적 산물이다. 그의 인육 가공 행위는 근대 이후 인간의 신체가 산업과 미디어, 기술에 의해 얼마나 손쉽게 분절되고 가공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거울이었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simulation)’으로 본다면, 에드 게인은 더 이상 실재의 범죄자가 아니라 ‘재현의 주체’로 변환된 존재다. 그의 실존은 이미 <싸이코>, <양들의 침묵>, <텍사스 전기톱 학살> 속에서 무한히 복제되고 변주되며, ‘에드 게인적’이라는 표현은 이제 악의 원본이 아니라 복제의 스타일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의 실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드 게인이라는 이미지의 소비 구조를 알고 있을 뿐이다. 악은 실재의 사건이 아니라 하이퍼리얼한 쾌락의 코드로 작동한다. 이것이 곧 ‘악의 시뮬라시옹’이며, 현대 사회가 범죄의 공포가 아닌 재현의 쾌락을 탐닉하는 이유다.


슬라보 지젝의 분석에 따르면, 대중이 폭력과 악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에는 단순한 공포가 아닌 ‘향유(jouissance)’가 작용한다. 사람들은 도덕적 혐오를 표하면서도, 그 혐오의 대상을 통해 금지된 쾌락을 얻는다. 에드 게인의 범죄를 다룬 수많은 영화나 다큐멘터리는 비판의 형식을 띠지만, 실상은 관객에게 금기된 영역을 엿보는 스펙터클적 쾌감을 제공한다.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악의 소비는 도덕의 붕괴가 아니라 도덕을 가장한 향유의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했듯, 에드 게인의 실존적 비극은 기호적 복제의 흐름 속에서 아우라를 상실한다. 그의 살인은 공포의 실체가 아니라 반복 가능한 서사의 원형으로 전락하여,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가면, ‘버팔로 빌’의 의상, ‘노먼 베이츠’의 심리라는 기표로 재조합된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악을 경험하지 않고, 악을 소비한다. 윤리적 거리가 제거된 자리에 오직 악의 미학만이 남는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과 <양들의 침묵>. 볼텍스, 롯데시네마 제공


결국 에드 게인의 대중문화적 흡수는 악의 산업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범죄는 서사적 자원으로 상품화되고, 공포와 혐오, 도덕과 욕망이 결합된 감정경제의 회로 안에서 유통된다. 이는 단순한 호러 장르의 유행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간이 악을 윤리의 문제가 아닌 미학의 문제로 전환한 징후다.


오늘날 ‘공포가 문화 콘텐츠의 한 축이 되었다’는 현상은 장르의 확장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의 정서적 구조, 다시 말해 집단 감정의 지형이 공포를 매개로 재편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현대의 공포는 단지 ‘무섭다’는 감각의 서사가 아니라, 불안의 사회학이자 생존의 정치학이며, 감정의 경제학이 교차하는 상징적 장르로 기능하고 있다.



불안의 사회, 공포가 일상의 언어가 된 시대


현대 사회는 안전을 약속받은 듯 보이지만, 실은 언제나 불안이 상시화된 구조 안에 있다. 기후 위기, 전쟁의 영상, 감염병, 플랫폼 해고, AI의 침투, 타인의 무례, 익명의 폭력. 이 모든 것은 ‘위험이 개인화된 세계’의 단면이다. 개인은 더 이상 실체적 위협에 맞서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가능성의 위협을 계산하며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서 공포는 현실의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일상 감정에 내장된 구조이자, 감각의 기본값이다. 문화 콘텐츠가 공포를 주요 서사로 삼는 이유는 불안을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불안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재가공하기 위해서다. 공포는 현실의 불안을 대신 처리하는 감정적 시뮬레이션으로 작동한다.


두려움의 유통이 만들어낸 시장은 감정의 산업화를 촉진한다. 콘텐츠 산업은 오래전부터 감정을 자본의 재료로 삼았다. 공포는 그중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상품이다. 두려움은 즉각적이고 신체적 반응을 유발하며, 반복 소비가 가능하다. 이제 공포는 공포영화, 스릴러, 괴담 콘텐츠, 실시간 재난 스트리밍, 살인 다큐멘터리 등으로 분화되어 감정의 분업 체계 속에 편입되었다. 소비자는 공포를 통해 현실의 불안을 잠시 배출하고, 다음 자극을 기다린다. 이때의 공포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의 관리 기술이 된다. 공포 콘텐츠는 사회적 불안을 마취시키는 일종의 감정적 진통제 역할을 수행한다.


타인의 고통이 엔터테인먼트가 될 때, 공포의 윤리적 공백이 생긴다. 공포가 문화의 중심에 자리하면서, 타인의 피해가 미학적 대상으로 치환되는 현상도 두드러진다. 실존적 공포가 아니라, 타인의 죽음과 고통이 스펙터클로 재현될 때, 공포는 윤리의 자리를 빼앗는다. 실제 범죄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폭발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사회가 타인의 불행을 감각적 데이터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감각 구조 속에서 우리는 피해자 되기를 두려워하기보다, 그의 두려움을 경험하는 나 자신을 즐긴다. 이러한 감정의 반전이 현대 공포 콘텐츠의 가장 큰 역설이다 — 공포는 더 이상 공포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향유된다.


<싸이코>의 알프레드 히치콕. 게티이미지


‘보는 자’의 감시와 피로는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디지털 환경은 공포의 구조를 한층 미세하게 재편했다. 우리는 더 이상 공포의 장면을 직접 체험하지 않고, 끊임없이 관람한다. 누군가의 낙상, 폭행, 전쟁의 실황, 자살 예고, 재난 영상. 모든 것은 실시간으로 유통되며, 사람들은 그것을 공유하며 현실 감각을 회복하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그러나 그 감각은 실재의 체험이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서 소비되는 타인의 공포다. 공포는 시각적 피로와 결합하며, 감정의 무감각을 낳는다. 공포를 너무 자주 경험하는 시대, 우리는 오히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결국 공포가 문화 콘텐츠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것은, 이 시대가 ‘두려움 이후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공포를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는 사회는 진짜 공포를 감당할 수 없게 한다. 공포를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감정을 방출하며, 생존의 긴장을 조절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피로와 무감각이 쌓인다. 공포의 상품화는 감정의 탈윤리를 낳고, 탈윤리는 다시 무감각한 사회를 양산한다. 그 결과 공포는 살아 있음의 감각을 대체하는 자극의 형식으로 전락한다. 오늘날 세태는 그 무감각을 정당화하며 작동한다. 불안은 일상이 되고, 두려움은 오락이 되며, 인간은 감정의 과잉 속에서 감정을 잃어간다.


요컨대, 공포가 문화 콘텐츠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람들이 무서운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진짜로 두려워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공포는 실재의 감정이 아니라, 실재를 대신하는 감정의 형식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두려움을 원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미 두려움을 잃은 존재로 살아간다.



공포의 감각화와 잃어버린 떨림


공포는 한때 인간이 세계와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감정이었다. 그것은 생존의 본능이자, 동시에 존재의 불가해함을 자각하게 하는 경험이었다. 밤의 정적 속에서 낯선 기척을 들을 때, 사람은 자신의 숨소리를 의식한다. 그 숨은 살아 있음의 징후이자, 세계와의 불화가 몸 안에서 떨림으로 번역된 흔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포는 그 떨림을 잃었다. 공포는 더 이상 체험이 아니라, 감각의 기획된 소비가 되었다.


이제 공포는 스크린과 플랫폼 속에서 안전하게 관리된다. 호러 장르는 그 체계의 완성된 형식이다. 조명과 음향, 편집의 리듬은 관객의 놀람을 미리 계산한다. 사람들은 자극의 순서를 알면서도 그 예측된 순간을 즐긴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어둠 속에서 손을 움켜쥔 채 비명을 삼키며, 끝내 살아남는 자의 쾌감을 확인한다. 그들이 체험하는 것은 죽음의 리허설이지, 죽음의 실감이 아니다. 공포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반응의 패턴이다.


이 감각적 공포는 사유의 여백을 허락하지 않는다. 공포가 본래 지니던 존재론적 깊이, 즉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느끼는 불가항력의 감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즉각적이고 소모적인 감각만이 남는다. 공포의 경험은 사유의 계기를 제공하지 않고, 감각의 리듬 속에 흡수되어 끝나버린다. 그렇게 공포는 불안의 근원을 드러내는 감정이 아니라, 불안을 잊게 하는 오락으로 전락한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자본의 논리가 있다. 자본은 인간의 감정을 언제나 상품화해왔다. 슬픔은 멜로드라마로, 분노는 액션으로, 사랑은 로맨스로, 그리고 공포는 호러로 가공된다. 감정이 상품이 되는 순간, 윤리적 긴장은 사라진다. 인간의 두려움이 팔리고 소비되는 동안, 우리는 그 두려움의 기원을 잊는다. 공포는 타자나 죽음, 혹은 세계의 무심함을 마주하는 윤리적 사건이 아니라, 가격이 매겨진 체험이 된다.


감각으로 포획된 공포는 ‘안전한 체험’이라는 기만을 통해 현실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우리는 스크린 속 괴물을 보며 현실의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스릴러 속 자극에 몰두하며 사회적 공포의 구조를 잊는다. 감정의 안전화는 곧 윤리적 무감각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을 체험하는 몸이 더 이상 존재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공포의 감각화는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의 깊이를 단절시키고, 현실의 악을 비판하는 능력마저 마비시킨다.



공포의 진정한 의미는 외부의 폭력보다 내부의 진동에 있다. 그것은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는 통로이자, 타자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응의 문이었다. 그러나 감각의 소비가 일상이 된 사회에서 그 문은 닫힌다. 사람들은 공포를 체험하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안전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한다. 공포의 감상은 현실의 공포를 대체하며, 우리는 세계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공포를 다시 사유하려면, 그것을 감각이 아닌 관계의 차원에서 회복해야 한다. 두려움은 단순한 신체 반응이 아니라, 타자의 침입을 받아들이는 윤리적 감정이다. 인간은 두려움을 통해 타자와 세계의 불가해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완전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야말로 공포의 철학적 힘이다. 감각의 쾌락으로 환원된 공포는 이 힘을 제거하고, 자극의 재현만을 남긴다. 우리는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서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가.


공포의 감각화는 인간이 스스로의 불안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현실의 공포를 재현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현실의 공포를 잊게 만드는 장치다. 감각적 자극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 생은 타자의 죽음을 감지하지 못하는 무감한 생이다. 공포가 다시 철학이 되려면, 그것은 다시 떨림을 가져야 한다. 그 떨림은 눈앞의 피나 절규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침묵의 울림이다. 그 울림이 사라진 시대에, 공포는 더 이상 우리를 인간답게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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