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벽을 지키지 못한 자들의 얼굴

-영화 <파수꾼>을 14년 만에 마주하고

by 박 스테파노

대학을 졸업하고 밀레니엄 시대의 문턱에 서자마자, 숨 돌릴 틈 없는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언제나 한 걸음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의 흐름보다 늘 반 템포 느렸고, 중심선에서 한 발짝 비켜 서 있었다. 몸담은 직장은 미국계 IT 기업이었다. 당시 산업의 공룡이라 불릴 만큼 인적 구성이 막강했다. 일명 ‘하늘’로 불리는 대한민국 명문 대학 출신이 8할을 넘었고, 전공은 대개 공학·상경·이학 등 회사 비즈니스에 직결되는 실용성과 무게감을 겸비한 분야였다.


나는 간신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었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문학도로 늙어갈 준비를 하던 사람으로서, 언제나 ‘가장 아래’라는 감각으로 출근하곤 했다. 집안의 분위기, 경제적 배경, 말투와 제스처에 스민 ‘익숙함’까지도 달랐다. 처음 교육 출장에서 마주친 영어 회의와 토론은 내게 전방위적인 압박이었지만, 그들에겐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처럼 보였다. 유창한 회화, 단정한 억양, 당당한 몸짓과 절묘한 침묵의 타이밍까지. 나는 모든 것을 ‘따라잡아야 했다.’


그 열패감은 역설적으로 나를 살게도, 죽게도 했다. 주경야독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전공을 보충했고, 주말마다 어학 능력을 닦았다. 리스크가 생기면 가장 먼저 손을 들었고, 궂은일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 년이 흘러, 최연소 관리자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세속적인 전성기를 통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렇게 원하던 자리였고, 그토록 간절했던 경력의 궤적이었는데, 그 자리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공허했다. 내면이 텅 비어 있었다. 문학이란 말을 멀리한 지 오래였고, 영화관에 들어서면 곧잘 졸았으며, 책을 펼치면 활자들이 허공으로 흘러내렸다.


공식적인 첫 영화 리뷰 <파수꾼>. 필라멘트 픽쳐스


그러던 어느 날, 마흔이라는 고지를 앞두고 무언가를 다시 채워야겠다는 감각이 들었다. 무척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온 내면의 신호였다. 그리하여 미디어 콘텐츠 비평 대학원에 등록했다.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첫 문장이 내 안에서 움텄던 때, 2011년이었다. 나는 블로그에 영화 <파수꾼> 리뷰를 올렸다. 그 글이 바로 내 비평 여정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흐른 지금, 나는 다시 그 글을 들여다보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가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한다.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가지만, 어떤 순간은 소용돌이처럼 현재를 휘감는다. 그 영화 속 소년들은 지금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그 시절 ‘지켜내지 못한 밤’의 실패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잔재로 남아 있을까. 나는 성장기를 지나버린 미숙한 존재의 성장을 다시 헤아려본다. 동시에, 이 시대가 여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다음 세대, 성장의 가능성조차 부정당한 청춘들에 대한 고민 또한 비켜갈 수 없다.



성장없는 성장서사― 역성장 공동체와 ‘파수꾼’의 비극


영화 <파수꾼>은 당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삼각형처럼 불안정한 구도를 이루던 세 친구는, 단단한 신뢰의 원으로 수렴하지 못한 채 각자의 방향으로 조금씩 균열되어 갔다. 누군가는 침묵했고, 누군가는 견디지 못해 폭발했고, 누군가는 애써 등을 돌렸다. 영화는 그들의 미숙함을 관대히 넘기지 않았다. 오히려 끝내 그 책임을 냉정하게 되묻는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동윤(서준영)은 기태(이제훈)의 부재 앞에서 무력했고, 희준(박정민)은 기억을 회피하며 조용히 사라졌다. 기태는 끝내 죽음을 택함으로써, 말과 관계와 공동체를 밀어냈다. 부재는 사건보다 더 거세게 남는다. 그해 봄,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이렇게 썼다.


그들은 그저 이 무겁고 절망적인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 문장은 당시에 내 감정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었지만, 그 ‘무겁고 절망적인 밤’이 우리 시대 전체의 감정적 상징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영화 속 허구의 청춘이었고, 나는 그저 영화관의 어두운 자리에서 울고 있던 관객 중 한 사람이었다.


세 친구 누구도 성장판을 닫지 못한 채. 필라멘트 픽쳐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 실패한 파수꾼들은 지금도 어딘가의 골방에 앉아 있다. 어떤 이는 포털의 댓글란에서, 어떤 이는 유튜브의 익명 채널에서, 어떤 이는 ‘사이트’라 불리는 은폐된 공간 안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선언한다. 그리고 시대를 향해 증오의 키보드를 두드린다.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애도되지 못한 감정이, 뒤틀린 정의감이 공동체를 향한 파괴적 언어로 되돌아온다. 이건 단순한 청춘의 좌절이 아니다. 소년 시절에 끝나야 할 실패가 사회의 구조적 결핍과 맞물릴 때, 그 실패는 성찰이 아닌 증오로 다시 자라난다.


독일어권 문학의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즉 성장소설은 인물이 내적 갈등과 도전을 통과하며 성숙해지고, 사회와의 화해나 통합을 통해 자아를 완성하는 서사 구조를 말한다. 그것은 개별 존재의 성장이 궁극적으로 공동체와의 새로운 관계를 정초한다는 믿음 위에 선 장르이다. 하지만 <파수꾼>은 이 전형을 정면으로 비틀어놓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갈등은 내면화되지 않고, 처리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상처를 ‘해석’하지 못한 채 방치하거나 내파한다. 감정은 말을 잃고, 책임은 주인을 잃는다. 결국 그들은 사회와 통합되지 못하고, 서로를 잃고, 자신마저 외면한 채 해체된다. <파수꾼>이 시사하는 바는 사춘기의 흔한 고통이나 일상의 감정 소동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한 개인의 성장을 지켜주지 못할 때, 어떤 종류의 ‘역성장’이 발생하는가에 대한 냉정하고도 절실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더욱 날카롭게 되살아난다. 정규직 문턱에서 반복적으로 좌절하고, 가족 내부에서조차 존재의 이유를 의심받으며, 정치적 신념과 실존적 고민마저 조롱의 대상이 되는 시대. 청년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성장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지킨다. 성숙하지 않기 위해, 살아남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일베'나 '에프엠코리아' 같은 극단적 온라인 집단은 오늘날의 ‘역성장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은 자신의 실패를 공동체의 배신으로 재해석하고, 그 분노를 무기화한다. 비난은 정체성이고, 조롱은 연대이며, 분열은 자기방어다. 이 집단의 심층 정서에는 성장의 실패, 파수의 실패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그 실패가 '분노한 피해자 서사'로 환원될 때, 이들은 더 이상 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신조차 제대로 애도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파수’는 다시 실패한다. 누군가는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지켜졌어야 했던 그 밤은 반복되고, 그 무거운 새벽은 여전히 오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지키지도 지켜지지도 않았다. 필라멘트 픽쳐스



파수 실패의 윤리 ― 누구도 지켜주지 않은 '우리'의 죽음


영화 <파수꾼>의 제목은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가져온 것이라 감독은 밝혔다. 셀린저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세상의 위선에 환멸을 품은 채, 순수한 것들이 오염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는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절벽에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그 상상은 애도되지 못한 어린 동생의 죽음을 향한 무의식적 반응이자, 세속과 타락에 대한 비가적 저항이다. 홀든에게 ‘파수’는 단지 감시가 아니라 보호이고, 윤리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아직 망가지지 않은 존재들에 대한 최후의 연대. 그것은 기성 사회의 허위 윤리와는 구별되는, 진실한 감정의 뒷모습을 지키려는 시도다.


<파수꾼>의 기태 역시 어쩌면 그런 파수의 욕망을 품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누구보다 외로웠고, 누구보다 관계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 갈망은 언어로 호명되지 못했고, 타인을 향해 건넬 준비가 되지 못한 채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되었다. 그의 폭력은 결국 파수의 실패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간절함이, 제대로 된 이름을 얻지 못하고 분노와 조롱으로 흘러내릴 때, 그것은 관계를 묶는 실이 아니라 끊어내는 칼이 된다. 그리고 공동체는 그 칼의 궤적을 감당하지 못한 채, 침묵한다.


이들의 폭력은 다름 아닌 파수의 실패다. 필라멘트 픽쳐스


이 지점에서 ‘파수’라는 행위는 단지 도덕적 명령이나 규범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균열을 함께 견디는 윤리적 실천이며, 관계를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존재 방식이다. 파수꾼은 감정을 감시하는 자가 아니라, 감정이 무너지지 않도록 버텨주는 자여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죽음의 정치』에서 공동체가 어떤 죽음을 애도하지 않기로 선택할 때 발생하는 폭력을 지적한다. 그는 죽음을 단지 종결이 아닌 호명되지 못한 결핍으로 보며, 그 결핍이 언어를 통해 사회적으로 기입되지 않을 경우 그 죽음은 반복된다고 말한다. 즉, 애도는 기억의 윤리이며, 진실의 마지막 구조다.


기태의 죽음은 그런 의미에서 ‘애도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누구도 그를 끝까지 불러주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학교는 침묵했고, 친구들은 흩어졌으며, 어른들은 무능했다. 그 죽음은 사적인 비극으로 처리되었고, 사회적 맥락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개인을 넘는다. 특히 그것이 제대로 애도되지 않을 때, 공동체는 그 죽음을 반복하게 된다. 그것은 기억의 실패이며, 진실의 유예다.


<파수꾼>이 영화라는 서사 양식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그때 그 아이들의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자리, 이 시대의 공기, 그리고 여전히 애도되지 않은 세대들의 침묵과 분노를 향한 윤리적 질문이다. 우리가 아직 이 영화를 떠나보내지 못한 이유, 이 이야기에 발이 붙들리는 이유는, 바로 그 애도를 우리가 끝내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파수 실패는 한 명의 청소년에 대한 교육적 방임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감정적 책무에 대한 유기였다. 그리고 그 유기의 결과는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그들은 골방에 앉아 있다. 익명의 아이디를 달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증오의 밈을 전파하고, 관계를 조롱한다. 그들은 외면당했고, 스스로도 외면했다. 그렇게 진실은 다시 한 번 새벽을 맞이하지 못한 채, 무거운 밤 속으로 꺼져간다.


공동체는 ‘무언가가 망가졌다는 신호’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징후를 회피했다. 이 회피는 무관심이 아니라, 더 절망적인 형태의 관성이다. 진실을 감당할 언어를 잃은 사회, 애도를 수행할 감각을 잃은 공동체. 기태의 죽음은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지켜야 했고, 누군가는 지켜졌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파수의 자리에 머물지 않았고, 결국 모두가 무너졌다. 그 무너짐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호명되지 못한 이름들이, 기억되지 못한 죽음들이, 인터넷의 어두운 골목을 떠돌고 있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누구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이름을 다시 부를 수 있을 때, 비로소 애도는 시작될 수 있는가.


애도는 지켜내야 가능한 일. 필라멘트 픽쳐스



그 밤의 끝에서, 다시 파수의 자리를 묻다


나는 그때 썼다.


세 친구에게 음산하고 침울한 깊은 밤은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벽은 온다는 사실, 그것을 알았더라면 힘겨워도 밤을 견뎌내고 새벽을 맞이했을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은 단순히 자연의 순환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새벽은 누군가가 끝내 그 밤을 ‘지켜내야만’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의지, 울음을 삼키는 단호함, 뒤돌아보지 않는 굳건함, 바로 그런 인간의 파수꾼 정신이 새벽을 불러낸다. 그들이 지켜내지 못한 그 밤은 너무도 깊고 어두워서, 그 시절의 나 역시 미숙하고 연약한 파수꾼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글을 썼던 그 마음, 그 눈물로 빚어낸 문장들이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끌어올렸다. 그러기에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파수꾼은 누구인가. 누가 애도되지 못한 죽음의 무게를 다시 입으로 불러내고, 누가 무너진 관계의 윤리를 복원하며, 누가 증오 대신 슬픔을 언어로 길어 올릴 것인가.


독립영화 <파수꾼>의 서사는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유효하다. 어설픈 저예산 영화임에도 그 담론은 여전히 우리 현실의 가장 깊은 상처를 꿰뚫는다. 오히려 지금, 그 이야기는 더욱 절실하게 되살려야 할 역사적 소명처럼 다가온다. 파수의 실패가 낳은 고통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서 세대적, 문화적 질병이 되었다. 그들을 미워하기 전에, 그들이 끝내 지키지 못한 것의 무게를 무겁게 느껴야 한다. 무수한 ‘놓침’과 ‘포기’가 쌓여 지금 우리의 불안과 분열을 이루고 있음을.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거나, 이전 세대를 부양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논리도 증명도 부재한 채 감정만으로 전염되는 ‘폴리 아 되’(Folie à deux), 감염성 감응증 같은 불안을 퍼뜨릴 뿐이다. 그 불안을 심어준 것도, 그 무게를 안겨준 것도 결국 앞선 세대의 주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시대에 쉰의 나이는 지나온 절반의 여정을 넘어, 남은 절반과 만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경계선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이 세대들과 공존하며 살아낼 것인가, 그것은 삶의 근본적 질문이자, 생존의 회심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질 때, 모두를 지켜낼 수 있다. 필라멘트 픽쳐스


나는 오늘도 여전히 파수꾼이 되기를 다짐한다. 감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말하고, 순수한 흔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그것이 나의 파수, 나의 지킴이며, 내가 다시 쌓아 올리는 새벽이다. 그날의 기태와 동윤과 희준, 그리고 내 안 깊은 곳에서 잊혔던 그 청춘이 언젠가 마침내 새벽을 마주할 수 있기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들이 끝내 닿지 못했던 그 새벽을, 우리는 이제 함께 지켜야만 한다. 그리하여 어둠의 끝자락에서, 불확실한 내일을 향해, 다시 한번 파수의 자리를 굳건히 해야 한다.


keyword
이전 06화스프레드시트 위의 위태로운 인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