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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의 사랑법, 결핍의 교환

영화 <하이파이브>와 드라마 <무빙>을 보고

by 박 스테파노

영화 〈하이파이브〉는 한 의문의 인물이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에게서 장기 기증이 이루어지고, 수술을 맡은 의사들은 강철처럼 단단한 피부와 비정상적으로 견고한 장기에 놀란다. 그러나 진정한 기이함은 그 이후에 벌어진다. 장기가 적출된 뒤, 기증자의 몸이 불길에 닿지도 않았는데 서서히 재로 변해 사라지는 것이다. 이 불가해한 소멸은 인간의 생명이 단순한 유기체의 순환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 질서의 분기점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장기가 다섯 사람에게 이식되면서 이야기는 초능력의 드라마로 변주된다.


심장을 이식받은 태권소녀 박완서(이재인)는 초인적인 괴력과 신체 능력을 얻게 된다. 심장마비로 아내와 장인을 잃고 보호 본능에 사로잡힌 아버지 종민(오정세)의 과잉된 사랑 아래에서 자라온 그녀는, 우연히 그 힘을 발견한 순간 비로소 억눌린 자유와 존재의 확장을 느낀다. 그녀의 심장은 더 이상 타인의 장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리듬을 다시 고동치게 하는 새로운 언어가 된다.


폐를 이식받은 작가 지망생 박지성(안재홍)은 엄청난 폐활량을 얻는다. 상상의 공간 속에서만 슈퍼 히어로에 대한 동경을 쌓아가던 그는 실제 초능력자가 된다. 그러나 그의 능력은 단순한 비범의 상징이 아니라, 무력감과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내적 욕망의 형상이다. 신장을 이식받은 프레시 매니저 김선녀(라미란)는 처음에는 무능력자라 실망하다 결국 가장 중요한 매개자로 판명난다. 다른 초인의 능력을 주거니 받거니 매개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그 능력은 일상의 굴레 속에 갇힌 일상인의 피로와 무력함을 벗어나려는 몸의 저항처럼 보인다.


슈퍼 히어로는 어떤이들의 꿈. 안나푸르나필름 제공


간을 이식받은 고지식한 작업반장 허약선(김희원)은 생수만 보충하면 타인의 신체 결함을 치유 회복시키는 능력을 가진다. 그 능력은 상처받지 않으려는 인간의 두려움이 반대로 작용하는 형상처럼 느껴진다. 각막을 이식받은 힙스터 백수 황기동(유아인)은 각종 전자기 장치를 제어하는 능력을 얻고,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읽는다. 그럼에도 허전한 한 편에는 이 능력에 대한 회의도 키우고 일상을 살아간다.


이 다섯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 안에 깃든 낯선 생명을 감지하며, 자신들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어떤 거대한 존재의 조각임을 깨닫는다. 이식된 장기는 생명을 연장시키는 기계적 부품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흔드는 상징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결국 서로를 찾아 나서고, 각자의 능력이 서로를 호출하며 ‘하이파이브’라는 이름으로 모인다. 그것은 단순한 팀의 결성이 아니라, 흩어진 생명들이 다시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신비한 복원의 과정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을 노리는 세력이 등장한다. 생명 연장의 환상을 좇는 사이비 종교 ‘새신 재단’과 그 배후의 빌런들은 다섯 명의 초능력을 흡수해 불멸을 완성하려 한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그 욕망은 생명의 신비를 도구화한 기술 문명의 오만을 은유한다. 다섯 명의 이식자들은 각자의 상처와 불안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힘을 합친다. 그들의 연대는 초능력보다 더 강한 윤리적 힘, 즉 ‘함께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로 작동한다.


〈하이파이브〉는 코믹 슈퍼히어로물의 외양을 지녔지만, 실상은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한계를 탐색하는 철학적 우화에 가깝다. 이 영화에서 초능력은 기적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다. 다섯 명이 손을 맞잡는 순간, 그들의 힘은 타인을 지배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관계의 언어로 바뀐다. 영화의 결말에서 우리는 깨닫게 된다. 진정한 영웅이란 초인적 존재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들이 서로의 생명을 나누며 함께 서 있는 그 순간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모든 아버지는 슈퍼 히어로. 안나푸르나필름 제공



뻔함의 품격, 혹은 서사의 귀환


최근 콘텐츠 전반에서 길고 깊은 이야기를 기피하고, 자극적이며 소비적인 캐릭터에 집중하는 경향에 대한 평론가들의 쓴소리가 잦아지고 있다. 특히 존경하는 한 평론가의 단상을 읽고 사유를 거듭했다. 서사가 사라지고 캐릭터가 앞장서는 스토리텔링의 시대라는 그의 지적에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서사란 본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다. 인물은 서사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며, 서사는 인물을 특정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이야기꾼의 고뇌와 노력에서 비롯된다. 어느 쪽이 더 부각되느냐의 문제일 뿐, 결국 이야기의 세계는 이 둘을 가르고 설명할 수 없는 유기체다.


영화 〈하이파이브〉에 대한 대중적 평가는 대체로 “뻔한 전개”라는 말로 저평가되어 요약된다. 이야기의 구조가 익숙하고 전개가 예측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고전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영화는 영웅 신화의 구성 구조를 정통하게 계승하고 있다. 탄생의 비밀, 고난의 성장, 모험과 임무, 그리고 세평과 업적으로 이어지는 신화적 구성이 모범적으로 갖추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뻔함이 오히려 작품의 장점이라는 점이다. 뻔하지만 몰입하게 되는 이야기는 서사의 힘을 증명한다.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수많은 비평과 변주 속에서도 살아남은 서사의 구성은 좀처럼 배신하지 않는다.


수년 전 방영된 리얼리티 경연 프로그램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2〉에서, 스트릿 크루 WolfLo의 리더 할로가 자신들의 안무 스타일을 ‘올드하다’고 평가한 다른 팀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올드랑 클래식을 구분도 못하는 애들에게 클래식이 뭔지 알려줘야겠네.”


이 한마디는 단순한 반박을 넘어,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형식과 그 안에 담긴 진정성의 차이를 정확히 짚어낸 선언처럼 들렸다. 오래된 것이 꼭 낡아 빠진 것이라는 등치는 흔한 일반화의 오류다.


〈하이파이브〉를 보며 떠오른 또 다른 작품은 2023년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 〈무빙〉이다. 원작은 1세대 웹투니스트 강풀의 동명 웹툰으로, 웹툰이라는 형식의 붐을 일으킨 시초라 할 만하다. 오랜 팬심이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최근에 본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는 것 중 하나다. 그 이유는 아마 강풀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휴머니즘 때문이다.


강풀 만화 원작의 <무빙>. 디즈니플러스 코리아 제공


〈무빙〉은 강풀의 세계를 이루던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돌연변이들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이 남다르고 이상한 인물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힘을 지녔기에, 사회 질서를 자신들의 것으로 믿는 부류에게는 그저 괴물로 인식된다. 그들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욕망에 편승하는 일이다. 그러나 강풀의 휴머니즘은 이 모순의 경계에서 피어난다. 그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보편적인 감정―사랑, 상실, 연민―을 드러내는 순간의 울림을 통해, 관객에게 ‘무빙’이라는 감동을 선사한다.


물론 〈무빙〉 역시 캐릭터의 에피소드를 부각시키며 서사의 고루함을 덮는 작품이라는 비평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반대의 입장이다. 뻔하지만 여전히 통용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편적 가치’라 부른다. 기독교의 구교, 곧 가톨릭의 어원도 이 보편성과 공번성에 있다. 사랑, 평화, 평등, 자유 ― 이러한 가치들은 고루하게 들릴지라도, 여전히 인간 삶에서 정답이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것들이다.


〈하이파이브〉는 그런 의미에서 〈무빙〉의 자매편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두 작품은 서사의 결이 닮았고, 정서의 방향도 유사하다. 디즈니라는 플랫폼의 정체성과도 묘하게 어울리는 작품들이다. 흔한 미스터리 복수극이나 영웅 서사가 유행이라면, 이 두 작품은 클래식이라 부를 만한 품격을 지닌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이 두 작품은 작가 강풀과 감독 강형철의 세계관이 묘하게 겹친다. 〈과속 스캔들〉, 〈써니〉를 거쳐온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는 결국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인간이란 여전히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으며, ‘함께 살아남고자’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초인의 인간학, 결핍의 사랑


드라마 〈무빙〉의 공개 에피소드 가운데 ep.10 〈괴물〉과 ep.11 〈로맨티시스트〉에는 이 작품의 중심 사유가 응축되어 있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손가락질 속에서 괴물이 된 인물, ‘구룡포 주원(류승룡)’의 탄생 비밀과 성장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는 괴물인가, 영웅인가. 그 가름은 그의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타인과 사회의 시선, 곧 낙인에 있다. 초인의 경계에 선 그들은 오히려 인간의 보편되고 공번된 가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된다. 이 드라마가 캐릭터가 아니라 서사가 중심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뻔하지만 늘 옳은 것이 있지 않은가. 바로 ‘사랑’ 같은 것 말이다.


〈무빙〉 ep.11에서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닌 주원은 다방 종업원 지희(곽선영)에게 마음을 연다. 주원이 즐겨 읽는 무협지와 매일 틀어놓는 프로레슬링 방송을 보며 지희가 묻는다. 치고받고 싸우는 것만 좋아하냐고. 주원은 잠시 웃으며 답한다. 프로레슬링의 전설 헐크 호건은 선(善)의 수호자였다고. 착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프로레슬링이며, 무협지는 결국 사랑 이야기라고.


“무협지는 그냥 싸우는 게 아니에요. 로맨스예요. 싸우다가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요. 사랑 이야기예요.”


이 단순하고 순진한 대사는 〈무빙〉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 핵심이다. 힘은 폭력이 아니라 돌봄으로 귀결되어야 하며, 초인의 이야기는 결국 사랑의 서사로 돌아온다.


지희와 구룡포 주원과의 사랑. 디즈니플러스 코리아 제공


〈하이파이브〉의 인물들 또한 그 사랑의 궤도 안에 있다. 특히 태권 소녀 완서와 그의 아버지, 태권도장 관장 종민의 관계는 유대와 신뢰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묶인다. 한때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평범한 도장의 관장으로 딸을 홀로 키우는 아버지. 그는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심장 약한 딸이 위험에 처한 순간, 그는 언제나 비범해진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슈퍼히어로다. 이 비범의 욕구는 단지 욕망의 과시가 아니라, 생존과 돌봄의 극한 소망이 발현된 것이다. 결핍을 복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그것이 비범에 대한 가장 순수한 동경의 원형이다.


비범함에 대한 열망은 원초적이며, 야생적이고, 이성 이전의 본능적 감정이다. 사전적으로 ‘보통보다 훨씬 뛰어남’을 뜻하지만, 문제는 그 반대편에 평범이라는 말이 대립어로 놓여 있다는 점이다. 비범함과 가까운 말로는 비상함, 특이함, 이례적임 등이 있고, 때로는 ‘돌연변이’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 결국 비범은 평균을 넘어서는 능력이나 성과를 가리키지만, 그 평균의 기준이 과연 절대적이고 합리적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단어에 대한 단편적 해석은 때때로 위험하다. 비범을 우월이나 절대적 선과 동일시하는 순간, 사회와 인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그때 평범함은 열등으로, 다름은 결함으로 오인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차별이 발생하고, 인간의 다양성은 정상이라는 이름 아래 억압된다. 강풀의 초기 만화에서도 비범한 사람들은 대개 바보나 천치, 외톨이, 장애인의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 사회의 평균 이하로 낙인찍힌 이들은 사실 단지 다르게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득권의 노멀리즘은 그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며 배제했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구분하려는 사람들은 어쩌면 특별함에 목을 맨 이들일지도 모른다. 능력주의를 공정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에서, 스펙(spec)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한 변별력을 지닌다. 그런데 이 specification의 어근이 special과 동일하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흥미롭다. 스페셜은 노멀의 반대말이다. 즉, 오늘날 능력주의는 비범함을 상품화하고, 인간을 스펙의 크기로 환산하는 체제의 또 다른 얼굴이다.


사랑은 결여의 교환. 안나푸르나필름 제공


이런 현실에서 〈하이파이브〉의 다섯 인물이 초능력자의 장기를 이식받아 남다른 능력을 얻게 되는 설정은, 결핍과 결여에 대한 집단적 보상심리의 서사로 읽힌다. 그들의 초능력은 욕망의 상징이 아니라, 결핍을 서로의 방식으로 채워가는 사랑의 실험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글을 빌리자면, 결국 사랑이란 결여의 교환이다. 서로의 결핍을 인정하고 응시할 때, 두 존재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비범한 관계를 창조한다. 이때의 비범은 권력이나 성취의 표시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고 돌보려는 윤리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무빙〉과 〈하이파이브〉는 초인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인간의 조건으로 돌아온다. 뻔한 이야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오래된 정답 ― 사랑. 그것이야말로 비범함의 가장 인간적인 형식이다.



비범과 평범, 결여와 교환


영화 <하이파이브>는 익숙한 설정 위에서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서로 다른 비범함을 지닌 영웅들이 호명되고, 그들의 힘으로 임무가 완수되는 서사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질문은 능력이나 장기의 과학적 근거가 아니라, 장기 기증이라는 생명의 교환을 통해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서로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묻는 데 있다. 과학적 논증을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것은 서사의 약점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이끄는 희망의 행진곡에 맞춰 박자를 조율하는 미학적 슬기다.


이 영화의 장점은 기대와 바람을 저버리지 않는 데 있다. 장기 기증이라는 실제적 교환의 순환은, 신장을 이식받은 선녀를 매개로 다섯 사람의 능력과 에너지를 교환하고 재충전하는 설정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물질적 결핍과 결여를 넘어 마음과 영혼의 결여까지 아우르는 이 장치는, 결핍을 채우는 최선의 방법이 결국 사랑이라는 단순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언어임을 보여준다.


미국 코믹스의 영향 없이도, 우리 시대 사람들의 추억 속에는 ‘슈퍼맨’과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가 자리 잡고 있다. 쫄쫄이 바지에 원색 팬티를 덧입고 망토를 두른 영웅, 육중한 가면과 방탄 슈트를 입은 갑부의 등장. 어찌 보면 유치하고 마초적 욕망의 표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쉰을 넘어선 나이에, 마음 한편 깊숙이서는 여전히 누군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려줄 초인적 존재를 기대하고 살아간다. 물론 그 초인이 반드시 하늘을 나는 망토맨일 필요는 없다. 주변에서 우리는 이미 수많은 슈퍼히어로를 만들어 내고, 평가하고, 때로는 신비로운 망토를 벗기기도 한다. 그것이 뻔하지만 현실과 조응하는 방식이다.


<엑스맨: 더 퍼스트 클래스>의 매그니토. 마블 코리아 제공


〈하이파이브〉와 〈무빙〉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떠오른 작품이 할리우드 <엑스맨> 시리즈다. 핵심 키워드는 변종(Mutant), 절대 선, 비범, 소수와 다양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엑스맨: 더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돌연변이 초능력자 집단이 두 갈래로 나뉘는 이유를 설명한다.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라는 두 집단이 지향하는 세계관은, 선과 악, 본질과 형상, 시작과 지속의 차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역사적 진화로 비유하면,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생존 경쟁은 결국 평범과 비범의 절대적 분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능력의 우월성을 통해 차별과 복수를 주장하는 매그니토와, 평범한 다수에게 인정받아 공생하려는 프로페서 X의 집단으로 나뉘는 결말을 보여준다. 비범함과 평범함은 단순한 능력의 우수성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지 못한 부러운 무엇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구분은 상황과 기준에 따라 이동하고 재조합되며, 우리는 그것을 ‘다양성’이라고 부른다.


둘 중 하나로만 환원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사람에게, 비범한 누군가의 등장은 신비롭고 이채롭게 다가온다. 그것이 내가 선택한 존재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이파이브〉와 〈무빙〉은, 결국 이 선택과 기대, 결핍과 교환을 통해 비범의 서사를 인간적 울림으로 되살린다. 현실과 상상을 겹쳐 놓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비범과 평범이 결코 상반되지 않음을, 그리고 사랑이야말로 그 교차점임을 새삼 깨닫는다.



보통의 비범과 일상의 영웅


〈하이파이브〉는 다양한 존재들의 평범이라는 실재하지 않는 가치 기준에 대한 모호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선과 악, 능력과 한계, 평가와 선택이 뒤얽힌 사회 속에서, 평범이라는 이름의 기준은 자주 왜곡되고 흔들린다. 특히 “악당은 늘 같은 초능력자들 사이에 있다”는 서사의 정설을 반복하는 장면은 그 모호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보는 이의 시선과 가치판단에 따라 선과 악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질문에 대해 〈무빙〉은 답을 주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고 헝클어진 세상에서도 결국 빛나는 것은 휴머니즘, 보편 되고 공번된 가치라고 강조한다. 우정, 사랑, 헌신, 감사 같은 오래되고 고루한 단어들은, 가치 판단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여전히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사람의,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가 살아남을 때, 우리는 과도한 자기 과대망상을 버티며 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세상은 나보다 비범한 사람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헌신과 기여 덕분에 발전한다. 그들의 비범함은 그들 자신이 절대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니라, 우월하지 못한 다수의 선택과 인정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들의 능력은 개인의 본연적 인성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 정치인, 검찰과 경찰, 재벌과 기업인, 한류를 이끄는 아이돌, 심지어 우리 자신까지—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들이 지켜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이지, 쫄쫄이 팬티와 망토가 아니다.


슈퍼히어로는 분명 비범하다. 평범한 우리는 그들의 등장에 환호하고 열광하며,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그러나 그 존경과 사랑을 오직 그들만의 것으로 여기는 순간, 세상은 오해와 분열로 가득 찬다. 비범함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대중의 평가로 결정되는 히어로는 권력과 지배의 위험을 안고 있으며, 그것이 현실적 제약과 혼합될 때, 그 존재는 인간적 번민과 방황을 겪는다.


영화 속 슈퍼히어로들도 인간적 욕구를 지닌 존재다. 지구를 지키다 지쳐, 사랑을 위해 망토를 벗어던진 슈퍼맨, 복수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며 오렌지 재벌로 살아가는 배트맨처럼, 그들은 능력만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단순히 본능에 충실해 살았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결국 그들의 사명은 정신을 차리고 악을 물리치며 곤경에 처한 이들을 구함으로써 이 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선의 의지다.


“사람들은 영웅이 필요 없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내 귀에는 매일 영웅을 찾는
수많은 절규가 들려요.”

―〈슈퍼맨 리턴즈〉


슈퍼맨의 이 대사는 단순한 영화적 대사가 아니라, 현실에도 적용된다. 최고 현금을 보유한 대기업 뒤에는 정권의 비호와 분식회계라는 비밀이, 그로 인해 눈물 흘리는 노동자들이, 시름시름 앉아 있는 배추밭의 할머니들이 있다. 한탕과 영끌이 공존하는 세상, 더 나은 내일을 꿈꾸다 기계 안에서 생을 마친 청년도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에게, 비범함은 더 이상 초인적 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세상은 아직도 영웅이 필요해. AI Sora


〈하이파이브〉와 〈무빙〉의 등장인물들은 일상의 슈퍼히어로로, 단순히 초인적 능력으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이들은 돌연변이, 괴물이라 낙인찍히지만, 그 낯섦과 비범함 속에서 우리 세계의 보편적 가치를 지켜내는 보루가 된다. 서로의 결핍을 채우고, 부족함을 나누며, 사랑이라는 교환의 언어로 관계를 형성하는 순간, 그들은 단순한 영웅이 아니다. 존재론적 서사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서사의 힘이 능력의 화려함이나 극적 장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일상적 인간성과 결핍의 응집을 통해 발현된다는 일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서사는 보편적 가치와 비범함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독자를 사유하게 한다. 즉, 비범함은 절대적 규범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과 끊임없이 교차하고 흔들리는 미학적 장치로 기능한다. 사랑, 헌신, 연민과 같은 오래된 가치들은 여기서 단순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서사의 구조를 지탱하는 근간이자 미학적 질료가 된다. 우리는 이 서사 안에서 비범함이 가진 단순한 매혹을 넘어, 결핍과 교환을 통한 윤리적·미적 충만을 목격한다.


결국 돌연변이, 괴물, 초능력자라는 장치는 상징적 장치일 뿐이다. 서사의 진짜 힘은 인간적 결핍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사랑과 연대, 그리고 이를 통과하며 만들어지는 희망의 순간에 있다. 그들은 우리 곁의 보이지 않는 슈퍼히어로이며, 서사는 그들의 존재를 통해 현실 세계의 균열과 불완전성을 드러낸다. 동시에 그것을 감각적·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초능력이라는 극적 장치가 사라져도, 결핍과 교환, 사랑과 헌신이 만드는 서사의 울림은 여전히 남는다. 이는 독자와 관객에게 미적 감동과 윤리적 성찰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 서사는 단순히 영웅 신화의 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 감각으로 재편된 인간적 서사다. 일상의 균열 속에서 희망과 연결을 찾아내는 미학적 실천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망토와 쫄쫄이를 입은 존재가 아니다. 서로의 결핍을 감지하고 채우며, 보편적 가치의 울림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조용한 영웅성을 포착하는 눈과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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