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로비>(2025) 리뷰
배우 하정우가 연출한 영화 <로비>가 쿠팡플레이에서 스트리밍을 시작했다. 여러 가격 정책과 Go-To-Market 채널 전략이 혼재하는 오늘, OTT로 이관되는 시점과 양상은 더욱 복잡하고 다층적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영화 산업 전반에 순풍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균열의 조짐일지는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 배급 파워십의 스크린 독점에서 밀려난 다채로운 작품들이 관객에게 닿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극장 유입이 점차 줄어드는 구조적 반작용은 더는 단순한 통계로 가늠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장 접근이 어려운 이들에게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작을 안방에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용하다.
영화 <로비>는 배우 하정우의 세 번째 연출작이기도 하다. <롤러코스터>(2013), <허삼관>(2015)에 이은 연출 겸 주연작으로, 그 특유의 해학과 허무의 미학으로 다시 관객을 찾았다. 이야기 구조로 보자면, <롤러코스터>에서 보여주었던 도미노식 반응의 소동극적 전개와, 원작이 있던 <허삼관>에서의 허무한 웃음 뒤에 배어 있던 소박한 교훈이 어느 정도 혼합되어 있다. 앞선 두 작품에서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강점만을 취해 배열한 듯한 이번 소동극은, 하정우 특유의 ‘농짓거리’로 웃음과 활력을 자아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로비>라는 타이틀은 국책 사업 수주 과정에서 벌어질 법한 ‘청탁 소동’을 중심에 놓는다. 로비, 청탁, 접대, 영업 등의 익숙한 거래 행위를 유쾌한 풍자의 대상으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모든 장면들이 오로지 상상과 전언에만 기댄 피상적 묘사에 머문다는 데 있다. 사회생활, 월급쟁이로 살아본 적 없는 유명 배우의 어설픈 서사는 현실감 없는 설정으로 핍진성을 스스로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실재하는 부조리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 자체가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역전된 아이러니만 남는다.
입구에서 정치를 시작한 단어 ― ‘로비’의 어원과 공간의 은유
‘로비(lobby)’라는 표현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주로 정치, 행정, 기업 등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비공식적 압력 또는 설득 활동을 뜻하는 말로 통용된다. 이와 함께 쓰이는 ‘청탁’은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개인적 부탁을 하거나 받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청탁 로비’라는 복합어는 외래어의 제도적 맥락과 토착어의 정서적 뉘앙스가 겹쳐진, 복잡한 언어적 풍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말은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고정되어 사용된다. ‘청탁’은 흔히 ‘사적 이해에 따른 부탁’, 또는 ‘권한을 넘어서는 요청’으로 받아들여지며, 공정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담는다. ‘청탁 로비’는 이러한 정서를 더욱 강화하며, 금품 수수나 향응 제공을 통한 이권 개입, 비공식적이고 은밀한 설득 활동을 뜻하는 부패의 상징어로 자리잡았다. 언론 보도 속 '청탁 로비 의혹', '로비 리스트', '정·관계 로비 연루' 등의 표현은 그 전형적인 용례다.
그러나 사실 '로비'라는 단어 자체는 결코 부정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영어의 lobby는 본래 건물의 입구, 복도, 현관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는 1층 로비를 떠올리면 된다. 이 단어는 라틴어 lobium 또는 중세 라틴어 lobia에서 유래한 것으로, 건축적으로는 사람을 맞이하고 기다리는 공적 공간을 가리킨다.
정치적 의미로의 전환은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정치문화에서 비롯되었다. 영국 의회 유래설에 따르면, 당시 하원의사당 내부로 들어가기 전 의원들이 머무르던 대기 공간인 ‘로비’에서 일반 시민, 이해관계자, 이익집단 대표들이 의원들과 접촉하여 설득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졌다. 이 공간에서의 대화와 설득이 점차 제도화되면서, lobbying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압력 또는 설득 활동’을 뜻하는 말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미국 유래설은 백악관 인근 윌라드 호텔(Willard Hotel)의 로비에서 비롯된다. 이 호텔 로비는 정치인들이 자주 찾는 장소였고, 기업이나 이익단체의 대표들이 그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하며 정책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이다. 이처럼 '로비'는 원래 물리적 공간에서 출발해,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설득과 영향력 행사’를 은유적으로 확장해 가며 제도화된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로비'는 정책 결정, 입법, 행정 절차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정부, 정치권,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정치적 설득 행위를 포괄한다. 민주주의 국가들 가운데는 이를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로비스트 등록법 등을 통해 투명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미국에는 ‘로비 공개법(Lobbying Disclosure Act)’이 존재하고, 유럽연합(EU) 역시 유사한 등록 및 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정당한 이해집단의 참여는 공적 의사결정에 필수적이며, 제도적 경로를 통해 로비는 곧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제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청탁 로비’는 대부분 제도 밖의 은밀한 권력 작동, 불법적 이권 개입을 뜻하는 부정적 맥락으로만 사용된다. 이는 단순한 언어 감각의 문제를 넘어, 불투명하고 비공식적인 권력 구조에 뿌리를 둔 현대 정치·경제사의 산물이다. 로비 활동이 제도화되지 못한 채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조, 그리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부터 이어져 온 정경유착, 권력과 자본의 비밀스러운 결탁은 ‘로비’라는 단어에 부정의 기운을 깊숙이 각인시켜 왔다.
실재 없는 재현은 그저 거짓 ― 영화 <로비>와 언어의 퇴락
영화 <로비>가 그려내는 ‘로비’는 정치적 설득의 제도적 맥락에서 출발한 행위라기보다는, 술잔과 접대, 말장난과 곡예로 대체된 희화된 청탁의 연쇄에 가깝다. 그것은 ‘로비’가 지닌 공적 함의―민주주의 정치 구조 속에서 이해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제도적 경로로 전달하려는 시도―를 지우고, 사적 이해관계가 거래되는 ‘밥값의 기술’ 정도로 축소된 형상이다.
이러한 희화화는 단순한 장르적 유희를 넘어, 현실 사회의 의식 구조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영업’과 ‘접대’, ‘로비’와 ‘술자리’가 언어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풍토, 그리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술을 잘 따르는 사람’이 로비스트로 상상되는 사회적 천박성. 이러한 감각의 현실이 영화 속 장면들을 단순한 오락의 장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서 ‘영업’은 오랫동안 사교 기술이 아닌, 관계의 이면에서 은밀히 작동하는 호의의 강요와 대가의 계산으로 치환되어 왔다. 영화 <로비>는 이 현실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낮은 층위의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재연하는 데 머무른다. ‘로비’는 여기서 ‘로비스트’가 아니라 ‘오더 따러 다니는 사람’, ‘술자리 조율사’쯤으로 전락한다.
한국어 속 부정적 표현인 ‘정치질’과 ‘영업질’은, 집단 내외의 유리한 고지를 얻기 위한 정당한 경쟁을 넘어서는 이면의 노력을 폄하할 때 등장한다. ‘영업질’은 특히 대가와 향응, 물질적 투여가 개입된 행동을 암시하며 더욱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언어습관에 있다.
정치도, 영업도 죄가 없다. 정치 없는 사회는 모든 갈등이 폭력으로 귀결되거나, 사법이라는 또 다른 권력의 도구에 의존하게 되는 야만으로 빠진다. 영업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과 기획이 있어도, 그것을 시장 안에서 실현시키는 ‘판매의 화신’이 없다면 자본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정치와 영업은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현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능케 하는 핵심 요소다.
로비 역시 마찬가지다. 그 본래의 정치적 기능과 제도적 의미가 왜곡된 채, 인식의 오해와 언어의 오류 속에서 ‘로비’는 여전히 오해받는다. 정작 공론장의 설득으로서, 영향력의 행사로서의 로비에 대한 성찰은 그만큼 부재하다. 언어는 단순한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인식의 지층이다. 영화 <로비>는 그 지층의 얕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로비'라는 단어의 퇴락을 증언하고 있다.
말장난과 소동의 연쇄라는 코미디 장르의 본령은 살아 있으되, 그 말의 윤리와 정치적 무게에 대한 자각은 사라졌다. 허공에 흩날리는 농담만이 남는다. 그 농담은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기지만, 문제를 성찰하거나 전복하려는 깊이에는 이르지 못한다. 결국 영화 <로비>는 웃기되 불편하고, 보여주되 가리며, 언어를 소비하되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로비’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진심의 설득인가, 계산된 접대인가. 말을 건네는 일인가, 말없이 술을 따르는 일인가.
부조리극과 리얼리즘 사이 ― ‘소외효과’의 오용
문화이론가 리처드 다이어는 재현이 언제나 선택적이며 구성된 것이기에, 모든 재현은 곧 왜곡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특정한 경험을 마치 전체인 양 일반화할 때, 재현은 억압의 도구가 되고 만다.
“재현은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선택되고 구성된 모든 재현은, 필연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을 담고 있다.”
― Richard Dyer, The Matter of Images (1993)
영화 <로비>는 ‘로비’라는 정치 행위를 그려내면서, 그것을 제작진이 경험하거나 상상 가능한 협소한 범위 안에 가둔다. 정치 제도의 설득 과정, 이해관계 간의 긴장, 공공성을 둘러싼 윤리적 논쟁은 그려지지 않고, 골프접대 자리를 중심으로 한 말장난과 처세술의 풍경만이 반복된다. 로비가 지닌 제도적, 윤리적, 설득의 맥락은 생략되고, 개인적 처세와 향응의 기술만이 전면화된다. 그렇게 ‘접대’라는 단면은 전체의 전형으로 둔갑하고, 풍자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현실은 오히려 지워진다.
이는 다이어가 경고한 바와 같다. 단면적 재현은 재현의 윤리를 무너뜨리고, 현실의 구조를 감추는 장치가 된다. 영화 <로비>는 현실을 재현하려는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현실을 다시 구성하는 데 실패한 모사에 그친다. 특히나 ‘로비’라는 단어에 붙는 공적 정치행위로서의 무게를 가볍게 소비함으로써, 언어와 정치의 관계를 허술하게 만든다.
<로비>는 장르적으로는 소동극, 혹은 부조리극의 양식을 차용하고 있으나, 그것이 사회비판적 장치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은 ‘거리두기’의 부재 때문이다. 브레히트가 말한 ‘소외효과(Verfremdungseffekt)’는 관객이 사건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대신, 현실의 모순을 이성적으로 직면하게 만드는 연극적 기법이다. 그러나 <로비>는 소동극의 형식은 차용하되, 그 형식이 가져야 할 전복적 거리두기는 실종되고 만다. 감정의 몰입도, 이성의 각성도 없이, 현실은 허공에 희화된 채 사라진다.
말하자면, 웃음은 있으되 깨달음은 없고, 소동은 있으되 문제의 구조를 가시화하지 않는다. 이는 브레히트적 의미에서 ‘소외효과’의 오용이며, 결과적으로는 소외의 실패다. 이와 대조적으로, 해롤드 핀터는 언어의 공백과 침묵, 비현실적 설정 속에서도 현실의 억압 구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의 극은 부조리의 탈을 쓰되, 그 속에서 폭력과 불안, 침묵과 억압의 리얼리즘을 직조해낸다.
<로비>는 그러한 층위에 도달하지 못한다. 장르적 코미디의 문법에 갇힌 채, 비판도 전복도 없이 현실을 한낱 유희의 배경으로만 소비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무게는 덜어지고, 권력의 부조리는 가려진다. 웃음을 준다기보다 웃음으로 덮어버린다. 마치 ‘로비’라는 단어조차, 영화의 끝에 가서는 말장난과 술수의 다른 이름처럼 허망하게 휘발된다.
세상이라는 여행길은 아는 만큼 보인다
영화 <로비>는 ‘로비’라는 개념을 풍자하고자 하지만, 비판적 거리 없이 곧장 희화로 흘러들며, 결과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편협한 인식을 되풀이하거나 오히려 강화하는 역설에 빠진다. 그것은 더 이상 패러디라기보다는 캐리커처에 가깝고, 비판이라기보다는 누구를 조롱하는지도 불분명한 모호한 장르 소비에 머문다. 린다 허친슨(Linda Hutcheon)의 패러디 이론이 말하듯, 진정한 패러디는 단순한 흉내내기나 풍자가 아니라 비판적 거리감과 인식의 전복을 동반한 창조적 재구성이다. 이 영화는 그 전복의 순간을 끝내 만들어내지 못한 채, 익숙한 웃음의 반복 속에 스스로를 소비한다.
현실의 다층성과 모순을 드러내는 대신, 협소한 경험과 피상적 전언이 전부인 양 제시될 때, 그것은 영화적 기술의 문제를 넘어서는 윤리적 결핍이다. 언어를 통해 현실을 재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그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로비>는 소동극의 형식을 빌려 부조리를 말하려 하지만, 정작 그 부조리는 낯설게 뒤틀린 거울이 되지 못한 채, 제작자의 얕은 세계관을 재확인시키는 농담으로 미끄러진다.
부조리를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부조리하지 않은, 비판을 말하면서도 어떤 전복도 시도하지 않는 이 아이러니는 결국 감독 자신의 한계로 되돌아온다. 영화가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이 작품은 사유의 겸허함을 보여주지 못하며, 오히려 시크함을 가장한 자기 소비의 전략에 의존한다. 그것은 감독이자 각본가인 하정우가 세상을 바라보는 깊이와 너비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러 논란도 시니컬한 표정으로 가볍게 넘기고, 스스로를 희화하는 방식으로 ‘힙함’을 가장하려는 태도는, 결국 자기 연민이 덧칠된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화가로서의 하정우가 보여주는 감각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이 인식은 더욱 짙어진다.
한국 영화계에도 두터운 연기 경험 위에 감독으로서 내면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배우가 필요하다. 정우성, 이정재, 유지태 등 몇몇 배우들이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었지만, 아직 ‘필모그래피’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탐색의 언저리에 머문다. 물론 방은진처럼 배우로서의 밀도를 감독으로 전이해 성공적인 이행을 이룬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어디엔가 이르고도 못 미친 채 맴도는, 그런 ‘미진함’이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단지 연출 기술의 문제도, 시장의 문제도 아니다. 인문학적 토대의 허약함, 다시 말해 세계를 해석하고 거리 두며 사유할 수 있는 언어의 부재가 이 부진의 본질이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화의 펀더멘털’이 아닐까. 말하자면, 예술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단지 감각이나 재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 곧 존재를 관통하는 타자의 언어와 그 균열을 받아들이려는 지성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과연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포드, 조지 클루니, 브래들리 쿠퍼와 같은 감독-배우를 만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단지 ‘스타’의 탄생이 아니라, 세상을 배우고 감각하고 다시 말로 되돌려줄 줄 아는, 그 겸허하고도 치열한 여정의 가능성이다.
그 여정 위에서, 우리는 늘 묻게 된다.
“세상이라는 여행길은 아는 만큼 보이는가, 아니면 보이는 만큼만 알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