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사회와 가벼움의 미학
로맨틱 코메디, 회빙환물, 애니메이션 은 왜 흥행 중일까?
상반기 극장가의 성적표는 참담하다. 흥행의 보증수표로 불리던 마동석조차 무너졌고, 기대를 모았던 <전지적 독자 시점>은 참사에 가까운 실패로 끝났다. 영화인들은 OTT의 급부상과 소비 위축이라는 익숙한 설명으로 자위하지만, 다른 풍경도 눈에 들어온다. 프로야구는 1200만 관중 시대를 열었고, 평론가들의 별점을 아끼던 <좀비딸>은 개봉 7주 만에 550만을 넘어섰다. 일본의 전통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500만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 현상 앞에서 영화계가 외부 환경 탓만을 되풀이하는 것은 과연 충분한 진단일까.
한 사회가 무엇에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이야기에 매달려야 버틸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은,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불안과 피로의 지층을 드러내는 심리적 단서이자, 산업과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의 응축된 징후다. 최근 한국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은, 로맨틱 코메디와 회빙환물(회귀, 빙의, 환생),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꾸준히 흥행을 이어간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가볍고 환상적인 장르로 분류되지만, 오히려 현실의 무게가 과중해질수록 힘을 얻는다는 역설은, 이 장르적 인기를 단순한 취향의 변화로 환원하지 못하게 한다. 산업적 구조, 심리적 회피, 매체적 조건이 교차하며 빚어내는 복합적 작동을 읽어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피로하다
무엇보다 오늘의 불확실성 구조와 사회적 피로를 감각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전 세대가 각기 다른 결핍 속에서 압박받는다. 청년은 집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으로 시작하고, 중년은 노동과 돌봄의 이중부담에 지쳐 있으며, 노년은 길어진 수명 앞에서 불안정한 생계와 고립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불확실성은 경제적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 전반을 관통한다. 탄핵 정국, 계엄 논란, 세대 간 불통 같은 갈등이 실시간으로 전파되며, 뉴스와 SNS는 이 무거운 현실을 증폭한다. 대중은 ‘현실의 과잉’ 앞에 피로와 무력감을 겪는다.
한병철이 ‘피로사회’라 명명한 시대적 병리는 한국에서 특히 짙다. 경쟁은 일상의 기본값이 되었고, 효율과 성과의 언어가 삶 전체를 잠식한다. 이런 조건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단순하고 가볍고 환상적인 서사에 끌린다. 로맨틱 코메디나 회빙환물, 애니메이션은 단순한 오락의 도피처라기보다, 피로와 불확실성에 맞서는 생존 전략이 된다.
자본은 이를 누구보다 빠르게 읽어낸다. 기업의 본성은 돈을 좇는 데 있다. 예술과 문화, 비평의 언어보다, 산업의 눈은 검증된 장르의 안정성에 집중한다. 한국 콘텐츠 산업은 전통 방송 체제를 거쳐 OTT, 유튜브, SNS로 이행하는 과정이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제작사와 투자자는 불확실한 시장에서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전한 장르’에 의존한다.
로맨틱 코메디는 비교적 제작비가 낮고, 사랑과 관계라는 보편적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기에 해외 수출도 유리하다. 회빙환물은 웹툰과 웹소설의 IP를 통해 이미 확보된 팬덤을 끌어들이고, ‘재시작’이라는 구조적 매력을 반복적으로 활용한다. 애니메이션은 아동과 청년을 아우르며, 캐릭터 상품과 2차 저작 시장으로 추가 수익을 창출한다. ‘가벼움’은 곧 ‘안전한 투자처’로 전환된다.
여기에 정부의 정책도 힘을 보탠다. K-콘텐츠를 국가 전략 산업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안정적 수익을 확보할 수 있는 장르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2024년 출범한 대규모 콘텐츠 전략 펀드는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영화계는 이 시그널을 해독하지 못한다. 산업의 문해력이 결핍된 채, ‘영화는 모르겠고 숫자만 맞추면 된다’는 장사꾼의 논리가 지배한다. 실질적 이득은 없어도 GDP 수치에 기여하는 듯한 착시만 있으면 족하다. 이 구조 속에서 무겁고 실험적인 영화의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가볍고 환상적인 장르가 주류를 차지한다.
답도 질문도 마음 속에
그러나 문화 현상은 산업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중이 이런 장르에 몰입하는 이유는 심리적 차원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첫째, 회피의 욕망이다. 사회적 불안이 클수록 도피적 소비는 매혹력을 얻는다. 로맨틱 코메디는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빈곤을 지워내고, 개인과 개인의 사랑이라는 사적 문제에 몰입하게 한다. 회빙환물은 “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이라는 환상을 통해, 현실의 상처를 잠시 지운다. 애니메이션은 동심적 세계로의 회귀를 통해 잃어버린 순수와 가벼움을 복원한다.
둘째, 감정적 정화의 욕구다. 무거운 뉴스와 갈등이 사회를 압도할수록, 가벼운 장르의 서사는 해피엔딩과 안도의 서사를 약속한다. 그것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감정적 재생의 기술이다. 예컨대 <그것이 알고 싶다>보다 <꼬꼬무>가 더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미제 사건의 음울한 현실보다 따뜻한 기결의 이야기를 원하는 대중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셋째, 통제감 회복의 욕망이다. 회빙환물은 특히 강력하다. 시간과 운명을 다시 쓰는 이 장르는,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환상의 권능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현실에서 상실된 통제감을 상상 속에서 되찾는 행위다.
매체 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현상은 ‘문화적 안전장치’로 기능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한 ‘문화산업’의 표준화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제공하며, 대중은 그 익숙함 속에서 불안정을 잠시나마 벗어난다. 로런 벌랜트의 ‘잔혹한 낙관주의’ 또한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웃음과 눈물의 가벼움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지만, 그것을 통해 삶을 이어갈 힘을 얻는다.
또한 최근 장르 이론은 위기의 시대일수록 장르가 혼합되고 변주된다고 말한다. 로맨틱 코메디 속에 판타지적 회귀가 스며들고, 애니메이션 속에 성인 취향의 사회비판이 교차한다. 이러한 혼합은 위기의 사회가 만들어낸 장르적 진동이다.
그러나 가벼움은 단순한 현실 회피에 머물지 않는다. 그 속에는 은밀한 저항과 상상력이 깃든다. 로맨틱 코메디의 웃음은 가부장적 질서를 희화화하고, 회빙환물의 시간 재설정은 불평등한 질서를 거부하는 판타지를 담는다. 애니메이션의 동심적 세계는 자본주의의 효율 논리와 다른 속도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회피와 저항은 서로를 배제하는 대립항이 아니라, 오히려 배음처럼 함께 울리는 이중적 진실일지도 모른다.
웃긴 영화의 사회적 의미
이 현상을 전통적 희극론과 연결해볼 수 있다. 희극적이라는 것은 곧 인간적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이렇게 말한다.
“희극적인 것은 결국 그 모든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감정의 일시적 마비 상태와 유사한 무엇을 필요로 한다.”
― 앙리 베르그송, 『웃음』, 김진성·류지석 옮김
희극에서의 웃음은 극 속 인물에게는 생사의 기로일지라도, 관객에게는 우스운 상황으로 전환된다. 웃음은 당사자가 아닌 타인의 불운을 공유하는 사회적 공범 의식이며, 대중적 트렌드는 이런 공조의 신호로 나타난다.
따라서 가벼움은 무게의 부재가 아니라, 견디기 위해 필요한 다른 방식의 무게일 수 있다. 사회적 현실이 지나치게 무거워질 때, 대중은 그 무게를 잠시 다른 방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웃음과 환상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창의적인 기술이다.
겨울을 목표로 준비중인 웃긴 영화의 사회학에 대한 글들은 바로 이 지점을 탐구해 보려 한다. 로맨틱 코메디, 회빙환물,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단순히 대중이 가벼움을 탐닉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성과 피로가 구조화된 사회에서, 산업이 안정성을 확보하고, 대중이 감정적 균형을 되찾으며, 매체가 새로운 혼합을 실험한 결과다.
이 지점을 외면한 채, 특정 세대의 문제라거나, 오타쿠의 외출이라거나, 플랫폼과 정책 탓이라는 단순한 진단만 넘쳐난다. 정작 영화비평은 난해한 용어의 스크럼 속에 머물며, 대중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분석은 드물다. 정권 교체가 정책적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허망하다. 예술을 문화로 환원하고, 문화를 산업으로 치환하는 이 정부의 얕은 인문학적 상상력은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킨다. 대통령 대변인이 영화인이라는 사실만이 곧 정확한 진단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아니다.
독립영화의 존재를 산업 인프라에 방해되는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여기는 말들이 부끄럽지 않게 흘러나오고, <매불쇼>같은 정치 방송에서조차 “독립영화 얘기 좀 그만하라”는 망언이 등장하지만, 영화계는 고요하다. 문화마저 반도체처럼 미국의 하청 구조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케이(K-)’라는 표식은, 실은 오래된 ‘한국형’의 단순한 개명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