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 침묵 속 춤의 의미
영화 <다음 소희>(2023)에는 일터로 위장된 착취의 시스템 안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소녀가 있다. 그녀는 학생이자 직업훈련 실습생이지만, 동시에 자본에 종속된 노동자다. 하루 정해진 수십 통의 인바운드·아웃바운드 콜, 감정을 덜어내야 가능한 응대의 시간, 그런 시간과 콜이 수치화되어 상품의 격을 갖추는 곳이 그녀의 일터다. 그곳에서 소녀는 그저 미세한 연료이며, 기록되지 않는 무명의 존재다. 느닷없이 생을 스스로 마감한 그녀는 누구의 애도도 허락되지 않은 채, 삭제된 리소스로 전락한다. 사연도, 유서도 없는 감정 불가능한 죽음, 그저 시스템의 오류처럼, 삭제 버튼 하나로 지워지는 생이다.
영화 <다음 소희>는, 고등학생 소희(김시은)가 경험하는 사회적 고통과 압박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소희는 사실상 주체적인 선택이 없는 상황에서 콜센터 실습이라는 환경 속에 감정 노동자로 편입된다. 이 영화에서 고통은 특수한 사건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점차 커져가는 침묵의 고통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다르게 읽혀야 한다. 소희는 말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말을 할 수 없게 된 존재다. 그녀는 분명히 말한다. 전화기 너머로, 상담 일지에, 교사에게, 친구에게, 혹은 무표정한 얼굴 너머의 진동으로. 그러나 그 말은 반향을 갖지 못한 채 흩어진다. 말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지도록 내버려진 말, 그러므로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외면된 목소리의 잔해다.
소희의 침묵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소희의 침묵”이라 말할 때, 그 침묵이 마치 소희의 내면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처럼, 혹은 리얼리즘의 절제된 미학적 장치로 포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침묵은 그녀가 선택한 언어가 아니라, 선택조차 허락되지 않은 비자발적 결과다. 소희는 친구들 앞에서 수다스럽고 세상의 기울어진 정의에 발끈하며 부당한 처우를 그냥 지나침이 없는 소녀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침묵'의 의표를 누구나 안고 떠난다. 말할 수 있는 조건이 제거된 자리에서,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체계에서, 소희는 점점 목소리를 지우게 된다.
그녀는 상담일지에, 전화기 너머로, 친구에게, 교사에게 분명히 말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 말은 허공 속으로 쓸려가고, 접수되지 않고, 귀 기울여지지 않으며, 마침내 ‘있음’으로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라지도록 유기된 것이다. 그녀의 침묵은 무언가를 감추는 것도, 스스로를 닫은 것도 아니다. 말이 작동하지 않는 자리, 말이 세계와 접속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흘러나온, 외면된 목소리의 잔해, 혹은 음파조차 되지 못한 침몰된 진동이다.
이 침묵이 가장 강렬하게 시각화되는 장면은, 그녀가 연습실에서 혼자 춤을 추는 장면이다. 아무도 없는 좁은 공간. 사방은 벽으로 막혀 있고, 거울 속의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청중이자 반향이다. 소희는 이어폰을 꽂고, 음악이 들릴 테지만 우리는 들을 수 없다. 관객에게 그 음악은 삭제되어 있고, 남겨진 것은 소희의 몸짓뿐이다. 그렇기에 이 춤은 더욱 침묵 속에서 빛난다. 그녀는 말로 닿지 못한 감정을 몸의 진동으로 말한다. 언어의 실패가 도달한 자리에 몸이 대신 나선다. 춤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녀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없이 외롭고, 구조적으로 격리된 몸짓이다. 말이 배제된 침묵의 시간, 소리는 지워진 공간에서,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몸으로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장면은 어떤 감정의 해방도, 카타르시스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춤은 닿지 않는 언어와 구조 속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자기 표현의 방식이며,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않을 운명이라는 절망을 함께 품는다. 그래서 이 춤은 아름답지 않다. 이 춤은 구조적 절망의 안무이며,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조차 기록되지 않을, 그런 쓸쓸한 발버둥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침묵—그리고 그 침묵으로부터 솟아오른 춤—에 대해, 누구도 묻지 않고, 듣지 않으며,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무반응, 무책임, 무관심의 체계야말로 소희를 침묵하게 만든 결정적 주체다. 말이 아니라, 듣지 않는 귀, 구조적 무반응이 문제의 핵심이다. 누군가 말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귀를 닫고 있다는 증거이며, 세계가 반향의 회로를 차단했다는 증거다. 침묵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 고립된 사람 앞에서, 우리는 그 침묵을 미학적으로 윤색하거나, 서사의 장치로 전유해서는 안 된다. 그 침묵을 낳은 조건, 즉 말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를 드러내야 하고, 침묵을 가능케 한 공동체의 공모를 성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소희의 침묵은 그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비판되어야 할 것은, 그 침묵을 강요하고, 방치하고, 낭만화한 세계다. 그녀가 말할 수 없게 된 사회, 말하려 해도 반응 없는 관계망, 말의 경제가 존재하지 않는 감정 노동의 구조, 그리고 끝내 그녀의 죽음을 ‘실습생의 불운’ 정도로 치부하는 무감각한 언어들이야말로 윤리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도록 요구한다. 말하려 했으나 닿을 수 없었던 그 모든 음성, 사라졌으되 기록되지 못한 죽음들, 유서조차 남기지 못한 존재들의 침묵은 오늘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응시의 대상이며, 언어적 긴장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침묵은 지금-여기의 현실 속에서도 낯설지 않다. 구조적 폭력에 의해 귀를 잃은 청년들, 정신적 붕괴에 이르도록 과잉 동원된 감정 노동자들, 침묵을 강요당하고도 침묵을 탓받는 수많은 ‘소희들’이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은 이들이 아니다. 말을 하려 했으나 반향이 지워진 세계 속에 유폐된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소희의 침묵은 우리가 애써 외면한 세계의 음파이며, 그 잔향이다. 따라서 우리는 “침묵”이라는 단어를 쓸 때, 그것이 그녀의 선택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그 침묵이 감각적 상징이나 미적 포즈가 아닌, 사회적 실패의 증언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침묵 끝에서, 소희는 춤을 춘다. 마지막까지도 말할 수 없게 된 존재가, 말 대신 남긴 단 하나의 잔재.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 누구도 응시하지 않는 몸짓. 그곳에야말로 우리가 애도해야 할 가장 내밀한 윤리의 자리가 놓여 있다.
춤은 말보다 앞서서 무너지는 육체의 언어
이런 소희의 세계에, 춤이 등장한다. 절망이 흘러넘치는 세상 속, 춤이라는 행위는 모순적이다. 춤은 기쁨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의 마지막 흔들림이기도 하다. 영화 <다음 소희>에서의 춤은 제의가 아니라 잔해의 몸짓이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몸은 저항하고, 흔들린다. 이때의 춤은 표현이 아니라, 발화되지 못한 감정의 압축이며, 감정 노동의 찌꺼기가 몸으로 흘러나오는 파열의 언어다.
소희에게 춤은 주체의 표출이라기보다, 존재의 경계에서 떠밀리는 흔들림, 다시 말해 감정의 해소가 아니라 감정의 밀폐가 빚어낸 격류다. 감정이 고여 고여 더는 언어로도 표출되지 못할 때, 오직 몸만이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리듬이 아니라 균열이며, 퍼포먼스가 아니라 침묵의 또 다른 말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Dancer in the Dark)>(2000)에서도, 춤은 언어의 붕괴 이후에 도달하는 마지막 통로로 나타난다. 주인공 셀마(비요크)는 체코 이민자 출신으로, 미국의 한 공장에서 일하며 서서히 시력을 잃어간다. 그녀는 아들에게 시력을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실명과 삶을 희생하고, 끝내 비극적인 사형에 이른다. 하지만 셀마는 그 모든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상상한다. 현실은 점점 어두워지지만, 그녀의 상상은 점점 더 뚜렷해진다.
그녀는 공장의 기계음, 철판이 구르는 소리, 발걸음 소리마저 리듬으로 변환하며, 일상을 뮤지컬의 무대로 치환한다. 이때 춤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그녀의 인식이 남겨놓은 마지막 생의 흔적이며,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감각적 저항이다. 셀마의 춤은 환상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근원은 현실의 고통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환상은 결코 그녀를 구원하지 못한다. 셀마는 노래하면서 죽지만, 그 죽음은 뮤지컬의 피날레가 아니라, 끝내 들리지 않는 절규로 남는다.
소희의 춤과 셀마의 춤은 모두 “말하지 못하는 세계에서의 마지막 언어”라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둘 다 말의 세계 바깥에서, 말의 실패 이후에, 춤이라는 몸의 리듬으로 진입한다. 셀마가 노래할 때마다 공장 소음이 리듬이 되고, 일상이 뮤지컬로 바뀌는 것처럼, 소희 또한 몸으로 무언가를 발화하고자 하지만, 그녀를 감싸는 현실은 그조차 비극으로 끌어내린다.
그러나 차이는 명확하다. 셀마의 춤은 내면의 환상에서 비롯된 잠시의 탈주이자 마법이다. 그녀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장치를 통해 현실의 어두움을 견디고, 그 장치 안에서만큼은 주체가 된다. 반면, 소희에게는 그 어떤 장르적 해방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의 춤은 환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의 벽 앞에서 감정이 누출되는 균열이다. 무대도 조명도 음악도 없는 연습실 구석, 혼자 낡은 이어폰을 끼고 추는 무음의 춤은, 발화조차 거부당한 소녀의 몸이 세상과 연결되는 최후의 접점이다.
환상과 무대가 없는 세계에서, 춤은 더 이상 구원도 해방도 되지 못하고, 오직 절망의 진동으로 남는다. 언어의 실패, 제도의 침묵, 공동체의 외면 이후에도 끝끝내 살아남는 감각의 마지막 형태. 춤은 ‘몸으로 견디는 언어’이며, 동시에 ‘몸으로 무너지는 언어’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이 아니라, 애초에 말할 수 없게 된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증언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증언은, 춤을 춘 자만이 아는 침묵의 깊이에서 시작된다.
말 없는 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응시
소희와 셀마의 춤은 미세 노동이라는 동시대 자본주의적 구조의 틈에서 발화되는 감각적 언어다. 이 춤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 존재 자체의 긴장을 품은 움직임이며, 억압과 통제 속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진동이다. 미셸 푸코가 말한 생명정치의 통치성 하에서, 이들은 하나의 기능으로 관리되는 신체이며, 감정마저도 규율되고 표준화된 양식으로 재편된다. 산업화된 감정노동의 장에서, 특히 소희는 감정의 억제가 곧 숙련도의 일부로 간주되는 구조에 위치하며, 그 억압의 부산물이 파열의 형태로 몸에서 흘러나온다. 그녀의 춤은 말이 아니라, 그 말조차 사라진 자리에서 터져 나오는 파편이며, 제어된 감정이 감당할 수 없는 한계로 밀려왔을 때 몸이 반응하는 절규이다.
로런 베를랑이 말한 '잔혹한 낙관주의'(Cruel Optimism)의 개념은 이러한 상태를 보다 분명히 조명한다. 미래를 위한 실습이라는 제도적 약속, 성공을 향한 계단이라는 이름의 현실참여가 사실상 그녀를 정서적, 육체적 소진의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는 구조였다는 것. 소희는 스스로 희망을 품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움직였을 뿐이고, 그 안에서 감정의 억제는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억제가 지속될 수 있는 시간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그 한계선에서 감정은 언어를 거치지 않고 몸으로 흘러나온다. 춤은 이처럼 마지막 경계에서 벌어지는,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격류이며, 구원이라기보다 침몰의 몸짓이다.
침묵 또한 이와 같은 구조적 억압 속에 자리한다. 침묵은 단지 말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관리되고 말이 수거되지 않은 상태다. 소희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이가 아니다. 그녀는 말했고,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으며, 상담 교사에게도 단서를 남겼고, 병원에서의 절박한 표정을 통해 고통을 전했다. 그러나 그 모든 목소리는 시스템의 청각에 닿지 않았다. 말이 없는 존재란, 실은 들어주는 이가 없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의 침묵은 자발적이기보다는 수신의 부재로 인해 생성된 것이다. 듣는 이가 없는 세계에서, 말은 곧장 침묵으로 전락하고, 침묵은 다시 고립의 감옥이 된다.
<다음 소희>와 <어둠 속의 댄서>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과 감정노동, 그리고 몸의 언어라는 주제에서 깊이 연결된다. 두 영화는 모두 여성의 몸을 통해 구조적 폭력을 조명하고, 말이 닿지 않는 세계 속에서 춤과 노래가 어떻게 생존의 마지막 기호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준다. 셀마는 상상 속 뮤지컬로 현실을 견디며 감각의 탈주를 시도하지만, 그 환상은 현실의 질곡을 넘어서지 못하고 붕괴한다. 반면 소희에게는 그러한 환상조차 부여되지 않는다. 그녀의 춤은 꿈의 대체물이 아니라, 감정의 폐허 위에서 마지막으로 흔들리는 절망의 진동이다.
춤은 말보다 먼저 반응하는 육체의 언어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감정의 무게를 감당한다. 말로는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지점에서, 몸은 제 감정을, 고통을, 소외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소희가 연습실에서 혼자 이어폰을 낀 채 추는 춤은 그런 파열의 장면이다. 그녀의 몸은 말하지 않지만, 그 침묵의 깊이만큼 격렬히 흔들린다. 감정은 표면 위로 드러나지 않고, 오직 진동으로 남는다. 무대도 관객도 없는 그 춤은 구원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조차 무력해진 시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 소희는 사라진다. 형사 오유진(배두나)은 그녀의 마지막 발자취를 좇으며, 그녀가 보낸 흔적을 되짚는다. 그 흔적은 데이터가 아니고, 공식 문서도 아니다. 그것은 문득문득 남겨진 신체의 기억, 흔들림의 기억이다. 소희의 행방을 더듬는 유진은,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사건을 가능케 한 구조의 실루엣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건을 가능케 한 침묵을 통과하는 방식으로 소희를 향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소희의 춤을 기억한다. 오유진은 함께 춤을 추지 않지만, 그녀의 얼굴과 시선은 소희 춤의 흔들림을 안다. 소희의 춤은 누군가가 기억하지 않으면 곧장 사라질 리듬이다. 그녀의 춤은 노래되지 않은 감정이며, 기록되지 않은 절규이자, 들려지지 않은 사유다. 소희는 춤을 춤으로써 살고자 했다기보다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몸을 흔든 까닭은, 말할 수 없는 세계에서 말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절박한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가 춤을 춘 이유를 묻기보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귀에 대해 먼저 사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