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17>리뷰: 소스와 기원의 감각적 재구성
현대 사회는 정보와 기술, 욕망과 계급, 감시와 쾌락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시스템이다. 인간의 손에서 비롯된 이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코드화하고 재배열하며, 마치 자율적 지배자인 양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봉준호 감독이 영화화한 <미키 17>은 이 반복적 시스템의 오류 속에서 인간성의 잔재를 탐색한다. 소동극에 가까운 전개 안에서도 영화는 묻는다. 폭주하는 시스템 아래,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가.
<미키 17>은 자본주의와 계급 구조로 상징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기술이 인간을 대체 가능한 존재로 어떻게 전락시키는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복제 기술은 인간 능력의 연장이자 생존의 수단으로 개발되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인간을 반복 가능한 ‘익스펜더블(expendable)’, 즉 폐기 가능한 부품으로 치환한다. 미키의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 그리고 매번 미세하게 남겨지는 기억의 잔재는 시스템이 완전히 작동하지 못하는 증거이자, 인간 주체가 틈입할 수 있는 균열의 징후가 된다. 봉준호의 카메라는 <괴물>, <기생충>, <설국열차>를 거치며 일관되게 증명해왔다. 사회 구조의 억압 아래 존재하는 하층민의 실존을 통해, 시스템 내부의 치명적 결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전작들만큼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극장 개봉과 스트리밍 이후의 흥행 성적은 저조했고, 주요 영화제에서의 호명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이유는 복합적일 수 있다. <기생충>이 남긴 강렬한 잔상, 외국 자본과 가상의 생명체가 등장할 때마다 봉준호 영화가 겪어온 고질적 난항 등.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 충분히 발효되지 않은 원작의 시간을 조급히 영상화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원천 소스로서의 소설이 의미를 퇴적할 시간 없이 재현되면서, 원작과 각색 사이의 간극은 충분히 벌어지지 않았고, 영화적 변주의 가능성 역시 그만큼 협소해졌다.
결국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감정은 ‘소스(source)’의 문제로 귀결된다. 기원, 원천, 추출물—영화 곳곳을 유령처럼 떠도는 ‘소스’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 나를 붙잡았다. 그것의 물질성과 은유성, 증식과 반복의 체계에서 소스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단상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미키 17>이 그리는 것은 단지 미래적 상상력이 아니다. 인간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소스의 유령들’이다. 이제, 그 유령의 감각을 따라, 영화가 투영하는 의미의 지형을 더듬어본다.
소스, 권력, 그리고 은유의 테이블
<미키 17>은, 약간 보태 말하자면, 꽤 시끄러운 영화다. 대사와 내레이션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짧은 플래시백과 스토리 몽타주들이 관객을 숨 돌릴 틈 없이 몰아친다. 서사는 돌발적인 소동의 연속이며, 인물들은 모두 분주하고 정처 없다. 관객 역시 사유의 발을 붙일 만한 공간을 찾기 어렵다. 이 과잉의 인상은 무엇보다 인물들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연극적 구성을 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하나같이 ADHD적 과잉 행동을 외피처럼 두르고 있다.
이 혼돈의 군상 중 단연 눈에 띄는 인물은, 미키의 반복된 죽음과 재생을 제외하면, '일파 마샬'(토니 콜렛)이다. 그녀는 니플하임 식민지의 실질적 지배자다.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의 아내로 소개되지만, 실제 권력은 그녀의 손에 있다. 겉으로는 케네스의 그림자처럼 움직이나, 그의 입을 빌려 말하고, 그의 손을 빌려 결정하며, 권력을 조율한다.
일파의 가장 집요한 집착은 다름 아닌 '소스(sauce)'다. 그녀에게 소스는 문명의 표식이자 야만을 구별하는 감각의 경계다. 4년 반의 우주 항해 동안 다른 승객들이 분자 단위로 조정된 대체식으로 영양을 공급받는 동안, 마샬 부부의 식사는 늘 정찬으로 차려진다. 고급 스테이크에는 반드시 소스가 곁들여져야 하며, 소스를 찍지 않고 먹는 행위는 그녀에겐 수치이며 혐오의 대상이다. 문제는 그 소스의 출처다. 대부분이 정체불명의 괴식 레시피로, 일파 특유의 폭력적 감각이 배어 있다.
이 집착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진다. 일파는 외계 생명체 ‘크리퍼’ 소년 조코의 꼬리를 잘라, 그것을 글라인더에 갈아 만든 소스를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 연구원들에게 시식하라고 강요한다. 실험인가, 위협인가, 아니면 문명이라는 이름의 미각적 복종 명령인가. 이 장면은 잔혹하면서도 정교하다. 생명으로 만든 소스를 통해 문명의 쾌락을 구현하는 그녀는, 권력과 욕망이 만든 미각적 신격화의 극단이다. 소스는 더 이상 조미료가 아니다. 타자의 신체가 감각을 위한 연료로 소비되는, 식민과 폭력의 결정체다.
시간이 흘러 평화가 찾아온 니플하임에서, ‘미키 17’이 아닌 ‘미키 반즈’로 살기로 한 미키는 꿈을 꾼다. 그 꿈속에도 일파는 나타난다. 현실에선 이미 사라진 인물이지만, 그녀는 미키의 무의식 안에서도 여전히 소스를 강요한다. 밟지 말라며 윽박지르고, 꼭 찍어 먹으라며 속삭이는 그녀는, 문명의 기호를 죽음 너머까지 강요하는 유령이 된다.
<미키 17>의 일파 마샬은 단지 독재자가 아니다. 그녀는 감각과 식탁, 욕망과 권력이 교차하는 테이블 위의 은유다. 그리고 그가 만든 ‘소스’는 단지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적 소스(source)의 문제다. 기억을 재조립하고 감각을 복제하며, 타자의 신체를 코드화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소스는 정보이자 정념이며, 유령처럼 반복되는 폭력의 액체화된 형상이다.
소스의 은유, 권력의 직설
영화 속에서 '소스'는 단지 음식의 부재료가 아니다. 일파 마샬은 이 소스를 통해 감각을 매개로 한 권력의 형식을 재현하고자 한다. 그는 니플하임이라는 식민지 행성에서 지구인의 질서, 기억, 미각, 문화, 심지어 식생활까지도 재배치하려는 통제자로 등장한다. ‘조코의 꼬리’를 잘라 소스로 만든다는 설정은 단순한 야만이나 기괴함의 연출이 아니다. 그것은 타자를 동화시키고, 해체하며, 결국 자기 체계로 흡수하려는 폭력의 형식이다. ‘소스’는 타자의 신체를 재조합한 감각적 흔적이며, 그 존재의 원형을 지워버리는 혼종의 기호다. 그것은 상징적 연금술이자, 권력의 미각이 작동하는 기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질문은 왜 하필 '소스'인가이다. ‘sauce’의 어원은 라틴어 salsa(짠 것)로, 고대에는 향미나 약효, 혹은 부패를 감추는 보존 수단으로 여겨졌다. 중세 유럽에서 향신료를 가미한 소스는 부패한 육류의 냄새를 감추기 위한 도구였고, 동시에 신분과 권위의 징표이기도 했다. 미각은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계급적 훈육의 감각이자, 권력에 의해 조직된 오감의 질서였다. 특히 프랑스 요리 전통에서 소스는 단순한 부속이 아니라, 요리의 핵심 기술이자 기원이 되었다. 에스코피에(Auguste Escoffier)가 정리한 마더 소스(fond de sauce)는 모든 요리의 '근본'이며, 이는 곧 조리 행위의 ‘소스 코드’였다.
이처럼 '소스'는 기억의 맛, 기술의 기원, 권력의 조율이 얽힌 복합적 층위의 상징이다. 일파 마샬이 집착하는 것도 바로 이 다층적 기원이며, 그것을 혼합하고 조작하며 새롭게 재배열하는 능력, 즉 ‘감각의 구성 권력’이다. 그녀는 ‘맛’을 통제함으로써 체계 전체의 ‘기억’을 장악하고, 나아가 타자의 존재를 체화하고 해체하는 권능을 실행한다. 조코의 살점은 그 상징적 작동의 은밀한 장치이자, 식민적 재현의 말초이다. 일파는 소스를 통해 기원을 다시 쓰고, 감각을 통해 문명을 새로 코딩한다.
이쯤에서 흥미로운 언어적 함의가 드러난다. 영어에서 'sauce'와 'source'는 서로 매우 유사한 발음을 지닌다. /sɔːs/와 /sɔːrs/ — 이는 시학적으로 유사라임(near rhyme), 혹은 반운(slanted rhyme)의 관계에 해당한다. 시작음, 중심 모음, 종결음이 거의 겹치며, 청각적 혼동과 의미의 미끄러짐을 유도한다. 이 발음의 중첩은 단순한 말장난 이상의 미학적 장을 연다.
예컨대, source는 ‘출처’, ‘기원’, ‘근거’, ‘코드’를 뜻한다. 존재의 구조를 떠받치는 심층적 기초다. 반면 sauce는 ‘맛’, ‘풍미’, ‘조합’, ‘향’을 의미하며, 감각적 차원에서 기원을 재구성하는 문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전자는 로직과 시스템의 근본을, 후자는 오감과 기억의 층위를 대변한다. 이 둘은 서로를 비추고, 교란하고, 변형시킨다. 그리하여 영화 속 소스는 ‘기원의 맛’이자 ‘감각의 코드’로 기능하고, 이는 곧 현대 디지털 사회의 ‘소스 코드(source code)’ 개념과도 은밀히 공명한다.
권력은 종종 ‘기원을 통제하는 자’가 아니라, ‘기원의 감각을 재구성하는 자’에게 귀속된다. 일파 마샬은 바로 이 지점에서 유령처럼 남는다. 그녀는 죽음 이후에도 미키의 꿈속에서 ‘소스’를 강요하며, ‘문명의 맛’을 지배하고자 한다. 이 반복 강요는 기원의 기억을 감각의 층위에서 오염시키려는 권력의 기시감이며, ‘맛’을 통해 존재를 길들이려는 통제의 역설적 표식이다.
소스는 현대 기술사회에서의 핵심 권력
현대 기술사회에서 '소스'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세계를 작동시키는 근원적 언어다. '소스 코드(source code)'는 소프트웨어와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구성 규칙이자, 존재를 운용하는 일종의 명령 언어다. 이 코드를 해석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은 곧 권력의 핵심이다. 미디어 이론가 알렉산더 R. 갤러웨이(Alexander R. Galloway)는 디지털 사회에서 코드가 곧 법이며, 그 해석권이 곧 권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인간은 점점 더 이 '소스'에 접근하지 못한 채, 블랙박스화된 알고리즘과 AI 시스템의 예측, 관리, 보조, 심지어 대체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영화 <미키17>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존재론적 질문의 산물이다.
미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죽음을 무한히 대체할 수 있는 존재다. 육체는 복제되고, 기억은 일종의 블록 모듈로 주입된다. 이 기억 삽입 장치는 USB처럼 단순하지 않다. 도관과 단자가 연결된 벽돌형 구조로 시각화되며, 기원의 삽입이 기술적으로 재현된다. 이는 명백히 '소스의 주입'을 상징한다. 소스는 더 이상 자연스럽거나 자생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작되고, 저장되고, 재편된다. 기원은 생산물이며, 소비 가능하다.
<미키17>의 세계에서 일파 마샬은 전통적인 인류 권력의 화신이다. 그는 식민지 행성 니플하임을 장악하며, 외계 생명체의 신체 일부를 '소스'로 만들어 인간에게 섭취하도록 강요한다. 이 행위는 야만적 식인 풍습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감각을 체화하고 기원을 재정의하는 권력 장치다. 이는 문화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가 말한 ‘경계의 정치학’과도 통한다. 더글러스에 따르면, 불순하거나 타자적인 것은 정화되거나 재배치되어야 하며, 이는 문화권력의 작동방식이다. 일파 마샬의 소스는 바로 이 감각적 정복의 은유다.
미키에게 반복적으로 주입되는 기억 모듈은, 인간 정체성이 '기억'이라는 데이터 조작으로 재구성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과정은 기술이 인간 존재를 탈기원화하고, 오히려 '제작 가능한 주체'로 재배치한다는 존재론적 전환을 드러낸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어떤 본래적 기원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감각, 기억, 취향, 경험은 모두 재조합 가능한 '소스'로 환원된다. 이 구조는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가 말한 현대성과 비근대성의 경계에서 기술과 인간, 자연과 인공의 혼종적 구성체가 등장하는 장면과도 교차한다.
‘오픈 소스(Open Source)’라는 개념은 이 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코드, 즉 소스의 민주화는 기술의 해방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다시 새로운 통제와 표준화의 도구로 기능한다. 소스는 더 이상 고정된 ‘기원’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기능’, 변형 가능한 ‘기억’, 재구성 가능한 ‘정체성’이다.
일파 마샬의 소스에 대한 집착은 단지 미각의 기호학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과 기억, 기원의 식민화에 대한 정치적 열망의 상징이다. 그의 요리는 타자와의 만남이 아니라, 타자의 감각을 자신 안에 흡수하고 지배하려는 은폐된 폭력이다. 이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플랫폼 기술이 개인의 취향과 기억을 어떻게 분석하고, 전유하고, 다시 되돌려주는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소스’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며, 타인의 기술적 체계에 의해 자신의 감각과 기억을 재구성당한다. 그렇게 인간은, 감각 가능한 존재가 아닌 조합 가능한 존재로 미끄러진다.
넘쳐나는 기표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의
일파 마샬(Ylfa Marshall)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상징의 지층을 이룬다. 'Ylfa'는 고대 노르드어로 ‘암늑대’를 뜻하며, 이는 감각과 타자성을 포식적으로 흡수하는 존재, 곧 본능과 통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려는 권력의 형상을 상징한다. ‘Marshal(l)’은 단순한 군사 직책을 넘어, 감각적 기원을 관리하는 ‘질서의 관리자’로서의 함의를 지닌다. 원초적 감각과 기술 통제가 결합한 이 이름은 현대 기술자본이 인간의 심층 감각까지 포섭하려는 권력 구조의 은유로 기능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샬’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마굿간 관리자에서 기병대 장군을 거쳐 결국 국가의 최고 군사 직책인 '원수'에 이르는 역사적 흐름은, 곧 관리의 기술이 지배의 권위로 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미키 17>은 이 언어의 계보학을 스크린 위에 상징적으로 배치한다. 원작 소설에는 없던 ‘일파 마샬’이라는 인물은, 영화적 재창작을 통해 기존의 군사적 권위를 희화한 ‘케네스 마샬’과 병치되며, 새로운 권력 상징으로 작동한다. ‘예로니모(신성한 자)’라는 이름 대신 ‘불에서 살아남은 자’인 케네스를 도입한 선택, 그리고 ‘소스’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파의 등장은 단순한 캐릭터 변형을 넘어, 기표의 교체를 통한 시대적 전환의 은유다.
<미키 17>에서 일파 마샬이 ‘소스’를 강박적으로 섭취하고 주입하는 행위는 단순한 식탐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과 기억의 블렌딩, 기원의 식민화, 타자의 동화를 통한 권력의 정당화이다. ‘소스(sauce)’와 ‘소스(source)’의 언어적 중의성은 이 의미망을 더욱 강화한다. 미키의 기억은 블록 형태의 장치로 주입되며, 이는 기억이 더 이상 신성하거나 자연스러운 내면의 발현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조작 가능한 구조물임을 암시한다. 이때 ‘소스’는 요리를 위한 맛의 도구를 넘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기반을 형성하는 핵심 기표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정은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이나, 푸코의 ‘생명정치’와도 접점을 가진다. 타자의 감각을 식민화하고 기원을 주입하는 행위는, 권력이 몸과 기억, 욕망의 층위까지 침투한다는 점에서 현대 기술 사회의 미시 권력 구조를 상기시킨다. 특히 푸코가 말한 ‘지식과 권력의 통합’은 이 작품에서 기술과 감각, 기억과 데이터의 중첩으로 구현된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의 기원을 스스로 구성하지 못하고, 외부적 장치―알고리즘, 플랫폼, 프로토콜―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러한 다층적 의미 부여가 영화적으로 감각화되지는 못한다. 영화는 지나치게 많은 은유와 기표를 나열하며, 그 각각이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채 표피에 머문다. ‘체화되지 않은 기표들’은 감각적 충격이나 서사적 응축으로 이어지지 않고, 관객의 해석 가능성만을 과잉 자극한다. 봉준호 감독의 두 번째 외국어 영화이자, 전면적으로 영어권 서사를 시도한 장편으로서, <미키 17>은 명확한 ‘의도’의 흔적은 남기되, 감각과 언어의 결합을 통해 도달해야 할 ‘효과’에는 이르지 못한다.
결국 이 작품에서 ‘소스’는 풍미를 더하기는커녕, 감각적 과잉과 의미의 분산을 야기하는 요란한 조미료처럼 작용한다. 원래 강화되어야 할 맛, 곧 기원이나 정체성의 서사적 울림은 오히려 혼탁해진다. 하지만 이 실패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유발하는 실패다. 그렇기에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현대 기술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존재가 감각과 기원, 정체성과 기억이라는 층위에서 어떻게 해체되고 재구성되는지를 스크린이라는 감각 매체 위에 실험적으로 투사한 시도였다.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기원을 조작하는 감각적 권력'이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미키 17>의 진정한 소스는, 서사나 인물보다도 그 질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체화되지 않은 언어, 그리고 '1인치 자막'의 역설
<미키17>의 인물들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듯하다. 배우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대사는 조심스레 다듬어진 은유도, 다성적 화법도 아닌, 마치 의무적으로 주어진 스크립트를 따라가는 말의 덩어리에 가깝다. 분명 대사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살을 얻지 못한 채 공중에 부유한다. 봉준호 특유의 생경한 유머, 감정의 비틀림, 은밀한 분노 같은 정서적 요철이 사라지고, 장면은 무심한 낭독처럼 지나간다. 그 감각의 공백은 단지 영어라는 외국어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언어 바깥에 있는 정서의 감각, 다시 말해 기표 이전의 리듬과 정조를 체화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봉준호가 한국어로 작업할 때, 인물들의 말은 ‘상처 입은 리듬’을 품고 있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와 박해일이 시선을 교환하던 장면, <괴물>에서 무너진 가족을 끌어안으며 터뜨린 소리 없는 절규, <기생충>에서 박사장과 기택 사이에 흐르던 ‘냄새의 침묵’. 이 순간들엔 언어 이전의 감정, 말 너머의 맥락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사만의 힘이 아니라, 말과 몸, 공간과 감정이 응축된 시공간의 집합이었다. 그러나 <미키17>은 그 밀도를 놓쳤다. 말은 몸에 닿지 않고, 이미지가 정서에 스며들지 않으며, 시스템이 인물의 서사를 압도한다. 정서의 통로가 차단된 이 구조는 결국 ‘1인치 자막’을 넘어서지 못한 감각의 외재성으로 귀결된다.
기억하자. 봉준호는 과거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인치 자막의 장벽을 넘는다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시엔 세계 영화계에 대한 시적 선언처럼 들렸지만, <미키17>을 마주한 지금, 그 문장은 되묻는 질문이 되어 감독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는 분명 자막의 바깥으로 나갔지만, 언어와 감각이 교차하는 그 얇고 깊은 층위—정서의 기원과 리듬의 지층으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1인치 자막’이란 단지 기술적 장벽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와 정서, 문화와 기억, 감각과 리듬 사이의 섬세한 조율에 도달하는 문제다. 단어의 번역을 넘어, 감정의 내면화를 요구하는 층위다. <미키17>의 실패는 바로 그 정서의 공감대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데 있다. 감독이 ‘외국어’로 말하려 했지만, 그 언어는 그를 배신했다. 아니, 어쩌면 감독 자신이 그 언어를 감각으로 내면화하는 데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는 봉준호만의 문제가 아니다. 타자의 언어로 창작하는 모든 예술가가 겪는 내면화의 간극이며, 감각의 전유가 불완전하게 이뤄질 때 발생하는 어색함이다. 이때 언어는 더 이상 의미를 매개하지 못한 채 기표로만 남고, 정서는 이미지 속에 침윤되지 못한 채 부유한다. 언어의 소유권과 감각의 체화를 둘러싼 이 간극은 <미키17>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실패는 비난의 대상이기보다, 이후 작업을 위한 소중한 데이터가 된다. 이질적인 언어와 감각의 어긋남, 체화되지 않은 기표들이 빚은 충돌은, 감독이 앞으로 타자의 언어를 어떻게 자기 리듬으로 번안하고 조율할 수 있을지를 되묻는다. 그것은 단지 외국어 대사의 숙련도나 현지 제작진의 협업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언어 감각이 다른 타자의 세계에 어떻게 정서적으로 입주할 것인가, 혹은 타자에게 자신의 정서를 어떤 방식으로 건네줄 것인가에 대한 윤리적 감각의 문제다.
‘일파 마샬’이 휘두른 폭력적 감각은 통제된 시스템의 산물이었다. 이에 반해 봉준호는 이질적 요소들의 불균형 속에서 정서적 공동체를 생성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아직 조율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키17>은 ‘외국어 봉준호’라는 실험의 서막이었지만, 그 실험은 성공이라 부르기엔 미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긋난 리듬은 다음 작업을 위한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타자의 언어를 새롭게 직조하는 방법, 감각의 차이를 감정의 공명으로 전환하는 기술—그것이야말로 봉준호가 향후 세계 영화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고유한 통로가 될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본도, 화려한 제작진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1인치의 감각’, ‘1인치의 정서’, ‘1인치의 체화된 언어’다. 그가 다음 작품에서 이 얇지만 깊은 층위를 어떻게 건너느냐에 따라, <미키17>의 실패는 더 큰 비전의 도약대가 될 수 있다.
다음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자막이 ‘장벽’이 아니라 ‘고유함’으로 작동하길 바란다. 언어의 경계를 감각의 공명으로 바꾸고, 기원의 지층 위에 다시 삶의 소스(sauce)를 흘려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또 한 번 그만의 리듬을 지닌 서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소스를 통해 기원을 묻고, 기원을 통해 타자의 감각을 사유하며, 감각을 통해 권력을 해체하는 유일무이한 영화적 사유를 다시.
그러니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일파 마샬은 소스에 집착했는가?”가 아니라, “왜 봉준호는 그 소스의 언어를 감각하지 못했는가?”로. 그리고 그 대답은 바로 ‘1인치’ 안에 있다. 언어의 경계에 새겨진 정서의 요철, 감각의 실핏줄. 그 얇고 깊은 층위를 다시 좇는 일이야말로, 봉준호 영화의 다음 장을 열어줄 진짜 소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