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야 할 일>이 던지는 질문- 연대가 실종된 시대의 틈을 찾아
시스템이라는 괴물을 마주할 때
형광등 아래 중형 조선회사 사무실은 소리 없이 흐른다. 무채색 모니터 위에는 이름·직급·근속연수가 빼곡히 적힌 엑셀 시트가 무심히 떠 있고, 그 명단 아래 숨은 당사자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인사팀 대리 강준희(정성범)는 익숙한 손끝으로 키보드와 마우스를 오간다. 줄 단위로 이름이 지워지고, 셀 하나하나에서 한 사람의 고된 노동 시간이 계산기처럼 차갑게 털린다. 시스템의 위력은 이곳에서 가장 날카로운 형태로 드러난다. 숫자는 인간을 지우고, 책임은 모호한 판단과 기술적 조작 속에 해체된다. 본부장들의 눈치, 경영진의 심기, 무표정한 엑셀 시트가 하나로 연결될 때 노동은 더 이상 얼굴을 가진 행 위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이 『장인』에서 말한 '숙련의 윤리'는 사라지고, 인간은 생명이 아닌 데이터로, 노동은 숫자의 조립품으로 전락한다.
영화 <해야 할 일>은 한 중소 조선소의 구조조정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비극을 담담히 펼쳐 보인다. 채권단의 최후 통첩은 사무직 150명 감원, 그 실무를 맡은 이는 관리본부 인사팀의 준희다. 영화가 던진 핵심 질문은 준희가 수행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더 나아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비극적 아이러니에 있다. 책임과 기대에 부응하도록 교육받은 이 땅의 젊은이들처럼, 준희는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한다. 엑셀 함수를 동원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사측의 변명을 대변하는 기고문까지 공들여 쓴다. 그러나 그의 성실함이 빚어내는 결과는 누군가의 좌절이며, 어떤 가정의 낙심이며, 결국 한 사회의 붕괴다.
한나 아렌트의 통찰처럼, 관료제는 단순한 행정 체계를 넘어 인간을 익명적 구조에 복속시키는 비인격적 권력의 구현이다. 각 층위의 담당자들은 자신의 역할 수행에만 몰두하며, '상위 명령'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한다. 부장은 본부장을, 본부장은 경영주를, 경영주는 다시 채권사와 투자자를 지목하며 책임을 전가한다. 결국 사후 책임은 증발한다. 정량적 기준을 억지로 마련해 구조조정을 시행하려 하자, 각 본부장들의 개인적 민원이 빗발친다. '누구는 살리고 싶고, 누구는 내보내고 싶다'는 민원은 애초 작성된 구조조정 리스트를 뒤흔든다. 결국 인간은 숫자나 분류 기준으로 환원된다. 성과표, 나이, 부서 등으로 필터링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이야기를 가진 존재'로 인식되지 않는다.
시스템은 개별적으로는 권력이 없는 하부 구조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집행을 독점한다. '의사 결정자'는 멀고 모호한 존재인 반면, 실제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현장의 시스템'이다. 이로 인해 시스템은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책임을 지지 않는 괴물적 질서가 된다. 갈등과 번뇌의 시간으로 구조조정 리스트는 줄을 세우며 마무리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때 갑자기 경영진들이 결론을 뒤집어 아무 일도 없던 일로 덮자고 한다. 논리도 명분도 턱없이 부족한, 때가 아니고 상황도 안 좋다는 말로 일방 통보한다. 결과적으로 인사팀이 한 일련의 지난한 작업들은 ‘해야 할 일’이 아닌 ‘안 해도 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유는 단 하나다. ‘시스템’이 내린 결정.
파편화된 연대의 종말 뒤에 작은 균열들, 리좀적 저항
이전의 노력이 거대한 '우리'의 의제였다면,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파편화되고 해체된 공동체 속에서 개인은 더욱 작아졌다. 켄 로치의 영화 속 인물들이 거리로 나서는 것과 달리, <해야 할 일>은 사무실을 택한다. 이 영화에서 시위 는 그저 먼 소음 같은 배경음이고, 함성은 노조원들의 각자도생 셈법으로 설 자리가 없다.
전조련(전국 조선노동자연맹) 간부들이 모인 회의실 장면은 이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들은 생산직으로 확대되면 파장이 크다는 이유로 사무직만의 구조조정에 합의한다. 노조 간부들조차 내 이익, 내 조직만 지키면 된다는 계산 아래 서로를 외면하고, 노동권 확보라는 공적 과제는 사적 이해관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는 단지 전통적인 노동의 현장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현대 플랫폼 알고리즘 아래 퀵서비스 기사들은 자신을 '자유로운 노동자'라 믿으며, 플랫폼이라는 시스템이 기획한 자율적 착취의 기반을 스스로 만든다.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경고했듯, 개인이 스스로를 기획하며 체제에 종속될 때, 그 고통은 '자율적 착취'로 전환되기 쉽다.
그럼에도 작은 파열은 곳곳에 숨어 있다. 구조조정 대상이 아닌 인사팀의 오랜 경력자 손 대리(장리우)의 퇴직 결정과 자재팀 장 부장(강인기)이 희망퇴직서를 제출하는 장면이 그 대표적 예다. 손 대리는 전졸(전문대 졸업) 여성에게 십여 년 동안 일다운 일도 주지 않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이탈과 탈주를 선택한다. 장 부장의 딸이 아버지의 마지막 출근 날 꽃을 보내고 싶어 근무팀을 문의하는 전화에 준희는 그만 무너지고 만다. 한참을 쉬어간 대답은 울먹였고 수화기를 든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완전무결이라 생각했던 시스템에 대한 환상이 균열 생기기 시작한 순간이다.
손 대리의 자발적 퇴사는 시스템의 알고리즘으로는 무의미한 선택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자신과 같은 저학력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마지막 윤리적 책임이자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였다. 그녀는 스스로 엑셀 화면에서 이름을 지움으로써 이 시스템에 더는 자신을 내맡기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준희의 흔들림으로 작은 진동이 시스템의 거대한 매끈함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이 작은 결단은 중앙 권력을 무너뜨리진 못해도, 적어도 데이터로만 작동하던 체제에 틈을 낸다. 혁명적 스펙터클 대신, 미시적 접촉 지점 하나가 시스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숫자 뒤에 가려진 인간의 윤리는 이렇게 아주 느리고 비가시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 개념'은 기존의 위계적이고 중심화된 사고 구조에 맞서는 비선형적이고 탈중심화된 저항의 형식이다. 리좀적 저항이란, 중심 없이 퍼지는 다수의 비위계적 연결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 시스템의 틈을 벌리고 새로운 감각과 윤리를 형성하는 탈영토화의 흐름이다. 준희가 예비 아내에게 고백하는 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너에게 말하지 못했다는 말은 말의 윤리를 회복하려는 몸부림이다. 명령을 수행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역할이 빚어낸 비극을 부끄러움으로 드러낸 순간, 그는 주체로서의 윤리적 거리와 책임을 되찾는다.
엑셀 화면 너머의 얼굴을 마주할 때
영화 <해야 할 일>은 작고 어설픈 영화다. 미장센이라는 말을 꺼내어 볼만한 장면이 펼쳐지지도 않으며 서사의 굴곡도 납작하게 흐른다. 서사의 굴곡이 없으니 배우들의 말과 행동도 연기인지 실상인지 분간 어렵다. 인물은 입체적인지 평면적인지 따져가는 것도 무의미하게 펼쳐진다. 이 영화의 평가는 영화의 내부가 아닌 영화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 <해야 할 일>은 유의미하다. 세상과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생각을 펼치게 하는 것이 영화의 의미다. 세상 안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 영화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로 인해서 영화는 영화 밖에 손을 내밀어 또 다른 의미의 연대를 이루고 답을 찾을지도 모르니까.
영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느냐 묻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고, 어떤 언어를 잃었으며, 어떤 얼굴을 지나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 균열, 감내 속에서 번지는 부끄러움과 고백, 타인의 얼굴을 향한 시선의 귀환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정치적 선언일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날 시스템은 우리를 알아서 잘 하게 만드는 기술로 진화했다. 플랫폼 노동자는 이 구조에 반대하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효율을 익힌다. 누구도 명령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복종하는 질서. 그 질서 속에서 연대는 점차 불가능해진다. <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시대를 사유한다. 단일대오의 스크럼이 더는 통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손익을 계산하는 풍경 속에서 영화는 묻는다. 그렇다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정답은 없다. 그러나 손 대리의 말처럼, '15년을 견디며 살아남은 잔존물'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 그것은 균열이 된다. 구조조정은 하나의 제도이지만, 거기서 누가 무엇을 '감내했는가', 누가 어떤 순간에 '거절했는가', 누가 말없이 '돌아섰는가'는 모두 서사의 시작점이 된다. 시스템의 압제는 결국 인간의 방식으로만 틈이 생긴다.
아렌트는 진실을 말하고 생각하는 힘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비인간적 기계 체제와 구분된다고 보았다. 푸코가 '자기 돌봄'을 통해 주체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했듯, 준희의 고백은 노동 현장에서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길임을 입증한다. 파편화된 공동체 속에서, 시스템의 압제 앞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다. 첫째, 치밀한 감내다. 권력의 비가시적 폭력 앞에서도 스스로를 돌보며 고통을 인식하면 최소한의 윤리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준비된 전복이다. 작은 파열이 모여야만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스템이 흔들린다. 셋째, 전략적 회피다. 우리는 잠시 체제의 그물망을 벗어나 스스로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회피는 영원한 피난처가 될 수 없기에, 언젠가 다시 엑셀 화면 앞에 서야 한다. 그 화면 너머의 얼굴을 응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은 균열은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