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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함정, 혹은 퀘스트 없는 퀘스트

<오징어 게임3> 시즌제의 자기 소진 미학의 실패

by 박 스테파노

<오징어 게임>이라는 서사의 위기, 시즌 3 스트리밍에 붙여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2021년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시즌 1에서 드러난 서사는 빈부 격차와 계급적 폭압을 게임이라는 극단적 서바이벌 형식으로 재현하며, 인간 존재를 ‘생존과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에 내몰았다. 여기서 작가는 자본과 권력의 착취 구조,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기보다 내몰리는 개인의 무기력함과 절망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후 시즌 2와 3에 이르러 이 작품은 중요한 서사의 원격성을 잃은 듯 보인다. 즉, 처음에 가졌던 ‘현대 자본의 구조적 폭력과 그에 맞선 개인의 윤리적 투쟁’이라는 주제는 점점 희미해지고, 단순한 서바이벌의 스펙타클에 집중하는 흐름으로 변질되었다. 원초적 생존의 절박함은 무너지고, 참가자들은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욕망의 발현자로 축소되면서 캐릭터의 입체감과 내적 동기 역시 퇴색한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서사의 도약과 성장 대신 클리셰 반복과 자기복제의 쳇바퀴를 걷게 되었다.


오징어 게임 각 시즌의 동일 구도의 포스터.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처음부터 계급의 잔혹성을 고발하는 장치로서 출발했다. 참가자들이 게임에 진입하는 방식은 자유의지처럼 포장되지만, 실상은 선택지를 박탈당한 채 구조적으로 밀려난 이들이라는 점에서, 자유라는 단어마저 자본이 구성한 착취의 언어임을 드러낸다. 번호로 불리는 참가자들, 얼굴이 가려진 관리자들, 그리고 무기명화된 병정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라 ‘기호’로 기능한다. 이름 없는 죽음은 숫자와 이미지로 소비되며, 그 위에 군림한 VIP 관객들은 서구 백인과 중국 자본가로 표상된 최상위 계층의 포식자들이다. 이 모든 구성은 계급 권력이 폭력과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어떻게 공공연하게 자신을 ‘현시’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고대 콜로세움처럼, 약자는 죽음으로 증명되고 강자는 그것을 향유하는 장면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구조는 바르트가 말한 ‘기표만 존재하고 기의는 사라진’ 신화 체계와 닮아 있다. 참가자들은 사회적 정체성, 인간적 내면, 윤리적 지향을 잃고 단지 게임을 완수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지닌 내면의 복잡성은 단순화되고, ‘어떤 과제를 해결했는가’가 그 존재 전체를 대체해 버린다. VIP 관객들이 이 과정을 낄낄대며 관람하는 장면은 단순한 풍자가 아니라,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낸 시선의 구조—즉 고통을 '소비 가능한 콘텐츠'로 전환시키는 문화 장치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시즌이 거듭될수록 이러한 고발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시즌 1이 계급 폭력의 스펙터클을 비판하는 장치로 기능했다면, 시즌 2와 3에 이르러 그 스펙터클은 곧 서사의 목적 자체가 되어버린다. 구조적 폭력은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시청률을 위한 자극으로 반복되며, 시청자는 게임의 의미가 아니라 게임의 연출을 기다리게 된다. 이는 바로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진실을 이미지로 치환하며 현실을 위장하는 과정과 맞물린다. 폭력은 더 이상 비판의 언어가 아니라 오락의 포맷이 되고, 서사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보다 ‘다음 회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즉각적 소비욕망에 예속된다.


시즌 1의 신스틸러 영희를 철수와 함께 등장시키지만. 넷플릭스



자본의 폭압과 죽음의 공공 전시


이런 퇴보의 결과, <오징어 게임>은 퀘스트 서사의 외피만을 두르고 내적 변화와 성찰을 상실한 채, 형식만 반복하는 빈 껍데기가 되었다. 시즌 1의 성기훈은 분명 조셉 캠벨의 영웅 서사를 닮은 궤적을 밟는다. 그는 일상의 세계를 떠나 시험의 공간에 진입하고, 윤리적 결단을 내리며, 귀환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귀환은 실현되지 않는다. 시즌 2와 3에서는 퀘스트의 구조는 유지되지만, 그 목적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캠벨이 강조한 ‘영웅의 변화’는 없으며, 참가자들은 오히려 영웅이 되기를 포기한 채 시스템의 구조 안에 편입된 존재로 반복된다. 이는 내러티브의 진화라기보다, 서사의 자기 복제, 그리고 미학의 고갈이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이 같은 변질을 가속화한다. 넷플릭스와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는 시청률, 시청 지속 시간, 클릭수를 중심으로 서사의 구조를 기획한다. 클리프행어와 폭력의 시각적 자극은 그 자체로 시청을 붙드는 기술이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아닌 ‘자본의 장치’로서, 콘텐츠의 목적이 아니라 기능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즌 3은 바로 이 알고리즘에 완전히 포섭된 결과물이다. 서사는 구조를 따라가지만, 의미는 진공 상태에 빠진다.


'성기훈'으로 대표되는 규열과 전복의 가능성은 자본의 논리에 잡혀버리고 끌려 가는 작품 자체의 메타 메시지를 보낸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넷플릭스


특히 죽음의 ‘공공 전시’는 단순한 서바이벌의 차원을 넘어 계급적 현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최상위 계층인 VIP들은 서구 백인과 중국 자본가로 상징되며, 천박한 소비욕망과 권력의 포식자 이미지를 지닌다. 이들은 참가자들을 무의미한 숫자와 기표로 환원하며, 인간의 정체성은 말살된다. 관리자와 경비 또한 탈개인화된 도구에 불과하다. 이는 현대 자본이 인간을 상품화하고 기계화하는 과정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부조리의 세상을 과장하고 부풀려 소비의 극단으로 치닫게 한다. 그것이 전부다.


VIP 시퀀스는 이러한 구조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백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VIP들은 소외된 참가자들의 생존 투쟁을 관람한다. 그들은 이 세계의 규칙 바깥에 존재하며, 윤리적 책임도, 인간적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위치에 놓인다. 부르디외의 개념을 빌리자면, 이들은 상징자본과 문화자본을 독점하는 지배계급의 형상이다. 참가자들이 자아와 인간성을 잃어가는 동안, VIP들은 타인의 죽음을 하나의 게임으로 관전한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사물화’되는지를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장면이다.


비슷한 서사 구조를 가진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이 문제는 더욱 뚜렷해진다. <배틀로얄>은 청소년들을 죽음의 게임에 밀어넣지만, 그 과정에서 폭력의 무의미성과 인간 내면의 붕괴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등장인물 각각은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자기 파괴 혹은 타자 파괴의 경계에 선다. <더 플랫폼>은 수직적 구조의 감옥이라는 설정을 통해 분배와 연대, 생존의 윤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 작품들 속의 참가자들은 단순히 게임의 부속이 아니라, 체제 내부에서 자기 선택의 윤리를 시험받는 존재들이다. 반면 <오징어 게임> 시즌 3은 참가자들을 입체적 주체가 아닌 죽음을 위한 장식물로 전시한다. 이는 곧 윤리적 상상력의 붕괴이며, 스펙터클의 기계적 반복이다.



서사의 평면화와 욕망의 단순화


<오징어 게임>의 후속 시즌에서 뚜렷해진 문제는 서사의 원격성이 소멸하고, 서바이벌 자체의 스펙타클에만 몰두하게 된 점이다. 초기 시즌에서 보였던 ‘현대 자본과 계급폭력에 대한 비판’이라는 뼈대는 점차 흐려지고, 참가자들은 단편적 욕망의 발현자로 축소된다. 그 결과 인물들의 내적 동기와 복합성이 사라지고, 단순히 ‘생존’과 ‘승리’라는 외형적 목표만이 남는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서사에서 영웅이 내적 성찰과 성장, 도덕적 갈등을 거쳐 퀘스트를 완수하는 전통적 서사 구조와 대비된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스가 여러 시련을 겪으며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는 성장과 도약의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다. 반면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러한 서사의 ‘목적론’이 무시된 채, 참가자들은 기능적 인물군으로 전락한다. 이는 서사적 깊이와 인간적 통찰이 희생된 채, 오로지 긴장과 흥분을 자극하는 쇼적 기계로만 기능하게 된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장면들이 처음에는 비판적 장치로 사용되다가, 이후 시즌에서는 그저 자극을 위한 연출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를 고발하던 서사는 자본주의적 성공의 논리—확장, 반복, 포맷화—에 흡수된다. 데이비드 하비가 말했듯, 자본은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재조직되고 재생산된다. <오징어 게임>도 마찬가지다. 시즌 1에서 구축된 윤리적 질문은 시즌 2에서 희미해지고, 시즌 3에서는 흔적만 남는다. 드라마는 더 이상 비판적 서사가 아니라, 장르적 성공의 공식이 되어버린다.


헝거게임, 배틀로얄, 더 플랫폼. 롯데시네마, 동아수출공사


<오징어 게임>의 미학적 한계는 <배틀로얄>, <더 플랫폼>, <헝거 게임> 등과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자본과 권력에 대한 사회구조적 비판을 바탕으로, 인물 개개인의 내면적 갈등과 성장, 그리고 윤리적 선택을 정면에 놓는다. 예를 들어, <배틀로얄>은 극한 상황에서 폭력의 윤리성을 탐구하고, <헝거 게임>은 권력에 맞선 개인과 공동체의 저항을 그린다.


반면 <오징어 게임>은 점차 ‘서바이벌 게임’ 자체의 관객 동원력에 집중하면서, 인물은 소비되는 욕망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서사의 납작화(flattening)로, 등장인물들의 다층적 욕망과 복합성이 단일한 함수로 축소되고, 그 욕망은 권력의 장치에 의해 반복 재생산된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반복과 소비의 순환만을 보여줄 뿐, 서사의 윤리적·철학적 가능성은 후퇴한다.



서사의 향방과 대중문화의 미학적 책임


지적하는 “진부한 미학적 장치”는 바로 영웅서사의 탈정치화다. 원래 영웅서사는 개인의 서사이면서도, 집단적 가치를 재구성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전통을 훼손한다. 서사 구조는 영웅 서사의 형태를 띠지만, 그 안에 영웅이 없다. 도전은 있으나, 초월이 없다. 죽음은 있으나, 해석이 없다. 승리는 있지만, 구원이 없다.


뒤로 갈수록 서사는 모호하고 혼란해 진다. 애초에 계획없던 확장이 작가와 연출의 실력 한계를 노출하고 말았다. 넷플릭스


이는 자기 반복적 구조가 서사의 의미를 소진시키는 과정이며, 미학적으로는 장르의 자가발전적 재탕 구조에 갇힌 결과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계급 폭력, 자본주의, 인간성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세팅한 이후,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채 장르의 소비 논리로 스스로를 퇴색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장 뚜렷한 자기 고백이 시즌 3에서의 기훈의 마지막 대사에 박제된다.


우리는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사람은...


이 대사는 후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고 인류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라고 황동혁 감독은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부를 넘어 진리와 부합하지 않는 얕은 정치 구호다. 성장 담론에 사로 잡힌 저출생의 문제, 미래 세대가 지금의 기성세대를 부양한다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부담감을 달래는 수사에 그친다. 지금 기득세대의 언어로 '내가 희생해 줄게'라고 말한다. 대안 없이 그저 걱정하는 척하는 자본의 이미지 세탁과 매우 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진정한 귀환이란 서사 바깥에서, 즉 이 세계의 규칙을 다시 쓰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기훈이 다시 게임에 들어가는 이유는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것이 퀘스트 없는 퀘스트를 구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내러티브일 것이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왜 계속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다시 질문해야 하는지에 대한 응답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오징어 게임>은 원래 시스템에 대한 고발자로 출발했다. 하지만 시즌이 늘어나면서 그 시스템을 반복 재현하고, 소비 가능한 서사 형식으로 가공하면서 결국 자신이 비판하던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역설에 빠졌다. 이는 한 편의 드라마를 넘어서, 오늘날 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메타비판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시스템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어느 순간 그 시스템의 양식이 되어버리는 현상. 이는 비단 <오징어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미디어 생태의 총체적 모순이기도 하다. 결국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자본의 자기장 앞에 서사는 멀어지고 감각만 가까워졌다.


결국 <오징어 게임>은 이야기의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물음을 남긴다. 초기에 구축된 거대한 세계와 윤리적 질문들은 점차 상업적 성공에 밀려 소거되며, 시리즈는 점점 더 '다음 회차'를 위한 에피소드들의 조합으로 재편된다. 이야기가 퀘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인물이 어떤 변화를 겪고, 그 변화가 다시 세계에 어떤 균열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기훈의 귀환은 그런 변화의 결과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반복 가능한 시작점처럼 느껴진다. 이는 서사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오직 흥미만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의 자기소진이다. <오징어 게임>이 자본주의의 폭력을 고발하면서, 자본주의 서사 구조의 함정에 빠지는 아이러니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출구와 열쇠는 있었다. 자본에 포섭된 서사는 스토리로 전락한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더 이상 단지 ‘무엇이 벌어질까’를 묻는 콘텐츠가 아니라,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를 질문할 수 있을 때에야, 다시 서사로 회복될 수 있다. 그 회복은 미학적 진부함을 깨뜨리고, 다시금 인간성과 윤리를 중심에 놓는 이야기의 귀환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콜로세움을 바라보며 박수만 치는 관객이 될 뿐이다.


'K컬처'라는 허상에 많은 것들이 묻히고 사라졌다.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이 가득했던 시즌 1의 고유한 독특함은 시즌 3의 마지막 신에서 할리우드 배우에게 배턴을 넘기는 그들의 싸구려 기법에 묻히고 말았다. 자본과 그 욕망이 만들어 내는 기표만 남은 미세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자각으로 인한 시스템 균열은 결국 돈의 힘에 굴복해 스스로 봉합하고 땜질해 사라져 버렸다. 21세기 초의 '강남스타일'이 왜 20세기의 'Yesterday'처럼 지속되지 못했는지 벌써 잊은 셈이다. 그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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