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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앉은 틈에서 피어난 미래의 시간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 리뷰

by 박 스테파노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 총 12화로 종영했다. 쌍둥이가 서로의 역할을 바꾼다는 다소 익숙한 설정이었지만, 그 안을 관통한 서사는 결코 낡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이곳을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건네는 하나의 챈트(chant), 응원의 노래였다. 특히 여전히 사회적 약자이자 구조적 소수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삶에 집중하며, 말 그대로 찬사이자 위로로서의 드라마를 완성했다. 넘치지 않는 우리말, 우기지 않는 플롯, 그 절제 속에 깃든 연대의 진심은 오래도록 남는다. 진정한 F코드의 서사이자 기호였던 <미지의 서울>은, 2025년 상반기를 대표하는 드라마라 불러도 지나치지 않다.


쌍둥이 혹은 형제자매가 서로의 자리를 바꾸며 벌어지는 해프닝은 익숙한 구조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부터, 디즈니 틴 무비 전성기의 린제이 로한 대표작 <The Parent Trap>(1998)까지. 이 이야기들은 전형적인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상상 실험이자, 정체성과 타자성 사이를 탐색하는 서사다. 쌍둥이의 역할 교환은 결국, 내가 아니었던 나를 상상하게 만드는 철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데리다의 ‘차연(différance)’처럼—같지만 다른 존재, 유사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은 조건 위에서 자아는 스스로의 경계를 형성해간다.


1931년작 <왕자와 거지>, 1998년 <The Parent Trap>. 월트 디즈니



경계 위의 정체성 – 나는 ‘너’로 살아볼 수 있는가


미래와 미지(박보영 1인 2역)는 일란성 쌍둥이다. 외모만 보면 엄마(장영란)조차 구분하기 힘들 만큼 닮았지만, 성격과 태도, 삶의 방향은 뚜렷이 갈린다. 미래는 내성적이고 침착하며, 전교 상위권을 다투는 우등생이다. 반면 미지는 외향적이고 덜렁대지만, 육상에 소질을 보여 체대 진학을 꿈꾼다. 미래는 가족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냉정한 편이고, 미지는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백수지만 넘치는 친화력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유쾌하게 살아간다. 꼭 닮은 얼굴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자리를 바꾸는 설정은 단순한 소동극을 넘어, 정체성과 존재에 대한 다층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쌍둥이의 자리 바꾸기는 장난이나 속임수의 차원을 넘는다. 그것은 존재의 경계를 실험하는 행위이며, ‘자아’라는 명제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곧 “나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가”라는 회의로 밀려나고, 더 나아가 “나는 너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질문으로 번진다. 역할 교환은 정체성을 하나의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타자의 자리에 들어섰을 때 드러나는 반사와 전이의 운동으로 보여준다. 쌍둥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자기동일성의 허상을 시험하는 일종의 철학적 퍼포먼스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가면’을 써야 타인의 삶을 흉내 낼 수 있다고 믿지만, 쌍둥이는 애초에 서로의 얼굴이라는 가면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이 단지 외형의 유사함을 넘는다면, 그들은 서로를 대신해 고통받고, 사랑하고, 심지어 복수할 수 있는 권리를 공유한다. 결국 이 자리 바꾸기는 “살아낸다는 것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나아간다. 살아낸 이가 주체인가, 살아지도록 만든 이가 주체인가. 이 물음은 ‘닮은 존재들’의 경계를 확장하며, ‘나와 같은 처지의 우리 모두’로 이어지는 윤리적 연대의 가능성을 호출한다. 이 질문의 여백만으로도, <미지의 서울>은 빛난다.


쌍둥이는 애초에 서로의 가면을 쓰고 태어 난다. 1인 4역이 되어 버린 박보영. tvN



미학의 전복 – 동일성의 미묘한 균열


쌍둥이가 서로를 흉내 낼 수 있다는 설정은 이야기꾼에게 가장 매혹적인 유혹이다. 외형은 같되 내면은 다른 두 존재가 바꿔치기되는 순간, 모든 ‘차이’는 외적 감각에서 지워지고, 오직 내면의 균열만이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더 이상 ‘눈’으로 구별하지 않고, 관계와 기억, 말의 리듬을 통해 정체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 전복된 인식은 감각의 미학을 흔들며, 그 자체로 서사의 힘을 획득한다.


이 지점에서 많은 창작자들은 자주 유혹에 머문다. 설정의 매력에 빠져 현실과의 대화를 유예하고, 이야기 내부에 틀어박혀 독백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지의 서울>은 이 함정을 단호히 비켜선다. 단지 쌍둥이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그 주변의 ‘우리’들을 즉각적으로 호출한다. 미지가 세상과 단절하며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 때, 가족은 외면하지 않는다. 특히 할머니(차미경)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있음의 의미를 부지런히 전한다. 엄마는 한 몸에서 낳았으나 서로를 구별할 수 없는 딸들을 홀로 키워내며, 그 복잡한 사랑의 책임을 끝까지 짊어진다. 이 관계의 연대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선다.


미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묵묵히 곁을 지키는 호수(박진영), 모든 것을 버리고 할아버지의 땅을 잇기 위해 내려온 세진(류경수)의 중심 잡힌 말들, 글 한 자 읽기 어려운 난독증에도 불구하고 미지와 호수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로사식당 주인 현상월(원미경)까지—각각의 인물은 배경이 되지 않는다. ‘기타 등등’으로 퇴장하지 않고, 각자의 서사와 목소리를 지닌 채 이야기를 부풀린다. 그들의 다채로운 합창이 시작된다.


미지와 미래를 지탱해 주는 연대에는 할머니들이 있다.


쌍둥이의 차이는 말의 억양, 침묵의 길이, 주저하는 눈동자의 속도 같은 미세한 리듬에 담긴다. 그래서 관객은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애쓰기보다, 그 자리가 품은 진실을 묻는다. 자리 바꾸기 서사는 그렇게 ‘몸의 자리’, ‘말의 자리’, ‘기억의 자리’를 해체하고 재배열하며, 그 배열은 쌍둥이 캐릭터를 넘어서 우리 모두의 존재 방식에 닿는다. <미지의 서울>의 서사는 쌍둥이를 중심축으로 삼되, 그것을 초월해 동시대의 집단적 감각을 환기시킨다.



신화의 거울 – 카스토르와 폴룩스,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쌍둥이 서사의 궁극은 그리스 신화 속 카스토르와 폴룩스다. 하나는 죽을 수 있는 인간(카스토르), 다른 하나는 불사의 신(폴룩스)으로 태어난 형제. 인간 카스토르가 죽자, 신이 된 폴룩스는 그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우스에게 청한다. “그와 삶과 죽음을 나누게 해달라.” 그렇게 둘은 하루는 지하에서, 하루는 하늘에서 머무는 별자리가 되었다. 바로 쌍둥이자리다.


이 신화는 단지 형제애의 서사가 아니다. 죽음을 넘어 정체성을 공유하는 존재에 대한 상상이자,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자아가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비워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자리 바꾸기는 곧 죽음을 대신 살아내는 형식이며, 자기희생이라는 윤리적 요청이 별의 순환이라는 신화적 미학으로 승화된다.


그런 의미에서 쌍둥이의 자리 바꾸기는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자리를 오가는 통로다. 실제로 현대 서사에서 쌍둥이 서사는 종종 ‘죽은 쌍둥이의 복수’ 혹은 ‘상처를 대신 치유하는 삶’으로 표현된다. 이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통과시키는 구조, 다시 말해 타인의 죽음을 살아내는 윤리의 서사다.


쌍둥이 자리의 신화 카스토르와 폴룩스. 던칸1890년작


<미지의 서울>은 쌍둥이의 자리 바꿈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이 설정은 이야기의 중력을 한 지점에 모으기보다는 에너지를 바깥으로 분산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미래가 미지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일은 단지 자매 간의 임시방편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 모두를 ‘역지사지’로 이끄는 전환의 장치다. 일등이 꼴찌를 경험하고, 서울 쥐가 시골 쥐로 살아보며, 각자의 미안함과 감사함이 서로의 자리를 가로지른다. 차이와 다름을 체험하며, 격차와 장벽을 넘어보는 이 도전은 실로 작지만 위대한 시도다.


무엇보다 드라마는 소외와 고립을 약한 연대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구석을 탈출해도 문을 닫지 못하던 미지는, 서울로 향한다. 시스템의 욕망에 떠밀려 고립된 미래를 향한 탈주의 여정이다. 위험한 문밖 세상으로 나서는 이 결심의 기저에는 ‘약한 고리’들의 연대가 있다. 서툴지만 진심을 나누는 두손리의 이웃들, 시샘과 걱정이 뒤섞인 친구들, 그리고 단지 처지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함께가 되는 모두의 얼굴들. 이들은 미지와 미래의 자리를 비춘다. 결국 자리 바꾸기는 신화적 환상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 속 윤리로 다시 태어난다.



희망의 변수, 여성의 연대


쌍둥이 교체 서사는 종종 기이한 대칭으로 끝난다. 자리 바꾸기의 장난은 성장의 계기로 전화하고, 타인의 삶을 잠시 빌리는 시도는 곧 나 자신의 경계에 대한 재인식으로 귀결된다. <미지의 서울>이 고전적 장르 문법을 무화하지 않으면서도 새롭게 건넨 건, 익숙한 구조를 해체하는 대신 감정을 정제하는 미학이었다. 말하자면, F코드는 요란하지 않았다. 복수도, 애도도, 분노도 한없이 조용하게 증식했다. 찢긴 관계는 섣불리 봉합되지 않고, 여성들은 서로의 부재와 상처를 명료히 인식한 채, 묵직한 눈빛으로 서로를 통과해 갔다.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그 눈빛이다. 화해보다 앞선 연대, 처벌 이전의 공감. 누구 하나의 진심이 타인의 거울에 무사히 닿을 수 있다는 것. 이 느린 기적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이 이야기의 서사가 허구를 넘어 현실의 표면을 스며들고 있다는 감각을 받았다. 그것은 세계가 아주 조금 바뀌고 있다는 조용한 징후였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다른 얼굴들을 떠올렸다. 분열된 시선과 자기도취적 분노, 낡은 권위에 몰입한 환상들. 최근 몇 년간 2030 남성 세대 내부에서 무기력과 증오가 뒤섞여 확산되는 것을 보며, 희망이 서서히 마모되는 감각을 느꼈다. 자신의 고립을 구조화하지 못한 채 혐오의 언어에 자신을 위탁하는 태도. 여성주의를 ‘적’으로 지목해야만 자아의 균열을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 전략. 그것은 복수조차 아닌, 자기부정의 가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와중에도 여성들은 멈추지 않았다. 말 대신 시선을, 분노 대신 손끝을 선택하며, 서로의 고통을 꺼내어 조심스럽게 다독이고 있었다. 이 조용한 연대는 단지 한 편의 드라마 안에서만 작동한 것이 아니었다. 내 주변에서, 거리에서, 고단한 일상의 틈 사이에서 그들은 여전히 ‘나 아닌 나’를 위해 살아내고 있었다.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자리를 자기 삶으로 다시 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응원에 찬사를 보낸다. Sora


그것이 나에게는 희망이었다. 혁명도, 투쟁도 아닌 방식으로. 그러나 더 근본적인 윤리를 통해 그들은 또 다른 미래를 조용히 예고하고 있었다. 미래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다. 불확실성은 두려움의 근거가 될 수도, 창조의 발화점이 될 수도 있다. <미지의 서울> 속 여성들의 태도는 그 불확실성을 견디는 법이 아니라, 그것을 희망의 변수로 삼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확실한 미래란 없다. 그러나 그 미지수를 함께 살아내는 이들이 있다면, 현재는 단단해진다. 그러한 현재야말로, 실제로 미래를 생성하는 시간이다. 내가 믿고 싶은 건 바로 그들이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도, 때로는 타인의 자리를 대신 살아내는 이들. 거울 너머의 나를 껴안듯, 세계의 가장 깊은 균열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


함께 하는 우리가 어제를 건너는 힘이었다.

그들이 있다는 사실이 오늘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미지의 미래를 기다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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