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극의 외피와 무거운 이념의 불화
최근 스레드(Treads)를 시작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기보다, 어쩌면 내년의 회복과 다시 걷는 행보를 위한 준비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글의 흐름을 다시 깨우기 위해 낯선 세계의 문을 두드린 셈이다. 첫인상은 오래전 트위터의 잔상과 닮아 있었다. 다만 140자가 아닌 500자로 확장된 문장들이 그 사이의 숨결을 조금 더 여유롭게 풀어내고 있었고, 알고리즘은 비슷한 관심사로 묶인 이야기들을 조용히 교차시켰다. 무수한 교집합의 피드 속에서 나는 새로운 시대의 감각, 즉 ‘유행과 여론의 결’을 체감하고 있었다. 스레드는 단순히 글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비추는 민감한 감응체처럼 느껴졌다.
최근 며칠 동안 피드를 장식한 이름들은 흥미로웠다. 노벨문학상 수상작 「사탄탱고」, 브런치 10주년 팝업 행사, 그리고 넷플릭스에서 새로 공개된 영화 <굿뉴스>. 특히 <굿뉴스>는 호평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근원은 단 하나, ‘재미’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정말 재미있다”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고, 한국과 일본의 인지도 높은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 신선하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언어들은 좀처럼 확장되지 않았다. 찬탄은 넘쳤으나 사유의 결은 희박했다.
그 공백이 궁금해져 넷플릭스를 열었다. 두 시간 남짓의 상영이 끝난 후, 대중이 왜 그렇게 재미를 강조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그것은 이야기의 균열을 재미라는 포장지로 덮으려는 다소 고단한 시도의 결과였다. 수많은 구멍을 웃음과 과잉된 장면으로 메우려는 궁여지책의 영화. 그렇게 두 시간 남짓의 시간은 비어 있는 서사의 공간 위에 떠다니는 화려한 파편들의 향연으로 흘러갔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분명하다. 뛰어난 배우들의 캐스팅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리듬이다. 이병헌 감독의 수다 코미디처럼 끝없이 밀어붙이는 말맛은 아니지만, 영화 곳곳에는 방백처럼 튀어나오는 대사들이 있다. 갑작스레 등장하는 인물과 상황이 낯선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의 효과로 읽힌다. 그러나 문제는 이 장점이 곧 단점으로 전이된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존재감과 코미디의 장식이 모든 결함을 덮어버린다. 과잉된 연극적 구성, 불필요한 설정, 산만한 시선의 전환. 이 모든 것이 감독의 전작들에서 이미 드러난 약점을 다시 호출하는 자동 장치처럼 작동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아쉬움은 ‘난삽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빠른 편집, 만화적 색감, 과장된 액션, 현란한 전환 등 감독의 스타일이 한껏 부풀려져 있지만, 그 형식들이 서사를 견인하지 못한다. 이야기의 개연은 자주 비약하고, 빈약한 구조를 메우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요소들이 끼워 넣어진다. 항공기 하이재킹과 인질극의 클리셰, 적군파와 독재 시대의 단면, 일본 소극운동에서 비롯한 소동극의 익숙한 도식, 그리고 메타적 연출을 흉내 내는 나레이션과 방백들. 이 모든 조각은 하나의 내러티브로 엮이지 못한 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의 나열로 남는다. 영화의 호흡은 분절되고, 관객의 몰입은 점점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평으로만 마무리하기엔 망설임이 있다. 이 어질한 장면들 속에서도 감독이 건네려 했던 언어의 흔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혼란한 시대를 향한 풍자일 것이다. 진지함과 농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뒤섞어 오늘의 사회를 조롱하고 싶었던 욕망. 그러나 그 욕망은 끝내 형식의 소음 속에 묻혀 버린다.
결국 나는 이 영화의 난맥 속에서 스레드의 짧은 피드를 떠올렸다. 조각난 문장들이 서로의 의미를 이어붙이며 하나의 감각을 구성하듯, 영화 또한 수많은 파편들로 지금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다만 그 말하기의 방식이 너무 조급했고, 너무 과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실패 속에서 지금 시대의 리듬을 본다. 어지럽고, 빠르고, 과하게 말하려는 욕망.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현재의 문법이 아닐까.
사건의 변용과 설명의 과잉
영화는 실화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영감’을 받았다고 서두에 밝힌다.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하든, 그로부터 영감을 받든, 이야기의 기점이 사건적 현실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차이는 크지 않다. 다만 그 변용의 폭과 상상력의 결이 다를 뿐이다. 영화 <굿뉴스>는 1970년 ‘요도호 납치 사건’으로 알려진 일본항공 351기 납치 사건을 중심에 둔다. 당시 일본항공(JAL)의 보잉 727기는 일본의 유명 강 이름을 기체 별칭으로 삼았는데, 해당 항공편은 ‘요도가와(淀川)’에서 이름을 따왔다.
1970년, 공산주의 동맹 적군파(赤軍派)로 불리던 일본 신좌파 활동가 9명이 승객 129명을 태운 민항기를 하네다 국제공항에서 출발시켜 후쿠오카로 향하던 중 납치해 평양으로 향하려 한 사건이었다. 영화는 이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 상상력을 덧입혀 서사를 구축한다. 그래서 초반부터 일종의 ‘양해’가 내레이션을 통해 제시된다.
“진실은 간혹 달의 뒷면에 존재한다. 그렇다고 달의 앞면이 거짓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 트루먼 셰이디.”
이 말은 모두 허구다. 그럴듯한 아포리즘도, 인용된 인물도 실존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초반에 등장하는 미지의 인물 ‘아무개’(설경구)의 첫 대사이자, 곧 영화가 이 뜬금없고 근거 없는 인물의 지휘 아래 전개될 것임을 예고하는 장치다. 그리고 이 진짜같은 거짓말은 극의 후반부에서도 반복되어, 그 허구의 실체를 드러낸다. 영화가 이 아포리즘을 서두와 결미에 병치한 이유는 분명하다. 서사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일종의 길잡이로, 감독이 과잉된 이야기를 한데 묶어두려는 시도다.
역사적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으나, 전체적인 서사의 맥은 실제 사건에 근접한다. 그러나 요도호 사건은 오랜 시간 기밀로 묶여 사실의 공백이 많다. 영화는 이 공백을 메우려 지나치게 설명한다. 적군파가 누구인지, 당시 남북의 대치와 경제 경쟁이 어떠했는지, 이들을 이중 납치하는 작전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복잡한지를 점프컷, 모자이크, 페이드백, 친절한 내레이션 등으로 삽입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 영화의 결정적 패착이다.
지금의 시대는 이미 정보의 과잉으로 규정된다. 요도호 사건은 수차례 탐사 프로그램과 역사 회고물에 등장해 왔다. 관객은 사후 검색을 통해 충분히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설명이 아니라 여백을 남겨야 했다. 관객이 숨을 고르고 사유를 머물게 할 틈이 필요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 여백을 두려워한다. 개연성의 틈을 내레이션과 방백으로 메우려 안간힘을 쓴다. 그 결과, 사건 해결의 핵심이 되는 ‘아무개’라는 인물은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기능하며, 오히려 허구의 틈을 더 벌려 놓는다.
이 정신없는 영화적 기술 위에 놓인 서사의 골조가 소동극적 연쇄 구조라는 점은, 변성현 감독의 고유한 습관이자 의도된 미학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대에 뒤처진 고답의 유행처럼 보인다. 소동극적 연극의 과잉, 사건이 사건을 몰고 가는 연쇄의 구도, 배우 중심의 구성은 과거 ‘장진 사단’이라 불리던 필모그래피에서 이미 익숙하게 본 양식이다. 그보다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소극장 운동에서 비롯한 소동극의 원류가 있다. 변성현의 <굿뉴스>는 그 계보를 재현하려 했으나, 결국 그 유령을 되살린 데 그친다.
소동극의 계보, 일상의 연대
영화 <굿뉴스>를 보고 있자면 오래된 일본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Welcome Mr. McDonald, 1997)가 자꾸 떠오른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일본식 ‘소동극(騷動劇)’이 어떻게 대중 코미디와 연극적 메타미디어의 경계에서 미학적 정체성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작품은 단순히 방송 사고를 둘러싼 해프닝 코미디가 아니라, 1970~90년대 일본 ‘소극장 운동(小劇場運動, Shōgekijō undō)’의 미학적 계보 위에서 읽을 때 비로소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소극장 운동’은 1960년대 안보투쟁 이후, 대학 연극 동인들이 제도권 연극(신극, 新劇)의 경직된 리얼리즘과 국가주의적 검열을 거부하며 시작되었다. 소규모 실험무대에서 비정치적 일상, 언어의 유희, 과잉된 상황극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 감각을 모색한 흐름이었다. 낡은 창고 같은 무대, 즉흥적인 대사, 반복된 오해와 집단적 혼란 속에서도 인간의 온기를 찾으려는 시도 ― 그것이 바로 이 운동의 핵심 감수성이었다. 난바라 사토시, 니나가와 유키오, 스즈키 타다시 등의 연극이 그 경향을 대표했고, 1980~90년대에 들어 그 실험정신은 TV 버라이어티와 영화의 서사 구조로 흡수된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모티프 ―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 도중 제작진과 배우, 기술진이 실수를 수습하다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야기 ― 는 바로 그 소극장의 감각이 미디어적 스케일로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즉흥성과 상황의 누적, 말의 오해, 무대와 현실의 전도 ― 이것은 근본적으로 공동체적 즉흥 협업이라는 연극의 리얼리티를 시청각 매체 속으로 옮겨놓은 시도였다.
이 장르의 플롯은 대체로 “혼돈 → 연대 → 감정적 수습”의 삼단 구조를 가진다. 혼돈의 기점은 대개 사소한 오해나 미디어 장치의 오류이며, 그 혼돈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욕망과 위선을 드러낸다. 그러나 일본식 소동극은 서구의 파르스(farce)와 달리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따뜻한 수습’을 향한다. 말하자면 집단의 파국을 통해 공동체를 다시 회복하려는 윤리적 회심의 서사다. 완벽한 시스템이 무너지는 순간, 인간의 허술함이 구원의 계기로 전환되는 미학이 그 안에서 작동한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에서처럼 방송 체계가 붕괴된 그 순간,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각자의 위치를 넘어 협력하고, ‘사고’는 ‘기적’으로 변모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식 소동극의 휴머니즘 ― 질서의 붕괴가 인간적 감응을 낳는다는 아이러니의 미학이다.
이 감각은 2000년대 초중반 장진 감독의 영화들 ― <킬러들의 수다>(2001), <아는 여자>(2004), <거룩한 계보>(2006) ― 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는 언제나 대사 중심의 상황극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인물들은 같은 공간 안에서 말의 충돌과 해프닝의 축적을 통해 내면을 드러낸다. 그는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 출신이자, 일본식 소극장 시트콤의 감수성에 익숙한 세대였다. 그의 리듬과 대사, 연출의 호흡은 일본 소극장 운동의 무대 리듬을 영화화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변성현의 <굿뉴스>(2025)는 그 미학적 계보의 후기적 형태다. 그의 영화에는 장진의 언어 유희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소동이 소동을 부르는 연쇄 구조가 남아 있다. 인물들의 욕망과 오해가 겹겹이 쌓이며, 사건은 일상의 범주를 넘어 과잉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변성현은 장진의 인간미 대신 현대적 냉소와 불신의 리얼리즘을 덧입힌다. 그는 ‘소동극의 휴머니즘’이 아니라 ‘소동극의 붕괴’를 보여주는 감독으로 읽힌다. <굿뉴스>의 후반부가 회심이나 연대를 향하지 못하고 불신의 서사로 끝맺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일본 소극장 운동이 낳은 집단적 해프닝의 따뜻한 회복은 한국을 거치며 파편적 소동의 냉소적 해체로 변형되었다. 그것은 시대의 감수성 ― 공동체적 연대에서 개인적 생존으로 옮겨간 윤리의 전환 ― 을 반영한다. 변성현의 영화가 가지는 미학적 맹점은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난다.
<굿뉴스>를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단순한 영화 감상이 아니라, 공동체가 해체된 초개인적 시대에 소동이 더 이상 연대의 기회가 아닌 파멸의 전조로 작동하는 현시대적 비유를 마주하는 일이 된다.
소동의 미학, 혹은 질서의 변주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미타니 코키(三谷幸喜)는 일본식 ‘소동극 영화’의 미학적 원형을 가장 정교하게 구축한 인물이다. 그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감독이자, 일본 소극장 운동이 남긴 감각을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정서적 유머와 구조적 혼돈의 조화로 번역한 연출가였다.
미타니는 원래 연극 집단 ‘도쿄 선샤인 보이스(Tokyo Sunshine Boys)’의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출발했다. 이 극단은 1980년대 일본 소극장 운동 이후 등장한 포스트-소극장 세대의 대표로, 일명 ‘리빙룸 드라마’ — 작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언어적 오해와 인물 간의 긴장, 그리고 그 틈에서 피어나는 정감의 미학 — 을 추구했다. 그의 연극은 현실비판적이지도 실험적이지도 않았지만, 대신 일상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비일상, 우연이 쌓여 필연으로 변하는 인간 군상의 드라마를 섬세하게 포착했다.
이런 연극적 감각 위에서 미타니의 영화는 처음부터 영화적 리얼리즘이라기보다 연극적 리듬을 지닌 시청각극에 가까웠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무대처럼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말과 오해로 얽히며, 카메라는 그들의 관계를 연속된 타이밍의 희극으로 구성한다. 그가 구축한 미학의 요체는 이렇다.
“말과 오해의 리듬으로 인간의 진심을 드러내는 연극적 카메라.”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는 전형적인 소동의 나선 구조를 따른다. 사건의 발화점은 라디오 드라마의 평범한 생방송이고, 그 안에 들어온 작은 이물질 — 배우의 즉흥, 제작진의 실수, 스폰서의 개입 — 이 하나씩 꼬리를 물며 예측 불가능한 도미노식 혼란을 낳는다. 그러나 그 혼란은 끝내 집단적 협업을 통해 수습되는 연대의 순간으로 귀결된다. 이 리듬이야말로 일본식 소극장의 전형이며, 미타니 코키가 인간을 관찰하는 방식, 그의 인류학적 통찰이다.
그에게 소동이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만 드러나는 인간의 선의와 연대감을 탐색하는 장치였다. 질서가 무너지는 그 한순간, 인간의 허술함이 오히려 구원으로 전환되는 축제적 시간이 펼쳐진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언제나 시스템의 결함이 공동체의 유머로 변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에서의 방송 사고는 미디어적 파국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넘어서는 순간으로 치환된다. 바로 이 역전의 미학, 그 전환의 리듬이 미타니 코키가 소극장 운동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영화적 보편으로 확장시킨 이유다.
그 이후 일본 영화계에서 소동극적 서사는 하나의 장르 감각으로 자리 잡는다. 예를 들어, 야구치 시노부의 〈워터보이즈〉(2001)와 〈스윙걸즈〉(2004)는 소동이 성장으로 전환되는 구조를, 오타니 케이의 〈남자 고교생의 일상〉(2013)은 언어 유희의 집단적 리듬을, 야마자키 다카시의 〈ALWAYS: 3丁目の夕日〉(2005)는 공동체 감정의 회복으로 변주한다. 이들은 모두 마타니의 소극장적 리듬 ― 말의 충돌, 집단의 혼란, 유머를 통한 연대의 감정 ― 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의 영화가 일본식 소동극 휴머니즘의 표준이 된 이유다.
이 미학의 계보가 한국으로 건너오며 언어극적 영화로 변형되었다. 장진 감독은 그 명백한 후예였다. 그는 극단 ‘신시컴퍼니’ 출신의 연극인이자, 영화 속 리듬을 언어의 타이밍과 오해의 축적으로 설계한 연출자였다. 바탕골 소극장 무대에 올린 그의 연극은 매번 매진을 기록했고, 그 리듬감은 곧 영화로 옮겨졌다. 〈킬러들의 수다〉나 〈아는 여자〉는 거의 한국판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라 부를 만하다. 소동이 소동을 낳고, 결국 인간미로 회복되는, 그 구조 말이다.
그러나 변성현에 이르러 그 회복의 온도는 급격히 식는다. 〈굿뉴스〉에서는 미타니가 구축한 따뜻한 연대의 엔딩이 불신과 냉소의 윤리로 대체된다. 그는 여전히 소동극의 형식을 사용하지만, 더 이상 인간이 회심하지 않는다.
소동은 이제 인간성의 붕괴를 폭로하는 리얼리즘적 장치로 변한다. 이 지점에서 변성현은 미타니의 휴머니즘을 부정하면서도, 그 형식적 리듬을 인용하는 감독으로 남는다. 마치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서양인이 학춤의 몸짓을 따라 하듯, 익숙한 형식의 틀 안에서 낯선 감정의 냉기를 드러내는 연출자. 그의 영화는 그렇게, 소동극의 잔해 위에서 새로운 질서의 변주를 모색하고 있다.
냉소 이후의 소동극, 변성현의 영화적 위치
변성현 감독은 아역배우로 출발해 여러 영화 현장에서 스태프로 경험을 쌓으며 영화의 리듬과 구조를 체득한 감독이다. 그의 장편 데뷔작 〈나의 PS 파트너〉(2012)는 청춘의 솔직함과 비루함이 공존하는 현실을 경쾌하게 포착한 로맨틱 코미디로, 약 186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상업적 성취를 거둔 작품으로 남았다. 개인적으로도 그의 영화 중 가장 균형감 있는 첫 작품이었다고 본다.
이후 그는 〈스물〉(2015)과 〈극한직업〉(2019)을 통해 흥행의 공식을 세운 이병헌 감독과 함께 새로운 세대의 코미디 감독으로 자리매김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과 〈킹메이커〉(2022)의 흥행 부진은 그 기대를 꺾었다. 변성현은 이후 넷플릭스라는 대안적 플랫폼으로 이동해 〈길복순〉(2023)을 연출했고, 그 넷플릭스 후광효과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굿뉴스〉다.
〈킹메이커〉로 그는 백상예술대상과 대종상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팬데믹의 영향으로 경쟁작이 드물었던 당시의 상황을 감안하면, 이 영광은 실제 역사 사건으로 회귀한 연출자의 일시적 귀환이자, 자기 미학에 대한 일종의 회고처럼 읽힌다.
문제는 그가 오랫동안 지적받아온 한계들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기보다, 현장의 기술을 체득한 디렉터에 가깝다. 스토리의 밀도보다 장면 단위의 연출, 즉 신(scene) 단위의 설계에 집중하는 유형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류승완 감독과 닮아 있다. 두 감독 모두 서사적 완결성보다는 작화와 기술적 리듬을 통해 영화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물론 각본의 성숙도에서 차이가 나지만, 그 방향성은 유사하다.
이른바 ‘씨네마 키즈’ 혹은 ‘씨네필’ 출신 감독들이 서사의 빈곤을 극복하기 위해 스타일로 승부를 보듯, 변성현 역시 외양의 세련됨으로 자신의 영화적 정체성을 구축하려 한다. 그는 할리우드식 빠른 편집, 만화적 조명, 다색적 영상 톤을 활용하며 장르의 경계를 느슨하게 넘나든다. 그의 영화는 개연성이나 인물 대사의 내적 리얼리즘에서 자주 비판받지만, 편집의 리듬과 시각적 구성에서는 스타일리시하다는 평을 받는다. 프리즈 프레임, 점프 컷, 몽타주 등 다양한 기법을 장르 불문하고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는 형식적 유미주의 세대에 속한다.
변성현 영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방백형 내레이션’이다. 이는 수미쌍관의 구조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거나,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짚는 방식으로 반복된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의 언더커버 형사 조현수(임시완)가 “나는 그때 알았어야 했다”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장치가 대표적이다. 이후 〈킹메이커〉와 〈길복순〉에서도 비슷한 구성적 흔적이 남아 있고, 최근 각본에 참여한 〈사마귀〉에서도 이 패턴이 되풀이된다.
이런 장치는 겉으로는 미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구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잡하게 얽힌 서사를 정리하는 안전장치에 가깝다. 즉, 서사의 낯섦을 극대화하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내러티브의 불안정함을 덮는 서술의 보정 장치로 작동한다.
그의 영화 세계를 앞서 논한 일본 소동극의 계보 안에 위치시켜 보면, 그 차이가 더 뚜렷해진다. 미타니 코키가 이끈 일본 소극장 운동이 즉흥적 상황극과 공동체적 연대를 통해 일상의 언어로 인간적 회심을 실험했다면, 장진은 그 감각을 한국의 현실 안으로 번역해 언어극적 유희와 연극성과 영화의 경계 해체를 시도했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에서 시스템의 붕괴가 오히려 인간의 온기를 드러내는 유머로 전환되었다면, 장진의 세계는 그 유머를 통해 감정의 공존을 실험했다. 그러나 변성현의 〈굿뉴스〉에서 그 연대의 가능성은 완전히 식어버린다. 그의 영화에서 소동은 더 이상 회복의 전주곡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불신, 냉소, 경쟁, 그리고 감정의 파열이 낳은 현실적 피로를 폭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굿뉴스〉의 과잉된 소동은 공동체의 연대를 갱신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미타니의 소동극 휴머니즘이 이 영화에선 탈휴머니즘적 냉소극으로 변주된 셈이다. 이 불화의 지점이야말로 변성현의 위치를 가장 정확히 드러낸다. 그는 미타니의 형식을 인용하지만, 그 윤리를 계승하지 않는다. 소동은 이제 질서의 회복이 아니라 질서의 파괴를 위한 연출적 리듬이 된다.
그의 영화는 기술적으로는 세련되지만, 정서적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의 냉기를 머금는다. 마치 공동체적 웃음이 사라진 연극 무대 위, 마지막까지 대사를 잊지 않으려 애쓰는 배우의 독백처럼. 〈굿뉴스〉는 그렇게, 소동 이후의 세계, 냉소의 시대에 남은 마지막 웃음의 형식을 기록하고 있다.
의미와 재미는 점점 멀어지는가
소동극이라는 장르는 오래된 양식이다. 고대 그리스 희극부터 셰익스피어, 체홉까지,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혼돈과 실수 속에서 관계와 사회를 탐색하는 전통이 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혼돈이 인간을 구원하고, 실패가 공동체를 완성한다.”
이 장치는 무너짐의 서사학이며, 무너짐을 통해 인간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따뜻한 희극의 미학을 담는다. 그런데 이 미학이 변성현의 영화에 오면, 무너짐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붕괴의 징후로 읽힌다. 즉, 같은 소동극의 구조가 공동체의 회심이 아니라 관계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윤리적 함의로 변질된다.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의 전통은 단순히 소동극의 계보가 아니라, “시스템이 무너진 자리에서 인간의 감정이 남는가”라는 질문의 연속이다. 장진은 그 질문에 “남는다”고 답했고, 변성현은 “이미 소멸했다”고 응답한다. 일본 소극장 운동의 유산이 한국 영화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미학적 드라마가 된다.
한자 ‘騷動’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의미가 있다. ‘騷(떠들 소)’는 말(馬)과 벼룩(蚤)으로 이루어져, 벼룩이 말의 몸을 기어 다니며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을 주어 말이 이리저리 뛰게 만드는 불가역적 연쇄 사건을 뜻한다. 즉, 소동의 원인은 하찮음과 의미없음이 뒤섞인 벼룩 같은 존재다. 이 원인에 이념이나 정의, 진실과 같은 거대한 담론이 개입하면, 소동의 경쾌함은 쉽게 무너진다. 〈굿뉴스〉가 시끄럽고 무의미한 뒷맛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의 죠〉를 끌여들여 적군파가 상징적 기의를 뿜으면서도, 그들이 애초 목표로 삼은 쿠바 아바나의 목적 지향은 소거된다. 하이재킹이라는 커다란 결의가 영화 안에서는 삭제되었다. 아마도 소동극이라는 외피가 역사적 사건과 결의를 수용하기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냉전기의 실제 사건을 일상의 소동으로 엮는 것 역시 부담스러운 과제였을 터. 이러한 딜레마는 작품의 모양새로 그대로 남는다.
달의 이면에 진실이 있다고 해도,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식이 시대적 의미를 가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깜깜한 뒷면에 촛불을 들고 진실을 밝히거나, 앞면의 토끼에게 다른 구멍을 파내어 이면으로 나아가야 한다. 작가가 팬덤과 자본이라는 강렬한 햇빛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현실은, 이러한 용기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Dark Side of the Moon》 의 수록곡 <Breathe>는 이렇게 노래한다.
“뛰어, 토끼야, 구멍을 파, 태양은 잊어 버려. 일이 끝나도 앉지 마, 새로운 구멍을 팔 시간이야.”
달의 어두운 이면에서 진실을 찾으려면, 태양의 따뜻한 빛을 버리고 그곳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단순히 앞면이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고문으로 같은 패착을 반복하는 일은, 결국 작가 용기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다.
결국 <굿뉴스>가 남기는 최종적 풍경은, 진실을 탐구하려는 의지와 장르적 미학 사이의 불화로 귀결된다. 역사적 사건에서 파생된 서사의 진실성은 소동극적 장치의 과잉과 냉소 속에서 희석되고, 의미 있는 회복이나 연대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인간적 온기와 서사적 완결성은 장르적 유희와 서사적 과잉 속에서 소거되며, 남는 것은 진실과 형식 사이의 간극, 의미와 재미 사의의 깊고도 넓은 틈 뿐이다. 이 간극은 곧 작품이 던지는 질문이자, 소동극이 현대적 현실과 충돌하면서 드러내는 미학적 긴장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